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세계사 1 - 경이와 혼돈의 시대 선명한 세계사 1
댄 존스.마리나 아마랄 지음, 김지혜 옮김 / 윌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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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내란 때 계엄군이 가지고 있던 케이블타이 용도에 대해 말이 많았다. 당시 707특임단장은 문 봉쇄용이라고 증언했지만, <뉴스토마토>기자를 케이블타이로 묶는 장면이 담긴 CCTV 영상이 공개되면서 거짓으로 드러났다.

계엄군이 순식간에 다가와 덮치는 바람에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다가 영상을 보니 다리를 걷어차이고 벽으로 밀쳐지는 등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생생하게 기억났다고 기자가 말했다.

영상과 마찬가지로 한 장의 사진도 우리의 희미한 기억을 선명하게 그리고 텍스트로 써 놓은 사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떠오르게 만들어준다.


<선명한 세계사 1, 2>는 '빛바랜 세계에 제 빛을 찾아주려는 시도이자 컬러로 보는 역사다. (p. 10 서문)' 1850년부터 1960년까지 촬영된 1만 장의 흑백사진 가운데 200장을 골라 디지털 작업으로 색을 복원해 이 책에 실었다. 2년에 걸친 협업이 필요했다고 한다. 흑백사진에 색이 더해져 세계가 더 생생하고 선명하고 리얼해졌다.


저자가 고른 1850년대 제국의 시대 대표 사진은 와인 운반용 수레를 개조해 암실과 침실을 갖춘 법률가 출신 사진사 로저 팬턴의 마차 사진이다. 이 시대는 영국을 비롯한 최강국들이 대양을 탐사하고 지배해 나가는 시대였다. 또한 기술력과 발견의 시대이기도 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했고 팬턴은 마차를 타고 다니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 이런 세계를 포착해 보존했다.

반란의 시대, 1860년대 대표사진은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를 암살하는데 실패한 암살자, 루이스 파월이 해군선 소거스호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남북전쟁, 총격으로 링컨과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 사망,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세계 곳곳의 중요한 봉기로 인해 요동쳤던 시대였다.

학대하는 아버지를 살해한 베아트리체 첸치로 분장한 메이 프린셉 사진이 혼란의 시대, 1870년대 대표사진이다. 이 사진이 1870년대와 잘 어울리는 건 근대적인 발전이 있었지만 중세적 감수성을 지닌 사건들도 일어났기 때문이다.

경이의 시대, 1880년대 대표사진은 머리에 독수리 깃털을 꽂은 아메리카원주민 헝크파파의 추장 시팅볼을 촬영한 사진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탐욕, 복수, 문화 말살이 이루어졌다. 반면 뉴욕 자유의 여신상, 파리 에펠탑, 고층 건물인 마천루가 건설되는 경이로운 건축의 시대이기도 했다.

세기의 황혼이라 칭하는 1890년대 대표사진은 <톰소요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집필한 마크 트웨인이다. 소설 <도금의 시대>에서 트웨인은 '급속한 기술 진보, 인구 증가, 산업적 부, 미국 재건이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실패라 할 만한 지나친 낙관주의와 부패와 만나 서로 충돌하는 시대로 역사적 순간을 규정했다. (P. 158)' 마크 트웨인은 그가 규정한 시대를 두 눈으로 확인하며 1890년대를 여행했다.

새벽의 어둠, 1900년대는 관능적인 무용수이며 서커스 공연자이자 코르티잔이었던 마타 하리의 모습이 대표사진이다. 벨에포크 시대가 저물어가면서 마타 하리의 인기도 스러져갔다. 태평양의 섬부터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폭력이 난무하고 군대가 충돌하면서 세계대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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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읽는다 - 한 권으로 깊이 읽는 한강 대표 작품
강경희 외 지음 / 애플씨드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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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문학 평론가가 한강의 대표작 다섯 권을 해설하는 책 <한강을 읽는다>다. 학술 논문 형태가 아닌 대중적 글쓰기를 지향했다고 '들어가는 글'에서 밝혔지만 이들의 평론 역시 한강 작품만큼이나 내겐 어려웠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세 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된 <채식주의자>를 평론가 김건형은 남편, 형부, 언니, 세 명의 영혜 주변 '정상인'들이 영혜를 바라보는 시선을 뒤집어 오히려 그 시선이 이상하다는 것을 폭로하는 장치라고 소개한다.

