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 - 읽기만 해도 어휘력이 늘고 말과 글에 깊이가 더해지는 책
장인용 지음 / 그래도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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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라도 우리말로 바꿀 낱말이 있다면 그 말을 쓰려고 노력한다. '계란' 대신 '달걀'이란 말을 쓰는데 거의 집착 수준인데도 조금만 방심하면 계란이란 말이 툭 튀어나온다. 일본에서 들어온 말은 더 고치려고 한다. '미소'라는 말이 아름답지만 그 자리에 '웃음'을 넣는다. '야채' 대신 '채소'를.

'보통 문학작품에서 3인칭으로 '그'와 '그녀'를 많이 쓴다. '그'에는 어디에도 성별 구별이 없지만 대개 '그'는 남성을, 여성은 특별히 '그녀'라고 표기한다. '그녀'는 '그'가 포함된 대명사 가운데 비교적 늦게 태어난 말로 일본어의 '카노조(彼女)'를 번역한 말이다. (p. 225)'

글 흐름상 여자임이 드러날 경우 '그녀'라는 말을 쓰지 않는 편이다. 아직도 일제강점기 문화를 청산하지 못한 느낌이 들어서이다. 실제로도 우리가 말을 할 때 '그녀'라고 하지는 않는다. '여자분'이라고 한다. 말할 때조차 쓰지 않는데 대명사를 굳이 글에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장인용, 이름이 낯익어 찾아보니 3년 전 동양화 그림을 감상하듯 읽은 <동양화 도슨트>의 저자였다. 30여 년 동안 출판 일로 글을 다루며 살다 보니 어원에 관심이 생겼다고 한다. 말에 새겨진 흔적과 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롭기도 했고. <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는 세상 모든 것에 시작이 있듯 말의 시작 그리고 그 변화에 담긴 단어의 사연을 담아놓은 책이다.

'그래서 이러한 옛 언어들을 알면 지금 쓰이는 낱말들의 의미가 분명하게 다가온다. 우리말도 다르지 않다. 한국어에는 한자어로 된 낱말들이 무척 많다. 이 책의 저자는 여기에 더해 우리말에 묻어 있는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거란어의 흔적을 맛깔스럽게 들춰낸다. 곳곳에 살아 있는 일본어의 자국들, 점점 우리 언어 습관에 진하게 파고드는 영어식 표현에 이르기까지, 책을 따라가다 보면 무심코 쓰던 말들의 사연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추천의 글, 안광복 <A4 한 장을 쓰는 힘> 저자)'


'회사'가 자본주의 가깝다면 '공사'는 왠지 사회주의 느낌이 나듯 말은 번역한 주체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진다. 꽃 모양이 제비를 닮은 '제비꽃'처럼 식물에 생김새가 비슷한 동물 이름을 붙이면 친근한 꽃 이름이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국토를 강점한 일본인으로서 가장 골치 아픈 일은 무수히 남아 있는 우리말 지명이었다. 식민지 지배자들은 이들 지명을 난폭한 방법으로 바꿔버렸다. 이름에 스민 정감과 기억들은 어찌 돼도 상관없고 그저 자신들이 편하게 표시하고 기록할 수 있으면 되었다. (p. 162)'

아름답고 부르기도 좋은 마을 이름을 한자 지명이 가려버리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그 경우다. 양수리가 돼버렸다. 냇가 돌덩이 아래 가재가 살던 동네 '가재골'은 '가좌'로, '숯고개'는 '탄현'으로, '살구골'은 '행촌'으로 바뀌었다.

삼국시대에 들어온 불교 영향으로 불교 용어들을 곳곳에서 쓰지만 불교에서 유래된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 단어도 있다. 원래 '점심'은 수도승이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지만 배가 고플 때 중간에 음식을 조금 먹어 허기를 누그러뜨리는 일이었다. 기독교의 핵심 용어인 '교회', '예배', '설교', '찬송', '기도', '신앙' 무려 여섯 단어가 불교에서 유래했다는 것도 놀랍다.


