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천 가족 1 유정천 가족 1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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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천 가족 1>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연재한 소설이다. 작가가 1979년에 태어났으니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쓴 작품이다. 여러 가지 기발한 판타지 세계관을 그 이른 나이에 가지고 있다니 놀랍다. 저자는 인터뷰에서 힘들게 고안해 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차고 넘친다고 말했다는 데, 진짜 그런 것 같다.


<유정천 가족>의 세계관에는 교토 시모가모 신사 경내 다다스숲에 사는 너구리, 인간 그리고 신묘한 존재 덴구가 함께 살아간다. 소설 속 너구리는 덴구를 동경하고 인간 흉내 내기를 좋아해 인간으로 둔갑한 채 인간들과 어울린다.

시모가모가의 너구리 사형제의 아버지 시모가모 소이치로는 너구리계의 두령, 니세에몬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고 '그 유명한 시모가모 소이치로의 피를 제대로 잇지 못한 좀 덜떨어진 자식들'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는다.

'큰형은 고지식하고 의지가 굳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약해졌고, 작은형은 은둔형 외톨이, 나는 다카스기 신사쿠처럼 재미만 좋아 다니고, 막내는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한심한 둔갑 능력으로 만천하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p. 63)'

주인공 야사부로는 시모가모가의 셋째로 두 형과 동생 그리고 어머니와 힘을 합쳐 아버지가 너구리 전골이 돼서 죽게 만든 작은 아버지와 그 집안, 에비스가와가의 악행에 맞서 싸운다. 비록 사형제가 훌륭한 아버지의 피를 제대로 이어받지 못한 바보들이라는 놀림을 받지만,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 어머니의 사랑, 끈끈한 형제애로 집안 명예를 멋지게 지켜낸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 그거였어..."
작은형의 온몸에 다시 바보의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은형의 심장 고동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재미있는 건 좋은 거야!"
작은형이 목청 높여 선언했고, 동생과 나도 따라 외쳤다. (p. 389)'

유정천(有頂天)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을 의미하지만,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를 뜻한다고도 한다. <유정천 가족 1>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유쾌함'이다. 덴구인 아카다마 선생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미련을 못 버리고 제자 벤텐의 미모를 독차지하려고 한다. 사형제의 어머니는 다카라즈카 배우를 좋아해 항상 '검은 옷의 왕자'로 둔갑해 인간 세계를 즐긴다. 바보라고 놀려도, 어려움이 닥쳐와도 사형제는 신난다. 시모가모가의 힘은 즐거워하는 데서 생긴다.

'작년에도 여러 가지 소원이 있었지만 일단 다들 살아 있고, 일단 즐겁게 지낸다. 올해도 여러 가지 일이 있을 테지만 일단 다들 살아 있고, 일단 즐거우면 그만이다. 우리는 너구리다. 너구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묻는다면 나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재미있게 사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p. 441)'

너구리만 즐겁게 살라는 법 있나? 우리도 올 한 해 즐겁게 살아보자. 새해에 유쾌한 이야기를 만나 유쾌하게 2024년을 출발한다.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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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15주년 기념 리커버 에디션)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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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오두막>의 저자 윌리엄 폴 영이 그의 자녀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로 만들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고 그것을 통해 아빠가 그토록 사랑하는 하나님과 아빠에 대해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p. 433)'

맥 필립스는 아이들을 데리고 캠핑을 떠났다. 그곳에 불행이 찾아왔다. 막내딸 미시가 유괴됐고, 숲속에 오랫동안 버려진 오두막에서 아이의 옷을 발견했다. 범인은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이었다. 수색 작업을 벌였지만 아이를 찾지 못했다.

미시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거대한 슬픔'을 지닌 채 지내던 맥은 어느 날 쪽지를 받는다.
'쪽지에는 이런 내용이 타이핑되어 있었다.
매켄지,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 다음 주말에 오두막에 있을 예정이니까 날 만나고 싶으면 찾아와요. - 파파 (p. 24)'

'거대한 슬픔'이 시작된 곳, 미시와 행복했던 기억을 앗아가버린 곳, 그곳 오두막에서 맥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 삼위일체이신 그분을 만난다.