최다영 평론가는 <희랍어 시간>을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이 세계가 침묵, 죽음으로 충만해 있음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라고 평하며 한강의 소설 가운데 가장 은유적이고 시적인 작품으로도 소개한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는 읽는 내내 한강 작가가 우리에게 던진 '이리도 참혹한 세계가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되뇌게 하는 작품이었다고 비평가 성현아는 말한다.

한강 작가 가족사의 아픔을 바탕에 둔 작품 <흰>을, 평론가 허희는 시적 에세이라고 소개하며 얇지만 빽빽한 책이라고 평가한다. '삶과 죽음을 둘러싼 사유의 밀도는 촘촘하기 때문이다. (p. 140)'

<소년이 온다>와 함께 국가 폭력을 다룬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 문학 평론가 강경희는 '70여 년, 매일 악몽에 시달려도 결코 작별할 수 없었던, 아니, 작별하지 않겠다는 (p. 171)' 소설 속 화자이자 한강 작가 본인으로 여겨지는 경하, 그의 친구 인선, 인선의 어머니 정심, 이렇게 세 명의 여성과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요약한다.


평론집은 좀 더 깊은 작품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한강 작품은 아름답지만 결코 쉽게 읽어나갈 수 없는 난해함이 있어 한강이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메시지를 알아채는데 애를 먹곤 한다.

'흥미로운 점은 한강이 직조한 큐브(플롯 plot)가 확연하고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지극히 의식적인 작법인데, 독자가 빠르고 쉽게 자신의 소설을 읽어갈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지연 방식이다. 독자를 곤혹스럽게 하겠다는 의도라기보다는 정지와 복귀, 다시 읽기와 재현을 통해 독자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겠다는 전략이다. (p. 182, 문학평론가 강경희)'

평론에 기대면 어느 정도 그 결을 찾아들어갈 수 있다. 작가가 배치한 장치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때 그 기쁨이란, 또한 흐릿했던 시야가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해지는 느낌도 갖게 된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인선이 3분마다 주삿바늘을 찌르는 장면이 나온다.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이 장면에서 내가 알아차려야 할 메시지는 뭘까? 잠잘 때조차 인선은 주삿바늘이 주는 고통을 참아야 한다. 만약 포기한다면? 환지통에 시달릴 것이다. 제주 4.3을 안 이상 외면하려 해도 고통은 계속된다.

어차피 환지통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3분마다 느껴야 할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래서 제주 4.3의 피가 내게도 흐르게 해 온몸으로 고통을 껴안을 수는 없느냐. 인선처럼 고통의 작업을 숭고한 예식으로 바꾸어 매년 애도하며 작별하지 않을 수 없겠는지. 한강의 물음이 들린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자격으로 지난해 12월 7일 스웨덴 한림원에서 한강 작가는 <빛과 실>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세 가지 물음을 우리에게 던졌다. 이 물음은 작가로서 한강 자신에게도 하는 질문으로 그 고민과 응답을 작품에 풀어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p. 156)'

첫 번째 두 번째 물음에 답은 우연치곤 기이하게도 지난해 12월 3일 밤에 벌어져 지금까지도 진행 중인 내란으로 똑똑히 확인해 가는 중이다. 세 번째 물음에 대해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p. 125)'라고 평론가 성현아는 전한다.

진한 아름다움은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울수록 눈에 띈다. 전쟁 가운데 핀 아름다움이 더 아름답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역설이 진리가 되어 골고루 퍼져있다. 독재 국가 폭력에 맞서 흘린 피가 선명하고 그래서 그 피로 이룬 민주주의가 더 아름답다.

가정 폭력에 멍든 푸른색도 선명하다. 그 푸른 폭력의 상처는 보편적 정상의 심기를 건드려 혐오, 차별로 치부되던 사람들을 급기야 정상에 가까운 아름다운 곳에 데려다 놓았다. 세 번째 물음에 내가 찾은 답이다.


이 책이 다룬 다섯 작품 가운데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만 읽었다. <채식주의자>는 읽지 않았지만 내용을 어렴풋이 알고 <흰>, <희랍어 시간>은 어렵다는 것만 전해 들었다. 평론집으로 한강 작품을 읽은 것처럼 행세해 볼 요량이었다. 얄팍한 생각이 문제였다.

