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룸 소설, 잇다 3
이선희.천희란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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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에 담아 읽는 '소설, 잇다' 시리즈 세 번째 <백룸>은 1911년생 이선희의 소설 두 편, 2015년생 천희란의 소설과 에세이 각각 한 편, 문학평론가 선우은실의 해설을 담았다.

작가 이선희는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나 개방적 사고를 접했다고 한다. 기자로 일하며 문단 데뷔를 했지만 한때 카바레 종업원으로 일했고, 극작가 박영호와 재취로 결혼해 전처와 갈등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 속 여주인공은 불행하다. 하지만 그 불행에서 주인공인 여성은 주저앉지 않고 일어나 가부장제로부터, 여성의 보편적 인식과 행동으로부터 탈피하려 한다.

작가 천희란이 태어나 마주한 세상은 이선희가 살던 백 년 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천희란 역시 이선희가 했던,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세계의 고통과 혼란을 어떻게 해명할까를 고민했다. 천희란에게 소설은 고민의 답을 찾는 과정이다. 문학 안에서 여성의 자리를 다양하게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천희란의 바람이다.


이선희의 <계산서>

주인공 '나'는 아이를 낳다가 한 쪽 다리를 잃어 절름발이가 된다. 다리가 둘인 남편과 사이에 균형이 무너졌다. 균형을 잃은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죽는 것보다 낫지 않소?"는 결국 나를 속이는 엄청난 사기술이었다. (p. 26)'

남편은 '나'를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듯하지만, 외출하고 싶다고 할 때 '나가봤자 괜히 몸만 괴롭지 않겠냐'라는 말 그리고 그동안 한 번도 매지 않았던 새 넥타이를 매고 나가는 남편을 보며 그 안타까움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눈치챈다.

여성이며 신체적 장애를 가진 주인공 '나'에게 사회 관념과 남편은 가부장제의 친절한 보살핌 속에 있기를 권하며 사회적인 활동을 금한다. 주인공을 위해서라기 보다 남편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두 다리를 가진 자와 절름발이 사이의 불균형이 불편한 이유다.

부부생활이 끝났으니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계산이 필요하다. 주인공이 남편에게 내민 계산서는 균형을 위해 남편도 다리 하나가 병신 되는 것이다. 아니 그것으로는 수지가 맞질 않는다. 목숨이라야 될 것 같다. 하지만 끝내 계산하지 못한다. 왜? 여성이자 아내여서다. 남성의 몫을 여성의 몫으로 감히 상쇄하지 못하도록 사회 규율이 가로막는다.

'나는 아직 살인을 하지 않은 채 이곳으로 왔다. 받을 것을 다 못 받고 그대로 주저앉는 것이 모든 아내 된 자의 약점이요, 애교인 모양이다. (p. 40)'


이선희의 <여인 명령>

​여자전문대학 학생인 숙채와 유원은 연인이다. 유원은 숙채에게 결혼 약속하며 고향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다. 그간 비밀스러운 활동을 한 유원은 잡혀서 감옥에 들어가고, 유원을 기다리던 숙채는 지쳐 서울에 올라가 불안정한 생활을 한다. 김 의사의 집요한 청혼을 몇 번 거절하지만 결국 받아들여 결혼한 숙채는 아이를 낳고 잘 살아간다. 어느 날 남편 김 의사가 열일곱에 혼인한 여자가 고향 본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배운 신여성에게 주어진 숙채의 자유연애, 즉 사랑으로 이어지는 결혼이라는 꿈은 유원(남성)의 징역살이로 끝나버린다. 주변 강요로 이루어진 김 의사와 결혼은 전해내려오는 결혼제도 속에서 본처(여성)의 등장으로 숙채는 후처(여성)가 돼버려 남편을 놓고 본처와 다투는 신세가 돼버렸다. 게다가 남편이 죽고 그를 따라 자살한 본처는 열녀가 돼 집안의 인정을 받아 자리 잡지만 숙채의 자리는 그 집안 그 어느 곳에도 없다.

병들어 죽게 된 숙채는 아이를 업고 사랑으로 선택했던 유원을 찾아가 마지막 부탁(명령)을 남긴다.

