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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8월
평점 :
일본 애니메이션 '란마 1/2'을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봤었다. 다음 편이 궁금해 한 번에 2~3편씩, 다음 편을 누군가 빌려 갔으면 예약까지 걸어가면서...
란마가 절반은 여자 절반은 남자라는 판타지 요소, 란마와 대결을 펼치는 샴푸가 란마가 여자일 때는 복수를 위해 싸움을 벌이지만 남자 모습일 때는 그 모습에 반해 사랑을 고백하는 개그와 에로 요소, 그리고 변태적 요소가 '란마 1/2'에 등장했다. 지금 다시 본다면 재미없을듯하다.
하여튼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읽으면 '란마 1/2'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특징적 요소들이 겹쳤다.
짝사랑하는 서클 여자 후배는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다.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숨겨 굳게 주먹을 쥐고 날리는 사랑이 가득 찬 친구펀치를 구사하며, 두 발 보행 로봇 스텝으로 기쁨과 의욕을 표현하며, 태평양 물이 모두 럼주라면 좋겠다고 할 만큼 술을 좋아하며, "나무 나무!"라고 읊조리는 만능 기도도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애용하며 대학생활의 낭만을 신나게 즐긴다. 선배의 짝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만날 때마다 "아, 선배, 또 만났네요!"라고 인사할 뿐이다.
선배는 서클 후배를 사모하지만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그녀의 주위를 서성인다. 후배의 흔적을 쫓아 찾아다니지만, 그녀 앞에 자신을 존재를 드러내기는커녕 마주칠 때마다 "뭐, 어쩌다 지나가던 길이었어"라는 대사를 목에서 피가 날 정도로 반복한다. 실패와 수난만 계속되는 걸 보니 그저 찬 바람을 맞으며 길가의 돌멩이처럼 구르고만 있을 것만 같다.
이 소설은 4개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어느 봄날 밤, '술'과 눈부신 어른의 세계를 만난다.
'"이백 옹에게는 두 가지 취미가 있었어. 하나는 술친구들을 거느리고 다니다가 밤길을 걷는 남자를 습격해서 속옷을 빼앗는 거고, 다른 하나는 가짜 전기부랑으로 술 마시기 대회를 하는 거야." (P.41)'
여름의 헌책시장에서는 짝사랑하는 서클 후배가 그토록 찾는 <라타타탐>을 위해 선배는 세상에서 가장 매운 음식을 먹는 지옥을 체험한다.
'멀리 돌아가는 계획을 백지로 돌리고 더 완벽한 계획을 다듬어 완성시켰건만, 거꾸로 내가 앞에서 백지로 돌렸던 처음의 계획이 멋대로 진행되다니, (p. 177)'
광란이 난무하는 가을 대학축제, 옥상 건물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하는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사랑의 대서사시 <괴팍왕>의 주연이 되어 드디어 후배를 품는다.
'"설마 선배가 괴팍왕 역할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내가 그렇게 말하자 선배는 별생각 없다는 듯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했습니다. (...)
"그건 그렇다 쳐도 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 선배와는 자주 만나잖아요. 이거야말로 신의 편리주의라고 해야겠지요."
"그렇군." (p. 287)'
교토 전체를 휩쓴 감기로 모두 앓아누운 겨울, 서클 후배만이 멀쩡하다. 감기로부터 모두를 구할 자는 다름 아닌 달걀술과 전설의 약 '윤폐로'를 손에 얻은 서클 후배다. 드디어 커피숍 전진당에서 선배 곁으로 걸어가는 후배가 작게 중얼거린다.
'이렇게 만난 것도 어떤 인연. (p. 392)'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천진난만한 여대생과 그녀를 짝사랑하는 선배의 이야기를 그린 로맨스판타지다. 2006년 작품으로 모리미 도미히코가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썼다.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소설에 나오는 여러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들은 힘들게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늘 머릿속에서 넘쳐나 그걸 모두 소설에 이용하려 들면 소설이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교토라는 도시와 대학생활, 어려서부터의 독서력이 그에게 소설의 소재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p. 396)'
심리, 행동, 주변 상황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눈에 띈다. 그런 이유로 시종일관 귀염귀염하고 무심한듯한 매력의 후배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눈에 못이 박힐 정도로 후배 뒤통수만 바라보고 쫓아다니는 순진무구의 선배 모습도 마찬가지다.
읽는 내내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신선하고 기발하고 판타지적인 아이디어가 놀랍다. 같은 상황을 후배의 입장에서 선배 입장에서 대비하며 펼치는 구성도 재미요소를 한층 높인다.
역자도 역자 후기에서 밝혔듯이
'"... 그냥 '읽어봐'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무책임한 의무의 방기가 아니다. 손끝에 닿는 기묘한 감촉, 혹은 이 혀끝의 촉감을 직접 맛보게 하고 싶은 것이다.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내 쪽에서 "어때? 어때?" 하고 빙긋이 웃으며 물어보고 싶어진다." (p.398)'
"재밌지? 그 대목은 정말 재미있지 않아? 또 여기 요 대목도...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