한강의 다섯 작품을 읽고 <한강을 읽는다>를 다시 읽어보려 한다. 그때는 한강의 작품에 스며있는 흔적 가운데 더 많은 흔적이 내 눈에 띄겠지라는 희망을 갖고. 한강 작품만큼은 그 세계에 깊이 빠져보고 싶다. 그만큼 깊으니깐.

'한강은 자신의 문법이 "신체의 사용"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감각의 세부를 사용하는 몸의 문장, "필명의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전류"가 통하는 소설을 쓴다. 이러한 작가의 고투가 전이될 때 독자는 작가처럼 아프고 힘겨울 수밖에 없다. (p. 210, 문학평론가 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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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스터츠의 내면강화 - 흔들리면서도 나아갈 당신을 위한 30가지 마음 훈련
필 스터츠 지음, 박다솜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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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 지쳐 쓰러져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때, 어떤 도움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을 때에야 비로소 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일으켜 세워 달라고. 신을 믿어야, 신만이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기도도 가능하다. 기적도...


심리상담가, 미국의 여러 셀러브리티들의 정신적 멘토인 필 스터즈는 <필 스터츠의 내면 강화>에서 서른 가지 마음 훈련을 소개한다. 이 훈련을 통해 상처를 받아들일 때, 흔들려 주저앉게 되더라도 일어날 힘을 얻어 삶의 여정을 이어나아갈 수 있다.

고통과 역경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이다. 고통을 받을만한 이유가 내겐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것과 상관없이 찾아온다. 때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오해를 받거나 미움을 사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겪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른으로서 확립해야 할 자아를 갈고닦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살면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게 된다. 이를테면 순간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내린 결정들이 그렇다. 옳은 결정만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때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자책하며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나를 구해줄 강력한 도구가 내 안에 있다.
'감사하다는 생각은 습관으로 들이는 게 좋습니다. 우리 정신 속에서 흐르는 감사하다는 생각이 부정적인 생각에 맞서는 방어 도구가 될 테니까요. (p. 91)'

우연에 맡기는 삶은 진정한 자유의 모습이 아니다. 자유로운 삶의 '진정한 성공은 새로운 걸 창조할 때 느끼는 활력 (p.142)'이다.

'자기애는 자신의 가장 열등한 부분을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p. 189)'
이 과정에서 자신감이 생긴다. 자기애는 어떤 실수와 실패에서도 빠르게 회복하게 만들어 내 삶의 모든 걸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질투는 내가 걷는 이 길에서 어떤 의미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이 걷는 길이라고 역경과 불확실성이 없을까. 마찬가지다. 질투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다른 마음먹지 말고 내가 가는 길에서 디뎌야 할 다음 한걸음에 집중하라는 것, 질투만이 알려줄 수 있는 교훈이다.

인류는 개인보다는 인류 전체를 하나로 보는 단계에서 개인으로 분리되어 공동체, 가족 등 사회관계가 약화되는 등 서로의 연결이 끊어지는 단계로 진화했다. 하지만 결국에 개인성은 유지하되 하나의 가족으로 모이는 자신의 분리성과 연결성을 동시에 인식하는 인류 진화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므로.


필 스터츠는 '툴스'라고 부르는 심리치료 방법을 개발했다. 이 치료로 인생을 바꾸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툴스는 과거에 일어난 일에 중점을 두는 다른 치료방법과 달리 미래에 가치를 둔다.

그리고 절박한 처지에서 신을 의지하며 그 앞에 무릎 꿇듯이 '고차원적 힘'을 인정해야 한다고 필 스터츠는 말한다. 그 힘을 느껴야만 툴스는 고차원적인 힘을 우리에게 끌어올 능력을 준다는 걸 명심하자.

*출판사로부터 원고료를 받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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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말 - 나를 향해 쓴 글이 당신을 움직이기를
이어령 지음 / 세계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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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가 아니라 잔디밭 위에 쓴 일행시(一行詩)"
88서울올림픽 개막식 굴렁쇠 퍼포먼스를 본 김태형 시인의 표현이다.