어릴 때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나갔다.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담았다. 어느덧 커버린 나는 내가 간직한 하나님의 모습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질문거리들이 하나 둘 쌓여갔다. 맥은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에게 나와 똑같은 질문을 하며 대답을 요구한다.

당신들 셋 가운데 누가 하나님인지, 서로 어떤 관계인지, 누가 명령을 하고 누가 따르는 입장인지. 왜 우리는 고통 가운데 살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준 십계명은 과연 지킬 수 있기나 한 건지. 천국은 있는지, 있다면 어떤 곳인지. 내가 부유하게 살도록 돈을 줄 수는 없는지. 내 기도를 왜 다 안 들어주는지. 왜 나는 죄를 짓고 또 짓고 그러는지...


많은 질문 가운데 하나님께 가장 하고 싶은 질문은 왜 악을 심판하지 않는지였다. 나쁜 놈들에게 벼락을 내리쳐서 급사하게 만들면 이 세상에서 악은 사라지고 선만 남을 텐데 말이다. 맥도 이 점이 가장 불만이었다. 딸 미시를 유괴해 살해하기 전에 연쇄살인범을 하나님이 심판해 죽였다면, 아니 아예 살인범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했다면, 전지전능하니까, 그랬다면 맥에게 사무친 '거대한 슬픔'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텐데.

'"내가 심판하기로 예정된 사람이 누구죠?”
"하나님이죠."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인류요." (p. 268)'

원망의 대상이었던 하나님을, 인류를, 자신의 아이들을 심판하는 심판관의 자리에 맥이 앉았을 때야 비로소 하나님은 벌주시는 분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내 아이들이 잘못했다고 해서 내가 죽음으로 아이들을 심판할 수 없다. 차라리 내가 내 아이들을 대신해서 벌받겠다고 나서듯이,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류 그리고 내 아이들이, 자신을 희생할 만큼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시는 분임을 맥은 고백한다.

'"사랑 때문이죠, 그는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선택해서 자비가 정의를 이기게 했어요. 파파가 모든 사람을 위해 정의를 선택했다면 더 좋았겠어요? '심판관이신' 당신은 정의를 원하나요?" (P. 277)'


어느덧 성인이 된 나는 하나님께 질문을 하면서 하나님과 나와 관계를 다시 그려보기 시작했다. 물론 어릴 때 들은 성경 이야기를 가지고 그린 그림 위에 덧칠하면서.

내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일까? 혼자 울기보다는 하나님 품에 안겨 울고 싶다. 어느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있는 분, 귀담아 들어주시는 분, 내 뒤에 서서 항상 응원하며 바라보시는 분, 어디든 가자고 하면 동행하시는 분, 기꺼이 내 편에 서 계시는 분, 어떤 울분도 토해할 수 있는 분, 위로해 주시는 분, 상처를 싸매주시는 분, 절망 가운데 희망을 주시는 분, 어둠에 갇혀 있는 때 빛을 들고 찾아오시는 분... 그런 분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모습을 덧칠해 그려 가고 있다.


하나님 대신 당신이 의지하고 믿고 싶은 존재를 넣어 <오두막>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 존재의 모습을 이 이야기를 물감 삼아 그려보기를. 그 가운데 상처가 치유되는 경험이 있기를 기도한다.

'3부에서는 당신의 역할이 중요하다. 당신이 이 책을 읽을 때 하나님이 당신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당신이 헤매고 있는 곳의 문을 열어주면서 더 깊고 풍요로운 어조와 색채와 소리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를 알려주기를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는 이 책이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확신한다. (p.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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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괜찮아 - 어느 실직 가장의 마라톤 도전기
김완식 지음 / 훈훈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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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걸까? 괜찮아서 괜찮다는 걸까? 괜찮다고 말해도 되는 물음이었나? 맞는 대답을 한 건가? 무슨 생각으로 괜찮다는 걸까?