'말이란 우리의 생각을 반영하는 도구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관념을 가지기 전에는 그에 해당하는 말도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서양의 과학을 받아들이고 세계관이 바뀌면서 예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개념이나 관념들이 생겨나자 그에 따라 새로운 말을 만들어낼 필요가 생겨났다. (p. 256)'

마르틴 하이덱거에 따르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 언어의 집에 우리들이 산다. 우리가 단어를 만든 것 같지만 사실 단어들이 우리들의 주인이다.' 그러고 보면 새로운 말을 만들어낼 필요에 따라 우리가 단어를 만들었다기보다 단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진화하는 생명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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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초 과학 - 과학 커뮤니케이터 리아 엘슨의 엉뚱하고 기괴한 과학 실험 103
리아 엘슨 지음, 조은영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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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의 알을 품은 에디슨. 어릴 때 위인전에서 이 에피소드를 읽고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면 나도 발명왕이 될 수 있는 건가?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했었다. 네 살 에디슨은 자기 체온으로 병아리를 알에서 깨어나오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본 에디슨 부모의 반응이 서로 달라 재밌다. 에디슨의 아버지는 영리하지 못한 아이라는 여겨 걱정한 반면 어머니는 오히려 영리한 아이라고 생각했단다. 하여튼 어린 나는 위인전에서 호기심의 위대함을 배웠다.


미국의 인기 과학 커뮤니케이터, 리아 엘슨도 에디슨 못지않은 호기심이 가득했던 모양이다. 호기심에 다양한 질문을 생각했고 무모하다 싶은 정도로 대담한 실험을 SNS 라이브로 방송했다. 크리스마스 전구를 전자레인지 넣고 돌려보기도 하고, 욕실에서 2단계 로켓 엔진 모형을 만들다가 샤워커튼을 태워먹기도 했다.

<60초 과학>은 우리들이 궁금해하는 질문 가운데 103가지를 골라 생물, 화학, 물리, 인체, 우주라는 5가지 카테고리 나누어 실어놓았다. 우리가 궁금해하는 질문들이 시시하다 싶지만 결국 과학적 설명으로 이어져 심오한 답변이 돼버린다.

'남자 젖꼭지에도 기능이 있을까?' 자궁 속 아기의 발생 과정에서 남녀 특징이 생각보다 늦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남자, 여자 어느 쪽이 될 수도 있으니 미리미리 갖춰 놓은 결과가 남자 젖꼭지인 셈이다.

건강검진할 때 피를 뽑는다. 알코올 솜을 주삿바늘 자국에 누른 상태에서 비비며 있으라고 알려준다. 그래야 상처 부위가 덧나지 않기 때문이다. '알코올로 문지르면 과연 병균이 죽을까?' 문지르면 기게적인 힘이 가해져 알코올 분자가 미생물 막을 깨고 들어가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알코올 분자가 미생물 단백질 구조를 훼손하고 형태를 바꿔버리는 이런 현상을 과학에서 '변성'이라고 한단다.

'달에서 깃털과 볼링공을 떨어뜨리면 땅에 동시에 닿을까?' 1971년 달 표면을 밟은 아폴로 15호 사령관 데이비드 스콧이 암석 채취용 망치와 깃털을 들고 실제도 달에서 실험했다. 꼭 유튜브 영상을 찾아서 보시길. 수백 년 전 갈릴레오가 예측한 대로 증명됐을지...

'겨드랑이 털은 왜 그렇게 짧고, 머리카락을 왜 계속 자랄까?' 체모는 생장 기간은 몇 달에 불과하지만 머리카락은 수년이 지나야 생장을 멈추기 때문이다.

'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없을까?'
'시간 팽창이란 당신이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할수록 당신에게 시간이 상대적으로 더 느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 때 상대적인 시간은 서서히 느려지다가 멈추는 것이죠. (p. 293)'

리아 엘슨이 동쪽을 공간으로 북쪽을 시간으로 대체해 시간 팽창을 자신의 모습처럼 매력적으로 설명하는데... 음... 잘 모르겠다. 리아 엘슨도 여러 번 읽어야 불현듯 이해하는 순간이 올 거라고 말하긴 한다. ㅋㅋ


어릴 때 해를 바로 쳐다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럴수록 호기심 생겼다. 두 눈을 부릅뜨고 해를 똑바로 바라봤다. 얼마 못 참고 눈을 감았다 떴는데 앞이 보이질 않았다. 덜컥 겁이 났었다. 실명한다는 소리도 같이 들어서였다.

호기심에 남몰래 엉뚱한 짓 한 가지쯤은 해 본 적 있을 테지? "에구~ 저런저런~" 이런 소릴 들을까 봐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털어놓아보시길...

