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도어 프라이즈
M. O. 월시 지음, 송섬별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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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러니까 과학이라든지 신이라든지, 당신이 믿는 무언가가 정해준 시간에 해가 뜨는 어느 날, (...) 당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게 되리란 사실을 당신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이토록 기분 좋고 안전한데, 당신한테 또 다른 인생이 있다는, 어쩌면 당신 안에 이미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할 이유가 있을까? (p. 15, 첫 문장)'


휘파람을 잘 부는 선생 더글러스와 그의 아름다운 부인 세릴린. 아이는 없지만 이들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존경하고 부러워할 만큼 완벽한 부부다. 시장 행크는 쌍둥이 아들 중 큰 아이를 사고로 잃었다. 행크의 쌍둥이 아들 제이컵은 형의 죽음에 뭔가 비밀이 있음을 직감한다. 신부 피트는 골칫거리 조카 트리나에게 항상 마음이 간다. 듀스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세릴린에게 마음이 있다.

루지애나의 작은 마을 디어필드. 이곳에 사는 사람 누구도 디어필드 외에 아무 데도 가보지 않았고. 이곳은 대체로 거의 고통스러울 만치 고요하다. 마을 사람들은 함께 자라온 만큼 서로 잘 알고 아주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간다.


'이 기계는 과학적인 방식으로 DNA를 측정해 당신 인생의 가능성, 그리고 당신의 신체와 정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알려준다고 한다. (...) 게다가 값은 고작 2달러다. (p. 17)'

어느 날, 식품점에 누구도 의식하지 못한 채 디엔에이믹스를 누군가 갖다 놓았다, 단순하게 생긴 이 기계 하나로 디어필드는 모두 것이 이전과 달라진다.

마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을 아는 것이 두렵다. 최악일까? 최선일까? 두렵기는 하지만 궁금하다. 최악이래봤자지... 만약 최선이라면?


'하지만 때때로는 깜깜한 곳에 있다가 커튼을 내리고 테이프로 고정한 뒤, 깜깜한 곳이 더 깜깜 해질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다. (p. 90)' 이런 이유로 기계에 2달러를 넣는다.

더글러스의 아내 세릴린의 새로운 인생은 '왕족'이다. 세릴린은 왕족이 된 자신을 꿈꾼다. 왕족이 된 것만 같다. 디엔에이믹스가 알려준 미래에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더글러스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휘파람 부는 사람. 교사.' 더글라스는 디엔에이믹스를 믿을만한 가치가 없는 기계라고 여긴다.

더글러스처럼 미래가 지금과 마찬가지라면 알려준 미련이 없겠지만, 현실에 불만이 있고 더 나은 미래를 알게 됐다면 세릴린처럼 현재의 나를 부정하고 미래에 기대를 걸게 된다. 기계가 뱉어낸 종이 쪼가리가 힘을 가진다. 나의 인생이 정해졌다는 터무니없는 말이 미래를 지배한다.


기계가 근사하지 않아도 된다. 테스트 결과가 말이 안 돼도 상관없다. 현재의 자신이 아닌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세릴린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서로의 믿음이 깨지면서 부부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일상도 달라진다.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고 결정된 미래를 포장하고 싶은 마음을 끄집어낸 기계 때문이다.

'부엌을 둘러보았다. 평소라면 지금은 와인 타임, 아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어야 했다. 아니, 그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아내가 그와 함께 삶을 살아가는 시간이었다.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는 시간. 하지만 오늘은 아내가 없었다. (p. 416.)'


가능성은 여지가 있어 설레지만 두렵기도 하다. 최선의 삶이 있다면 마음이 끌리게 된다. 희미하던 잠재된 나의 능력이 뚜렷해진다면 더욱더 그 삶에 자신감이 생긴다. 하지만 현재의 익숙한 삶이 뒤집힐 수도 있어 주저하게 된다.