실직 가장 김완식의 마라톤 도전기에 내 감정을 몰입해 읽게 되는 건 공통점이 많아서다. 가장이고, 남편이고, 아빠여서다. 동기는 다르지만 실직도 같다. 저자는 자신의 의지로, 나는 나갈 때가 돼서 직장을 나왔다. 그리고 '괜찮다'라는 말을 하는 것도 그렇다.

'괜찮다'라는 말이 입버릇일 수도 있다. 아니면 마땅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편하게 갖다가 대는 말일 수도 있다.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처지일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도 많이 쓰는 말이긴 한데 아빠들이 유독 많이 하는 말이다. '괜찮아~'

많이 피곤할 텐데 회사 갈 수 있겠어? '괜찮아~'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
직장 상사인데 명절에 찾아가 봐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
이거 갖고 충분해? '괜찮아~'
아이들 독립도 시켜야 하고 양가 부모님 병원비도 만만찮을 거 같은데...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하지? '괜찮을 거야~'


'내려놓은 빈 공간에 대신 자리한 것은 미안함이었다. 퇴직 이후의 모습은 무력했다. 중년의 퇴직자에게 세상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아빠로서 뭐라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것이 달리기가 될 줄은 몰랐다.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삶이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달리면서 느꼈다. (p. 8)'

퇴직 후 며칠은 편했다. 하지만 잠시였다. 거실 소파, 식탁 의자, 침대... 그동안 퇴근 후 내가 머물던 곳들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차지하고 있을 때의 그 익숙함이 사라졌다. 눈치 주지도 않는데 가족에게 눈치가 보였다. 뭐하나 필요해서 찾으면 찾질 못했다. 갑자기 남에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들과 대화도, 길어진 아내와 같이 있는 시간도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아내도 어색해하는 듯했다. 멈춰 있을 수 없는 분위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어떤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이들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게 하는 질문이었다. (p. 62)'

아빠의 모습. 엄마 뒤에 서있는 아빠의 모습. 아이들은 항상 아빠를 엄마 어깨너머로 본다고 한다. 아빠의 한 부분만 보는 셈이다. 아빠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 아빠 또한 아이들을 엄마 뒤에서 어깨너머로 본다. 엄마에게 반응하는 아이들의 모습만 보는 셈이다. 보는 이에게 아빠의 모습은 항상 불완전하다.

'아빠로서 뭐라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것이 달리기가 될 줄은 몰랐다.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삶이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달리면서 느꼈다. (pp. 8,9)'

저자는 마라톤을 선택했다. 인생은 마라톤이라고들 한다기에 아빠의 인생을 마라톤으로 아이들에게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자기만의 속도로 달려야 하는, 당장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해서는 안 되는, 순간의 기쁨을 만끽해서도 안되고, 포기하지 말아야 완주할 수 있는, 힘겨운 자기와 싸움인 마라톤, 아니 인생. 저자는 이러한 아빠의 인생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2월 15일부터 시작해 11월 6일까지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기 위해 저자가 연습하는 과정을 읽으며, 군 훈련병 시절 16킬로미터 구보를 한 경험이 떠올랐다. 천천히 뛰다가 호루라기를 두 번 불면 빨리 뛰고 다시 호루라기를 한 번 불면 천천히 뛰고를 반복하는 구보였다. 죽을 맛이었다.

'공식 기록 6시간 24분. 아침 9시부터 달리기 시작해서 오후 3시가 넘는 시간까지 달렸다. 정말 믿기지 않았다. 내가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는 사실도, 6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달렸다는 것도, 어떻게 그렇게 달릴 수 있었을까? (p. 192)'

나에게 이런 유사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저자의 풀코스 마라톤 완주를 고스란히 느낄 수는 없다. 저자의 인생과 나의 인생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제각각 다른 이유로 출발선에 선다. 그리고 서로 다른 템포로 달린다. 달리는 계획부터 다르고 완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다르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건 같다. 나름 최선을 다해 열심히 달리는 것도 같다. 모든 아빠들이 달리기로 결심하게 된 용기도 똑같이 갖고 있다. 그리고 모든 아빠들은 "괜찮아~"라고 말한다.


