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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룸 ㅣ 소설, 잇다 3
이선희.천희란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9월
평점 :
근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에 담아 읽는 '소설, 잇다' 시리즈 세 번째 <백룸>은 1911년생 이선희의 소설 두 편, 2015년생 천희란의 소설과 에세이 각각 한 편, 문학평론가 선우은실의 해설을 담았다.
작가 이선희는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나 개방적 사고를 접했다고 한다. 기자로 일하며 문단 데뷔를 했지만 한때 카바레 종업원으로 일했고, 극작가 박영호와 재취로 결혼해 전처와 갈등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 속 여주인공은 불행하다. 하지만 그 불행에서 주인공인 여성은 주저앉지 않고 일어나 가부장제로부터, 여성의 보편적 인식과 행동으로부터 탈피하려 한다.
작가 천희란이 태어나 마주한 세상은 이선희가 살던 백 년 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천희란 역시 이선희가 했던,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세계의 고통과 혼란을 어떻게 해명할까를 고민했다. 천희란에게 소설은 고민의 답을 찾는 과정이다. 문학 안에서 여성의 자리를 다양하게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천희란의 바람이다.
이선희의 <계산서>
주인공 '나'는 아이를 낳다가 한 쪽 다리를 잃어 절름발이가 된다. 다리가 둘인 남편과 사이에 균형이 무너졌다. 균형을 잃은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죽는 것보다 낫지 않소?"는 결국 나를 속이는 엄청난 사기술이었다. (p. 26)'
남편은 '나'를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듯하지만, 외출하고 싶다고 할 때 '나가봤자 괜히 몸만 괴롭지 않겠냐'라는 말 그리고 그동안 한 번도 매지 않았던 새 넥타이를 매고 나가는 남편을 보며 그 안타까움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눈치챈다.
여성이며 신체적 장애를 가진 주인공 '나'에게 사회 관념과 남편은 가부장제의 친절한 보살핌 속에 있기를 권하며 사회적인 활동을 금한다. 주인공을 위해서라기 보다 남편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두 다리를 가진 자와 절름발이 사이의 불균형이 불편한 이유다.
부부생활이 끝났으니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계산이 필요하다. 주인공이 남편에게 내민 계산서는 균형을 위해 남편도 다리 하나가 병신 되는 것이다. 아니 그것으로는 수지가 맞질 않는다. 목숨이라야 될 것 같다. 하지만 끝내 계산하지 못한다. 왜? 여성이자 아내여서다. 남성의 몫을 여성의 몫으로 감히 상쇄하지 못하도록 사회 규율이 가로막는다.
'나는 아직 살인을 하지 않은 채 이곳으로 왔다. 받을 것을 다 못 받고 그대로 주저앉는 것이 모든 아내 된 자의 약점이요, 애교인 모양이다. (p. 40)'
이선희의 <여인 명령>
여자전문대학 학생인 숙채와 유원은 연인이다. 유원은 숙채에게 결혼 약속하며 고향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다. 그간 비밀스러운 활동을 한 유원은 잡혀서 감옥에 들어가고, 유원을 기다리던 숙채는 지쳐 서울에 올라가 불안정한 생활을 한다. 김 의사의 집요한 청혼을 몇 번 거절하지만 결국 받아들여 결혼한 숙채는 아이를 낳고 잘 살아간다. 어느 날 남편 김 의사가 열일곱에 혼인한 여자가 고향 본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배운 신여성에게 주어진 숙채의 자유연애, 즉 사랑으로 이어지는 결혼이라는 꿈은 유원(남성)의 징역살이로 끝나버린다. 주변 강요로 이루어진 김 의사와 결혼은 전해내려오는 결혼제도 속에서 본처(여성)의 등장으로 숙채는 후처(여성)가 돼버려 남편을 놓고 본처와 다투는 신세가 돼버렸다. 게다가 남편이 죽고 그를 따라 자살한 본처는 열녀가 돼 집안의 인정을 받아 자리 잡지만 숙채의 자리는 그 집안 그 어느 곳에도 없다.