내 앞에 디엔에이믹스가 놓여 있다면? 2달러를 넣을지 말지... 선택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분명 또 다른 인생의 가능성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더글러스와 세릴린은 그동안 기대를 접었던 아이를 얻으면서 지금의 삶을 선택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가 고민했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할까 하는 질문은 뒤로 물러나고 새로운 질문이 그 자리를 채웠다. 나는 나를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은가? (p. 494)'


소설의 마지막에 들어서면서 미스터리 소설답게 디엔에이믹스를 둘러싼 비밀 반전이 있다. 누가, 왜 기계를 갖자 놓았는지.. 테스트지의 적힌 결과는 어떻게 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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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사회학적 읽기 - 우리는 왜 그 작품에 끌릴까
최샛별.김수정 지음 / 동녘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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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시대적, 사회적 요소에 따라 조건 되고 결정됨으로 예술에서 그 당시 사회에 대해 무언가를 읽기가 가능하다. 반면 예술은 사회에 영향을 끼쳐 변화시킨다.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생산된다.

'예술사회학은 간단히 말해 예술을 사회학적으로 읽어내는 학문이다. (...) 사회학은 예술을 포함해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사회현상들과 사회문제들을 다채로운 시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며, 그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학문이다. 역사적으로 오랜 발전 과정을 거치며 독자적인 이론과 방법론을 확립해온 사회학은, 예술에 대해서도 다른 학문들과 구분되는 독특한 시각을 견지한다. (p. 38)'

예술사회학의 가장 큰 매력은 보이지 않거나 보지 못하던 것을 보는 힘이다.


그렇게 먼, 범접하기 어려운 곳에서 고고한 빛을 발하던 예술이 어느덧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산다. 그건 이제 예술을 보고 읽어야만 하는 시대를 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술의 사회학적 읽기>는 생소하기만 했던 예술사회학의 기초적인 이론과 다양한 이슈를 재미있는 사례를 제시하며 편안하게 설명한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영웅 유디트, 예술 작품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연약한 여성, 성녀 또는 요부이다.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권력을 허락하지 않는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분위기가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바그너의 음악과 레니 리펜슈탈의 영상 미학은 히틀러와 인연을 맺어 정치적으로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다.

브뤼디외는 예술 소비 취향으로 사회 계급을 구분하기도 한다.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소비하는 상층계급은 작품에 담긴 의미, 화풍, 역사적 사건과 배경 등을 중요시한다. 이들의 취향은 타고난 것이다.

르누아르의 <두 자매>를 좋아하는 대중적 취향의 하층계급은 즉각적인 만족을 주며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이 쉽게 몰입하는 작품을 선호한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상층계급과 하층계급의 중간적 성격을 띤 중간계층 취향의 작품이다. 이들은 상층계급 취향을 추구하는 반면 하층 계급의 취향과는 거리를 두려고 한다.

'취향을 매개로 유유상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포섭과 배제의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부르디외는 이를 사회 계급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투쟁, 혹은 '구별 짓기'라고 설명한다. (p. 274)'

지금 젊은 세대들의 예술 소비는 좀 다르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소비가 아닌 생산으로 만들어낸다. 포스팅이란 방식으로 감상(소비)을 '나를 표현하는 수단(생산)'으로 활용한다.


<예술의 사회학적 읽기>는 예술과 사회를 함께 읽을 것을 제안한다. 예술의 이면을, 숨겨진 의미를, 비밀을 보기를 권한다. 예술을 만드는 데 무엇들이 작용했는지를, 각자의 방식으로 예술을 읽는 방법을 알려준다. 예술을 이전과는 다르게 보도록 한다.

