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가 들려주는 산티아고 순례 이야기
낸시 루이즈 프레이 지음, 강대훈 옮김 / 황소걸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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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길 카미노데산티아고,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의 론세스바예스 Roncesvalles에서 출발해 큰 도시와 마을, 탁 트인 전원 지대를 지나 마냥 걷는 길이다.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인 750킬로미터의 카미노데의 끝은 산타아고데콤포스텔라 시 오브라도이로광장의 산티아고대성당이다.

'카미노 루트는 노란 화살표나 가리비 껍데기로 표시되며, 역사 명소 안내판도 마련되었다. 순례자는 순례자 여권이라 불리는 증서 credential를 들고 다니며 매일 도장을 받는다. 산티아고대성당 사무소에서는 산티아고 순례를 완수했음을 증명하는 콤포스텔라 Compostela 증서를 발급한다. (p 25)'

산티아고, 즉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의 유해가 산타아고데콤포스텔라가 있는 언덕으로 옮겨졌고,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이 된다. 1000년 순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16세기에 순례가 위축됐고, 19세기에도 순례자 수가 크게 줄어 고비를 맞았다. 하지만 오늘날 카미노 순례는 종교 여행을 넘어 삶의 내면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는 여행으로 카미노는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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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가 들려주는 산티아고 순례 이야기>는 순례길 카미노데산티아고에 관한 민족지다. 조사의 시작은 순례였다. 저자인 낸시 루이즈 프레이는 9주간의 첫 번째 순례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카미노를 걸었고, 순례자 숙소 네 곳에서 13개월간 일하며 순례를 경험하며 현지 조사를 수행했다.

'사람들은 왜 순례를 떠나며, 어떤 목표와 동기를 가지고 카미노로 오는가? 순례 중에 맞닥뜨리는 기쁨과 시련, 고민은 무엇이고, 순례 경험은 집으로 돌아간 뒤 그 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 (p. 6)'

이 책은 여느 순례 기록과 다르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물리적 여행의 종결에서 기록을 멈추지 않고 순례자의 귀향 이후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순례 경험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경험이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추적 조사한다. '사람은 언제, 무엇으로 인해 변화를 맞이하는가?'라는 인류의 오래된 물음에 답을 찾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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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했던 집으로 돌아온 뒤 카미노의 경험을 어떻게 작동할까?

'순례는 여행 결심과 더불어 시작되지만, 산티아고 도착과 더불어 종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p 25)'
여행의 목표가 목적지에 도착이라면 순례의 목적은 오브라도이로광장의 산티아고대성당, 성지에 도착이 아니다. 길을 걷는 과정이 목적지이고, 집으로 돌아온 뒤 본격적인 순례가 시작되기도 한다.

순례 후 일상 복귀의 어려움도 느낀다. 관점과 인식이 변했기 때문이다. 순례자는 어떤 힘을 갖고 있는데, 그 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보지 못한 것을 경험한 데서 비롯된다. 순례에서 발견한 것들을 일상에 적용하는 과정이 복잡하다. 일상의 리듬에 다시 익숙해지기도 만만찮다.

카미노를 걸으며 일상의 소중함을 알고, 일상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카미노의 가치를 깨닫는다. 기억 속에 두 가지 카미노가 존재한다. 이웃과 나누는 과정에서 재해석하는 카미노, 또 하나는 본인 만의 기억 속 카미노다. 이 기억은 카미노를 재방문 할 때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카미노 순례는 종교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종교로부터 멀어지게도 한다. 카미노는 잠재해있던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선물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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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산티아고 순례를 결심하곤 했다. 왜 카미노데산티아고 찾을 결심을 했을까? 곰곰이 그때를 생각해 보면,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변화를 찾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저자는 카미노를 걷는 것만으로 변화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카미노가 순레자에게 열어주는 새로운 문을 자신의 힘으로 통과해야만 한다...

