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중독 - 실패 혐오 시대의 마음
롤란드 파울센 지음, 배명자 옮김 / 복복서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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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훨씬 살기 좋아졌다. 경제와 기술의 발전으로 식생활과 주거환경 그리고 건강관리 등 모든 면에서 그렇다.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저소득층이라고 해도 중세의 왕보다 더 나은 삶을 산다고 한다.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은 아폴로 11호에 탑재한 컴퓨터보다 700배나 더 큰 메모리와 10만 배 더 좋은 성능을 갖춘 기계다.

그런데 왜 걱정과 불안은 늘어갈까? <걱정 중독>은 걱정과 불안이 어떻게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됐는지를 파헤치는 책이다.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어떻게 미래, 원인과 결과, 위험과 재앙,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좇는다. (p. 14)'


사냥과 채집으로 먹을 것을 얻어 소비하는 공동체에게 과거와 미래는 그들의 자아상과 세계관에 미미한 영향을 미친다. 최근까지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온 산족의 경우, 자신이 언제 태어났는지 부모와 조상이 누구인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이 내다보는 미래도 불과 며칠에 불과하다. 오로지 '지금'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미래를 대비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다. 그들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농업으로 지연된 소비가 가능해지면서 미래는 걱정거리가 됐다. 통제할 수 없는 날씨나 병충해를 대비하려면 지금보다는 미래에 주의를 더 기울여야 했다. 내년에 가뭄이 들면 어떡하지? 불안하다. 지금 발생하지 않았지만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가뭄을 상상하니 걱정이 생긴다.

'만약에... 이면, 어떡하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생각이다. 인지 연구에서는 이것을 반사실적 사고라고 부른다. (p. 76)'

'만약에 ... 이면, 어떡하지?'와 마찬가지로 후회에서 비롯되는 '만약에 ...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의 결과 역시 지금 벌어진 사실이 아닌 '반사실적 사고'이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걱정을 하며 살게 됐을까? 인류는 역사의 95퍼센트에 달하는 약 20만 년 동안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지 않고 잘 살았다. 먼 훗날을 내다보지 않았다. 시간관념은 인류에게 미래를 선물했다. 미래의 지평선을 끝없이 확장하는 상상력으로 미래 비전을 지어내어 걱정거리를 찾아냈다.

현대인에게 신비한 건 없다.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지식이 인류에게 있으니 걱정거리는 더 는다.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익숙하다 보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무실 밖으로 나길 일도 큰 걱정이다. 세상은 또 얼마나 위험해졌나. 머릿속도 복잡하다. 생각하며 생각할수록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만 든다. 게다가 남들이 나를 비정상으로 보는 것 같아 그것도 걱정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걱정 스위치를 끄려고 노력한다. 그럴수록 걱정거리가 더 머릿속에 가득해진다. 불안에서 벗어날수록 불안이 더욱 커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걱정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방법은 걱정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우리가 걱정하는 미래는 어차피 불확실하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 가만히 앉아 비현실이 가득한 걱정을 그만두고 일어나서 행동해야 한다. 모든 힘은 행동에서 나온다.

'행동한다는 것은 재앙이 일어날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재앙이 일어날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지금 위험을 감수하든 회피하든, 재앙이 일어날 위험은 그대로다. 하지만 모든 재앙이 미래의 일은 아니다. (p. 401, 402)'


뉴욕의 건설노동자 가운데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모호크 인디언 부족은 유난히 고소공포증이 없는 줄 알았다. 모호크 족은 높은 곳에서 불안해하지 않았다. 마치 땅에서 걷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좁은 들보 위를 걸어 다녔다. 모호크 족이 '만약에 ... 이면, 어떡하지?를 생각하며 몸이 굳어버리지 않은 이유는 뭘까?

'"하루에 서너 번씩은 거의 떨어질 뻔합니다." 인터뷰에서 한 모호크 족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일해요. 나중에 누군가가 '아까 네가 아래로 떨어지는 줄 알았어'라고 말하면, 그제야 그 일이 떠오릅니다." (p.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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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로봇 와일드 로봇 1
피터 브라운 지음, 엄혜숙 옮김 / 거북이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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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처음 만난 로봇은 아마 <우주소년 아톰>이었지 싶다. 그다음 중학생이 되었을 때 등장한 로봇은 잘 보지는 않았지만 <마징가 Z>, <로보트 태권브이>다. 이 로봇 모두는 지구를 위해 인간을 위해 악당을 무찌르는 활약을 했다.


