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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착취 : 돌봄노동
알바 갓비 지음, 전경훈 옮김 / 니케북스 / 2024년 11월
평점 :
우리 부부에게는 이젠 커서 이십 대 후반에 들어선 연년생 남매가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두 아이의 육아를 아내가 도맡아 했다. 늦게 퇴근해 집에 들어서면 집은 전쟁터 같았다. 산발이 된 아내와 딸아이가 날 쳐다봤고 바닥은 장난감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아내는 마치 큰 죄라도 지은 듯이 서둘러 집안을 치우고 아이 둘을 달래놓고는 저녁상을 차렸다. 돈 벌어오는 남편의 심기를 살피다가 괜찮다 싶은 내 표정을 확인하고서야 오늘 하루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것도 이해를 구하는 투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너무 힘든 날은 아이 둘을 데리고 나가 음식점에서 밥을 먹기도 했던 모양인데 말을 들어보면 보채는 아이 둘과 식사는 더 고됐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 모든 아내의 일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나의 노동을 위한 일이었다. 노동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나는 쉼을 얻는다. 배고픔을 해결하고 아이들을 보면서 기쁨을 얻고 아내가 청소해 놓은 방에서 편히 잔다. 그다음 날 아내가 빨래해 다려놓은 옷을 입고 충전해 놓은 힘을 쓰러 출근한다.
'이 책은 재생산 reproduction 노동의 정치에 관해 말한다. (p. 13, 시작하며)'
재생산 노동의 정치 관점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노동 인구를 유지하고 교체하는 일이다. 음식 만들기, 청소, 빨래, 부모를 돌보는 일 등은 노동하는 사람의 안녕을 보장하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은 '사회적 재생산'이라고 부른다. 이뿐만 아니라 집안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감정 재생산'도 재생산 노동에 포함된다. 이 모든 일을 대부분 여성이 도맡아 한다.
특히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슬픔을 달래며 남편이 직장에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잘 지내도록 기운을 북돋아 주는 일 등 정서적 지원을 하는 감정 재생산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하게 노동의 대가인 임금으로 돌려받지도 못하고 사랑으로 포장돼 노동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노동을 했는데 대가가 뒤따르지 않는 경우 우리는 이를 '착취'라고 한다. 사랑해서 한 일이라고 여긴다면 '친밀한 착취'가 된다.
이렇게 돌봄노동이 친밀한 착취로 탈바꿈하는 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저자인 알바 갓비는 자본주의, 가족, 젠더 이 세 가지를 폐지할 것을 제시한다.
돌봄노동을 인정하고 임금을 지불하는 순간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구조를 자본주의는 갖고 있다. 이를테면 조리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상품을 판다면 그 가격을 비쌀 수밖에 없다. 팔리지 않아서 가격을 낮추면 이익은 쪼그라든다.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임금 유무와 상관없이 재생산 노동에 의존한다. (...) 페데리치가 쓴 것처럼 '우리가 집에서 집안일을 하지 않으면, 그들의 공장, 광산, 학교, 병원이 운영될 수 없으며 그들의 이윤도 전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p. 96)'
그래서 자본주의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돌봄노동을 미화하고 사적 영역으로 몰아가는 것뿐이다. 사랑이란 끈으로 엮여있는 가족이야말로 아름다운 돌봄을 해낼 수 있는 사적인 곳이다.
'자본주의 권력이 노동을 명령하는 권력이듯, 젠더는 친밀성의 노동을 명령하는 권력이다. (p. 191)'
가족 안에서 돌봄은 주로 여성이 한다. 퇴직하고 나서야 집안일을 도왔다. 아내 손목이 고장 나 못하는 일 가운데 설거지가 대표적으로 내 담당이다. '도와줄 일 없을까?' 집안일을 할 때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언제부터 집안일이 아내의 일이고 내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역할 분담됐을까. 여성에게 어울리는 일이라서? 저자는 이를 젠더화라고 일컫는다.
자본주의, 가족, 젠더 이 세 가지가 폐지되지 않는 한 돌봄을 사랑으로 한 일이 아닌 노동이라고 여기는 날은 절대 오지 않는다는 게 알바 갓비의 주장이다.
전업주부로 지낸 아내가 지나온 날은 돌아보며 '이제껏 난 뭘 하고 살았나. 한 일 없어.'라는 말을 쓸쓸한 표정으로 자주 한다. 왜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할까. 보이는 대가, 다시 말해 자신이 한 노동으로 번 돈이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으면 연금조차 줄어드니 남편이 오래 살기를 바라야 한다.
노동이라도 안 했으면 덜 억울하지. 남편을 뒷바라지하고(노동의 안녕), 아이 둘을 키우고(노동 인구 유지 교체), 시아버지를 모시는 일(감정 노동)까지 갖은 재생산 노동에 시달렸다. 친밀한 착취를 당했다. 젠더화하는 세상에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OECD 국가의 미혼모 아이 평균 비율이 41.5퍼센트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최근 급격히 늘어 4퍼센트 남짓 된다. 전형적인 가족의 형태가 해체되는 추세다. 세계적으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국가도 늘어나고 있다. 젠더화도 점차 사라질 것이라는 걸 뜻한다.
더 이상 사랑의 유대에 기대어 돌봄을 강요할 수 없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돌봄을 노동으로 간주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 인식의 혁명이 필요한 순간이다.
'감정노동이 사적 영역에 국한되는 일이 훨씬 적어지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사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노동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라고 말하기가 더 쉬워질 것입니다. 그 일을 덜어 줄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덜 어려워질 테고요. (p. 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