'한 영국 순례자는 순례가 "정신의 상태, 삶의 방식, 마음의 형편 a state of mind, a way of life, a condition of the heart"이라고 말했다. 순례가 생각과 해석, 행동, 느낌과 감정의 집합체라는 이야기다. 순례는 순례자의 개인적·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강도로, 여러 층위에서 꾸준하게 영향을 미친다. 기억은 현재의 감정과 사고, 행위에 방향을 부여하며 그것의 표현에 관여한다. (p. 339 순례의 정신을 간직하기)'
뚜렷한 의미를 단박에 찾기 힘들어 참 어려운 문장이지만 곱씹어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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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팔레스타인 2 - 만화로 보는 팔레스타인 역사 아! 팔레스타인 2
원혜진 지음,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감수 / 바이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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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 유학 중인 이스라엘 국적의 학생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 전쟁에 참여했지만, 이슬람권의 학생들은 미국에 그대로 남았다는 말이 아무 근거 없이 오르내리곤 했던 적이 있다. 즉 애국심이 이스라엘 학생에겐 있었고 이슬람권 학생에겐 없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가진 이스라엘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는 박정희 군부 정권 때부터 뿌리내렸다. 사회적 반발을 달래고 애국심을 강조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성공사례로 가져왔다. 내가 배운 친미 성향의 교육에 따르면 유대인은 탈무드로 교육받아 지능이 우수하고, 고난을 극복한 위대한 민족이다. 그들의 키부츠 성공 사례는 근면, 자조, 협동을 생활화하는 새마을 운동으로 이어졌다.


나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 집시, 장애인까지 학살했지만, 홀로코스트의 희생이 가져온 동정 여론은 온전히 유대인의 몫이었다. 신성불가침인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의 건국을 정당화하는 토대가 됐다. 또한 유럽은 암묵적으로 이스라엘 정책에 동의하며 유럽이 가진 반유대주의 죄의식을 씻고자 했다.

'엠지엠(MGM), 20세기폭스, 워너브라더스, 콜롬비아, 파라마운트 등 할리우드의 제작사 대부분은 유대인이 창립한 회사입니다. 그들은 홀로코스트나 과거 유대인의 핍박을 담은 대작 영화를 끊임없이 제작해 유대인의 비극을 전 세계에 계속 상기시킨다. (p. 134)'

친 이스라엘 정서와 달리 세계의 눈에 비친 팔레스타인의 이미지는 테러다. 그것도 자살 테러.
'우린 그걸 자살폭탄 공격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자살이라는 말은 삶을 포기한 매우 비겁한 말이며 이슬람에서는 그런 자살을 인정하지도 않아요. 그건 순교입니다. 팔레스타인을 위한 저항이죠. 그런 희생적인 저항은 세상 모든 나라의 역사에서 등장했습니다. (p. 4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교전이 벌어지는 것처럼 외신은 전하지만, 실상은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공격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이스라엘 집권 여당은 선거를 앞두고 대공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표를 많이 얻으려고 강경 노선을 걸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했다. 정도가 심해 소수이긴 하지만 이스라엘 내에 반정부 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스라엘 국내에서는 언론과 여론의 따가운 눈총에도 1,000여 명의 시민이 모여 가자 침공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스라엘의 병역 거부 젊은이들은 동영상을 만들어 자신들의 주장을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p. 128)'


20세기 독일 나치는 유대인 거주 지역 게토를 설치해 유대인을 외부와 격리했다. 21세기에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가뒀던 게토처럼 장벽을 세워 팔레스타인인을 고립시켰다. 이스라엘은 이 장벽을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막기 위한 '보안 장벽'이라고 말하면서 감시탑을 세워 팔레스타인인들을 감시한다.

'그들의 말과는 다르게 이 장벽은 농부와 농토, 학생과 학교, 환자와 병원, 노동자와 공장, 서로 만나려는 가족과 가족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p. 76)'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자신들의 나라는 없었다. 이스라엘 점령촌만 있을 뿐이었다. 나에게 이 사실은 너무 생소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동할 때가 허가증이 있어야 하고, 온갖 수모를 겪으며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 억압과 통제를 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점령촌 이스라엘 군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저지르는 폭력조차 전혀 처벌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점령촌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제4차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 사례 가운데 가장 악랄한 경우 꼽힌다. (p. 162)'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경제도 통제하고 있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기업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이스라엘 기업이 생산하는 상품을 구매하는 등 팔레스타인 경제는 이스라엘에 철저히 종속된 구조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식민을 오히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귀환한 것으로 정당화하고 있었다면, 박노자 교수의 말처럼 지금부터는 팔레스타인을 '한국적 입장'에서 읽어야겠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했듯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했고, 한국이 일본을 공격하지 않고 저항했듯이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고 저항했을 뿐이다. 윤봉길, 안중근 의사는 독립투사이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살해한 아메드 야신, 란티시, 아라파트도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외친 이들이다. 하마스는 엄연한 팔레스타인의 정당이다.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오긴 하는 걸까? 이스라엘 북부의 와디 아라(Wadi Ara) 지역에 설립된 두 민족, 두 언어가 공존하는 학교에서 이스라엘 아이와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같이 즐겁게 논다. 이런 풍경이 점차 많아진다면? 이 지역의 희망도 커지리라. 결국 다음 세대에게 실낱같은 기대를 걸어본다.