"책 제목을 보고 가슴이 아려왔다. 괜찮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다. 자식이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모습을 어느 부모인들 보고 싶을까? 못 해줘서 미안하고 잘 자라줘서 고마울 뿐이다. 어미의 부족한 기도가 아들에게 힘이 되기를 바 란다. 막내야, 사랑한다." (p. 7, 사랑하는 어머니 윤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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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사랑 권하는 사회 - 진짜 사랑을 잊은 한국 사회, 더 나은 미래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김태형 지음 / 갈매나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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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를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회라 볼 수 있을까? No! 주저함 없이 나는 병든 사회라고 딱 잘라 말할 자신이 있다.

이태원에 축제를 즐기러 간 젊음 159명의 삶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죽음으로 안타깝게 끝맺었다. 그러한 참사가 발생했을 때는 뭔가 잘못이 있었을 텐데, 없다고 한다. 그냥 그 자리에 있어서 죽었다는 뜻이다.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이 되면 같은 상황이 벌어졌었지만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비정상이다.

엊그제 우리는 아카데미 수상작 배우와 작별했다. 우리가 그토록 자랑하던 문화 하나를 잃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어서 마음이 저리다. 자신의 허물을 덮으려는 자,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자, 직업윤리를 망각하고 자극 기사를 상품으로 내놓고 클릭수 장사하는데 혈안이 된 자 등이 힘을 합쳐 린치를 가해 소중한 목숨을 스스로 끊게 만들었다. 우리 사회가 더 안타까웠던 건 구경하는 자들은 많았지만 손 내밀어 힘내라고 제발 죽지는 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도 그 틈에 끼어있었다. 진짜 사랑이 없는 우리 한국 사회, 이런 걸 병든 사회라고 말하지 않는가 말이다.


'싸우는 심리학자' 김태형 소장은 <가짜 사랑 권하는 사회>에서 왜 우리 사회가 비정상인 사회가 되었는지를 진단하고 진짜 사랑을 하는 정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견과 생각을 내놓는다.


상대방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사랑이라면 그건 가짜 사랑이다. 스토킹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상품으로 간주해 등가교환을 하려 한다면 그것도 가짜 사랑이다. 사랑의 가치를 매기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받으려는 사랑은 가짜 사랑이다. 과도하게 인정받고, 존중받고, 명예를 얻고, 과시하려는 불건전한 욕망이 뿌리내리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불행에 빠진 사람을 선택해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바꾸려 하는 구원자적 사랑도 가짜 사랑이다. 결국 자신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불같은 사랑도 욕망이 건전하지 않다면 욕망이 앞선 사랑이니 가짜다. 부부의 사랑도,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형제간의 사랑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대상을 이용한다면 모두 가짜 사랑이다.

'에리히 프롬이 정당하게 지적했듯이, 부모는 '사회의 대리인'이다. 사회가 건강하면 부모도 건강하고 사회가 병들면 부모도 병든다. 한국인들의 심리를 나쁜 쪽으로 몰아가고 정신건강을 파괴하는 주범은 부모가 아닌 병든 한국 사회이다. (p. 106)'

저자는 가짜 사랑을 하거나 사랑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사회라고 진단한다.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주류 심리학이 사랑에 관한 문제를 개인 탓으로 돌리는 것을 저자는 비판한다. 불건전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한 주범이 병든 사회임에도 사회 개혁보다는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그 책임을 몰아가니 그렇다.


돈이 없으면 생존 불안, 존중 불안이 심화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 불안이 존재하는 한 이기적 사랑, 가짜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불안과 공포를 없애야만 하는데 개인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사회 또는 국가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의견이다.

먹고사는 생존의 불안 때문에 갑질에 저항하지 못하고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포기한다. 이런 불안이 없어졌다면 정의롭지 못한 인간에게 머리 숙이지 않아도 된다. 정의로움 편에 서니 허물 덮을 일도 없고 허물을 덮으려는 자들이 사라진다.

