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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하는 정신 ㅣ 소설, 향
한은형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11월
평점 :
'첫눈에 반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말이 사기라는 것을 나는 파도에서 배웠다. (...)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 너무 늦은 때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p. 9, 첫 문장)'
올봄 지인 찬스로 2박 3일 일정으로 양양을 갔었다. 서피 비치라는 곳을 알게 됐고 호기심에 찾아갔다. 우리나라에도 서핑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처음 알았다. 해변의 이국적인 풍경은 낯설었다. 더 이상 동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서피비치와 그리고 그곳에 있는 젊은이들과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멀리 떨어져 그곳과 그곳에 있는 이들을 쳐다만 봤다. 너무나 낯선 서핑과 나이 든 나, 간혹 너무 늦은 때라는 게 존재함을 나는 서피비치에서 배웠다.
작가정신의 '소설, 향 시리즈' 일곱 번째, 한은형의 <서핑하는 정신>은 다국적 스타트업 기업을 다니는 주인공 이제이의 서핑 도전기, 그리고 서핑 도전 과정에서 자신을 위로하며 진정한 나로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다.
바쁜 직장 일과 미치도록 무료한 일상 속에서 번아웃에 빠진 주인공은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7일간의 급행 휴가를 신청하고 양양으로 향한다. 갑작스럽게 죽은 큰이모는 유일한 가족인 제이에게 양양 해변의 아파트를 남겼다. 갑자기 아파트가 생기면 좋아할 일이지만 제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직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숙제일 뿐이다. 그 숙제 해결이 '서핑과 파도의 고장' 양양으로 가는 이유이다.
'나만은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그것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좌절 당하고 싶어도 좌절당할 수 없는 서퍼에 가깝다고 말한 것이다. 서핑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p. 28)'
제이는 아버지가 해양학자여서 서핑의 천국인 하와이에서 태어났지만 정작 서핑을 할 줄 모른다. 배우겠다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런 제이가 양양 아파트 상가 술집에서 우연히 서핑 강사 양미를 알게 되고 서핑 강습에 참가하기로 결심한다.
'서핑도 그래요. 하나 된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뭔가 이루어져요. 거기까지 가기가 힘듭니다. 넘어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그럴 거라서... (p. 137)'
서핑만 힘들까? 인생의 파도를 타는 삶 모두가 힘들다. 이게 사는 건가 싶다. 서핑하는 서피비치에 놓여 있는 글귀를 우리 삶 속에서도 항상 마주한다. 'THIS IS LIVING?'
환상을 갖고 서핑을 하듯, 직장이든 사업이든 내 인생이든 환상을 갖고 시작한다. 물속에서 눈 뜨는 게 누구에게나 아프듯, 삶이라는 서핑에서도 반드시 눈을 떠야 하는데 아프다. 파도를 타기 위해, 밀려갔던 파도가 다시 밀려올 때까지, 결국 돌아오게 마련인 파도를 기다리며, 계속 파도만 보고 있을 수 없으니...
패들링으로 라인업으로 가서 밀려오는 파도를 타는 거다. ' 보드, 패들링, 테이크 오프, 노즈 라이딩, 그리고 파도 읽기'를 반복하는 거다.
'서핑이란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타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지만 서퍼들 사이에서는 파도를 타는 것만을 서핑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파도를 타기 전, 타는 중, 그리고 타고 나서의 변화된 삶 모두를 서핑이라고 말합니다. (p. 170)'
기다리는 삶을, 제이처럼 덜 복잡하기를 원해 새로운 결정을 내리는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인생을 '서핑하는 정신'으로 바꾸는 거다.
'서핑하는 정신 뭘까? (...) 스스로를 위로하는 정신. (...)
위로는… 남한테 받는 게 아니거든요. (...)
그치. 자기가 자기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위로야. 너 잘하고 있다. 앞으로도 잘할 거다. 살자, 살자, 살아야겠다. (p. 223, 224)'
파도로부터 나를 지키며 서핑하듯 스스로 나를 보호하며. 이게 사는 거지. 이게 사는 거지...
'저는 제이가 자유롭길 바랐던 것 같아요. 제이와 같이 서핑을 배운 사람들도 함께요. 여기까지 쓰다 보니 떠올랐어요. 서핑하는 정신은 '자유를 찾으려는 적극적인 몸부림'이 아닐까라고요. - 작가 인터뷰(p. 307)'
잘 되는 걸 하는 건 재미없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눈이 아픈 서핑을 하듯이... 도시의 파도를 즐기며... 서핑은 원래 도시에서 하는 거다. 자신을 다독여가며 인생의 파도를 자유롭게 즐기다가 하나 된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우리는 인생이라는 파도를 진정으로 즐기는 서퍼가 된다. 간혹 너무 늦은 때라는 게 존재한다는 생각마저도 떨쳐버리는 자유로운 서퍼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