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는 <파이 이야기>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얀 마텔이 전 캐나다 수상 스티븐 하퍼에게 2007년 4월부터 2011년 2월까지 격주로 보낸, 문학작품을 언급한 편지를 모아 묶은 책이다. 총 101통의 편지였고, 101권이 조금 넘는 책을 선물로 같이 보냈다.


얀 마텔이 수상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 이유를 책 서문에서 밝히는데 그 내용이 곱씹어 볼 만하다. 캐나다 예술위원회 창립 50주년 행사에 참석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고개조차 들지 않은 수상을 얀 마텔은 보았다. 예술 행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수상에게 의문과 관심이 생겼다.

하퍼 수상이 문학작품이나 그에 버금가는 문학작품을 읽는지, 만약 문학작품을 읽지 않는다면, 그의 마속에 무엇이 있고,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력을 어디에서 얻는지, 인간다운 감성을 어떻게 구축했는지, 무엇을 근거로 상상하고, 그 상상의 색깔과 무늬는 무엇인지...

'스티븐 하퍼 수상에게도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혼자서 빈둥대는 시간이 있어야 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이 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라는 기능적인 문제보다, '이것은 왜 이렇고, 저것은 왜 저럴까?'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했다. 나는 책과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고 책을 읽고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또 책과 고요함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기 때문에, 좋은 책을 통해서 스티븐 하퍼 수상에게 조용한 시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기로 결심했다. (p. 24)'


하퍼 수상의 말과 행동에서 문학이나 문학 전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전혀 없음을 얀 마텔은 눈치챘다. 자신이 보낸 편지의 일곱 통의 의례적인 감사 편지를 받고 얀 마텔은 그 생각을 굳힌듯하다. 그가 원한 답장은 자신이 보낸 편지와 책을 몇 권만이라도 읽었음을 증명하는 도도한 답장, 원칙론적인 답장, 교활한 답장, 정직한 답장, 야멸차게 정직한 답장, 숨김없이 정직한 답장이었다.


지도자라면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면 좋겠다고 꿈꾸는 능력까지 갖추어야 하는데 세상을 이해하고 꿈꾸는 데 문학 작품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얀 마텔은 개인적인 견해를 밝힌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스티븐 하퍼 수상처럼 나를 지배하는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상상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의 꿈이 자칫하면 나에게는 악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과 희곡과 시는 인간과 세계와 삶을 탐구하는 가공할 만한 도구이다. 지도자라면 인간과 세계와 삶에 대해 당연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나는 열렬하게 성공을 바라는 지도자에게 "국민을 효과적으로 이끌고 싶다면 책을 광범위하게 읽으십시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p. 33)'

나부터 인간과 세계와 삶을 탐구할 도구 문학을 가까이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우선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를 곁에 두고 틈틈이 다시 읽고자 한다. 한 번 단숨에 읽고 옆으로 치워둘 책이 아니어서다. 그리고 얀 마텔에게 정직한 답장, 야멸차게 정직한 답장, 숨김없이 정직한 답장을 써보려 한다.

에고~ 읽을 책 리스트만 늘어나게 생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짱 좋은 여성들 - 용기와 극복에 관한 가슴 떨리는 이야기들
힐러리 로댐 클린턴.첼시 클린턴 지음, 최인하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 우리 투쟁의 목표는 여성 아인슈타인을 조교수로 임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멍청한 여자들이 멍청한 남자들과 똑같은 속도로 승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의 '선출된 지도자들' 편에서 첫 번째로 다룬 인물, 남들은 그녀를 '거칠고 시끄러운 여자, 프로 권투선수, 남성 혐오자, 싸움꾼 벨라'라고 불렀지만, 자신을 '매우 진지한 여자'라고 소개하는 벨라 앱저그가 한 말이다.

여성들도 여느 남성들처럼 그림을 그렸고, 글도 쓰고, 무엇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뤄왔다. 하지만 남성들이 기준을 만들고 판단해온 탓에 그녀들의 성과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했다.