돈 많은 사람의 과시행동을 참는 이유는 척을 지지 않고 지내는 게 유리해서인데, 이것 역시 생존 불안이 해결되면 수모를 참으면서까지 관계를 이어갈 이유가 없어져 과시행동을 더 이상 참지 않는다. 과시하는 권력에 잘 보이려는 자들도 없어진다.

돈으로 사람의 가치나 지위를 평가하는 풍조가 사라지면 돈 많은 사람을 선망하지 않게 된다. 클릭수 장사로 무리해서 돈을 벌 이유가 없으니 클릭수 장사하는 데 혈안이 된 자들도 눈에 띠지 않게 된다.

국가나 사회가 개인의 생존을 책임지고 보장해 그 불안이 사라지면...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권력 과시나 갑질을 할 수 없고 자랑을 할 수도 없으며, 타인들이 자기를 존중해 주지도 않는다면 미친 듯이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거의 사라져버린다. 이처럼 생존 불안이 해결되면 돈이 선물해 주었던 병적인 쾌감을 더는 누리지 못하게 되고, 돈에 대한 과도한 욕망 그리고 돈을 중심으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병적인 풍조 역시 현저하게 줄어든다. (p. 243)'


사랑은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그 사랑이 중요하다.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도 사랑이요 어울려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것도 사랑이다. 가짜 사랑은 우리 인간과 어울리지 않는다. '부자 되세요~'란 허망한 욕망에서 해방되고, 개인 간의 다툼이 사라지고, 불평등이 해소된다면 우리는 돈이 아닌 인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면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열망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사람답게 살기를 바란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사랑하면서 살기를 바란다. 모두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모두가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것이 인간이 주인 된 세상이고 진짜 사랑이 가능한 이상 사회다. 우리가 이 땅에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그날이 오면, 마침내 사랑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p. 244)'

그래서 일 년 전 잃은 이태원에서 축제를 즐기던 젊음도, 엊그제 우리 곁을 떠난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였던 그 사람도 우리의 본성인 진짜 사랑이 귀하게 여기게 될 터이니 다시 그들을 잃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묻지마 살인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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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의 세계 - 저울과 자를 든 인류의 숨겨진 역사
제임스 빈센트 지음, 장혜인 옮김 / 까치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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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물을 반 컵씩 두 번에 나눠 마신다. 화장실 앞에 놓인 체중계에 올라간다. 한 달 전부터 불어난 몸무게가 3킬로그램이나 된다. 다시 홈트에 박차를 가하기로 결심한다. 오늘 날씨와 온도를 확인하고, 동작마다 시간을 재면서 스트레칭을 한다. 배고파서 밥을 먹는다기보다 정해진 시간에서 밥을 먹는다. 11시 30분에 아점을 먹는다. 타이머를 3분으로 맞추고 전자렌지에 밥을 데운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거리와 걸리는 시간을 미리 알아두었다가 출발한다. 하루에 12,000보 걷기로 했으니 그 기준으로 정해놓은 곳까지 걸어갔다가 턴한다. 오후 5시 30분, 저녁 먹을 시간이다. 밤 10시 30분이 되면 잠자리로 간다. 적어도 7시간 이상 자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으니 그럴려면 11시 정도엔 잠들어야 한다. 내 하루에 측정이 가득하다.

'내가 분명한 방식으로 측정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측정은 분명 나의 삶의 중심이며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측정을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사용한다. 나의 일상은 업무, 운동, 생산성의 일반적인 척도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p. 377, 나가며)'


<측정의 세계>는 저자 제임스 빈센트가 가진 측정 단위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책이다. 저울과 자를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과학, 수학과 어울려 측정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1장에서 4장까지 다룬다.

5장에서 8장까지는 측정과 사회의 관계를 살펴본다. 미터법 제정과 프랑스 혁명의 관계, 미국의 개척자들이 지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그린 역사, 통계의 엄청난 힘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미터법을 따르지 않는 영국과 미국식 척도의 배경을 설명한다. 그리고 9장에서는 표준값 정의의 의미 마지막으로 10장에서 현대사회에서 측정의 힘이 얼마나 큰 영향을 발휘하는지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일화가 역사를 재미있는 동화로 바꾼다.


