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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평점 :
천선란의 <노랜드>. 그간 발표된 열 편을 소설을 한 권으로 엮었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열 편의 이야기는? '이유 없이 살아가자는 말을 너무 길게 한 것 같다. (p. 417)'였다.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과 싸우고, 화산재로 뒤덮인 지구를 떠나 살만한 행성을 찾아 떠나고, 복제인간이, 좀비가 나타나고... 작가의 세대들이 중년의 나이에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를, 그 세계를 다룬 단편들이다.
흰 밤과 푸른 달
외계인과 싸워야 하는 삭막한 미래인듯싶지만, 늑대 인간일지라도 여전히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잃는 것이 가장 두렵다.
바키다
동물들을 가축화하고 지구의 모든 생물들과 공존하며 산(다고 여긴) 인간이 외계인 바키타에게 지구를 빼앗기고 그들의 가축이 되었다. 가축이 되는 삶을 거부한 숲속 인간들은 감정을 잃었다. 표정이 없다.
푸른 점
무엇이 옳을까? 무엇이 행복일까? 허상이지만 지구는 여전히 푸르고 아름답다고 기억하며 믿는 것일까 아니면 화산재로 뒤덮여 새까만 모습, 지구의 진실을 아는 것일까.
'[... 그들이 제게 명령한 것은 딱 하나입니다.] (...)
[진실을 모르게 하라.]
'가끔은 진실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니까.' (p. 106)'
옥수수밭과 형
기억이 같으면 같은 사람인가? 그럼 AI 9호, 13호, 2호가 나의 형이 갖고 있던 기억을 똑같이 갖고 있다면. 그는 나의 형인가.
제, 재
내 안에 다른 자아가 있다면. 그 둘의 재능은 서로 다르다. 공존이 어려워서 한 쪽을 없애야 한다면 그 선택의 기준은? 재능인가. 사회의 기여도인가.
이름 없는 몸
'그 이름조차 안 불렀어. 혼을 뺏으려고.
혼?
응. 이름을 잊게 해서 정체성을 흐리게 만드는 거야.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는 건 결국 내가 누군지 잊게 된다는 거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거야. 뭔지 모르는 것에게. 그럼 이름 없는 몸이 돼. (p. 218, 219)'
현재의 누구처럼 미래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몸으로 살아갈지도. 인간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그런 비극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혼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써야 하는 세상을 마주할지도.
- 에게
죽은 자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니 죽어도 절대 자신의 이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산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 억울하지 않도록 그 서글픔을 떠안고 그들의 이름을 끝까지 추모할 일이다.
우주를 날아가는 새
지구에 버려지지 않도록, 버려졌다는 것이 그 사실 이상의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하도록 지구를 품고, 사람을 품는 한없는 다정함과 친절함이 필요하다. 더 좋은 미래를 위해서.
두 세계
태어난 세계에 발붙이고 살 수 없다면. 밖의 세계, 세계의 밖이 있음을 안다면. 그곳에 가지 못하는 고통의 삶을 살아야 하나 아니면 죽음으로 이 세계를 끝내고 밖의 세계, 세계의 밖으로 가는 선택을 해야 하나.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시체는 살아있었음을 증명한다. 다른 죽음, 내가 원하면 완전히 소멸하는 우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죽음이 있다면? 기억을 지우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 종류의 죽음을 선택하겠는가.
천선란 작가의 미래의 세계관에도 사랑은 존재한다. 사랑이 존재하니 그 사랑을 떠나보내는 헤어짐도 존재한다.
행복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게 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서 읽고 나면 지치는 책이 될까 봐 두렵다. 여전히. 하지만 사랑하고 싶어 소설을 읽고,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듯 가끔은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으리라 믿으며 두 번째 소설집을 이렇게 엮어 당신께 보낸다. (p. 418)'
작가는 우리의 삶이 어차피 지쳐 살아가는 삶이고, 우리가 더 지치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챈 듯한다. 작가 자신처럼. 그리고 작가의 세계관, 우리 인류 미래의 세계관에도 현실처럼 지쳐 사는 삶이 연장되나 보다. 그 지친 삶을 사는 우리를, 미래의 인류를 위로하는 말을 여기 소설로 하는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