<배짱 좋은 여성들>은 힐러리 클린턴과 딸 첼시 클린턴이 역사의 난처한 환경에서 굴하지 않고 현실에 맞서고, 의문을 던지고, 목표를 이루어 변화를 일으킨 여성들의 삶을 번갈아가며 들려주는 책이다.

교육계, 환경분야, 탐험, 발명, 치료 분야, 스포츠, 사회운동, 작가로, 정치 지도자로, 개척자로, 여성인권 운동가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배짱 좋은 여성들의 가슴 떨리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한 흑인 여성 육상 선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TV 화면에 비친 100미터 달리기 출발 자세를 취한 그녀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컬러풀한 긴 손톱, 짙은 화장, 선수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낯설었다. 100미터, 200미터 달리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질투하며 그녀의 능력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의 능력을 폄하해야 했다. 급기야 스테로이드를 복용했을 것이라며 흑인 여성의 능력을 부정하며 증명하려 했다. 약물 검사 결과는 깨끗했고 증명이 된 건 남성들의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려는 나약하고 치졸한 자존심뿐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여성들은 '여성의 위치'를 새롭게 정의하고 지키고자 폭력이나 협박을 당해왔다. 위협에 맞설 때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때론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했고 사생활이 까발려지기고 했다.

그래도 지금은 모든 여성의 권익이 신장됐고 균등한 기회를 누리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인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착시에 불과하다.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는 운동이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시작됐고, 1971년이 되어서야 스위스에서 여성의 투표권을 허용했다. 불과 50년 전에.

출산 관련 위험과 출산에 따른 경력단절, 여성의 옷차림이나 외모를 통제하려는 시도, 여성 노동자의 임금 불평등, 성폭력 등은 여전하다. 여성들의 권리와 기회 그리고 완전한 참여를 보장하려는 노력보다는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들뿐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대화가 시작되기를, 혹은 이미 시작된 대화를 이어 가기를 바란다. 절대로 이 책이 마침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이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여러분의 호기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그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길 응원해 주고 싶다.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p. 11)'

아직 멀었다. 그런 이유로 힐러리, 첼시 모녀의 주장처럼, 계속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잊히는 여성들이 없도록 이야기를 찾아 나서야 한다. 나의 아내, 나의 딸들의 인권을 위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
요아브 블룸 지음, 강동혁 옮김 / 푸른숲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이 말을 걸어왔다.
'일단, 신뢰를 좀 쌓읍시다. (p. 9, 첫 문장)'

<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 이 안내서를 쓴 작가는 요아브 블롬이 아니다. 어떤 전지적 작가다. 그가 차기작 슬럼프에 빠진 요아브에게 원고를 전달했고, 요아브가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이 책의 작가를 요아브 블롬이라 여길 것이다. 전지적 작가도 그렇게 예언했다.

'이 책을 쓴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는 말을 책 한가운데에 인쇄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당신이 작가라고 생각할 겁니다. (p. 204)'

전지적 작가는 이 책을 15년 동안 썼고 열두 번의 개고를 거쳐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할 수 없다는 사실과 독자 모두에게 말을 거는 책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듯이 요아브를 이름으로 출간했고, 네 사람만을 위해 이 책을 썼고 책의 말미에 그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러니, 고맙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괄호 속 단어들을 많이 쓴 벤에게.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 영국 팝을 듣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보조개가 있는 바텐더 오스나트에게.
모두에게 이 책이 자기 것이라고 말해 주기로 한 요아브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p. 462)'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 책의 7장 98쪽에서 아래와 같이 책이 말할 때까지,
'청하지는 않았지만, 충고 하나 하겠습니다.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들을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끝내지 마십시오. 당신이 찾는 게 변화라면, 여기 그대로 머무르세요. (p. 98)'

다시 말해 98쪽을 읽을 때까지도 이 소설의 내용을 종잡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이 책 저자의 상상력이 참신하다 못해 기상천외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따라 펼친 내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발견한 책의 뒤표지에 내 이름이 적혀있고, 책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다니.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알고 있다니...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칠 수 있는 스토리다.