'측정은 언어나 놀이처럼 인지의 초석이다. 우리는 측정으로 세계를 구분하는 방법에 관심을 두게 되고, 직선이 끝나거나 저울이 기울어지는 지점에 주목하게 된다. 측정은 현실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비교하고 그 차이를 드러내면서, 앞을 향한 발판을 놓는다. (p. 15)'

인류는 자기 몸을 가장 먼저 측정 도구로 삼았다. 손을 벌려 한뼘으로 가늠했고, 팔꿈치에서 손끝까지를 재서 큐빗이라고 이름붙였다. 측정해서 교환하고, 댓가를 지불한다. 내가 체중계에 올라가듯이 측정을 건강관리에 이용하기도 한다.

권력자는 통치를 정당화하는데 측정을 도구로 사용한다. 이럴 경우 측정은 권력에게 이득을 주었고 힘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학업 성취도를 측정해 줄 세우는 사용한다. 기업은 성과를 측정해 보상에 차등을 두어 지급한다. 측정된 숫자는 복잡해서 머리 아플만한 것들을 없애고 단순화해 한결 편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숫자는 결과를 주고, 문제를 "감정에 덜 흔들리게 만들면서도 지적으로 더욱 다루기 쉽게 해주기 때문이다." (p. 362)'


측정된 통계를 맹신해 진실로 취급할 때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삶과 죽음을 측정하는 우생학이 그것이다. 우생학자 헨리 고더드는 IQ가 낮은 사람을 바보, 천치, 멍청이로 분류했고 이를 변하지 않는 잠재력으로 여겨 이들에게서 모든 교육 기회를 박탈했다.

'고더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지능이 원래 그러하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환경이 좋아도 정신이 나약한 사람을 정상인으로 바꿀 수는 없다. 빨간 털 동물을 까만 털 동물로 바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p. 267)'

이러한 생각은 외국인 혐오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다. 우생학을 교리로 여겨 미국과 유럽에서 수십만명이 불임 수수을 받아야 했고, '살 가치가 없는 삶'이라고 간주된 사람들이 유럽 '청소'라는 명목하에 살해되었다. 캘리포니아 교도소에서는 비교적 최근인 2014년까지도 수백 명의 여성들이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았다.


이렇듯 측정에 명암이 존재한다면 무엇을 측정해야 할까? 아니 측정이 우리에게 필요하기나 한 걸까? 저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소한 척도 하나를 소개한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제4악장 '환희의 송가'를 듣는 일이다. 인생에서 긍정적인 일이 일어나거나 주목할만한 성취를 했을때에만 들기로 결심했단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그런 행복을 느낄만한 일들이 점점 드물어지고 당연히 환희의 송가를 듣지 못하게 됐다. 재미삼아 시작한 일이 저자를 구속하게 된 것이다.

글머리에 소개한 나의 하루에서 보다시피 나도 저자와 비슷한 자기측정 관계를 갖고있다. 그러한 하루가 건강에 도움이되고 짜임새있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 틀 안에 자신을 가두기도 한다. 환희의 송가를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 주변에서 측정된 각종 숫자와 통계로 성취를 높일만한 방법을 조언한다. 폭력처럼 느낄정도로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어온다. 생각해보자. 모든 가치를 측정할 수 있을까? 고대 이집트인들은 영혼도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수천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측정할 수 없는 가치들을 재보라는 강요는 여전하다.

'오늘날 우리가 측정을 다루는 방식에는 여전히 이와 비슷한 마술적 사고가 남아 있다. 우리는 측정이 객관적이라고 믿기 때문에 숫자를 숭배하고, 삶의 모든 문제를 통계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는 한다. 그러나 때로 세상 속 어떤 것의 위치를 측정하면, 그 표시 자체가 더욱 힘을 얻고 측정 대상은 오히려 배경으로 물러나기도 한다. 계획이 목표를 삼켜버리고 애초에 원한 것은 보이지 않게 된다. 측정 위에 세워진 사회, 측정이 만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측정이 어떤 목표에 기여하는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p.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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