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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ㅣ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평점 :
'갈색 털이 무성한 손이 불쑥 내 코앞까지 뻗어와 멈추었다. 그의 손아귀에 펴 든 패스포트 속에서 긴 머리의 아가씨가 활짝 웃고 있었다. (p. 11, 첫 문장)'
한국전쟁 중 주인공 이경은 집에 포탄이 떨어져 두 오빠를 잃었다. 홀어머니와 함께 한쪽 지붕이 날아간 집에 살면서 명동 미군부대 P.X. 초상화부 점원으로 생계를 꾸리며 산다. 미군들을 상대로 호객하며 일하던 어느 날 옥희도라는 화가가 초상화부에 새로 합류한다.
두 아들을 여위 어머니는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다. 스무 살 이경은 암울한 분위기를 벗어나 미래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의 발목을 잡는다. 이경은 옥희도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반면, 같은 P.X.에서 전기 일을 하는 태수는 이경을 짝사랑한다.
이경은 자신의 제안으로 두 오빠를 행랑채에 숨겨 포탄이 떨어져 죽게 했다는 죄책감과 아들을 잃은 다음부터 딸에게 무관심한 어머니에 대한 증오, 두 가지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빛나던 어머니의 눈이 점점 귀찮다는 듯이 게슴츠레 감기며 나에게 잡혔던 손을 슬그머니 빼내고 부시시 돌아눕더니 휴하고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들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놓으셨노." (p. 313)'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경은 태수와 결혼한다. 세월이 흘러 이경은 옥희도의 유작 전시회 소식을 알게 돼 전시회에 간다.
'나는 미처 화랑을 들어서기도 전에 입구를 통해 한 그루의 커다란 나목裸木을 보았다. (...)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p. 390)'
<나목>은 박완서가 마흔 살에 쓴 처녀작이자 대표작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옥희도가 화가인 고 박수근 화백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 박완서는 박수근 화백의 전기를 써보고 싶긴 했지만 알고 지낸 시간이 짧아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나목>은 허구인 소설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예술가가, 모든 예술가들이 (...) 1·4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 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은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p. 8)'
전쟁 가운데 놓여있을 때 이경에게 스무 살이 찾아왔다 (박완서 선생님도 1931년 생이니 마찬가지다). 전쟁은 스무 살 이경한테 사랑을 누릴 특권을 빼앗고 그 자리에 무섭다는 생각과 춥다는 생각을 던져 놓았다. 그래서 이경은 전쟁이 없는 곳에 사는 여느 스무 살의 청춘처럼 사랑할 수도 삶을 살아갈 수도 없었다.
'너무도 아득한 시간, 5년이나 10년쯤. 바로 산 너머쯤에 전쟁이 있는 이 살벌한 거리에서 5년이나 10년 후쯤을 꿈꾸다니 얼마나 미련한가 말이다. 나는 그렇게 천천히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아주 상식적이고도 완만한 궤도로부터 과감히 탈선해서 지름길로 삶의 재미난 것을 재빠르게 핥으며 가야 하는 것이다. (p. 109)'
또한 전쟁은 이경한테 가족의 유대를 빼앗고 그 자리에 증오를 던져 놓았다. 어머니와 단절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번번히 실패했다. 어머니 품속의 아들들 자리를 계집애로는 대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어젯밤의 딸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눈치가 조금도 없었다. 나도 어머니의 지난밤에 무관심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이미 나에게 무관심이 어떤 형태의 증오보다도 가혹할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주었고 나도 어머니를 그런 무관심한 동거인으로 대하리라 마음먹었다. (p. 343)'
하지만 박완서는 소설 속 주인공 이경을 무섭고 추운 곳 그리고 증오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는다. 전쟁의 기억 속에 아우성치던 이경을 몸부림치며 춥디추운 아우성과 함께 살아가게 한다.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렇게도 집착하던 고가를 헐 때도 뒤뜰 은행나무는 그대로 둔다. 그 은행나무의 노오란 빛과 그지없이 화사한 조화를 이루는 옷을 차려 입고 이경은 옥희도의 전시회로 향한다.
화랑에 들어선 이경은 '고목'이 아닌 옥희도의 '나목'을 본다. 무섭고 추운 전쟁과 증오로 말라 비틀어 죽어가는 '고목'이 아닌 이파리를 떨군 채 봄을 준비하는 '나목'이 이경의 앞에 놓여있다.
전쟁이 이경을 휩쓸고 지나갈지라도 '나목'으로 살아가려는 의지,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 이것이 최은영이 '헌사'에서 말하는 박완서의 '진실을 향해 투쟁하는 글쓰기'다. 박완서다움의 출발점에 서 있는 소설 <나목>이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p. 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