<와일드 로봇>은 그림책 작가로 널리 알려진 피터 브라운이 어린이 독자를 겨냥해 쓴 소설이다. 작가는 늘 로봇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악당이 나타나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 때면 어린 나도 아톰이 나타나길 간절히 기대했다. 매력 넘치는 로봇은 흥미진진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작가는 야생의 삶에도 늘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어린 나도 나지막한 뒷동산에서 하루 종일 놀곤 했다. 나무에 올라가고, 개미도 관찰하고 가끔 멀리서 여우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한 로봇과 야생은 피터 브라운이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로봇이 자연에 버려진다면 그 환경에 잘 적응할까?' 또 '자연은 로봇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로줌 유닛 500개를 실은 화물선에 폭풍우에 침몰했다. 야생의 섬에 로줌 유닛 7134, 로즈(작가는 롯봇에게 여성의 정체성을 부여했다)만이 살아남았다. 폭풍을 견디고 사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로즈는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며 동물들과 친해지기 시작한다.

'로즈는 생존 본능을 느꼈다. 그 본능은 위험에서 벗어나게끔 컴퓨터 뇌에 설정되어 있었다. (p.23)'

어느 날 로즈는 절벽을 타고 내려오다가 미끄러지면서 기러기 둥지와 같이 떨어진다. 로즈는 가족을 잃은 기러기 알 하나를 발견하고 그 알에서 깨어난 새끼 기러기를 키우며 엄마 역할을 한다.

로즈는 거칠고 황량한 곳을 정원으로 바꾸고, 아픈 동물을 도와 치료하기도 하고, 밧줄과 바퀴를 만들어 동물 친구들을 돕기도 한다.

'로즈는 자신이 야생성이 강하게 행동하면 할수록 동물들이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로즈는 여우와 함께 짖고, 새들과 함께 노래하고, 뱀과 함께 쉭쉭거렸다. 오소리와 함께 뛰놀고, 도마뱀과 함께 일광욕하고, 사슴과 함께 숲을 뛰어다녔다. 그해 봄, 로즈는 정말이지 야생 동물 같았다. ( p. 215)'


<와일드 로봇>으로 로봇을 처음 대하는 아이들은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로즈가 내가 어릴 적 만난 로봇들처럼 싸우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봇을 정의의 사도로 알고 자란 나는 어른이 돼서도 로봇을 곱게 바라보지 않는다.

요즘 하루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AI 뉴스를 들을 때마다 걱정이 태산이다. 로봇과 같이 살아가야지라는 생각보다 '저 터미네이터 같은 놈들... 지능이 장난 아니던데 날 해코지하지 않을까?'라는 불안이 앞선다.

이야기꾼 피터 브라운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로봇이야기의 주인공 로즈는 야생을 없애거나 차지하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오히려 야생이 되기로 한다. 교감한다. 가족애를 동물들에게 선물한다.

아톰이 아닌 로즈를 로봇으로 처음 만난 아이들은 로봇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을까? 로봇은 무엇에 관심이 있을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기계보다 인간인 자기를 더 많이 닮았다고 여길 수도 있고, 철이 전하는 차가움보다 따스함을 느낄지도 모르겠고, 나처럼 경계하기 보다 함께 지낼 대상이란 생각해 먼저 들 수도 있다.

나의 생각과 아이들이 가질 생각 중에 어떤 것이 옳을까? 아예 이런 질문, 즉 옳고 그름이란 잣대를 로봇에 들이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로봇도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미래일지도...

'"여러분은 제가 자연의 일부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러니 모두 함께 모여 자연과 우리의 삶을 축하해요!" (p.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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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소설, 향
조경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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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은 이십칠 년 전, 즉 작가가 이십 대 막바지일 때 쓴 스무 살 주인공 이경의 가족 이야기다. 어떤 소설을 쓸까 고민하던 중 조경란 작가가 문학적 주제로 삼은 건 '가족'이었다. 이 소설 덕분에 작가는 고단하고 불안했던 이십 대를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가족이라는 주제는 제 문학의 시작이었고, 그 출발의 책이 바로 <움직임>입니다. (p. 7, 개정판 작가의 말)'


주인공 신이경('나')은 스무 살이 됐을 때 엄마를 잃었다. 유일한 가족을 잃은 '나'는 외할아버지를 따라 새로운 가족에게 간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은 할아버지, 여섯 살 많은 이모, 열두 살 많은 삼촌이다. 그들이 사는 곳은 목욕탕집 일 층으로 여섯 가구가 한 개의 공중 화장실을 이용한다.

