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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조각 미학 일기 - 미학생활자가 바라본 미술, 음악, 영화
편린 지음 / 미술문화 / 2023년 11월
평점 :
이런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상황일 수도 있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일 수도 있다. 아무튼 입이 다물어져 '말할 수 없는' 순간, 그래서 정적이 흐른다. 하지만 그 정적의 반대편에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어떠한 말이라도 동원해 '말하고 싶은' 욕구다.
'미학은 바로 그 이중적인 충동에 두 발을 딛고 선 학문입니다. (p. 9)'
저자는 미학이 원한圓環 구조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말하고 싶고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그럼에도 말하고 싶고 그러나 말할 수 없는...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을 때 쓰는 '아름답다'라는 말 해당된다. '미학은 바로 이 '아름답다'라는 패배 선언 안에 꾹꾹 눌러 담겨 있는 세계와 인간의 함축을 연구하는 학문 (p. 9)'이라고 저자는 미학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담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면 할수록 표현하려는 욕망은 더 간절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시, 소설, 음악, 춤, 그림과 같은 예술과 철학으로 간절함을 표현하고 규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미학에 관심을 가진 건 오래전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나서였다. 문화유산을 해석하는 그의 방식과 글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도대체 무엇을 공부한 사람일까 궁금해 찾아봤다. 미학이었다. 그가 멋지니 그가 전공한 미학도 뭔지 모르지만 멋졌다. 미학을 알고 싶었다.
딸아이가 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면서 미학에 대한 관심은 더 커졌다. 미술과 관련 있는 학문인듯싶었기 때문이다. 아니었다. 아니 내가 알고 있는 미학은 너무 좁은 의미였고 미학은 더 크게 아우르는 학문임을 미학생활자 편린의 <조각조각 미학 일기>을 읽고 알게 되었다.
'미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학문'입니다. (p. 6)'
서울대학교에서 미학을 공부한 저자 편린은 백오십여 명의 독자들에게 매일 연재하던 글을 다듬어 이 책에 옮겨 놓았다. 암호, 단서, 편지 이 세 가지 키워드에 각각 세 개씩 미술, 음악, 영화를 바라보는 미학적 사유를 아홉 꼭지로 구성했다. 키워드 별로 하나씩만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난해한 질문에 대답하고자 하는 첫 번째 조각, '암호'
앤디 워홀, <브릴로 박스> × 아서 단토
그래도 미학의 핵심은 미술이지 싶다. 그래서 질문, 예술이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이것도 예술이야?'라고 할만한 작품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제 브릴로를 담은 박스와 닮은 앤디 워홀의 작품 <브릴로 박스>.
저자는 현실과 꿈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예술 작품을 정의하는 예술 평론가 아서 단토를 데려와 이를 설명한다. 평범하고 예술의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어 하잘것없는 것이라도 미적 경험으로 전환될 수 있다면 <브릴로 박스>는 예술 작품인 것이다. 이 작품으로 인해 꿈만 같았던 예술이 현실(세제 박스)과 똑같아져 꿈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제 '깨어 있는 꿈 <브릴로 박스>'을 꾸게 됐다.
'예술은 깨어 있는 꿈을 꾸는 일이다. (p. 55)'
예술 작품 <브릴로 박스>의 해석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어 꿈을 꾸듯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면 미완 상태인 예술 작품은 비로소 완성된다. '이것도 예술이야?'가 '이것도 예술이야!'가 된다. 앤디 워홀은 일상을 예술로 만들어버렸다. 그 일상을 예술로 받아들여 새로운 일상을 창조한다면 우리는 이미 예술가다. 워홀은 우리를 해석하는 미학자로 만들어버렸다.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이다. 그들은 이제 어떤 것이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를 확증하기 위해 실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미리 말해 줄 수 있다. p. 57)'
사회의 구조적 억압에서 해방되는 결정적인 둘째 조각, '단서'
토끼 굴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마 워쇼스키스, <매트릭스> × '시뮬라크르'
유토피아에 산다면 불만이 없을까? 영화 <매트릭스>에서 기계들이 인간을 위해 만든 가상현실 세계가 실재를 뛰어넘는 시뮬라크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불행해질 권리를, 선을 원하기 전에 악을 원하는 존재다. 레오가 매트릭스에 흡수당하지 않기 위해 맞서듯 우리 인간 앞에 놓인 현실이 유토피아와 같더라도 기만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유토피아에서 벗어나 또 다른 유토피아를 찾아 나서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 유토피아는 하나가 아니다. 하나하나이다. '그렇다면 그 유토피아'들'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요? 바로 미세한 차이 그 자체인 나와 내 주변의 존재의 사이에, 그리고 그 자체로 주변적 존재인 나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p. 185)'
예술과 윤리의 관계를 사유하는 셋째 조각 '편지'
이창동, <밀양> × 자크 데리다
우리는 다른 인간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신은 우리를 대신해 죄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영화 <밀양>의 메시지는 고개를 젓는듯하다. 자크 데리다의 애도, 용서, 구원 개념은 '환대'라는 개념을 토대로 하는데 그 개념에서도 완전한 환대는 불가능하다. 신에 의해서도 법의 정의에 의해서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완전한 환대의 그런 불가능은 오히려 '더 나은 환대'를 생각하는 원동력이 된다. 불가능한 용서는 용서라는 행위를 간편하게 사용하는 (신애의 아이를 죽인 살인자가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을 막는다. 용서를 매듭짓지 않고 유보한 것이기에 완전한 용서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기도 한다. 애도의 불가능성이 더 인간적인 애도로 이끌듯이 말이다. 극복하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책을 받아 읽은 다음, 서평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 책을 읽고 덧붙여 기록을 남기는 것이니 후기나 독후감에 더 가까운 글을 남기곤 한다. 대부분은 책을 다 읽고 내가 이해한 수준에서 작가의 글에 기대어 내 방식으로 글을 남긴다.
그런데 이 책은 다 읽긴 했는데 나의 글투로 정리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은 더 집중해서 읽어야 내 나름의 정리가 가능할듯하다. 마땅히 그런 다음 후기를 남겨야 하는데 마감일을 지켜야겠기에 서둘렀음을 실토한다. 그래서 남긴 글이 창피하게도 중구난방이다.
내가 원하던 책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 관심을 가졌던 미학에 대한 지식의 범위와 해석의 다양성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기다. 곁에 두고 읽는 책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