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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읽는다 - 한 권으로 깊이 읽는 한강 대표 작품
강경희 외 지음 / 애플씨드 / 2025년 2월
평점 :
다섯 문학 평론가가 한강의 대표작 다섯 권을 해설하는 책 <한강을 읽는다>다. 학술 논문 형태가 아닌 대중적 글쓰기를 지향했다고 '들어가는 글'에서 밝혔지만 이들의 평론 역시 한강 작품만큼이나 내겐 어려웠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세 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된 <채식주의자>를 평론가 김건형은 남편, 형부, 언니, 세 명의 영혜 주변 '정상인'들이 영혜를 바라보는 시선을 뒤집어 오히려 그 시선이 이상하다는 것을 폭로하는 장치라고 소개한다.
최다영 평론가는 <희랍어 시간>을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이 세계가 침묵, 죽음으로 충만해 있음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라고 평하며 한강의 소설 가운데 가장 은유적이고 시적인 작품으로도 소개한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는 읽는 내내 한강 작가가 우리에게 던진 '이리도 참혹한 세계가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되뇌게 하는 작품이었다고 비평가 성현아는 말한다.
한강 작가 가족사의 아픔을 바탕에 둔 작품 <흰>을, 평론가 허희는 시적 에세이라고 소개하며 얇지만 빽빽한 책이라고 평가한다. '삶과 죽음을 둘러싼 사유의 밀도는 촘촘하기 때문이다. (p. 140)'
<소년이 온다>와 함께 국가 폭력을 다룬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 문학 평론가 강경희는 '70여 년, 매일 악몽에 시달려도 결코 작별할 수 없었던, 아니, 작별하지 않겠다는 (p. 171)' 소설 속 화자이자 한강 작가 본인으로 여겨지는 경하, 그의 친구 인선, 인선의 어머니 정심, 이렇게 세 명의 여성과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요약한다.
평론집은 좀 더 깊은 작품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한강 작품은 아름답지만 결코 쉽게 읽어나갈 수 없는 난해함이 있어 한강이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메시지를 알아채는데 애를 먹곤 한다.
'흥미로운 점은 한강이 직조한 큐브(플롯 plot)가 확연하고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지극히 의식적인 작법인데, 독자가 빠르고 쉽게 자신의 소설을 읽어갈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지연 방식이다. 독자를 곤혹스럽게 하겠다는 의도라기보다는 정지와 복귀, 다시 읽기와 재현을 통해 독자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겠다는 전략이다. (p. 182, 문학평론가 강경희)'
평론에 기대면 어느 정도 그 결을 찾아들어갈 수 있다. 작가가 배치한 장치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때 그 기쁨이란, 또한 흐릿했던 시야가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해지는 느낌도 갖게 된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인선이 3분마다 주삿바늘을 찌르는 장면이 나온다.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이 장면에서 내가 알아차려야 할 메시지는 뭘까? 잠잘 때조차 인선은 주삿바늘이 주는 고통을 참아야 한다. 만약 포기한다면? 환지통에 시달릴 것이다. 제주 4.3을 안 이상 외면하려 해도 고통은 계속된다.
어차피 환지통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3분마다 느껴야 할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래서 제주 4.3의 피가 내게도 흐르게 해 온몸으로 고통을 껴안을 수는 없느냐. 인선처럼 고통의 작업을 숭고한 예식으로 바꾸어 매년 애도하며 작별하지 않을 수 없겠는지. 한강의 물음이 들린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자격으로 지난해 12월 7일 스웨덴 한림원에서 한강 작가는 <빛과 실>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세 가지 물음을 우리에게 던졌다. 이 물음은 작가로서 한강 자신에게도 하는 질문으로 그 고민과 응답을 작품에 풀어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p. 156)'
첫 번째 두 번째 물음에 답은 우연치곤 기이하게도 지난해 12월 3일 밤에 벌어져 지금까지도 진행 중인 내란으로 똑똑히 확인해 가는 중이다. 세 번째 물음에 대해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p. 125)'라고 평론가 성현아는 전한다.
진한 아름다움은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울수록 눈에 띈다. 전쟁 가운데 핀 아름다움이 더 아름답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역설이 진리가 되어 골고루 퍼져있다. 독재 국가 폭력에 맞서 흘린 피가 선명하고 그래서 그 피로 이룬 민주주의가 더 아름답다.
가정 폭력에 멍든 푸른색도 선명하다. 그 푸른 폭력의 상처는 보편적 정상의 심기를 건드려 혐오, 차별로 치부되던 사람들을 급기야 정상에 가까운 아름다운 곳에 데려다 놓았다. 세 번째 물음에 내가 찾은 답이다.
이 책이 다룬 다섯 작품 가운데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만 읽었다. <채식주의자>는 읽지 않았지만 내용을 어렴풋이 알고 <흰>, <희랍어 시간>은 어렵다는 것만 전해 들었다. 평론집으로 한강 작품을 읽은 것처럼 행세해 볼 요량이었다. 얄팍한 생각이 문제였다.
한강의 다섯 작품을 읽고 <한강을 읽는다>를 다시 읽어보려 한다. 그때는 한강의 작품에 스며있는 흔적 가운데 더 많은 흔적이 내 눈에 띄겠지라는 희망을 갖고. 한강 작품만큼은 그 세계에 깊이 빠져보고 싶다. 그만큼 깊으니깐.
'한강은 자신의 문법이 "신체의 사용"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감각의 세부를 사용하는 몸의 문장, "필명의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전류"가 통하는 소설을 쓴다. 이러한 작가의 고투가 전이될 때 독자는 작가처럼 아프고 힘겨울 수밖에 없다. (p. 210, 문학평론가 강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