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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두고 온 100가지 유실물 - 아날로그 시대의 일상과 낭만
패멀라 폴 지음, 이다혜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5월
평점 :
'맞아, 그땐 그랬었는데...' 그때로 돌아가 장소, 물건, 사람 등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잠시라도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는 요즘, 물끄러미 밖을 쳐다보거나 멍 때리는데 시간을 내주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시간을 잠시 만들어준다.
'이 책은 우리가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들, 존재조차 몰랐던 것들,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그 부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책이다. (p. 23)'
패멀라 폴의 <우리가 두고 온 100가지 유실물>은 뭐든지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른 채 잃어버린 것들을 기록한 책이다. '그래, 옛날이 좋았지'라며 지난날만 좋다는 식으로 찬양하는 글이 아니다. 저자가 풀어내는 100가지 잊었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그 하나하나마다 얽힌, 하지만 지금은 내게서 사라진 감정과 느낌을 되찾게 된다.
'하지만 이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이제 지루함이 없으니까. 텅 빈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그런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 그런 생각 할 시간 있는 사람이 어딨어? - 황당하게 느껴진다. (p. 24, 25 지루함)'
언제 지루했지?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커피숍에서 약속 시간보다 늦게 오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지루해 두리번거렸다. 저 사람은 어딜 가는 걸까? 저 사람들은 무슨 사이일까?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심각하게 하는 걸까? 뜻하지 않게 생긴 텅 빈 시간을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지루함을 달랬다. 지금은... 지루할 틈이 없다. 버스? 몇 분후 도착할지 그 버스가 어디 있는지 알려준다. 늦게 오는 사람과 스마트폰으로 이야기하면 기다릴 수도 있다.
'이 시기의 사진첩을 훑어보는 일은 파티에서 울고, 동창회에서 얼굴을 찌푸리며, 동생의 어린이 야구 경기에서 비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때로는 미친 것처럼 보이는 과거의 암흑기를 마주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아주 멋져 보이는 드문 순간에 카메라를 가지고 오는 사람은 없었다. (p. 48 실패한 사진)'
집집마다 카메라가 없던 시절, 놀러 갈 때 카메라를 가져오는 친구의 위세가 대단했다. 어렵게 부모님께 허락받아 가져왔을 테니 그 거드름 인정. 연신 사진을 찍어댔는데 뭔가 싸하다. 필름을 넣지 않았다. 추억이 사라졌다. 36방 필름을 다 찍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음 놀러 갈 때까지? 아님 그 친구 집에 행사가 있을 때까지? 없던 시절이라 무조건 사진을 찍어 36방을 채울 수 없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사진을 한 장씩 현상해 가져오면 사진 뒷면에 내가 잘 나온 사진만 이름을 적는다. 내가 못생기게 나왔어도 그 사진을 찢어버리지 못한다. 옆에 잘 나온 친구가 그 사진을 찾아 나의 흑역사를 보관할 것이다.
'이런 부족한 정보만 가지고 바 안으로 걸어 들어가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는지, 서로 알아볼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p. 277 소개팅)'
결혼 전 소개팅을 무려 100여 번 한 탓에 나름 요령이 있었다. 첫 만남에서 서먹함을 없애기 위해 여러 차례 전화로 대화를 나눈 다음 만났다. 목소리와 말하는 톤으로 어떤 모습의 여자일지 설렘을 간직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 들어오는 곳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저 여잔가? 저 여자였으면...' 가슴이 간질간질했었다. 지금은 뭐~ SNS로 만나는 사람을 통째로 미리 알아버리니 몸이 달싹달싹하는 기분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지 않을까 싶다.
잃어버린 것들은 그리워하느라 지금 내 주변의 것들을 구박하지만, 이것들 또한 세월이 지나면 그리워하는 것들이 되겠지. 사라진 감정과 느낌을 찾아 추억할 건 추억하고 지금 이 시간의 흔적들도 곧 빠르게 사라질 테니 마음껏 추억으로 담아놓자.
'잃어버린 것들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존재도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인터넷은 주어진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하며 모든 것을 보관한다. 어쩌면 인터넷은 우리가 아직 놓칠 수 없는 것들을 붙잡을 수 있는 기회를 줄지 모른다. (p. 320 종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