'인류 역사에서 끝없는 호기심이야말로 현재까지 세계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끌어낸 발견의 원동력이었으니까요. (p.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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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찰리 맥커시 지음, 이진경 옮김 / 상상의힘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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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둘러보면 공기가 참 거칠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시대가 있었을까 싶다. 혼잣말로 또는 서너 명이 모여서 할법할 말을 광장에 나와서 마이크를 앞에 두고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 심지어 사랑을 전하는 목회자라는 자들이 정치인보다 앞장서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외친다. 죽여야 한다고. 휩쓸어버리고 파괴해야 한다고.

친절한 말을 했으면 좋겠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이건 내가 맘먹으면 할 수 있으니까.

이 세상에 우리가 건사해야 할 아름다움이 아주 많다면서 두더지가 소년에게 말을 이어간다.
'"자신에게 친절한 게 최고의 친절이야." 두더지가 말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은 언어의 바다를 통과해야 닿을 수 있는 섬과 같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 찰리 맥커시의 그림 에세이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은 소년이 두더지, 여우, 말과 나누는 대화 글은 적지만 우리가 생각할 것들을 많이 안겨주는 책이다.

우리네 삶처럼 소년은 외롭다. 세상은 마치 거친 들판 같아 두렵다. 하지만 소년과 다른 그리고 각자 약점을 가진 동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무엇이 중요한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는다. 마치 인생의 황혼에 들어서서야 아름다운 노을이 눈에 들어오듯이.


'"난 아주 작아." 두더지가 말했어요.
"그러네." 소년이 말했지요.
"그렇지만 네가 이 세상에 있고 없고는 엄청난 차이야."'

두 달 전 친구를 잃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친구가 있던 세상과 그 친구 없던 세상은 많이 달랐다. 그 친구의 표정, 말투, 몸짓이 그 친구가 있을 때보다 더 선명해졌다.

작가는 이 책을 우정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 우정? 글쎄. 책장을 다시 펼쳐보니 우정에 관한 책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친 세상을 외롭게 혼자 걸어갈 뻔했는데 친구들이 있었기에 순간순간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난 친구와 같이 했던 시간, 나눴던 이야기, 함께 웃으며 기뻐했던 순간. 이제 남은 친구들과 나머지 내 삶을 아름답게 채워가야 한다.

'"네가 했던 말 중 가장 용감했던 말은 뭐니?" 소년이 물었어요.
"'도와줘'라는 말." 말이 대답했습니다.'

그리 용기 내지 않고도 '좀 도와줄래?'라는 말을 건넬 수 있는, 친구들. 그런 친구들이 곁에 있어 삶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도움을 청하는 건 포기하는 게 아니야." 말이 말했어요.
"그건 포기를 거부하는 거지."'


그리고 또 하나의 바람. 제발 친절함이 우리가 마주한 이 거친 사회를 압도해 주길...
'"어떤 것도 친절함을 이길 수 없어." 말이 말했어요.
"친절함은 조용히 모든 것을 압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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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이야기 중국 신화
김선자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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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 우리 인간의 언어가 진화했다. 우리 언어의 독특한 측면 가운데 하나가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 허구 덕분에 단순한 상상을 넘어 집단적 상상을 하기까지 이르른다. 대표적인 집단적 상상으로 신화를 꼽을 수 있다. 그 신화 때문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우리는 신화에 기반을 둔 채 살아간다. 신앙, 국가, 기업, 법 등, 이 모두가 인류가 지어낸 상상의 결과물이다. 상상이라는 신화 밖에서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상상은 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어떻게 이 땅에 태어나게 됐을까?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와 산은 또 어떻게 만들어졌고. 동물은 나무는? 왜 비가 오고 덥고 춥고 천둥 번개가 칠까?

'머나먼 옛날, 고대인들은 세상이 이렇게 만들어진 이유를 찾아 헤맸다. 왜 인간의 머리 위에는 하늘이, 발아래는 땅이 있을까? 새벽의 하늘은 왜 붉은색일까? 해가 하나뿐인 이유는 뭘까? 이들은 자신이 가진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그 대답을 만들었다. (책날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맘껏 상상하고 서로 주고받으면서 멋지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완성해 간다. 스토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허점이나 더 재미있는 상상이 있으면 더하고 빼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매혹적인 신화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신화학자 김선자의 <처음 읽는 이야기 중국 신화>에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에서 살아온 56개 민족 신화를 담았다. 한족 중심의 신화를 다룬 중국 신화학의 대가 위안커의 책에 소수민족의 신화를 보충했다.