'나에게 새 가족이 생겼다. 밥상을 차려놓고 식구들을 기다린다. 상 위에는 네 벌의 수저가 놓여 있다. 나는 혼자 밥을 먹고 아침이면 혼자 어두운 방 안에 남겨진다. (p. 13, 첫 문장)'

이모는 키가 몹시 작다. 잔뜩 일그러진 미간 주름은 엄마를 빼닮았다. 하루 종일 농협에서 돈을 세고, 퇴근 후 집에서 새벽녘까지 공부한다. '지긋지긋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모는 '나'를 부를 때 이경아, 라고 부르지 않고 꼭 성까지 붙여 신이경이라고 부른다.

삼촌은 늑막염에 걸렸고 등허리께 손가락만 한 물혹이 달려있다. 그래서 매일 한 움큼씩 알약을 털어 넣는다. '나'는 삼촌과 말을 섞은 적이 없다. 할아버지는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삼촌과 함께 시멘트보다 모래를 더 많이 섞은 벽돌을 만든다. 이 벽돌로 지은 집이 금방 무너지리란 걸 둘도 안다. 할아버지와 삼촌은 엇갈려 들어와 집에서 마주칠 일이 없다.

외가 쪽 사람들은 말이 없는 편이다. 마치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 같다. 모두들 식성도 제각각이다.

'아무도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 누구의 배 속도 빌리지 않고 세상에 혼자 태어난 사람처럼 나는 여전히 혼자다. (...) 이곳에서는 시간도 늘 완류로만 흐르고 있다.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p. 38)'

삼촌에게 삼촌보다 두 살 더 많은 여자가 있다. 삼 층 안마시술소 안내원으로 삼촌을 비롯해 외가 식구들은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앞 방 남자는 우편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천애고아이거나 버려진 사람으로 '나'처럼 타지 사람임이 분명하다. 같은 처리란 생각에 '나'는 그 남자에게 관심이 많다.


비교적 이른 나이인 쉰여덟 살(2023년)에 작고한 김미현 평론가는 이 소설의 작품 해설에서 불행은 우성優性이고 행복은 열성劣性이라고 말한다. 불행은 마치 혈액형처럼 유전된다. 그런 이유로 노력하지 않아도 불행해진다. 반면 행복은 노력해야만 하고 돌연변이같이 돌발적인 사고로만 발생한다.

'행복은 행복과 만나야만 행복이 되고, 불행은 행복을 만나도 불행이 된다. 그것이 우성인 불행의 운명이다. (p. 108, 작품 해설)'

하나 남은 엄마라는 가족을 잃어 불행한 '나'는 새로운 가족에 합류한다. 그 가족이 행복해도 불행이 행복을 만나 불행한 법인데, 불행하게도 그 가족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서로 무관심한 불행한 가족이다. 주인공 '나'도 외가 식구들 이름이 가물가물하고 외가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이름을 불러주는 이모마저 '나'가 남이라도 되는 듯 성까지 붙여 이름을 부른다.

게다가 이 가족을 보호해야 할 할아버지와 삼촌이란 벽은 그들이 모래를 많이 섞어 쉽게 부서지도록 만든 불량 벽돌로 쌓은 벽과 같다. 단단하지 못해 불안하기 짝이 없다.

'나'가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앞 방 남자는 이모와 함께 떠나버렸다.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나'와 외가 식구들이 달가워하지 않던 삼촌의 여자는 삼촌의 아이를 갖게 되면서 삼촌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나'와 삼촌의 여자는 서로 이름을 불러주는 가족이 된다.