정적을 알리는 '삐이~' 소리와 함께 한 소년이 나타나 굴렁쇠를 굴리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다. 딱 1분 동안 펼쳐진 행위예술이라 할만한 장면이었다. 굴렁쇠는 올림픽 마크의 원과 서양의 직선과 대비되는 동양의 원형적 사고를, 소년은 전쟁 고아라는 한국 이미지를 바꾸는 역할을 그리고 한국 전통의 여백의 미까지 많은 철학을 굴렁쇠 소년 퍼포먼스에 담았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이어령 선생만이 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획이었다. 서울올림픽 개막과 폐막식 총괄 기획을 맡은 이어령은 주변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밀어붙였다. 굴렁쇠 소년을 잡는 카메라 워킹까지 세심하게 주문했다고 한다. 문학하는 사람이 88서울 올림픽에 참여했다는 논란에 이어령 선생이 한마디 남겼다.

"원고지에 쓰던 것을 잠실 주경기장으로 옮긴 것일 뿐이다."


이어령 어록집 1권 <이어령의 말>은 그가 원고지에 쓴 깊이와 넓이가 함축된 일행시를 우리 삶에 옮겨놓는 책이다.

'남을 비방한다는 것은 그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일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거지를 동정하지, 비방하지는 않는다. (p. 30 비방)'

비방하려는 마음을 저 깊은 곳에 묻어두게 하는 회초리 같은 이어령 선생의 글이다. 따지고 보면 못난 자신을 감추려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이 비방이다. 타인을 인정하는 것이 이리 어렵다. 비교하지 않으면 될 것을, 내가 잘하는 것을 보면 되는데 이것도 힘겹다.

'나의 서재에는 수천수만 권의 책이 꽂혀 있다. 그러나 언제나 나에게 있어 진짜 책은 딱 한 권이다. 이 한 권의 책, 원형의 책, 영원히 다 읽지 못하는 책, 그것이 나의 어머니다. 그것은 비유로서의 책이 아니다. 실제로 활자가 찍히고 손에 들어 펴볼 수도 있고 읽고 나면 책꽂이에 꽂아둘 수도 있는 그런 책이다. (p. 46 어머니)'

아무 생각 없이 먼 곳을 쳐다볼 때 어머님이 먼저 떠오른다. 이런 분이셨지. 어떤 분이셨지? 두 개의 생각이 겹치는 존재, 어머니다. 그래서 자주 생각한다. 어머니가 '한 권의 책, 영원히 다 읽지 못하는 책'이라니, 이보다 어머니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 책장을 스르륵 넘기며 한곳에 머무르고 또 넘기다 멈추며 그렇게 어머님 생각을 책 펼쳐보듯 하게 될 것 같다.

'한국 종소리의 여운을 보세요. 한번 울린 그 소리는 헤어지기 싫어서 흐느끼듯이 길게 길게 꼬리를 남기고 사라져 갑니다. 떠나는 사람이 한 걸음 가다가는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p. 295 종소리)'

종소리가 사랑하는 사람 모습으로 변해 흐느끼며 아쉬움이 묻어나는 뒷모습을 보여준 채 떠나가는 것 같지 않은가. 종소리를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 우리에게 보여줄 사람이 또 있을까?


이어령, '진정한 우리들의 스승, 이 시대의 참 지성인', 이런 수식어가 참 잘 어울리는 분이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밑줄을 긋게 된다. 그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내 모습이 나타난다. 내 삶에서 밑줄을 그어야 할 그 모습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기자의 물음에 "더 이상 아름다운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나에게 누군가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아름다운 한국말로 글을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p. 165 한국말)'

이제 그가 쓴, 아름다운 한국말로 쓴 글을 읽을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다행인 건 그가 만들어 놓은 그의 언어들이 많이 남아있다. 어록이 되어 내게 건네질 그가 쓴, 자신을 향해 쓴 글이 나를 움직이게 하니...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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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 - 읽기만 해도 어휘력이 늘고 말과 글에 깊이가 더해지는 책
장인용 지음 / 그래도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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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라도 우리말로 바꿀 낱말이 있다면 그 말을 쓰려고 노력한다. '계란' 대신 '달걀'이란 말을 쓰는데 거의 집착 수준인데도 조금만 방심하면 계란이란 말이 툭 튀어나온다. 일본에서 들어온 말은 더 고치려고 한다. '미소'라는 말이 아름답지만 그 자리에 '웃음'을 넣는다. '야채' 대신 '채소'를.

