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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이야기 중국 신화
김선자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2월
평점 :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 우리 인간의 언어가 진화했다. 우리 언어의 독특한 측면 가운데 하나가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 허구 덕분에 단순한 상상을 넘어 집단적 상상을 하기까지 이르른다. 대표적인 집단적 상상으로 신화를 꼽을 수 있다. 그 신화 때문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우리는 신화에 기반을 둔 채 살아간다. 신앙, 국가, 기업, 법 등, 이 모두가 인류가 지어낸 상상의 결과물이다. 상상이라는 신화 밖에서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상상은 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어떻게 이 땅에 태어나게 됐을까?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와 산은 또 어떻게 만들어졌고. 동물은 나무는? 왜 비가 오고 덥고 춥고 천둥 번개가 칠까?
'머나먼 옛날, 고대인들은 세상이 이렇게 만들어진 이유를 찾아 헤맸다. 왜 인간의 머리 위에는 하늘이, 발아래는 땅이 있을까? 새벽의 하늘은 왜 붉은색일까? 해가 하나뿐인 이유는 뭘까? 이들은 자신이 가진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그 대답을 만들었다. (책날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맘껏 상상하고 서로 주고받으면서 멋지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완성해 간다. 스토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허점이나 더 재미있는 상상이 있으면 더하고 빼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매혹적인 신화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신화학자 김선자의 <처음 읽는 이야기 중국 신화>에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에서 살아온 56개 민족 신화를 담았다. 한족 중심의 신화를 다룬 중국 신화학의 대가 위안커의 책에 소수민족의 신화를 보충했다.
신화가 집단 상상의 결과여서인지 어떤 신화를 읽더라도 익숙하다. 이를테면 태초는 질서가 없는 혼돈 상태였다. 신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든지 인간이 오만하게 굴때 대홍수로 심판하는 등등은 여러 신화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다.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쳐 끝없는 고통 속에 갇힌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있다면 중국 신화에는 인간을 홍수로부터 구하기 위해 천제의 보물인 신비로운 흙, 식양을 훔쳐 죽은 고집불통 곤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전쟁하듯 중국 신화의 신들도 전쟁한다. 탁록들에서 벌어진 황제와 치우의 전쟁을 가장 웅장하고 장엄하다. 비와 바람의 신, 비를 부르는 응룡, 불덩어리 여신 발, 온갖 도깨비와 귀신, 무시무시한 동물 등이 총동원된 전쟁이다.
이 책 10부에서 '세상 밖의 세상'을 다루는데, 가히 상상력의 끝판왕 신화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우주 생명체를 상상해 만들어내듯 아득히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은 산 너머 강 건너에 살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상상했다.
대인국, 소인국은 상상의 디폴트고 검은 이를 가진 흑치국, 구미호의 나라 청구국, 늘 바쁜 워커홀릭의 나라, 외다리들의 나라, 후손이 없는 나라, 걸음이 빠른 하루에 천리를 가는 사람들의 나라, 팔, 다리, 눈과 콧구멍이 하나인 일비국, 여자들만 사는 여자국, 남자들만 사는 장부국, 머리가 없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영원히 사는 사람들의 나라, 다리가 얽혀 있는 사람들의 교경국, 혀가 갈라진 사람들의 나라, 머리만 따로 이리저리 날아다니게 할 수 있는 사람들, 발이 거꾸로 붙은 사람들, 장이 없는 사람들이 나라 무장국 등등.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책을 덮고 상상해 보는 일도 즐겁다. 예를 들면 후손이 없는 나라가 어떻게 가능할까. 죽지 않으면 된다. 무계국 사람들은 죽은 후 120년이 지나면 되살아난다. 죽음은 조금 긴 잠에 불과하다.
'내가 좋아하는 빛깔만이 세상 전부가 아니라는 것, 원색의 세상도 파스텔 조의 세상도 모두가 세상을 구성하는 일부라는 것, 그 다양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가슴이 바로 신화를 읽으면서 우리가 덤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p. 695)'
또 어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있을까? 그 사람들과 같이 산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이야기로 수다떨기 위해 우리 언어는 진화했다. 상상하고 그 상상한 신화와 같은 이야기로 수다 떨고. 수다,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래서 우리는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혼자 수다 떨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모두가 '챗GPT'와 '딥시크'를 말하는 시대입니다. AI는 차가운 기계음으로 우리의 물음에 대답해 주기도 하지요. 그러나 모두가 손에 스마트폰을 하나씩 들고 있고 궁금한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순식간에 얻어낼 수 있는 지금,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외로움을 느낍니다. 이럴 때 고대인의 소박한 상상의 세계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모든 것이 너무나 세련되어 숨 막히게 느껴지는 지금, 다듬어지지 않은 중국 신화의 투박한 이야기 세계가 어쩌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따뜻한 신들의 '장소'가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p.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