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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부터 일만 광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신해경 옮김 / 엘리 / 2022년 8월
평점 :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나이가 61세 되었을 때 비로소 여성 작가임이 밝혀졌다. 본명은 앨리스 브래들린 샐던. 51세에 SF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화가, 예술 비평가라는 이력 외에 군 정보원, CIA 정보원 등의 직업을 가졌던 팁트리는 여성작가라고 주목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팁트리 삶의 마감이 안타깝다. 의붓딸은 자살했고, 알츠하이머로 고생하던 남편이 죽음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남편을 총으로 쏘고 자살했다.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은 열세 편이 담긴 팁트리의 단편집이다. 작가의 SF 세계관의 서사와 상상력이 어마어마하다.
(구원)
미래에도 누구를 위한 구원인지 모를 구원을 앞세워 선교사들이 먼저 온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난다. 종파 간의 전쟁도 벌어지고...
'"역사에서도 그래요?" 피바디 부인이 물었다.
"그렇지는 않죠. 확실히 옛날에는 아니었어요. 종파 간 분쟁에 걸려든 가난하고 미개한 이교도들은 그냥 고통받다가 끝났어요. 그건 그렇고, 우연히 십자군이 지나는 길에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읽어 본 사람 없어? 우린 그걸 놓치고 있었어. 지금껏" (p. 153, 154)'
(고통에 밝은)
'그는 고통의 방식들에 밝았다. 그래야 했다. 아무것도 못 느꼈으니까. (p. 159)'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로 개조되어 이용당하지만, 그래도 지구는 그리운 곳, 가고 싶은 곳이다.
(허드슨베이 담요로 가는 영원)
러브스토리는 SF 세계에서도 슬프다. 연인의 죽음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시간도약을 하는 롤리, 사랑하는 연인을 지키려는 마음은 가슴 아프다. 과거가 현재 상태에 영향을 주는 '이력현상'이 연인들의 사랑을 방해한다면?
'이미 역설들이 사회의 어딘가에 축적되고 있다고. 아마도 대체 시간선? 어쩌면 시간-독립적 이력현상? 물론 역설은 잘못됐다. 역설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역설이 일어난다면 - 누구에게 항의해야 할까? (p. 308, 309)'
(수영장이 비면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테라식 성간 계몽 운동을 핑계로 어린 소년이 낙후된 행성에 와 만행을 저지르며 조롱한다. 현실에서도 무수히 자행되는 행태들이다. 문명인들의 시각이 항상 옳다는 생각은 교만일 뿐이다.
'"자! 저는 지금껏 테라식 성간 계몽 운동의 보잘것없는 연결고리로서 여러분께 봉사해왔어요. 제가 여러분의 고유한 문화 현장의 속도를 너무 가속화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입니다. (p. 334)'
(세일즈맨의 탄생)
지구인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색, 음악, 향이 다른 행성엔 치명적이다. 행성 간의 화물을 전송하는 세일즈맨의 고민이다. 하긴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유럽인들이 가져온 세균과 바이러스에 면역력이 없어 목숨을 잃었으니... 돈만 된다면 위험에 처하든 말든 무엇이든지 팔아 제치는 자들은 미래에도 여전할 것인가?
열세 편에 걸친 팁트리의 상상력은 역사, 사랑, 철학 등 모든 주제를 망라한다. 현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계몽을 앞세워 폭력을 일삼는 제국주의적 사고와 부의 축적과 이익을 위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은 몰염치, 욕심을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미래에도 계속될지도 모를 소수인 약자들, 젠더 문제도 그의 상상 속에 소재로 빠지지 않았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일만 광년이란 범위로 미레 세계는 확장될 것이다. 더 멀리 가면 갈수록 그곳에서의 외로움은 변치 않는 감성으로 남아, 집을 그리워하며 결국 귀환을 꿈꾸고 마는 미래의 인류다.
SF 소설의 재미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스토리를 제대로 쫓아가며 읽어야 그 맛을 제대로 느낀다. 하지만 팁트리가 구축한 신나고, 통쾌하고, 엉뚱하기 그지없는 SF 세계관은 나로서는 도저히 쫓아가기가 버겁다. 팁트리의 상상(특히 '테라여, 그대를 따르리라, 우리의 방식으로'에 등장하는 수많은 우주 생명체들)을 이미지로 그리기가 힘겨웠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보다 재미를 덜 느꼈다는 생각에 미련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