'내 이름은 신이경이에요. 나는 이모처럼 진저리 치는 시늉을 하며 뇌까린다. (...) 아가씬 내 이름 알고 있어요? (...) 그녀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조차 하다. 그녀는 안마시술소 안내원이나 아니면 이모가 불렀던 것처럼 그 여자, 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삼촌은 그녀를 어떻게 부를까. 내 이름은 양미순이에요, 양미순. 그녀가 후르륵 제 이름을 알려준다. (p. 101)'

불행이 우성이라서 지긋지긋해서 가족을 거부하고 떠나면 가족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불행한 곳에 남거나 찾아 들어온 사람이 가족이 된다. 머물러 있는 듯해 움직임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가족을 떠난 할아버지와 이모가 남긴 넓어진 공간에 '나'의 조카와 삼촌의 여자가 들어섰다.

새로운 가족은 이전의 가족과 다르다. 이제 서로 이름을 알고, 삼촌의 여자는 이모에게 부르듯 '나'에게 아가씨라고 부르지만 이모처럼 어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삼촌의 여자 뱃속에 있는 아기, 어쩌면 그 아기의 발가락은 할아버지나 삼촌의 뭉툭한 발가락이 아니라 그녀의 하얗고 기름기름한 발가락을 닮을 수도 있다. 불행한 피가 조금은 희석되어 돌연변이 행복이 가족에게 있을지도 모를 희망을 그 아이가 가지고 태어날지도 모른다.

'가족을 버리거나 떠나는 것은 오히려 쉽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가족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고 한계가 있다. (p. 121, 작품 해설)'

불행한 가족이란 이유로 그 가족을 없애버려야 할까? 그 집에 더 이상 행복이 없으니 모두 떠나버려야 할까? 아니, 그곳에 남아 행복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 불행이 우성이라서 지레 겁먹고 좌절해하거나 떠나서는 안된다. 불행의 벽 틈을 헤집어 행복의 빛이 스며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끊임없이 움직여 불행과 행복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집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도망 쳐봤자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단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 가려는 끊임없는 '움직임'이 있는 곳, 그곳이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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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 관하여 - 훌륭한 것을 만들어내는 일에 대한 뉴욕 목수의 이야기
마크 엘리슨 지음, 정윤미 옮김 / 북스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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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 관하여>의 저자 마크 엘리슨을 사람들은 '뉴욕 최고의 목수'라고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집은 짓는 40년 동안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걸작이라고 감탄한 계단을 만들었고, 최근 10년을 대표하는 아파트 '스카이하우스'를 지었으며, 유명인 데이비드 보위, 로빈 윌리엄스, 우디 앨런의 집도 그 작품이다.

우리들처럼 마크 엘리슨도 태어날 때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는 '성실함, 결단력, 대담함, 남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강단, 자립심, 낙천적인 마음, 때로는 고집스러움이라는 내면의 특성을 결합해 의지라는 것을 만들었(p. 24)'던 어머니 영향을 받아 아무리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품고 자랐다.

목수라는 직업을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어떤 부조리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은 똑같은 작업이 한 번도 없었고, 다음 일은 어떤 작업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목수 일을 죽을 때까지 해도 좋다고 여겼다.

그의 천직인 목수 40년 인생은 신념, 재능, 연습, 수학과 언어, 부조리, 집중과 의도, 역량, 관용, 두려움과 실패, 우정과 죽음, 건축과 예술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완벽에 관하여>는 인생을 개척한 이야기이고, 스스로 잘해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저자가 건네는 영감과 조언이기도 하다.


좋은 목수와 훌륭한 목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저자는 훌륭한 목수를 만난 적이 없으니 질문을 바꿔보자고 제안한다. "괜찮은 목수와 좋은 목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라고. 그의 대답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내가 어릴 때 무서워하던 것들과 현재 나를 괴롭히는 걱정거리를 잘 섞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p. 240)'

일상적이지 않은 것을 만드는 일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처음인데 망치면 어떻게 하지?, 다른 사람이 하면 되지 뭐... ' 하지만 기회는 언제나 두려움을 뒤로하고 용기를 내는 사람이 차지했다.

모든 일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해 내라는 것이 저자가 만난 좋은 선생님들이 강조한 교훈이었다. 완벽이야말로 추구할 만한 유일한 가치이고 목표다. 하지만 완벽함에 이르기 위해 또 하나 넘어서야 할 건 실패, 무너짐, 약점, 오류를 함부로 조롱해서도 두려워해서도 안된다는 교훈이다.


