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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트, 묘지지기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2년 7월
평점 :
숱한 묘비에 쓰여있는 것 중에 묘지지기 비올레트가 가장 좋아하는 묘비명은
'내가 좋아하는 묘비명은 이것이다. "죽음은 당신 꿈을 꾸는 사람이 더는 아무도 없을 때 시작된다." (p. 21)'
비올레트, 죽은 자들의 영혼에 둘러싸인 비올레트는 정원을 가꾸고 꽃도 키운다.
'내 직업을 이루는 요소는 이렇다. 입이 무거울 것, 타인에게 호의적일 것, 연민을 품지 않을 것. 나 같은 사람에게 연민을 품지 말라는 건, 우주 비행사 나 외과의사나 화산학자, 유전학자가 되라는 소리와 같다. 그건 내 세계가 아니고 내 능력 밖의 일이다. (p. 19)'
그리고 비올레트는 모든 이들에게 연민을 품고 살아간다. 건널목지기로... 묘지지기로...
고아로 위탁가정에서 자란 비올레트의 첫 번째 만남은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스물일곱 살의 필리프 투생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날,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필리프는 달랐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프랑스와즈였다. 그런 이유로 비올레트에게 필리프는 더 이상 사랑과 위로의 대상이 아니었다. 필리프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올레트가 예뻤고, 그녀에게 용서를 빌어야겠다고 마음먹지만 끝내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 비올레트는 필리프가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와 영원히 이별했다.
비올레트의 두 번째 만남은 그녀의 나이 열여덟 살에 태어난 딸, 필리프 투생을 닮은 레오닌이었다. 레오닌은 건널목지기 관사 벽의 페인트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태어났고,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여름캠프에서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죽음으로서 비올레트와 이별했다.
'"아이들이 고통받지 않았어. 자는 중에 죽었다고." 나는 대답했어. "고통은 우리가 받겠지." 셀리아가 혹시 관 속에 물건이든 옷이든 넣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어. 나는 대답했어. "나." (p. 240)'
비올레트의 세 번째 만남은 레오닌이 묻혀있는, 아니 모두 타버려 묘비에 이름만 있는 묘지의 묘지지기 사샤다.
'"전 건널목지기예요."
"부인은 사람들이 저편으로 건너가는 걸 막고, 난 사람들이 저편으로 건너가는 걸 돕는다고 할 수 있겠군요." (p. 266)'
그는 자신의 일을 비올레트에게 물려주었고 그녀의 삶에 위로와 함께 살아갈 힘도 주었다. 사샤는 모르는 이들에게도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았고, 그가 유일하게 원하는 삶의 방식인 여행을 떠남으로써 비올레트와 이별했다.
묘지지기로 있던 어느 날 이른 아침에 네 번째 만남이 찾아왔다. 쥘리앙 쉘. 그는 죽은 자신의 어머니 이렌 파욜과 함께 왔다. 이렌 파욜은 남편이 아닌, 그녀가 사랑한 변호사 가브리엘 프뤼당의 묘지에 함께 묻히기를 원했다. 쥘리앙은 어머니와 가브리엘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일기장을 비올레트에게 전했고, 그 일기장을 읽으며 비올레트는 또 다른 사랑 쥘리앙을 보게 된다.
당신을 살게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비올레트의 슬픈 생애, 그녀 앞으로 다가온 만남 그리고 이별. 기쁨으로 다가오고 슬픔을 남기고 간 이별. 사랑했고 미워했고.
묘지지기 비올레트를 둘러싼 묘지에 묻힌, 죽은 이들의 사연 속에서 그들을 살게 한 사람은 누구였나.
많은 것을 주는 삶, 그리고 매몰차게 많을 것을 빼앗아 가는 삶. 우리는 그런 삶을 산다. 꾸역꾸역 살아간다. 살아가는 힘을 주는 사람이 있기에. 고비마다 그런 살게 하는 사람을 만나기에... 모든 이들에게 순수한 연민을 품고 살아간다면 말이다.
'어떤 이야기는 길어서 행복하다. 이 소설이 그랬다. 읽는 내내 행복에 취해 이야기라는 크고 높은 언덕에서 오래 걷고 싶었다. 읽으면서 여러 번 눈물을 글썽였다. 죽음이 삶의 연장선이고 삶이 그 이면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설엔 이런 게 들어있다. 날씨, 바다, 기차, 기다리거나 떠나는 일, 유령의 외로움, 인간의 그리움, 재, 상처, 치유, 삶과 죽음의 연속성, 유머, 노래, 시, 우정, 사랑, 생을 다채롭게 하는 것들! - 박연준, 시인 (뒤표지)'
박연준 시인처럼 나도 읽는 내내 행복하고 아름다워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더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