신화가 집단 상상의 결과여서인지 어떤 신화를 읽더라도 익숙하다. 이를테면 태초는 질서가 없는 혼돈 상태였다. 신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든지 인간이 오만하게 굴때 대홍수로 심판하는 등등은 여러 신화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다.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쳐 끝없는 고통 속에 갇힌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있다면 중국 신화에는 인간을 홍수로부터 구하기 위해 천제의 보물인 신비로운 흙, 식양을 훔쳐 죽은 고집불통 곤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전쟁하듯 중국 신화의 신들도 전쟁한다. 탁록들에서 벌어진 황제와 치우의 전쟁을 가장 웅장하고 장엄하다. 비와 바람의 신, 비를 부르는 응룡, 불덩어리 여신 발, 온갖 도깨비와 귀신, 무시무시한 동물 등이 총동원된 전쟁이다.


이 책 10부에서 '세상 밖의 세상'을 다루는데, 가히 상상력의 끝판왕 신화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우주 생명체를 상상해 만들어내듯 아득히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은 산 너머 강 건너에 살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상상했다.

대인국, 소인국은 상상의 디폴트고 검은 이를 가진 흑치국, 구미호의 나라 청구국, 늘 바쁜 워커홀릭의 나라, 외다리들의 나라, 후손이 없는 나라, 걸음이 빠른 하루에 천리를 가는 사람들의 나라, 팔, 다리, 눈과 콧구멍이 하나인 일비국, 여자들만 사는 여자국, 남자들만 사는 장부국, 머리가 없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영원히 사는 사람들의 나라, 다리가 얽혀 있는 사람들의 교경국, 혀가 갈라진 사람들의 나라, 머리만 따로 이리저리 날아다니게 할 수 있는 사람들, 발이 거꾸로 붙은 사람들, 장이 없는 사람들이 나라 무장국 등등.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책을 덮고 상상해 보는 일도 즐겁다. 예를 들면 후손이 없는 나라가 어떻게 가능할까. 죽지 않으면 된다. 무계국 사람들은 죽은 후 120년이 지나면 되살아난다. 죽음은 조금 긴 잠에 불과하다.

'내가 좋아하는 빛깔만이 세상 전부가 아니라는 것, 원색의 세상도 파스텔 조의 세상도 모두가 세상을 구성하는 일부라는 것, 그 다양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가슴이 바로 신화를 읽으면서 우리가 덤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p. 695)'

또 어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있을까? 그 사람들과 같이 산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이야기로 수다떨기 위해 우리 언어는 진화했다. 상상하고 그 상상한 신화와 같은 이야기로 수다 떨고. 수다,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래서 우리는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혼자 수다 떨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모두가 '챗GPT'와 '딥시크'를 말하는 시대입니다. AI는 차가운 기계음으로 우리의 물음에 대답해 주기도 하지요. 그러나 모두가 손에 스마트폰을 하나씩 들고 있고 궁금한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순식간에 얻어낼 수 있는 지금,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외로움을 느낍니다. 이럴 때 고대인의 소박한 상상의 세계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모든 것이 너무나 세련되어 숨 막히게 느껴지는 지금, 다듬어지지 않은 중국 신화의 투박한 이야기 세계가 어쩌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따뜻한 신들의 '장소'가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p.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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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과 생각
정용준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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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을 긋는다. 책을 다 읽은 다음, 밑줄 친 글만 다시 읽으려는 까닭이다. 밑줄 친 글 옆에 생각을 적어 넣지는 않는다. 밑줄까지만... 내가 책에 허용하는 범위다. 그렇지만 생각을 적어가며 책 읽는 사람과 그 책은 부러워한다.

'한 줄의 문장. 그 밑에 그은 한 줄의 밑줄. 그 곁으로 여러 생각들이 만들어지는 책이 되었으면 합니다. (p. 6)'

정용준 작가도 밑줄을 긋는다. 좋아서. 그런 다음 생각에 잠긴다고 한다. 밑줄은 문신처럼 흉터로 남아 삶에 일부가 된다고 고백한다. 밑줄은 '저자와 악수하고 인물과 포옹하고 이야기가 연결되는 느낌 (p. 6)'을 작가에게 준다.


