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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월
평점 :
'작가는 우리 곁에 없지만, 변함없이 마음을 덥혀 주는 그의 진솔한 문장을 통해 우리는 다시 따뜻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꿈을 꾼다. 시골집 장독대에 핀 고운 백일홍 한 송이처럼 노을 진 들녘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소박하고 순수한 눈빛으로 착해지는 꿈을. 그래서 살기 좋은 세상이 되는 꿈을. (p. 4, 출간을 기념하며 - 이해인)'
애정을 듬뿍 담은 글, 솔직한 고백 그 솔직함 때문에 공감하게 되는 글, 그리고 겸손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드는 글... 이해인 시인에 이어 나는 박완서의 글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지난달 22일이 박완서 선생님의 13주기였다. 그에 맞춰 출간된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 미발표 원고를 더해 만든 리커버 특별판이다. 세계사의 이런 기획 덕분에 박완서 글의 여운을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다시 한번 간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니까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초판이 1977년 나왔으니 내가 10대 시절인 청소년일 때다. 에세이마다 끝에 표시된 글 쓴 연도를 보는 순간 (특히 70년대에서 80년 중반) 이 책의 글들은 나를 청년 시기의 풍경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 재미있다는 감정을 그토록 과장했음은 딸이 재미있어 한 것, 즉 젊은 세대가 즐긴다는 것을 나도 즐길 수 있다는 것, 젊은 세대를 이해한다는 것의 과시였음 직하다. (p. 206)'
대학 입학 후 딸이 미팅이란 걸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부럽고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자신이 미팅하는 양 딸보다 더 들떠 신나하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인 소지품을 보고 맘에 드는 여학생 것이 어떤 것일지 살필 때 그 간질간질한 느낌, 그 설렘, 다시 갖지 못할 추억을 나도 갖고 있다.
보이프렌드, 걸프렌드란 말도 참 많이 썼다. 지금이나 촌스럽지 그땐 세련된 느낌의 말이었다. 짙은 아이새도우에 벽돌색 립스틱 그리고 사자머리, 얼마나 섹시했는지. 제사도 결혼식도 가정의례준칙에 의해 간소화해 허례허식을 타파하는데 동참해야 했었다.
장발, 미니스커트 등은 사회를 어지럽히는 퇴폐풍조로 단속 대상이었다. 정치적으로 이익된다면 유행도 통제하던 시대였다. 지금은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그땐 궁서체였다.
'공부에 열중하느라, 연애에 정신이 팔려서, 이발료를 아끼려고, 멋있으려고, 머리터럭쯤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두었기로서니 거리를 활보하는 데 지장을 주어서야 되겠는가. (p. 220)'
조율, 알맞거나 마땅하도록 맞추어 고르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청년이 아닌 노년에 접어드는 나이에 박완서의 글을 다시 읽으면 생각난 낱말이다. 조율한다. 솔직하게 글을 써 내려가며 박완서는 자신의 삶을 조율해 나간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한옥의 불편함과 촌스러운 구식 동네의 시도 때도 없이 선을 넘는 지나친 관심이 싫어 이사했다. 이사 간 곳에서 만난 무관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 없이 지내던 관심을 끌어다 놓아 조율한다. 자식에게 데모에 앞장서지 말라고 당부하는 비열함, 대학 생활이 아이에게 눈부시고 왕성한 시기임을 깨달으면서 보신보다는 소신을 드러내는 작가로 자신을 드러내 조율한다.
'나는 그런 표정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꼈다. 여직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가슴이 뭉클하더니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는 20등, 30등을 초월해서 위대해 보였다. (p. 171)'
속임수라고는 하나도 없는 꼴찌 마라토너를 응원하며 갈채를 보낼 수 있는 뜨거운 가슴도 조율해 넣고.
무등산을 바라보며 그 산이 굽어본 이름 없이 살다 간 사람들의 숱한 사연을 담아 마음을 조율하고, 폭력이 용기와 다르듯이 편견이 신념이 아님을 조율하고, 늙어 소멸해가는 노인에게서 추함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비어가는 자리에 노인 품에 안긴 손주의 아름다운 생명력을 채워 넣어 조율한다.
관계를 폭넓게 바라보자고 조율하고, 아이에게 들인 엄마의 정성만을 저울에 달아 무게를 가늠하다가 정성을 덜어내 아이들이 느낄 사랑의 무게를 조율해 0g으로 저울 추가 이동하도록 한다. 행복도 조율한다. 그 누구도 엄두 내질 못할 박완서만이 가진 행복...
'양말 깁기나 뜨개질만큼도 실용성이 없는 일, 누구를 위해 공헌하는 일도 아닌 일, 그러면서도 꼭 이 일에만은 내 전신을 던지고 싶은 일, 철저하게 이기적인 나만의 일인 소설 쓰기를 나는 꼭 한밤중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하고 싶다. 규칙적인 코 고는 소리가 있고, 알맞은 촉광의 전기스탠드가 있고, 그리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라도 할라치면 여왕님이 팔자를 바꾸재도 안 바꿀 것같이 행복해진다. (p. 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