'모쪼록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예술이라는 매력적인 대상을 사회학이라는 한층 더 매력적인 학문적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기를, (p.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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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괜찮은 어른 -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 내게 던지는 인생의 질문들
김혜민 지음 / 시크릿하우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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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름을 하냐, 바람을 피냐, 돈을 안 벌고 놀기를 하냐. 남편으로서 뭐가 어때서 불만이냐?"
결혼 N년차 접어들었던 친구가 부부 싸움하다가 아내에게 한 말이다. '괜찮은 남편 아니야' 그런 의미인데, 그러네 '괜찮은 남편이네'라고 잠시 생각하다가 절친에게 한마디 했다.
"대한민국 남편 대부분 다 그렇지 않나? 그게 자랑거리인가?"

내가 그래도 괜찮은 남편이라고 말하려면 남들이 다 갖춘 기본은 물론이고 뭔가 하나가 더 필요하듯, 내가 어른임네 하려면 다른 어른보다 뭔가 내세울 만한 구석이 하나 더 필요하다.


21년 차 어른, YTN의 김혜민 PD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 자신에게 질문을 했다. 질문 끝에 찾은 어른으로서 갖춰야 할 태도 중 하나, 염치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8년 전 세월호, 지난해 이태원에서 벌어진 일을 대하는 우리 어른의 태도는 염치를 생각한다면 정말 할 말이 없다. 부끄러워 하기는커녕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니 말이다.

가끔 커나란 분노가 일어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곤 하는데, 이런 세상을 내 아이들에게 물려준다고 생각할 때다. 욕심 덩어리인 어른들, 그들이 우리 사회의 리더라 할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나는 '신독愼獨'을 마음에 품고 산다. 남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기본이고 자신에게조차 부끄러운 행동이나 마음을 갖지 않으려 노력하는 나의 의지를 나타내는 경구다. 신독愼獨.


지금보다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태도들,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는 진리 깨닫기, 상대방 존중하기, 비겁한 변경하지 않기, 사과하는 태도, 소명과 욕망 구분하기...

'어른이라면 '기다려 봐', '잘 되겠지'라는 비겁한 변명 따위는 집어넣고 행동해야 한다. (p. 91)'

김혜민 PD는 마흔이라는 어른의 문턱에서 좋은 어른이라 불리고 싶었고, 괜찮은 어른이 되려고 좋은 태도로 채워 나가고자 한다.


'어릴 때는 재미를 위해 모든 일을 선택하는데, 왜 어른이 되면 재미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까.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어른의 삶에서 재미를 찾는 것이 어렵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면 당연히 삶의 축을 '재미'보다 '의미'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미만 추구하는 어른에게는 철이 없다 흉본다. 대체 왜 어른은 재미보다는 의미가 더 값지다고 생각하는 걸까. (p. 42)'

김혜민 PD가 던진 질문들을 나에게 해보니, 나이만 먹었지 어른은 아니다. 어른은 되어가는 과정이라 위안을 삼을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내가 가진 많은 나이가 부끄럽다. 꼰대가 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이 정도면 그래도 내가 괜찮은 어른이라고 어쭙잖게 뽐내고 있지는 않은지.

"대한민국 대부분의 어른이 그 정도 노력은 하지 않나? 그 정도 가지고 자랑할 일인가?"
괜찮은 어른이 되려면 뭔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생각에 나는 '신독愼獨'을 다시 한번 마음에 품고 좋은 어른이 돼보려고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계절 중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즐길 수 있는 날들은 며칠 안 되는 것처럼, 한 사람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온한 날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어른이 힘을 기르는 과정이 아닐까. 책을 쓰면서 이런 우울함과 두려움까지 받아들이게 됐다. (p.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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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는 애벌레 - 한없이 낯선 세계가 우리에게 전하는 아주 오랜 지혜
이상권 지음, 이단후 그림 / 궁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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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등학교 시절에 벌어진 내 기억의 한 풍경이다. 준비물은 한 쪽 끝에 솜을 칭칭 감아 묶은 막대기와 깡통이었다. 그걸 들고 학교 뒤 민둥산(그땐 산에 나무가 귀했다)에 올라갔다. 석유통에 솜뭉치 막대기를 들이밀어 석유를 묻히고 송충이를 찾아 막대기를 갖다 대면 송충이는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깡통에 송충이가 수북해지면 선생님께 검사를 받고는 구덩이에 털어 화형식을 거행하곤 했다.