'이윽고 숙채는 이야기하기를 시작했다. 마치 홀러 가는 물과 같이 그렇게 조용히 그렇게 쉽게.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달리 온 게 아니고 저 어린애 때문에 왔어요."
숙채는 이렇게 말을 떠놓고 유원이를 쳐다봤다.
"저 애를 당신의 아들로 입적을 시켜주십시오."
유원이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떠서 숙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눈은 결코 독을 품은 눈이 아니었다.
"왜 괴로우셔요?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 명령입니다." (p. 401)'

결국 숙채(여성)는 아이를 유원(남성)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가부장 제도, 즉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자유연애를 한 숙채(여성)의 건너편에 본처(여성)가 존재한다. 남성중심주의가 전제되는 한 여성의 해방을 가로막는 것은 여성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남성에게서 벗어나면 함정은 없을까?

'유연한 능력주의는 페미니즘과도 어렵지 않게 결탁해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성의 경제력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하라고 여성들을 부추긴다. 자발적인 돌봄과 사랑을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고 홀로 살아가라는 명령은 그러한 삶이 누구를 착취하고, 억압할 것인가를 회의하지 않는다. (p. 467)'


그럼 여성해방은 불가능한 것인가? 이상적인 여성 해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적어도 현재 내가 내린 답은 이렇다. 여성 해방의 유토피아는 없다. 페미니즘에 있어서 유토피아란 도래하는 순간 디스토피아일 뿐이어서, 페미니즘은 도리어 유토피아의 도래를 계속해서 후퇴시키는 동력이어야 한다고. (p. 468, 천희란의 에세이, <우리는 이다음의 지옥도 찾아내고 말 테니까> 중에서)'

백룸은 똑같거나 유사한 구조가 무한히 반복되고, 외부 세계와 연결되지 않은 폐쇄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일종의 미궁이다. 천희란의 소설 <백룸>의 주인공 '나'는 백룸 플레이어로 시청자들의 기대에 따라 예측되는 상황임에도 깜짝 놀라는 행동을 반복한다. 반복해야만 하는 규칙에 놓인 상황은 폐쇄된 것으로 질식을 일으킬만한 요소다.

또 다른 주인공 '나'는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으로 전 애인인 연상의 변호사로부터 돌봄 받는 존재로 반복 학습되어왔다. 레즈비언이라고 밝힌 삶에서도 이성애를 중심으로 능력 있는 남성과 그의 가치를 보증하는 여성이란 성 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복된다는 측면에서 여성의 삶은 '백룸' 플레이와 유사하다.

가부장제 또는 남성 중심의 규범에 놓인 상태에서 반복되는 행동을 하며 공포에 떨고 있으면 있을수록 여성의 자율성은 위험하거나, 나쁘거나, 방종하고, 공포스러우며, 미친 것으로 의미화된다.

출구는 없는 것일까? 백룸에 갇힌 여성에게 해방이란 출구는 없는 것일까? 출구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일상적 규범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취급해 출구를 지워버린다. 보이지 않을 때는 구태여 보는 것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어둠을 인정하고 만지고 더듬는 감촉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출구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것만이 미궁 같은 현실에 처한 여성이 출구를 찾아 나서는 동력이다.

'내게 이선희는 '지속된 한계'를 벗어던지기 위해 새로운 지옥을 찾아 나선 여성이었다고 답할 것이다. 소설을 쓰는 내내, 그저 그 지옥을 함께 걷고자 했다. (p. 470, 천희란의 에세이, <우리는 이다음의 지옥도 찾아내고 말 테니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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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러브 모텔
백은정 지음 / 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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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입사하고 한 달쯤 됐을 때였다. 늦게까지 일했고 겹친 술자리마저 길어져 집에 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여인숙에서 자기로 했다. 돈도 아껴야 해서 싼 곳을 찾았다. 처음이었고 지갑을 잃어버리니 잘 간수해야 한다는 등 좋지 않은 정보가 머릿속에 가득한 터라 지갑을 베개 밑에 두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밤새 술 취한 사람의 고함, 싸우는 소리, 걷어차는 소리, 부딪히는 소리, 방을 잘못 찾았는지 시도 때도 없이 방문을 두드리는 등 거의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당연히 내게 여인숙이나 모텔의 이미지는 좋지 않다. 뭔가 범죄가 일어나는 곳 같고 불륜의 현장이란 생각이 든다. 게다가 내가 사는 남양주에서 (주자창이 가려진) 한강뷰 모텔이 많으니 그런 생각이 더하다.


<아이 러브 모텔>은 객실 서른다섯 개 모텔을 남편과 7년째 운영하며 그곳에 머문 이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을 모아놓은 에세이다. 저자는 자신의 모텔에 책을 놓아 북텔로 만들었다. 이곳 모텔에 머물다 간 사람들이 '두 번째 우리 집'으로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도 모텔에 놓았다.