팔레스타인, 지구상에서 상처가 가장 큰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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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팔레스타인 1 - 만화로 보는 팔레스타인 역사 아! 팔레스타인 1
원혜진 지음,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감수 / 바이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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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의 이야기.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 없으면서 누구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 (p. 4, 추천의 글 - 박재동)'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 이 메시지로 인해 크게는 이슬람 국가, 작게는 팔레스타인에 대해 우리가 가진 선입견은 폭력과 테러다. 이슬람 문화를 폄훼하려고 퍼뜨린 말이라는 사실엔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연신 웰컴을 외치며 사탕을 손에 꼭 쥐여주던 제닌 시장에서 만난 어느 노숙인과 차 한잔 마시면서 쉬었다 가라던 염소와 양을 치던 베두인 할아버지, 한국인을 만 났다는 이유로 꺅꺅거리면서 정말 행복해하던 지드래곤과 이홍기의 소녀 팬, 언젠가 돌아갈 고향 집의 낡은 열쇠를 보여주며 눈은 울고 입은 웃던 난민촌 할아버지까지. (p. 10, 개정판을 내면서 - 원혜진)'

우리의 고정관념대로라면 위의 풍경은 이스라엘에 좀 더 가깝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만화로 보는 팔레스타인 역사' <아! 팔레스타인>의 저자 원혜진이 첫 팔레스타인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다.


2000년 9월 30일. 열두 살 소년 라미 자말 알두라가 아버지와 함께 중고차 시장에 다녀오던 중 시위대를 진압하던 이스라엘 군과 맞닥뜨린다. 총구를 겨눈 이스라엘 군을 향해 쏘지 말라며 아버지 자말 알두라는 절규한다. 수차례 총성이 울렸고 소년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장면은 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때, 부근에 있던 프랑스2TV 카메라에 포착되어 텔레비전에 방송되었다. 맨몸인 아버지와 아들을 향해 총구를 들이민 이스라엘의 잔학한 행위를 두고 당시 팔레스타인 의회 의장이었던 아메트 케레이어는 "세상에서 인간이 목격할 수 있는 추악한 장면"이라고 말했다. (p. 22)'

이 장면에 원혜진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대해 갖고 있던 자신의 선입견에 의문을 가진다. 원혜진이 아는 이스라엘이 21세기에 이런 짓을 한다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은 기원전 2100년경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해 25년간 여호수아는 가나안 토착민 필리스틴인을 몰아내며 정복 전쟁여호수아다. 20세기에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필리스틴인을 무참히 짓밟듯, 팔레스타인에 멀쩡히 살고 있는 원주민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했다. 야만인을 죽이는 것이 신의 명령인 양 아메리카 신대륙의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 유럽 백인들과 흡사하다.


고등학생 시절 박영한의 소설 <머나먼 쏭바강>은 베트남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바꿔놓았다. 베트콩은 나쁜 놈들이고 미국은 좋은 나라라는 미국 관점의 내 생각을 베트남의 입장으로 바꾸고 보니,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 주권을 빼앗으려는 미국에 대항한 독립 전쟁이었다.

'김구, 안중근, 윤봉길, 홍범도 등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싸우신 분들을 일본은 지금도 테러리스트라고 부릅니다.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그들 또한 미국과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라 매도하고 있습니다. (p. 12, 13 [초판] 작가의 말)'

만약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1945년에 우리나라가 독립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모습이 팔레스타인의 모습이지 않을까?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아! 팔레스타인 1>을 읽으면 팔레스타인 역사가 우리와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민족', '혈통' 위주의 집단의식이 어떤 파멸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 팔레스타인>을 '한국적' 입장에서 읽기를 권장한다. (p. 8, 추천의 글 - 박노자)'