나는 한 곳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마쳤다. 직장을 옮기지 않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분명 두려움이었다. 그렇더라도 그다지 불만은 없는 것이 한 직장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대부분 새로운 일이었다.

대부분 자료가 없어 새로 만들어야 했다. 선례가 없으면 불안하고 두렵기 마련인데 그만큼 해냈을 때 성취감은 몇 배 그 이상이었다. 지금도 내가 몸담았던 곳을 지나칠 때면 내 것도 아닌데 내 것인 양 속으로 뽐내며 웃음을 짓는다.


태어날 때 우는 건 낯섦에 대한 두려움일 거다. 죽을 때, 그때까지 두려움 가운데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인생에서 완벽을 추구하지만 실패를 맛본다. 실패를 맛볼 기회를 얻었던 건 두려움을 극복하고 완벽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실패가 주는 건 배움으로 들어가는 열쇠다.

내가 이 책에서 읽은, 뉴욕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짓는 목수 마크 엘리슨이 얻은 깨달음은...

'모든 실수는 하나의 문과 같다.
열쇠는 실수 뒤에 숨겨져 있다. (p.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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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잔혹사 - 약탈, 살인, 고문으로 얼룩진 과학과 의학의 역사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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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잔혹사>는 왜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는지를 다룬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의 일탈은 해적질, 노예 무역, 시신 도굴, 살인, 동물 학대, 윤리 위반, 스파이 활동, 심리적 고문, 증거 조작 등 다양하다.

왜 좋은 과학자가 나쁜 짓을 할까? 이들 과학자들은 평범한 범죄자와 어떻게 다를까? 또 자신의 죄를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할까?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에 몰입하다 보니 윤리 문제나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는 것 정도는 무시하기도 한다. 과학은 항상 옳은 것이라는 함정에 빠져 과학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이유가 된다.

'에디슨의 팀은 교류의 위험성을 부각시키려는 노력으로 결국 개 44마리, 송아지 6마리, 말 2마리를 죽였다. 에디슨은 심지어 실험 대상으로 쓰려고 서커스 코끼리까지 수배했는데, 이 계획이 무위로 돌아가자 크게 실망했다. (...) 에디슨에게는 한 가지 희망이 남아 있었다. 직류를 살리려면 교류와 죽음 사이의 관계를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사람을 죽일 필요가 있었다. (p. 165)'

우리가 아는 발명왕 에디슨 맞다. 에디슨은 교류를 '사형 집행인의 전류 the executioner's current'라고 부르며 사형 집행에 사용할 최초의 전기의자를 만든다. 아무 고통 없이 죽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켐러의 사형집행은 고통 속에서 처참하게 이루어졌다.

'물론 공중보건국 의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를 고결한 것으로 여겼다. 터스키기의 일부 남성들이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은 당연하게 인정했지만, 대다수 일반 대중에게는 이 연구에서 얻은 지식이 혜택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피험자의 고통을 고결한 희생으로 포장했다. (p. 223)'

흑인 남성 400명을 대상으로 매독의 후기 단계 진행 과정을 연구했다. 공중보건국 의사들은 이 실험을 위해 불과 8일 만에 페니실린으로 매독 치료를 할 수 있었음에도 터스키기의 흑인 환자들을 방치해 매독균이 활개 치도록 방치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과학 지식을 발견하는 과정이 비윤리적이었다고 해서 그 데이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그것이 이미 희생된 사람들을 더 존중하는 것일까? 죽기 직전의 사람을 앞에 두고 내버려둬야 하나? 간단하지 않다.

게다가 윤리적 기준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 역사학자들은 갈릴레이와 뉴턴, 베르누이, 돌턴, 멘델을 비롯해 많은 과학자가 오늘날의 번듯한 연구소에서 그랬더라면 모두 해고되고도 남았을 방식으로 실험 결과와 데이터를 조작했다고 지적한다.

'많은 사람은 훌륭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이 지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훌륭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은 인성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p. 5)'

새로운 과학적 돌파구에는 항상 새로운 윤리적 딜레마가 뒤따른다. 또한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과학의 힘은 커진다. 이를 감안하면 아인슈타인의 통찰과 같이 과학자들이 지성에만 의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과학의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은 인성뿐이다. 처음부터 윤리를 염두에 두도록 해 일이 시작되기 전에 성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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