평범하다 못해 무료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주인공 벤 슈워츠먼, 그는 남들에게 관심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그의 경험에서 얻은 건 패배감뿐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세상과 소외된 삶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지녔다. 그런데 용기가 없다.

어느 날 벤은 변호사로부터 하임 울프의 유품인 위스키 한 병을 전달받고, 서점에서 발견한 책 <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가 말을 걸어온다. 이 안내서는 벤을 일상에서 강제로 탈출하게 만들고, 위스키를 마신 벤 앞에 새로운 경험을 지닌 벤이 나타나 이전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벤이 그토록 욕망했던 삶이 펼쳐진다.

벤의 위스키뿐만 아니라 지하에 보관된 하임 울프의 많은 병안에는 각기 다른 경험들이 담겼다. 경험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기억은 머릿속에 저장한 자료의 한 조각이니까. 경험은 완전히 다른 문제야. 경험은 사람을 변화시키니까. 우리가 파는 것도 그런 거란다. 정보가 아니라 변화. (p. 134)'

경험은 행동으로 얻는다. 그 경험은 사람을 바꾼다. 만일 내 경험을 타인에게 심는다면 그 사람을 나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어 통제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경험은 사실 '떠올리지 못함'이라는 공간에서 '떠올림'이라는 공간으로 기억을 이전하는 것일 뿐입니다. (p. 417)'

경험은 '떠올리지 못한 것'을 '떠올림'으로서 벤처럼 새로운 나를 탄생시켜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한다. 매혹적인 체험을 하게 한다.


책과 술을 둘러싼 미스터리 판타지. 이 책을 통해, 새로운 경험으로 내가 바뀔지도 모른다. 이제껏 상상만 했던, 웅크리고 잠자고 있었던 새로운 삶이 내 앞에 펼쳐지는 판타지를 경험할 수도 있다. 용기가 생긴다. 내 삶을 응원한다. 희망이 있다.

'모든 책은 암호를 해독하는 암호다. 책이 암호인 이유는 아무도 그 책이 쓰인 방식대로 정확하게 그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조금씩 다르게 읽는다. 독자가 해독한 내용은 암호를 적용한 사람의 의도와 절대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책은 작가의 내면에 있음에도 작가 자신도 몰랐던 것을 해독해 주기도 한다. 암호를 작성하는 와중에 말이다. (p. 461)'

네 사람만을 위해 쓰여진 책, 넷 중에 한 사람은 '나'다. 책 속의 주인공 벤, 오스나트 그리고 저자라 할 수 있는 요아브와 함께 내 나름의 암호로 책을 해독할 때 이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비로소 완성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올레트, 묘지지기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숱한 묘비에 쓰여있는 것 중에 묘지지기 비올레트가 가장 좋아하는 묘비명은
'내가 좋아하는 묘비명은 이것이다. "죽음은 당신 꿈을 꾸는 사람이 더는 아무도 없을 때 시작된다." (p. 21)'

비올레트, 죽은 자들의 영혼에 둘러싸인 비올레트는 정원을 가꾸고 꽃도 키운다.
'내 직업을 이루는 요소는 이렇다. 입이 무거울 것, 타인에게 호의적일 것, 연민을 품지 않을 것. 나 같은 사람에게 연민을 품지 말라는 건, 우주 비행사 나 외과의사나 화산학자, 유전학자가 되라는 소리와 같다. 그건 내 세계가 아니고 내 능력 밖의 일이다. (p. 19)'

그리고 비올레트는 모든 이들에게 연민을 품고 살아간다. 건널목지기로... 묘지지기로...


고아로 위탁가정에서 자란 비올레트의 첫 번째 만남은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스물일곱 살의 필리프 투생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날,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필리프는 달랐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프랑스와즈였다. 그런 이유로 비올레트에게 필리프는 더 이상 사랑과 위로의 대상이 아니었다. 필리프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올레트가 예뻤고, 그녀에게 용서를 빌어야겠다고 마음먹지만 끝내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 비올레트는 필리프가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와 영원히 이별했다.

