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로하는 애벌레 - 한없이 낯선 세계가 우리에게 전하는 아주 오랜 지혜
이상권 지음, 이단후 그림 / 궁리 / 2022년 12월
평점 :
1970년대 초등학교 시절에 벌어진 내 기억의 한 풍경이다. 준비물은 한 쪽 끝에 솜을 칭칭 감아 묶은 막대기와 깡통이었다. 그걸 들고 학교 뒤 민둥산(그땐 산에 나무가 귀했다)에 올라갔다. 석유통에 솜뭉치 막대기를 들이밀어 석유를 묻히고 송충이를 찾아 막대기를 갖다 대면 송충이는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깡통에 송충이가 수북해지면 선생님께 검사를 받고는 구덩이에 털어 화형식을 거행하곤 했다.
'그러니까 숲에서 살아가는 것들 눈으로 보면, 제가, 우리가, 당신들이 해충이자, 악의 축인 것입니다. (p. 76)'
알고 보니 그 송충이가 매미나방 애벌레였다. 왜 죽였을까? 그때 나는 이유를 몰랐다. 죽이라고 하니 죽였다. 누군가가 하라고 하면 아무 생각 없이 하던 암울한 시대였다. 초가집도 막 없애고, 마을 길도 막 넓히고.
흉측하고 징그럽게 생겼으니 죽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혐오스러움조차 인간 입장에서 일방적 생각이다. '당신들만 빼고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p. 68)'
작가 이상권의 글과 그림 그리는 그의 딸 이단후의 그림이 담긴 <위로하는 애벌레>는 주홍박각시 애벌레, 대왕박각시 애벌레, 매미나방 애벌레, 가중나무고치나방 애벌레, 맵시곱추밤나방 애벌레, 반달누에나방 애벌레, 거세미나방 애벌레, 현무잎벌 애벌레, 차주머니나방 애벌레, 참나무산누에나방 애벌레, 큰빗줄가지나방 애벌레, 유리산누에나방 애벌레, 열두 종 애벌레에 대한 서사시다.
'환상적이면서도 수다스럽고, 그러면서도 영원 같은 애벌레의 침묵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p. 5)' 초대에 응하면 징그러운 애벌레가 사랑스러워진다.
작가의 글답게 묘사하는 글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자연과 애벌레의 일상이 이토록 아름답다.
'그의 몸속에는 푸른 봉숭아 이파리를 발효시켜서 걸러낸 물감을 보관하는 소중한 항아리 하나가 숨겨져 있다. 나방이 애벌레였을 때 봉숭아 잎을 모으고 또 모아, 보이지 않는 분홍빛을 모으고 또 모아, 그 항아리에다 숙성시키고 또 숙성시켰다가 저토록 아름다운 옷감을 만들어낸 것이다. 색이 아름다울수록, 그가 애벌레였을 때 열심히 살았다는 뜻이다. (p. 29, 30)'
'집 안에는 빛이 존재하지 않아 색을 찾아볼 수 없고,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시간만이 흐르고 있다. 완벽한 침묵이다. 침묵의 뿌리는 살아온 생 전체를 전복시키는 것, 새로운 환생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침묵은 도발적이고도 무겁다. (p. 242)'
작고 한없이 낯선 애벌레의 세계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삶에 적용할 지혜를 전해준다. 저항하면서 이기려는 삶이 아닌 그냥 버티어내며 살라고.
가볍고 자유로운,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는, 침묵하는, 두려움을 인정함으로 두려움을 떨쳐내는,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는 그런 지혜를...
'쭈글쭈글 물렁물렁 애벌레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항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버티기만 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저항하면서 이기는 게 아니라 그냥 버티어내는 것임을 애벌레는 잘 알고 있다. 이럴 땐 꿈틀거려도 안 된다. 그냥 버틸 뿐이다. (p. 33)'
'벌레는 아무런 저항을 못한다. 벌레의 유일한 무기는, 살아 있음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꿈틀거리는 것... (p. 185)'
애벌레의 변신은 놀랍다. 모든 것이 다 바뀐다. 얼굴, 몸 구조, 심장의 위치, 뇌의 위치까지 모두 다. 그렇게 애벌레의 삶을 살고, 미라의 삶을 살고, 마지막 세 번째의 삶이 가장 화려하다. 나방이 되어 형형색색의 날개 한껏 펴 팔랑팔랑 날갯짓하며 날아간다.
애벌레, 미라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기만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는 애벌레의 생애다.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부모, 학교, 태어난 곳 따위의 조건에 따라 꿈을 이루지 못할 때가 종종 있지만, 나방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하는 애벌레는 없다.
애벌레가 징그럽고 혐오스럽다고? 그냥 우리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고 작가는 말한다. 편견을 버리고 용기를 내어 애벌레에게 다가가보자. 말을 걸어보자. 그러면 애벌레는 이렇게 말을 걸어온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에서 잠깐 쉬겠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애벌레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내다보았을 때는 내가 궁금한 것이고, 쏙 들어갔을 때는 내가 두려운 것이고, 집을 끌고 움직일 때는 배가 고파서 가는 것이고, 실로 집을 매달아두었을 때는 쉬는 것이다. 일단 그 정도로 애벌레의 말을 알아들었다. (p. 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