'버스를 타면 핸드폰 말고 창밖을 보는 사람, 밥은 굶어도 바다 보는 것은 포기 못하고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좋아해요. 아직도 별똥별에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어서 가끔 하늘을 봅니다. (책날개, 저자 소개 중에서)'

나는 버스를 타자마자 핸드폰을 본다. 바다? 그보다는 배고프면 못 참기에 밥을 더 챙긴다. 별똥별에 소원을 빈다고? 무슨 애도 아니고... 이런 나는 모텔에 드나드는 사람을 범죄자 또는 불륜으로 단정해 버리지만 저자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모텔 프런트에 앉아 들어오는 사람의 너머를 본다. 그것도 다정한 눈길로. 그의 삶을 단정하지 않고 여러 있을법한 삶을 그들에게 부여하며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내듯이 말이다.


아이와 같은 반 학부모로 만난 그녀는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야무지다 보니 공격적인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 부딪혔다. 그래서 슬슬 거리를 두려던 차에 남편이 아닌 남자와 함께 그녀가 모텔로 들어왔다.

'구겨진 구석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곪은 것이 있다면 터뜨려야 살 수 있을 텐데 내가 뭐라고 그녀를 판단하나. 완벽하지 않기에 우리는 불완전에서 완전을 향해 흐르는 인간이 아니겠는가. (p. 84)'


친구 유희는 아름다운 모습을 물려받았다. 의사인 남편과 결혼했고 23년을 친구들의 부러움 속에 살았다. 다 가졌을 것 같았던 친구에게서 외로움을 보았다. 친구의 마음에 사랑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706호 키와 함께 사랑으로 빈자리가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도 건네준다.

'그녀에게 외로움은 보이지 않는 형용사가 아니라 한 발만 다가서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동사였다. (p. 96)'


수줍은 듯 나이 든 여자와 남자가 들어온다. '이 사람이 몸이 아파서 목욕시키려고요'라는 여자의 말에 욕조 있는 객실 키를 건네며 우리 쩡이 모텔 사장은 피곤했을 여자의 삶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공부와 집밖에 모르는 순둥이 정애는 국민학교도 못 나왔지만 큰 키에 멋진 매너와 말투, 철수의 잘 생긴 모습에 반해 결혼했다. 아이들을 돌보거나 집안일을 거들지 않는 철수를 견디며 정애는 묵묵히 살았다. 남편은 폐암 4기 판정을 받아 길어야 3개월이라는 시간을 남겨둔다. 마지막 서방 노릇을 하기 위해 모텔을 찾았으리라. 철수가 죽은 뒤 정애는 큰 아들을 불었다. 남편이 남긴 소 한 마리를 물려주며 아들에게 말한다.

'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갔노라는 말을 함께 전했다. 이제 막 결혼한 너에게 해줄 말은 그것뿐이라고. (p. 303)'
철수와 행복했던 기억을 남기려 몸부림치는 정애의 모습을 저자는 발견한다.


한쪽 다리를 저는 백발의 중년 남자와 30대 초반의 단아한 모습의 여자가 들어온다. 둘 다 무거워 보이는 화구를 어깨에 멨다.

다희는 어려서부터 그림이 실력이 뛰어났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려 했지만 고등학교 미술부의 텃세와 교칙으로 그 꿈을 접었다. 결혼 후 아이가 어느 정도 컸을 무렵, 문화센터 수채화 성인반을 알게 돼 수강했고, 거기서 수현의 코칭을 받는다. 물감과 종이 그리고 붓을 만나며 그동안 잠들었던 다희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수현은 다희의 종이 위에 멋진 무대를 만들어 주었고, 둘은 낯선 사랑의 감정도 갖게 된다.

'다희는 707호 키를 받아든 수현의 뒤를 따른다. '이 사랑'이라고 쓰고 '이 사람'이라고 고쳐서 되뇌면서. (p. 351)


추석 연휴에 쩡이 작가의 유쾌하고 따뜻한 마을을 읽을 수 있어 이번 한가위는 더 넉넉해졌다. 그래 우리에게 필요한 건, 누구를 정죄하는 차가움이 아니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 제목처럼 다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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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명품이 되는 순간
최경원 지음 / 더블북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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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북부 빌바오시는 조그마한 도시였지만 철광산이 있어 활황을 누렸다. 하지만 철광을 다 캐내자 많은 사람들이 떠나 도시는 텅 비어갔다. 그런 도시를 다시 살려낸 것은 다름 아닌 건축물이었다.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유형으로 프랑크 게리가 디자인한 구겐하임미술관이었다.

