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울어진 미술관 -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이야기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평점 :
지금도 차별과 혐오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지만 오래전부터 그림 속에도 있었다. 이유리의 <기울어진 미술관>은 그림이 품고 있는 여성, 인종, 장애, 소수자, 아동, 노인, 가난한 자들에 대한 다양한 양상의 차별과 혐오를 꺼내놓는다.
'마티스가 그랬던가. "그림은 책꽂이에 있는 책과 같다"고. 책이 책장에 꽂혀 있을 땐, 고작 몇 단어의 제목만 보일 뿐이다. 그림이 품고 있는 풍부한 세계를 알리기 위해, 앞으로도 책꽂이에서 그림을 꺼내어 독자들에게 직접 펼쳐 주는 '친절한 손'으로 살고 싶다. (작가 소개 중에서)'
표지의 그림은 게르다 베게너의 1928년 작 <하트의 여왕>이다. 그림 속의 모델은 게르다의 남편인 풍경화가 에이나르 베게너다. 게르다는 약속을 깨뜨린 모델 대신 남편에게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했다. 스타킹과 높은 구두를 신는 순간, 남편 에이나르는 릴리(여성성)의 존재를 각성했다. 이후 에이나르는 아내 게르다의 동의하에 릴리 엘베(여성)로 살기로 한다.
'그럼에도 릴리는 주눅 들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살라'는 시대의 폭력에 맞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하트의 여왕> 속 릴리는 '나의 본 모습으로 사는 것이 바로 정상성'이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하다. (p. 69)'
릴리는 주류가 선호하지 않는 정체성의 표현을 자제하는 행동 즉 '커버링 Covering'에 맞서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좇아 살았다.
피터르 얀선스 엘링가의 <네덜란드의 집의 내부>에는 청소하는 하녀가 나온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 그림에 등장하는 하녀와 같은 해나 컬웍이 있었다. 중산층 변호사 아서 먼비를 만났고 연인이 되었다. 겉보기에는 집주인과 하녀의 관계 같았지만 둘은 깊은 유대관계를 지속하다가 19년이 지난 후 비밀 결혼을 했다. 일찍이 먼비가 청혼했지만 컬웍이 거절했다. 대신 여는 하녀처럼 바닥을 쓸고, 음식을 만들고 빨래를 하며 지냈다. 왜 그랬을까?
열악한 처우였지만 하녀는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았지만, 아내가 한 하녀와 똑같은 가사노동에는 어떤 대가도 없었기 때문이다. 저평가된 노동, 아이 돌봄과 같은 집안일은 여성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외에도 대리모, 자궁 혐오, 가부장제, 모성애와 어린이다움 강요, 전염병으로부터 비롯된 혐오, 노화를 죄악시하는 것, 소수민족 폭력, 도시개발로 내동이쳐지는 빈민, 동물권, 예술가 후원과 자선을 빙자한 부자들의 위선, 예술의 힘을 악용하는 권력자들, 환경오염 문제까지 그림에서 여러 가지를 드러내놓으며 고발한다.
'이 책은 의도치 않게 시대를 증언한다. 화가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필연적으로 자신이 살던 시대의 공기를 작품 안에 담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p. 8)'
'자동차 사고로 부상당한 남자아이가 있다. 아이 아버지가 크게 다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고, 아이는 곧장 수술실로 보내졌다. 그런데 수술실에 들어온 의사가 아이를 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난 이 아이를 수술할 수 없습니다. 얘는 내 아들입니다." (p. 129)'
어떻게 된 거지?
하며 잠시 혼란스러워했다면...
.
.
.
.
의사를 남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문직 종사자는 남성일 거란 생각, 노동시장 내 성차별을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남들에게만 손가락질 할 일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차별과 혐오를 지니고, 일상에서 나도 모르게 차별과 혐오를 행사하고 있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