병들어 죽게 된 숙채는 아이를 업고 사랑으로 선택했던 유원을 찾아가 마지막 부탁(명령)을 남긴다.
'이윽고 숙채는 이야기하기를 시작했다. 마치 홀러 가는 물과 같이 그렇게 조용히 그렇게 쉽게.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달리 온 게 아니고 저 어린애 때문에 왔어요."
숙채는 이렇게 말을 떠놓고 유원이를 쳐다봤다.
"저 애를 당신의 아들로 입적을 시켜주십시오."
유원이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떠서 숙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눈은 결코 독을 품은 눈이 아니었다.
"왜 괴로우셔요?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 명령입니다." (p. 401)'
결국 숙채(여성)는 아이를 유원(남성)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가부장 제도, 즉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자유연애를 한 숙채(여성)의 건너편에 본처(여성)가 존재한다. 남성중심주의가 전제되는 한 여성의 해방을 가로막는 것은 여성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남성에게서 벗어나면 함정은 없을까?
'유연한 능력주의는 페미니즘과도 어렵지 않게 결탁해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성의 경제력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하라고 여성들을 부추긴다. 자발적인 돌봄과 사랑을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고 홀로 살아가라는 명령은 그러한 삶이 누구를 착취하고, 억압할 것인가를 회의하지 않는다. (p. 467)'
그럼 여성해방은 불가능한 것인가? 이상적인 여성 해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적어도 현재 내가 내린 답은 이렇다. 여성 해방의 유토피아는 없다. 페미니즘에 있어서 유토피아란 도래하는 순간 디스토피아일 뿐이어서, 페미니즘은 도리어 유토피아의 도래를 계속해서 후퇴시키는 동력이어야 한다고. (p. 468, 천희란의 에세이, <우리는 이다음의 지옥도 찾아내고 말 테니까> 중에서)'
백룸은 똑같거나 유사한 구조가 무한히 반복되고, 외부 세계와 연결되지 않은 폐쇄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일종의 미궁이다. 천희란의 소설 <백룸>의 주인공 '나'는 백룸 플레이어로 시청자들의 기대에 따라 예측되는 상황임에도 깜짝 놀라는 행동을 반복한다. 반복해야만 하는 규칙에 놓인 상황은 폐쇄된 것으로 질식을 일으킬만한 요소다.
또 다른 주인공 '나'는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으로 전 애인인 연상의 변호사로부터 돌봄 받는 존재로 반복 학습되어왔다. 레즈비언이라고 밝힌 삶에서도 이성애를 중심으로 능력 있는 남성과 그의 가치를 보증하는 여성이란 성 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복된다는 측면에서 여성의 삶은 '백룸' 플레이와 유사하다.
가부장제 또는 남성 중심의 규범에 놓인 상태에서 반복되는 행동을 하며 공포에 떨고 있으면 있을수록 여성의 자율성은 위험하거나, 나쁘거나, 방종하고, 공포스러우며, 미친 것으로 의미화된다.
출구는 없는 것일까? 백룸에 갇힌 여성에게 해방이란 출구는 없는 것일까? 출구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일상적 규범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취급해 출구를 지워버린다. 보이지 않을 때는 구태여 보는 것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어둠을 인정하고 만지고 더듬는 감촉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출구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것만이 미궁 같은 현실에 처한 여성이 출구를 찾아 나서는 동력이다.
'내게 이선희는 '지속된 한계'를 벗어던지기 위해 새로운 지옥을 찾아 나선 여성이었다고 답할 것이다. 소설을 쓰는 내내, 그저 그 지옥을 함께 걷고자 했다. (p. 470, 천희란의 에세이, <우리는 이다음의 지옥도 찾아내고 말 테니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