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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래서 쓴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사이연 옮김 / 비트윈 / 2023년 10월
평점 :
'왜 글을 쓰느냐는 질문은 단순하게 들립니다만, 이 단순함이 위험천만합니다. (...)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오래전에 본 어느 작가의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그가 스튜디오로 들어서면서 "나는 죽을 목숨이기에 글을 씁니다."라고 말하던 장면입니다. (p. 9)'
'죽을 목숨' 정도의 각오까지는 아니었지만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다. 고등학생 시절 담임선생님이 국어를 담당한 시인이었다. 시를 써보았다. 창피해서 남들에게 보여주진 못했고 그냥 일기장에만 기록으로 남겼었다. 그 이후 대학생 시절 리포트, 회사 다닐 때 협조전이나 보고서를 쓴 게 내가 쓴 글 전부였다.
몇 년 전부터 죽기 전에 나의 철학을 한 번쯤 정리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문제는 지식의 한계였다. 생각 정리용으로 사용할 만한 내가 가진 표현 도구들이 너무 형편없었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책에게 도움을 청했다. 책을 읽고 생각을 이어가며 글로 옮겨 적는다. 흐트러진 생각들을 하나하나 모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래서 쓴다>는 작가 크나우스고르가 자신에게 '왜 글을 쓰느냐'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글을 어떻게 쓰는지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가 왜 어려운지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글이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작품은 <나의 투쟁>이 유일한듯하다. 잔혹할 정도로 솔직하다고 평가받는 작가로 적은 페이지의 이 책에서도 자신의 문학관을 솔직하게 힘겨워하며 드러낸다. 진실한 무언가와 그 진실이 무언가를 드러내는 상황 사이의 틈, 그 틈이 문학이라고 밝힌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언가가 이야기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 (p. 10)'이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온갖 판단과 가식과 입장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글을 쓰는 행위는 창조하고 얻는 것만큼이나 잃는 것이고 되돌려주는 것이다.
작가는 만화책이긴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가 거론하는 책은 어슐러 르 권의 <어스시의 마법사>,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미셀 푸코의 <사물의 질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입센의 <유령> 등이다. 이상 언급된 책들이 어떤 내용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작가의 세계관을 간접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아직이라면 관심을 둘만한 책 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독서는 각각의 책을 관문으로 삼아서 들어설 수 있는 평형 세계 속에서 다른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너무 쉽게, 또 너무 과하게 감정적이 되곤 하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감정이 늘 문제입니다만, 독서는 어떻게든 이런 감정들을 해소시켜 주었고, 동시에 새롭고도 낯선 감정들을 불러일으켰습니다. (p. 63)'
지난해 봄에 출간된 <루스 아사와>를 만난 것이 비트윈 출판사와 첫 인연이었다. 일본계 미국인으로 배타적이고 적대적이었던 세상을 상대로 묵묵히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나가서 결국 순수 예술가로서 인정받은 루스 아사와의 삶을 그린 책이다.
사이연(사이연구소 Between Labs)은 언어와 문화 및 시대와 세대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치열하게 살아낸 작가들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 비트윈 출판사의 결인가? <루스 아사와>와 <나는 이래서 쓴다> 그리고 이어질 세 번째로 기획 출간될 책이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