비올레트의 두 번째 만남은 그녀의 나이 열여덟 살에 태어난 딸, 필리프 투생을 닮은 레오닌이었다. 레오닌은 건널목지기 관사 벽의 페인트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태어났고,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여름캠프에서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죽음으로서 비올레트와 이별했다.
'"아이들이 고통받지 않았어. 자는 중에 죽었다고." 나는 대답했어. "고통은 우리가 받겠지." 셀리아가 혹시 관 속에 물건이든 옷이든 넣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어. 나는 대답했어. "나." (p. 240)'

비올레트의 세 번째 만남은 레오닌이 묻혀있는, 아니 모두 타버려 묘비에 이름만 있는 묘지의 묘지지기 사샤다.
'"전 건널목지기예요."
"부인은 사람들이 저편으로 건너가는 걸 막고, 난 사람들이 저편으로 건너가는 걸 돕는다고 할 수 있겠군요." (p. 266)'
그는 자신의 일을 비올레트에게 물려주었고 그녀의 삶에 위로와 함께 살아갈 힘도 주었다. 사샤는 모르는 이들에게도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았고, 그가 유일하게 원하는 삶의 방식인 여행을 떠남으로써 비올레트와 이별했다.

묘지지기로 있던 어느 날 이른 아침에 네 번째 만남이 찾아왔다. 쥘리앙 쉘. 그는 죽은 자신의 어머니 이렌 파욜과 함께 왔다. 이렌 파욜은 남편이 아닌, 그녀가 사랑한 변호사 가브리엘 프뤼당의 묘지에 함께 묻히기를 원했다. 쥘리앙은 어머니와 가브리엘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일기장을 비올레트에게 전했고, 그 일기장을 읽으며 비올레트는 또 다른 사랑 쥘리앙을 보게 된다.


당신을 살게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비올레트의 슬픈 생애, 그녀 앞으로 다가온 만남 그리고 이별. 기쁨으로 다가오고 슬픔을 남기고 간 이별. 사랑했고 미워했고.
묘지지기 비올레트를 둘러싼 묘지에 묻힌, 죽은 이들의 사연 속에서 그들을 살게 한 사람은 누구였나.

많은 것을 주는 삶, 그리고 매몰차게 많을 것을 빼앗아 가는 삶. 우리는 그런 삶을 산다. 꾸역꾸역 살아간다. 살아가는 힘을 주는 사람이 있기에. 고비마다 그런 살게 하는 사람을 만나기에... 모든 이들에게 순수한 연민을 품고 살아간다면 말이다.


'어떤 이야기는 길어서 행복하다. 이 소설이 그랬다. 읽는 내내 행복에 취해 이야기라는 크고 높은 언덕에서 오래 걷고 싶었다. 읽으면서 여러 번 눈물을 글썽였다. 죽음이 삶의 연장선이고 삶이 그 이면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설엔 이런 게 들어있다. 날씨, 바다, 기차, 기다리거나 떠나는 일, 유령의 외로움, 인간의 그리움, 재, 상처, 치유, 삶과 죽음의 연속성, 유머, 노래, 시, 우정, 사랑, 생을 다채롭게 하는 것들! - 박연준, 시인 (뒤표지)'

박연준 시인처럼 나도 읽는 내내 행복하고 아름다워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더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가 들수록 맛있게 먹는 한 끼 식사가 만들어내는 행복감이야말로 삶의 원천이며, 진정한 밥도둑은 역시 약간의 모자람과, 누군가와 함께 나눠 먹는 맛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p. 8)'

<황석영의 밥도둑> 우리 문학의 거장 황석영이 음식을 글감으로 차린 소박한 자전 밥상이다. 음식은 먹을 때 같이했던 이와의 관계이며, 그 시절에 얽힌 기억을 불러내는 촉매이다.