'그러니까 숲에서 살아가는 것들 눈으로 보면, 제가, 우리가, 당신들이 해충이자, 악의 축인 것입니다. (p. 76)'

알고 보니 그 송충이가 매미나방 애벌레였다. 왜 죽였을까? 그때 나는 이유를 몰랐다. 죽이라고 하니 죽였다. 누군가가 하라고 하면 아무 생각 없이 하던 암울한 시대였다. 초가집도 막 없애고, 마을 길도 막 넓히고.

흉측하고 징그럽게 생겼으니 죽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혐오스러움조차 인간 입장에서 일방적 생각이다. '당신들만 빼고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p. 68)'


작가 이상권의 글과 그림 그리는 그의 딸 이단후의 그림이 담긴 <위로하는 애벌레>는 주홍박각시 애벌레, 대왕박각시 애벌레, 매미나방 애벌레, 가중나무고치나방 애벌레, 맵시곱추밤나방 애벌레, 반달누에나방 애벌레, 거세미나방 애벌레, 현무잎벌 애벌레, 차주머니나방 애벌레, 참나무산누에나방 애벌레, 큰빗줄가지나방 애벌레, 유리산누에나방 애벌레, 열두 종 애벌레에 대한 서사시다.

'환상적이면서도 수다스럽고, 그러면서도 영원 같은 애벌레의 침묵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p. 5)' 초대에 응하면 징그러운 애벌레가 사랑스러워진다.


작가의 글답게 묘사하는 글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자연과 애벌레의 일상이 이토록 아름답다.

'그의 몸속에는 푸른 봉숭아 이파리를 발효시켜서 걸러낸 물감을 보관하는 소중한 항아리 하나가 숨겨져 있다. 나방이 애벌레였을 때 봉숭아 잎을 모으고 또 모아, 보이지 않는 분홍빛을 모으고 또 모아, 그 항아리에다 숙성시키고 또 숙성시켰다가 저토록 아름다운 옷감을 만들어낸 것이다. 색이 아름다울수록, 그가 애벌레였을 때 열심히 살았다는 뜻이다. (p. 29, 30)'

'집 안에는 빛이 존재하지 않아 색을 찾아볼 수 없고,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시간만이 흐르고 있다. 완벽한 침묵이다. 침묵의 뿌리는 살아온 생 전체를 전복시키는 것, 새로운 환생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침묵은 도발적이고도 무겁다. (p. 242)'


작고 한없이 낯선 애벌레의 세계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삶에 적용할 지혜를 전해준다. 저항하면서 이기려는 삶이 아닌 그냥 버티어내며 살라고.

가볍고 자유로운,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는, 침묵하는, 두려움을 인정함으로 두려움을 떨쳐내는,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는 그런 지혜를...

'쭈글쭈글 물렁물렁 애벌레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항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버티기만 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저항하면서 이기는 게 아니라 그냥 버티어내는 것임을 애벌레는 잘 알고 있다. 이럴 땐 꿈틀거려도 안 된다. 그냥 버틸 뿐이다. (p. 33)'

'벌레는 아무런 저항을 못한다. 벌레의 유일한 무기는, 살아 있음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꿈틀거리는 것... (p. 185)'


애벌레의 변신은 놀랍다. 모든 것이 다 바뀐다. 얼굴, 몸 구조, 심장의 위치, 뇌의 위치까지 모두 다. 그렇게 애벌레의 삶을 살고, 미라의 삶을 살고, 마지막 세 번째의 삶이 가장 화려하다. 나방이 되어 형형색색의 날개 한껏 펴 팔랑팔랑 날갯짓하며 날아간다.