정용준 작가 글이 좋았던 건, 내가 가진 하지만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생각을 다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생각에 내 생각을 더할 수 있어 더 좋았다.

'지금 느끼고 있는 경험과 감정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것에는 아직 이름이 없다. (p. 83)'

사랑이 그렇다고 밑줄 그으며 생각했다. 정용준도 이를 가장 실감하는 건 사랑이라는 경험이라고 바로 아랫줄에 써 놓았다. 사랑하는 동안엔 그게 사랑이라는 걸 모른다는 것 때문에 사랑이 아프고 잔인하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은 또 어떤가.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별은 합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하며, 감정이 소진되지 않은 상태로 끝을 내야 한다. 한쪽이 원해도 다른 한쪽이 원하지 않을 수 있고, 한쪽은 다시 만나고 싶어도 한쪽은 만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며, 둘 다 원치 않아도 이별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 (p. 86)'

그래서 얻은 깊은 상실감, 이것 때문에 몇 년 동안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난 후에는 이별이 없어서, 감정이 종료되지 않아 이름을 따로 붙이지 못하고 있다. 이것도 사랑인가? 싶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불편한 이유도 알게 됐다.
'울어야 할 때 울지 않는 것. 자신의 행동을 납득되게 설명 못하는 것. 살려고 애쓰지 않는 것. 그게 나쁜가? 분명 유죄인데 죄가 아닌 것 같은 불편함의 정체는 무엇이지? (p. 277)'

가끔 이럴 때가 있다. 주변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싶다. 그것이 나다운 실존인 걸 알지만, 내 삶을 누리는 자유라는 걸 알지만, 소외될까 두려운 마음에 다시 위선과 허위라는 옷을 입고 뫼르소를 꺼림직한 눈으로 바라본다. 사실을 말하고 진실을 주장하는 뫼르소가 불편한 이유다.


여러 색깔의 사랑을 알고 있는 이승우 작가가 좋다. 정용준 작가에게 이승우는 이렇다. (같은 작가를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만나 너무 좋다.)
'작가에게 소설을 배웠다. 만약 소설이 배워서 쓸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소설 쓰기의 거의 모든 것을 그에게 배운 셈이다. 지금은 선배 작가의 모습을 통해 여전히 배우고 있다. 그런데 그 배움이 크기가 너무 커서 담아지지 않는다. (p. 335)'

이승우의 <사랑이 한 일>을 읽고 생각했다. 뭐지? 달싹달싹 입끝에 맴도는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생각. 찾았다. 축복을 뺏긴 에서를, 사라에게 쫓겨난 하갈을 그리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에 맞닥뜨린 사람들, 이들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던 건 이 모든 게 '사랑이 한 일'이라고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사랑은 아픔을 줘 상처를 낼 수도 있다. 이해해 달라. 그래도 '사랑이 한 일'임을.


작가의 일이다. 소설을 써 사랑이 한 일을 알려주는 것. 신과 인간 사이에 서 있는 사제와 같은 사람이 작가다. 신도 사랑하고 인간도 사랑하고, 신의 뜻도 인간의 기도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작가는 안다.
'때로는 변호하는 것이, 우기고 또 우기는 것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아이처럼 떼쓰는 것이, 태양을 멈추고, 운명을 바꾸고, 신의 마음을 돌이키기도 한다는 것을. (p. 331)'

정용준 작가가 이승우 작가에게 한 말을 나도 정용준 작가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소설을 써줘서 고맙다.'
계속 소설을 읽고 소설을 써 내가 생각해 내지 못한 표현을 만나게 해주길, 내가 소설을 읽고 불편해할 때 그 이유를 설명해 주기를 그리고 사랑이 한 일을 내가 오해하지 않도록 나를 가로막고 서서 알려주기를. 그리고... 언어의 집에서 계속 눌러 앉아 살기를...

'빛으로 어둠을 물리치고 언어로 존재를 만드는 신의 방법. 창조를 모방한 창작. 그는 촛불을 켜고 노트를 펼친다. 한 문장, 한 문장, 벽돌을 쌓아 올린 언어의 집. 그는 거기에 살기로 결심했다. (p.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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