'보통 문학작품에서 3인칭으로 '그'와 '그녀'를 많이 쓴다. '그'에는 어디에도 성별 구별이 없지만 대개 '그'는 남성을, 여성은 특별히 '그녀'라고 표기한다. '그녀'는 '그'가 포함된 대명사 가운데 비교적 늦게 태어난 말로 일본어의 '카노조(彼女)'를 번역한 말이다. (p. 225)'

글 흐름상 여자임이 드러날 경우 '그녀'라는 말을 쓰지 않는 편이다. 아직도 일제강점기 문화를 청산하지 못한 느낌이 들어서이다. 실제로도 우리가 말을 할 때 '그녀'라고 하지는 않는다. '여자분'이라고 한다. 말할 때조차 쓰지 않는데 대명사를 굳이 글에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장인용, 이름이 낯익어 찾아보니 3년 전 동양화 그림을 감상하듯 읽은 <동양화 도슨트>의 저자였다. 30여 년 동안 출판 일로 글을 다루며 살다 보니 어원에 관심이 생겼다고 한다. 말에 새겨진 흔적과 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롭기도 했고. <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는 세상 모든 것에 시작이 있듯 말의 시작 그리고 그 변화에 담긴 단어의 사연을 담아놓은 책이다.

'그래서 이러한 옛 언어들을 알면 지금 쓰이는 낱말들의 의미가 분명하게 다가온다. 우리말도 다르지 않다. 한국어에는 한자어로 된 낱말들이 무척 많다. 이 책의 저자는 여기에 더해 우리말에 묻어 있는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거란어의 흔적을 맛깔스럽게 들춰낸다. 곳곳에 살아 있는 일본어의 자국들, 점점 우리 언어 습관에 진하게 파고드는 영어식 표현에 이르기까지, 책을 따라가다 보면 무심코 쓰던 말들의 사연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추천의 글, 안광복 <A4 한 장을 쓰는 힘> 저자)'


'회사'가 자본주의 가깝다면 '공사'는 왠지 사회주의 느낌이 나듯 말은 번역한 주체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진다. 꽃 모양이 제비를 닮은 '제비꽃'처럼 식물에 생김새가 비슷한 동물 이름을 붙이면 친근한 꽃 이름이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국토를 강점한 일본인으로서 가장 골치 아픈 일은 무수히 남아 있는 우리말 지명이었다. 식민지 지배자들은 이들 지명을 난폭한 방법으로 바꿔버렸다. 이름에 스민 정감과 기억들은 어찌 돼도 상관없고 그저 자신들이 편하게 표시하고 기록할 수 있으면 되었다. (p. 162)'

아름답고 부르기도 좋은 마을 이름을 한자 지명이 가려버리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그 경우다. 양수리가 돼버렸다. 냇가 돌덩이 아래 가재가 살던 동네 '가재골'은 '가좌'로, '숯고개'는 '탄현'으로, '살구골'은 '행촌'으로 바뀌었다.

삼국시대에 들어온 불교 영향으로 불교 용어들을 곳곳에서 쓰지만 불교에서 유래된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 단어도 있다. 원래 '점심'은 수도승이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지만 배가 고플 때 중간에 음식을 조금 먹어 허기를 누그러뜨리는 일이었다. 기독교의 핵심 용어인 '교회', '예배', '설교', '찬송', '기도', '신앙' 무려 여섯 단어가 불교에서 유래했다는 것도 놀랍다.


'말이란 우리의 생각을 반영하는 도구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관념을 가지기 전에는 그에 해당하는 말도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서양의 과학을 받아들이고 세계관이 바뀌면서 예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개념이나 관념들이 생겨나자 그에 따라 새로운 말을 만들어낼 필요가 생겨났다. (p. 256)'

마르틴 하이덱거에 따르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 언어의 집에 우리들이 산다. 우리가 단어를 만든 것 같지만 사실 단어들이 우리들의 주인이다.' 그러고 보면 새로운 말을 만들어낼 필요에 따라 우리가 단어를 만들었다기보다 단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진화하는 생명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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