건축물 하나가 가져온 강력한 사회 경제적 효과는 널리 알려졌고, 그 이후 도시마다 그 도시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구겐하임미술관, 즉 프랑크 게리의 희한한 아이디어는 건축의 역사가 되었다.

'1,000켤레 한정 생산으로 만들어진 이 신을 신으면 스프링 모양의 신발 몸체가 발을 인체공학적으로 감싸며 멋진 모습을 연출한다. 일상적으로 신는 신발까지 이렇게 획기적인 모양으로 디자인한 솜씨는 건축가를 뛰어넘어 해탈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 혹은 도인의 면모까지 풍긴다. (p. 227)'

자하 하디드가 라코스테 요청에 따라 디자인한 '라코스테 부츠'는 디자이너들에게 상상의 한계가 있기나 한 건지 의심이 들 정도다.


'훌륭한 음악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천만 관객의 영화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듯,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창조한 디자인들이 심오한 인문학적 가치로 대중들에게 아름다움을 즐기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삶에 대해서 근본적인 사색을 하게 만든다. (p. 5)'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최경원 교수의 <일상이 명품이 되는 순간>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디자이너들이 어떤 디자인을 창조하고 그 디자인은 우리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는지, 그리고 어떻게 세계 문화를 변화시키는지 디자인의 흐름을 알려준다.


우리가 사는 공간, 사용하는 물건, 입는 옷 등 주변에서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을 본다. 우리가 감탄하는 것은 대부분 피상적인데 실용성을 중심으로 한 아이디어의 쓰임새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두 가지 사례에서 보듯 이들 디자이너들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가 하면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작품에서 예술작품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고 즐거움에 감동까지 하게 된다.

'조명으로서 해야 할 일에서도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디자인 바깥으로 몰아낼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조명은 상식적인 조명들이 하지 못하는 기능까지 더하고 있다. 이 조명의 파격적인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충격을 줌과 동시에 높은 파고의 감동에 휩싸이게 만든다. 미학에서 말하는 예술적 감흥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pp. 233, 234)'

잉고 마우러의 조명 디자인 <포르카 미세리아>는 페기물인 깨진 접시 조각들로 재활용 수준을 넘는 속성이 다른 존재의 조명으로 재탄생 시킨 결과이다. 조명으로서의 기능을 물론 심미적 거리감도 느낄 수 없는 순수 예술품이나 다름없다.

이 책을 읽고 든 생각은 이제까지 디자이너들이 만들어내는 디자인을 너무 상업적으로 한정해 생산활동으로 규정했고, 순수미술과 구분 지으려 했으며 그래서 가치를 부여하는데 너무 인색했다는 반성이었다.

디자인에 대한 낡은 해석을 지워버리고 디자인이 얼마나 예술적 가치가 있는지를 작품으로 보여준 디자이너 스무 명의 이야기를 <일상이 명품이 되는 순간>에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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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0분, 철학이 필요한 시간 - 삶에 대해 미치도록 성찰했던 철학자 47인과의 대화
위저쥔 지음, 박주은 옮김, 안광복 감수 / 알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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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대화록 가운데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날 언행을 기록했다. 파이돈과 제자들은 사형을 앞둔 스승을 찾아가 그의 마음을 살폈다. 서글픔이나 괴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파이돈>의 기록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라는 말로 차분하게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죽는 순간까지 죽음을 정의하고 나눔으로써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배심원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며 남긴 "숙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는 자신의 말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증명해 보였다. 소크라테스를 '생각의 산파'라고 한다. 질문을 던져 상대방으로 하여금 멈췄던 (어떤 사람은 아예 생각할 의지조차 없었던) 생각이란 걸 하도록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질문은 하고 사유를 통해 스스로 그 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철학과 철학자의 역할이다.


우리도 생각을 하긴 한다. 그리고 대부분 질문도 한다.
'내가 믿는 신은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신이 진리인가?'
'나는 누구인가?' '잘 살고 있는 건가?'
'나는 행복한가?' '무엇이 행복한 삶일까?'
'일은 언제까지 해야 하지?' '인생은 원래 힘든 건가?'
'내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죽은 다음은?'

다만 생각의 깊이와 폭이 모자라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접을 뿐이다. 그러면 그뿐일까? 아니다.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면, 다시 말해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면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안쓰럽게 여긴 타인이 '그건 그런 거야'라고 답을 알려주면 기분이 나쁘다. '지가 날 얼마나 안다고..'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한 질문의 대답은 내가 찾아야 한다. 남들이 대신해 줄 수 없다.