군 시절과 선생이 시국사범으로 감옥살이할 때 먹곤 하셨던 음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열악한 교도소에서 여러 음식을 해 먹는다. 특히 요구르트와 빵으로 곰팡이를 피워 밀주를 만들어 마시는 에피소드는 기가 찰뿐이다.

전쟁으로 광명에서 피난시절, 첫사랑 어린 소녀가 "수남아, 너만 먹어!"라는 말과 함께 건네준 건 방금 솥에서 긁어낸 겉바속촉의 누룽지였다.

돌아가시기 전 어머님이 몇 번이나 찾으셨던 고향의 음식 노티, 북한에 방문했을 때 어머님의 이산가족 동생인 이모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노티를 만들어 순안비행장에서 헤어지는 전에 푸른색 보퉁이에 담아 내미신다. 노티를 찾으시던 어머님의 입맛은 고향의 향수였던 셈이다.

뜻하지 않은 유럽 망명 생활에서는 지중해, 독일 등에서 음식을 접하면서 유럽에서의 추억과 그 추억에 깃든 음식의 레시피에도 전문가 수준이다.

고등학생 시절 출가 후 절에서 신세 진 고된 이야기. 전국 각지 산지 특유의 그 고장 음식이야기 끝에 들려주는 강진에서의 아욱된장국 이야기, 친구가 먹기를 원했던 아욱된장국을 같이 즐기지 못했던 아쉬움은 그 친구가 세상을 먼저 떠났기에 더하다. 그 친구를 떠나보낸 후로 그와 즐겼던 음식의 맛도 잃었기에 때문에...


황석영은 <황석영의 밥도둑>에 소개된 음식의 레시피를 꼬박꼬박 일러준다. 그 레시피를 읽다 보면 음식을 해보려는 욕심도 생기고, 음식을 만들 줄 알긴 한 건가? 또는 진짜 맛이 있기는 한 건가? 하는 의구심도 들고, 음식 냄새를 맡는 착각도 든다.

'서울에서 반도의 서쪽 끝자락인 전라도까지 천릿길이라 난생처음 먹어보는 음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그중 첫 번째가 '보릿국'이다. (...) 새봄이 되어 햇볕이 포근해지고 아직 잔설이 덜 녹아서 밭두렁이 희끗희끗할 무렵이면 눈밭 사이로 파란 보리 싹이 고개를 비죽 내민다. 바로 이때에 보리 싹을 잘라다가 국을 끓이는 것이다. 먼저 쌀뜨물을 받아두고 다시를 내든지 아니면 '홍어애'를 넣어 국물의 맛을 깊게 한다. 보리 싹은 된장으로 살살 버무려 두었다가 넣고 끓인다. 한술 떠 넣으면 봄의 생명력이 싱싱하게 들어 있을 보리 싹과 구수한 된장과 홍어애의 콤콤한 맛이 어우러져 전라도의 땅 내음이 입안 가득 맴도는 것 같다. (p. 217)'

게다가 자신만의 비법도 소개한다. 이런 식이다.

'쌀과 버터, 파르메산 치즈와 달걀만 가지고도 맛있는 초 간단 리소토를 만들어 먹을 수가 있다. 쌀을 소금 친 넉넉한 양의 물에 삶듯이 익힌다. 익힌 쌀을 체에 걸러 물을 따라내고 접시에 담아 뜨거운 상태에서 버터와 달걀노른자를 얹어 파르메산 치즈를 뿌려 살살 섞어서 먹는다. (p. 173)'

이런 걸 보면 음식을 만들어본 솜씨이긴 한 것 같다.


<황석영의 밥도둑>에서 풀어내는 황석영의 맛깔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선생의 곡진한 삶을 느낌과 동시에 나의 추억도 저절로 떠오른다. 내가 먹어본 음식과 함께 마치 과거가 깨어나는 느낌이다. 어느새 가물가물해진 기억들이 조금씩 모양을 갖춰가며 선명해진다. 그래서 피식 웃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한동안 멍하니 있기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