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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감각 - 21세기 지성인들을 위한 영어 글쓰기의 정석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4년 6월
평점 :
잘 쓴 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끔찍한 글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독자는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된 글을 훨씬 잘 이해하고 기억한다고 한다. 이를 감안하면 아래 비교한 두 글 가운데 어떤 글이 잘 쓴 글인지 확실히 드러난다.
'체스판이 탁자에서 떨어졌다.
상아로 된 체스판이 탁자에서 떨어졌다. (p. 148)'
하나만 더
'참가자들은 음향 차단 수준이 좋거나 훌륭한 조건에서 시험을 받았다.
우리는 조용한 방에서 학생들을 시험했다. (p. 149)'
첫 번째 글에 전문가 언어가 있어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해하려면 두 번째 글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린다.
비교 말고도 좋은 글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또 하나 있다. 번역가의 말을 들어보는 거다.
'그것은 저자가 주제를 자신만만하고 명료하게 해설했기 때문이고, 긴 책의 적재적소에 사례와 통계를 배치해 리듬감을 주었기 때문이고, 기초적인 차원에서 문법이 틀린 문장 따위도 없었기 때문이다. 번역가로서 경험을 걸고 말하는데, 이렇게 잘 씀으로써 번역가를 도와주는 작가는 그다지 많지 않다. (p. 629, 630)'
20년 가까이 100여 권의 영어 책을 우리말로 옮긴 김명남 전문 번역가가 이 책의 저자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두고 평한 글이다. 알다시피 1,000쪽이 넘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옮기는 반년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어려움도 없었다고 한다. 이 책 <글쓰기의 감각>도 같은 작가의 책이니 잘 쓴 글임이 분명하다. 글쓰기 책이니 당연히 잘 썼을 거라 여기지만 그렇지 않은 책들도 많다.
스티븐 핑커의 <글쓰기의 감각>은 글을 잘 쓰는 작가가 훌륭한 글과 그렇지 않을 글의 사례를 비교하며 글을 쓸 줄은 알지만 더 잘 쓰고 싶은 사람을 위해 쓴 '고전적 글쓰기 지침서'다.
1장에서는 잘 쓴 글을 알아보고 음미하며 역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의 기술은 익히도록 한다. 2장에서는 맥없는 글을 낳게 되는 작가들의 못된 습관을 보여준 다음 그런 고루한 글로부터 멀리 떼어놓을 수 있는 방법으로 '고전적 글쓰기'를 알려준다. 3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쓰는 작가가 빠지기 쉬운 함정, '지식의 저주'에 대해 설명한다.
5장에서는 글의 연속성이 끊어지고 초점을 잃는 문제를 다룬다. 즉 글의 일관성 유지를 위해 작가와 독자 모두 주제(topic)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텍스트의 주제와 더불어 독자는 텍스트의 요지(point)도 보통 알아야 한다. 요지란 작가가 그 주제를 탐구함으로써 달성하려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무릇 우리가 그 행위자의 목적을 알 때만 이해되는 법이다. (...) 요컨대, 작가는 이야깃거리(주제)와 말하고 싶은 바(요지)를 둘 다 갖고 있어야 한다. (p. 288)'
4장과 6장은 각각 영어의 구문과 단어를 예문을 가득 실어 설명한다.
인상 깊었던 스티븐 핑커의 글쓰기 조언 몇 가지를 소개하면, 글을 개선하는 방법으로 세 가지를 소개한다. 다른 사람에게 원고를 보여줄 것, 시간이 얼마쯤 흐른 다음 스스로 다시 읽어볼 것 그리고 글을 소리 내어 읽는 방법이다.
대부분 글쓰기 책에서 수동태보다는 능동태로 쓸 것을 권하곤 한다. 독자의 시선을 어떤 행동을 하는 행위자로부터 떼어놓아야 한다면 수동태만이 가능하다.
또 하나 연결어를 가급적 쓰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스티븐 핑커는 오히려 연결어가 적어서 혼란스러워질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걱정하면서 확신이 서질 않는다면 차라리 연결어를 쓰되 딱 한 번만 쓰라고 한다. 이를테면 내가 자주 쓰는 글인데 '~하는 이유는 ~때문이다.'의 경우다. 글이 답답해지니 '이유'와 '때문' 중 하나는 빼라는 것이다.
스티븐 핑커는 글쓰기 중요성을 세 가지 정리했다. 첫째, 잘 쓴 글은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해 읽는 사람의 귀중한 시간을 흐리멍덩한 글을 해독하는데 낭비하지 않도록 한다. 둘째, 잘 쓴 글은 신뢰를 얻는다. 마지막으로, 잘 쓴 글은 세상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글쓰기의 감각(The Sense of Style)>이라는 이 책의 제목에는 이중 의미가 있다. 감각(sense)이라는 단어는 '시각'이나 '유머 감각처럼 인간의 어떤 정신 능력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는데, 이 책의 경우에는 잘 씌어진 글을 이해할 줄 아는 능력을 가리키는 셈이다. 한편 이 단어는 '난센스(nonsense)'와 반대되는 의미에서 '상식'을 뜻할 수도 있는데, 이 책의 경우에는 글의 품질을 높여주는 타당한 원칙들과 전통으로 전수되었지만 미신이나 집착이나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 어법들, 글쓰기 세계의 입문 심사에 지나지 않는 시시콜콜한 규칙들을 구별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셈이다. (p. 17, 18)'
좋은 글쓰기만큼이나 중요한 건 '무엇이 좋은 글인가' 판단하는 능력이다. 챗GPT 같은 AI가 글을 쓰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AI가 내놓는 글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스티븐 핑커처럼 좋은 글쓰기 코치가 되어야 하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