쉽게 답을 찾을 수도 없다. 철학적 질문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정답이 있다고 교육받았고, 그래서 명확하게 '옳다, 그르다' 또는 '좋다, 나쁘다'로 구별될 것 같지만 세상이 그리 녹록지 않다.


<하루 10분,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저자 위저쥔이 중국 팟캐스트에 업로드했던 철학 강의 원고를 정리해 담은 책이다. 저자는 위대한 철학자 47인이 다룬 삶을 꿰뚫는 질문 50가지를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해 철학자들이 어떻게 사유했는지 그 방식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신이 궁금하다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나는 누구인지 의심이 든다면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행복한 삶이 궁금하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왜 이토록 일에 매달릴까라는 의문이 든다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의 답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생각을 이어나가기 위한 힌트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듯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자신 내놓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 철학자의 어깨 위에 올라서면 더 멀리 볼 수 있게 돼서 우리에게 부족한 사고의 깊이와 폭을 채울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실력으로 거인들의 어깨 위로 단숨에 올라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궁극적인 의문을 다루는 형이상학의 철학 책에는 두껍고 높은 진입장벽이 있다. 거인의 어깨 위로 올라가는 일은 힘들 뿐만 아니라 재미도 없다. 우선 근육이 필요하고 즐겁게 오르기 위해 지루함을 없애는 콧노래도 필요하다.

위저쥔의 <하루 10분,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근육을 키우고 콧노래를 알려주는 책이다. 우리보다 앞서 삶에 대해 미치도록 성찰하며 생각을 멈추기 않았던 철학자 47인과 하루 10분 대화를 나눈다면, 힘을 덜고 조금은 홀가분하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거움 마음으로 거인의 어깨 위로 올라가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도 소크라테스처럼 생각을 멈추지 않는 나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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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로마사 (텐바이텐 로마사) - 천년의 제국을 결정한 10가지 역사 속 100장면
함규진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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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교수는 로마가 있었던 유럽이 아니라 고대 로마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 역사가 아닌 정치외교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럼에도 로마사에 대한 책을 쓸 수 있었던 이유가 따로 있다. 앞서 수많은 대가들이 써온 로마 역사서를 읽었고 이해했다. 그들, 그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 거인들이 보지 못한 곳을 볼 수 있고, 나름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덧붙여갈 수 있는 자신감이 저자에게 있다.

'Roma non uno die aedificata est.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미겔 데 세르반테스 (p. 409)'

함규진 교수의 <10×10 로마사>는 2천 년에 달하는 로마 역사를 영웅, 황제, 여성, 건축, 전쟁, 기술, 책, 신, 제도, 유산, 이렇게 열 가지 주제에 핵심적인 열 가지 장면을 각 주제별로 뽑아 전체 100가지 이야기를 책에 실었다. 100 장면 모두 흥미롭고 대여섯 쪽으로 구성해 로마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을 갖춘 책이다.

남성 이미지의 로마에 '여성'을 주제로 할만한 이야기가 있을까 싶지만 그렇지 않다. 비록 영웅이나 황제의 어머니 또는 아내로 여성을 조명하긴 하지만 리비아처럼 권력 막후의 여성도 있었다. 또 기독교가 국교화되면서 헬레나, 타이스와 같이 성녀로 여성이 등장하기도 한다.

로마의 위대한 문명은 어떤 '책'을 남겼을까. 건축에 사용되었던 과학기술을 총망라한 비트루비우스의 <건축론>, 베르길리우스의 대서사시 <아이네이스>,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은 <신약성서>, 당시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등 열권의 책을 저자는 꼽았다.

로마가 남긴 '유산'도 흥미롭다. 지금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알파벳의 기본인 로마자, 현대 정치의 원리의 하나인 공화정, 태양력, 대중문화의 시작점인 콜로세움, 병원, 경매 등 모두 로마가 남긴 유산이다.

딱딱한 느낌의 역사라기보다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 책의 재미요소가 하나 있는데, 마치 보드게임하는 이쪽 챕터에서 저쪽 챕터로 다시 또 다른 쪽 챕터로 넘나들며 읽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며 챕터 2-6 '하드리아누스'를 읽다가 '콘술'이란 용어에 막혔다면 안내하는 챕터 9-1을 펼치면 그 개념을 알 수 있다. 또 그 챕터를 읽어나가다가 '공화정'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려 한다면 안내하는 10-5로 잠시 건너갔다가 오면 된다.

로마사의 깊이와 넓이에 더해 로마제국의 비밀을 색다른 방법으로 즐기고 싶다면, 역사를 쉽게 풀어내는 함규진 교수의 <10×10 로마사>를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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