팔레스타인, 지구상에서 상처가 가장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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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파일 명화 스캔들
양지열 지음 / 이론과실천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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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법률 이슈와 그림이다. 변호사, 기자, 철학 세 가지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라면 쓰기 힘든 주제의 글들을 참 쉽게 써 내려갔다. (뒤표지, 신장식 변호사)'

<사건 파일 명화 스캔들>은 '김태현의 정치쇼'라는 라디오 프로그램 속 '살롱 드 지' 코너에서 양지열 변호사가 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건 한 폭의 그림에서 사회적 이슈가 된 사건을 풀어내는 새로운 시도라는 점이다. 딱딱한 법이 말랑말랑해진다.


주세페 크레스피의 <큐피드와 프시케>. 프시케는 밤마다 찾아오는 남편의 정체가 궁금했다. 결국 언니들의 부추김에 곤히 잠든 큐피드의 이불을 걷어버린다. '사랑은 의심과 함께 머물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큐피드는 떠난다.

배우자 또는 상대를 의심해 개인정보를 돈을 주고 산다(개인정보 보호법 위반). 싹튼 의심이 생사람을 잡곤 해서 법적 분쟁 까지 가 아름답지 못한 결론에 이른다. 무엇보다 사랑에 필요한 건 신뢰가 아니까?

'의심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는 겁니다. (p. 32)'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판도라의 상자>. 제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에피메테우스가 못마땅했다. 골탕 먹이려고 아름다운 여인 판도라(최초의 여성)와 함께 상자를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낸다. 호기심에 판도라가 그 상자를 연다. 성경 속의 이브, 판도라, 왜 세상에 재앙을 불러온 이들은 모두 여성일까?

경찰 내부에서 여자 경찰관을 동료 경찰관이 성폭행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가 합의금 요구를 거절하자 이 사건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주변 동료들이 여자 경찰관의 말은 무시하고 오히려 비난하고 모욕을 주며 휴직을 요구했다. '그 여자 그럴 줄 알았다.' 등등의 2차 가해는 여성을 향한 뿌리 깊은 편견이 출발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에게 부당하게 가해진 저주로부터 이제는 벗어나야겠습니다. (...) '판도라'라는 이름 자체가 '많은 선물을 받은 여인'이라는 뜻인데요. 여성의 잠재적 재능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신화에 따르면 인간의 문명은 판도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p. 118)'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특이하게도 옆모습인 초상화의 우르비노 공작 콧날 위쪽이 뚝 끊겼다. 결투를 벌이다 한 쪽 눈을 잃은 공작은 시야를 가리는 콧등을 잘라냈다. 이 그림의 비밀이 하나 더 있다. 마주 보는 부인의 얼굴이 창백한데 죽었기 때문이다. 공작은 부인을 무척 사랑했고 그림 속에서조차 아내를 그리워했다.

과장 광고, 잘 생긴 외모를 선호해 이미지 조작이 일상인 세상, 실제 모습과 진실이 숨겨진 세상에서 우리는 산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흔적을 자신의 신체 어딘가에 새기기 마련입니다. 그 흔적의 참된 의미를 어떻게 해야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외모로만 평가한다면 결코 진실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을 겁니다. (p. 182)'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그림 오른쪽 아래에 왜소증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당시 귀족은 장애인을 시종으로 부리며 때로 웃음거리,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가난한 집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일부러 기형으로 만드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벨라스케스는 왕의 총애를 받는 궁정화가이고 스스로도 높은 신분의 귀족이었지요. 그의 눈에는 모두가 평등한 것으로 보였답니다. (...) 적어도 그의 그림 속에서만은 모두가 평등한 존재였습니다. ( p. 202, 203)'


'법원은 과거를 심판할 뿐 미래의 설계도를 그리지는 못합니다. (p. 147)'

한 손에 저울, 다른 손에 칼을 쥔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린 이유는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서다. 눈가림은 법 앞에서 누구나에게 공정하고 공평한 판단을 의미한다. 편견과 착각에 빠지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요즘 법을 집행하는 이들에게 눈가림은 없다.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자신만의 이익을 쫓고 차별을 일삼는다. 저울은 팽개치고 칼만 휘두른다. 서슬이 퍼렇다. 차갑다. 오싹하다.