애벌레, 미라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기만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는 애벌레의 생애다.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부모, 학교, 태어난 곳 따위의 조건에 따라 꿈을 이루지 못할 때가 종종 있지만, 나방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하는 애벌레는 없다.

애벌레가 징그럽고 혐오스럽다고? 그냥 우리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고 작가는 말한다. 편견을 버리고 용기를 내어 애벌레에게 다가가보자. 말을 걸어보자. 그러면 애벌레는 이렇게 말을 걸어온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에서 잠깐 쉬겠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애벌레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내다보았을 때는 내가 궁금한 것이고, 쏙 들어갔을 때는 내가 두려운 것이고, 집을 끌고 움직일 때는 배가 고파서 가는 것이고, 실로 집을 매달아두었을 때는 쉬는 것이다. 일단 그 정도로 애벌레의 말을 알아들었다. (p.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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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의 호시절
이강 지음 / 북드림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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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하나를 읽고 책장을 잠시 덮은 후 생각해 본다. 작가 이강이 간직한 추억과 비슷한 나의 기억들을...

우리 집 바로 위에 고모님이 사셨다. 학교에 다녀온 후 뒹굴뒹굴하며 지내던 고모님 댁. 그 위로 한 집 건너엔 솜틀집, 누런 솜이 새하얀 색으로 바뀌어 뭉게구름처럼 몽실몽실한 자태로 나타나는 게 너무 신기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던 곳이다. 그 위로는 방앗간. 국수를 널어놓은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국수 가락을 끊어 몰래 먹곤 했다.

길 건너 아래에는 대장간이 있었다. 조카뻘인 대장간 아저씨는 담금질하며 쇠를 다루는 모습을 넋 놓고 구경하는 나에게 아저씨 왔냐면 과자를 건네 주곤 했다. 우리 집 옆 건너편 학교 앞에는 하성당, 교문사문방구, 두 곳의 문구점이 있었는데 모두 친구네 집이어서 어느 곳을 이용하든지 눈치가 보였다. 사진관, 다방, 대소서, 장터... 지금도 동네 약도가 내 머릿속에 또렷하다.


책 겉장부터 개어서 쌓아놓은 이불과 베개의 선명하고 한국적인 색감이 인상적이다. 책에 담긴 이강 작가 작품에서 그리워하는 정서와 옛 마음이 느껴진다. <이강의 호시절>은 이강 작가의 어린 시절, 엄마가 차려주시던 밥상, 고향 이야기, 집의 나무들, 가족, 할머니 댁, 할머니표 먹거리에 얽힌 추억 이야기다.

'이 글 속에 담겨 있는 일상적인 사물들이 내 삶에 녹아 있는 철학이 되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p. 10)'

작가의 어릴 적 일상들과 서랍, 이불장, 찬장... 추억이 되어 작가가 힘을 발휘하도록 했다. 그리고 작가의 글은 우리에게 공감을, 위로를 건넨다.


'뒷마당에는 왜 그리 재미있는 것이 많을까? 바닥에 박힌 돌멩이 자국만 쳐다보면서도 한나절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p. 230)'

지난해 말, 아버님의 빈소를 지키며 누님 두 분과 어릴 적 이야기로 수다를 떨었다. 밤을 지새울 만큼이나 끊임없이 생각나는 에피소드들... 같은 일을 겪고도 각자의 기억에 남은 것들은 서로 다르다. 서로 우기며 깔깔거리다가도 끝내 눈시울을 적신다. 우리 형제들의 추억은 웃음으로 끝낼 수 없는 추억들이다.


내가 나의 호시절 70세대 레트로 감성을 불러냈듯이, 각자의 호시절, 80세대 또는 90세대의 레트로에... 젊다면, 자신들의 스타일로 뉴트로에... 취하길 원한다면 <이강의 호시절>을 읽고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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