이 책의 저자 양지열 변호사의 그림을 보는 눈과 그의 글은 따듯하다. 이런 법조인이 눈에 띄는 건 참 다행스럽다. 따뜻한 법 이야기를 읽게 돼 좋았다. 머리는 차가울지라도 법의 마음만은 따뜻했으면... 그런 세상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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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술관 - 풍속화와 궁중기록화로 만나는 문화 절정기 조선의 특별한 순간들
탁현규 지음 / 블랙피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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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술관>의 저자 탁현규는 고미술계 최고의 해설가이다. 그는 이 책에 조선 문화절정기의 풍속화와 궁중기록화를 담아 특유의 해설로 특별한 순간을 이야기한다.

'풍속화가 사생활이라면 기록화는 공공생활이고 풍속화가 드라마라면 기록화는 다큐멘터리다. (p. 9)'

당시 그림은 사진을 대체했다. 통치자는 자신의 임무를 되새기기 위해 백성들의 사는 모습에 관심을 가져야 했고, 사람들의 풍속을 그린 풍속화를 보며 백성들의 생활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책 <조선 미술관>에 실린 50여 점의 그림과 탁현규의 설명을 통해 조선 후기의 백성들의 일상과 왕실, 상류사회의 성대한 잔치 모습을 우리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은 사람 구경이라고 했던가.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사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는 산수화만큼 사랑받았다. (p. 12)'

저자는 그림 한 장에서 스토리를 찾아내고 신윤복, 정선, 김홍도를 비롯한 7인이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 연출 의도를 알려줘 매우 흥미롭다.

<귀인응렵貴人鷹獵>에서 김홍도는 사슴 다리와 말 다리를 가려놓아 '다 그리면 재미없다'라는 법칙을 지킨다. 뒷배경도 나무 한 그루만 그리고 비워놓아 오롯이 말탄 선비에게만 집중해서 감상하도록 한다.

<밀희투전密戲投錢>에서 김득신은 패를 쥔 네 명의 손짓을 다르게 그려, 각자 속마음이 다른 도박판의 상황을 나타냈다.

정선 역시 <어초문답漁樵問答>에서 어부의 얼굴을 다 그리지 않아 '다 그리면 재미없다'라는 법칙을 어기지 않는다. 이 그림은 중국 것을 소재로 그렸지만, 멜대를 지게로 바꾸고 중국 그림에서 서있는 어부와 나무꾼을 땅바닥에 앉혀 느긋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그림으로 조선화化를 이끌어냈다.

노상에서 두 부부가 만나는 <노중상봉路中相逢>에서 신윤복은 눈빛 교환만으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삿갓 쓴 여인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에서 미모 경쟁을, 미모의 부인을 둔 남성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에서 시샘을, 남성의 눈빛에서는 자신감을 담아내 심리묘사를 극적으로 연출했다.


'풍속화와 더불어 조선인들의 삶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그림이 공공 모임을 그린 기록화이다. (...) 기록화 가운데 압권은 임금이 등장하는 궁중기록화이고 그 가운데 역시 희귀성에 있어 으뜸은 임금이 기소에 들어간 사건을 그린 기사첩耆社帖이다. (p. 156)'

기로소는 기로사耆老社 혹은 기사耆社라고도 하는데 70세 이상 정 2품 이상의 문신들이 들어가는 영예로운 모임을 일컫는다. 왕은 이들과 달리 60세가 되면 들어갈 수 있었다. 숙종과 영조의 기로소 입소 잔치 기록인 <기해기사첩>과 <기사경회첩>을 보며 당시 사회가 노인을 얼마나 우대했는지와 두 화첩의 그림으로 두 왕조의 문화 수준 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

이를테면 숙종은 사치와 향락을 경계하였으므로 당시 기록 화첩에서는 기녀가 등장하지 않는 반면 영조에 이르러서 <본소사연도本所賜宴圖>에는 머리에 꽃을 꽂은 춤추는 기녀들이 등장한다.


도슨트 탁현규의 <조선 미술관>은 일종의 그림 '감상하기'를 알려주는 책이다. 미술관의 각종 오디오와 미디어로 작품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림을 찬찬히 응시한다면, 저자처럼 그림 한 장에서 스토리를 찾아 읽어내기가 가능하고 작가의 연출 의도를 끄집어내게 될지도 모른다. 제대로 감상하는 한 장의 그림이 선조들과 우리들을 이어주는 진정한 교감이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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