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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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작가가 우연히 만난 노신사의 소개로 파텔을 만나고 그가 풀어낸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해서, 골진 함석지붕을 인 오두막처럼 생긴 그리스어 알파벳[π]이자, 과학자들이 우주를 이해하는 데 사용한 신비로운 숫자 '파이'에서 난 피난처를 찾았다. (p. 47)'

피신 몰리토 파텔. 파리 최고의 수영장 이름이자 파이의 이름이다. 피신을 잘못 발음하면 '소변을 보는' 뜻으로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자 졸업 후 새로운 학교에서는 자신을 파이라고 소개한다.

파이의 폰디체리 동물원을 운영하는 집안의 둘째다. 파이는 동물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스레 동물들의 습성을 터득하게 되고,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접하면서 세 종교 모두를 받아들인다.

동물원을 정리하게 되면서 파이의 가족은 이민 가기로 결정한다. 팔아버린 동물들과 함께 파나마 선적 일본 화물선 침춤 호를 타고 새로운 정착지인 캐나다로 향하던 중 배가 침몰하고, 파이는 구명보트에 몸을 실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구명보트에는 침춤 호를 타고 같이 이동 중이던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호랑이가 있었다.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죽이고 하이에나는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구명보트에는 파이와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만이 남게 돼, 바다 한가운데서 227일간 표류하는 이 둘의 공생이 시작된다.

구조된 파이는 치료 중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일본인 조사원들에게 227일간 동물들과 실제 겪은 이야기를 말한다. 조사원들이 이야기를 믿지 않자 이야기 하나를 더 들려준다. 동물 대신 인간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간디께서는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에요." 불쑥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p. 110)'

이슬람교, 힌두교, 기독교 지도자가 서로 자신들이 믿는 종교를 믿으라며 다툴 때 파이가 한 말이다. 파이는 세 종교 모두를 믿음으로 안정감을 갖는다. 표류 중 위험에 처할 때마다 파이는 세 종교의 신에게 기도를 드린다. 파이는 종교인이라기보다는 모든 종교는 진실하고 신을 사랑하는 인간일 뿐이다. <파이 이야기>에 인간과 종교에 대한 고찰이 담겨있다.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 리처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 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 견뎠을 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 거야. 포기하지 마, 리처드 파커. 포기하면 안 돼. 내가 육지에 데려다줄게. 약속할게. 약속한다구!" (p. 339, 340)'

소설 속에서 파이에게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언제 덮칠지 모르는 공포의 대상이다. 한편으로는 공존하는 동반자이자 생존의 계기를 마련해 준 희망이기도 하다. 리처드 파커가 없었다면 살아야 원동력이 없어 절망 속에서 진즉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리처드 파커라는 두려움을 길들이면서 그 두려움은 살아야 할 이유이자 희망으로 변했다.


'"두 가지 이야기가 맞아떨어져."
"그러니까 대만 선원은 얼룩말이고, 자기 어머니는 오랑우탄이고, 요리사는... 하이에나... 그렇다면 이 사람이 호랑이군요!"
"맞아. 호랑이가 하이에나를 죽였지 - 또 프랑스인 장님도. 그가 요리사를 죽인 것처럼." (p. 448)'

파이는 일본인 조사원들에 묻는다. 동물이 등장하는 이야기와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 중 어느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지... 그들은 동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믿지는 않지만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든다고 대답한다.

우리에게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진실과 거짓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둔다.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마음에 드는 걸 받아들인다. 결국 내가 보고 싶은 걸 내 방식대로 보고 진실이라 믿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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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Chaeg 2022.4 - No 75
(주)책(월간지) 편집부 지음 / (주)책(잡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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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에 선정된 덕분에 지난달부터 받아보는 월간지 <Chaeg>. 마치 지은경 편집장과 그의 동료 에디터들과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서 웃음기 가득 머금고 책 이야기로 신나게 수다 떤 기분이랄까? 좋아하는 책을 읽고 책 이야기를 쓰는 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이번 75호의 주제는 '우리가 함께라는 것'이다. 우정, 협력, 공존, 연대, 동료, 함께 살아가는 가치에 대한 에디터들의 글, 기고가들의 에세이, 책 이야기가 가득하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분을 잃는 것은 도서관 하나를 잃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선생님의 죽음은 수많은 도서관들이 사라진 것과도 같다. (p. 33)'

하나의 도서관인 이어령의 삶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배웅하며 시대 지성을 우리는 잃었다. <Chaeg> '삶의 아틀라스' 코너에서 사진작가 김용호는 그의 말과 현란한 손동작을 사진에 담아 조금이나마 아쉬움을 달랜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의 우정이 어려워진 이유는 너무 많아진 생각과 계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다가가는 것을 상대방이 불편해할까 봐, 친구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뺏길까 봐... (p. 55)'

10여 년간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조르주 상드와 귀스타브 플로베르, 21년간 편지를 주고받은 스콧 피츠제럴드와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 데이비드 호크니와 평론가 마틴 게이퍼드의 25년간 이어온 예술적 교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정치인 피델 카스트로의 우정의 견고함을 엿보며 진정한 우정을 마음속에 새겨본다.


'책 속 이야기'에서는 <나는 이스트런던에서 86 ½ 년을 살았다 (마틴 어스본, 클)> , <우정 그림책 (하이케 팔러, 그림 발레리오 비달리, 김서정, 사계절)>, <아이 웨이웨이: 인간 미래 (국립현대미술관 펴냄)>, <고흐와 고갱-고독한 영혼의 화가들 (김광우, 미술문화)> 네 권의 책을 소개한다.

이스트런던에서 평생을 보낸 헐렁한 양복을 입은 작은 체구의 조지프. 사진을 보자마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네온 색 옷을 입고 햇볕을 쬐며 빈둥거리는 젊은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조지프 마코비치를 포착한 마틴은 공모전 상을 받은 욕심으로 접근했지만 좋은 컷을 찾지 못한다. 조지프에 집중해 우정을 나누는 친구 사이가 되고 나서야 마틴은 그의 모습에서 "살 수 있는 동안 살라"라는 유쾌하고도 뭉클한 지혜를 얻는다.


'amicitia. 우정을 뜻하는 라틴어. (...) 우정(amicitia)과 사랑(amor) 모두 사랑하다 (amare)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는데, 여기서 '사랑한다'는 뜻은 이해관계를 떠나 선의를 맺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정 또한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p. 125)'

우정을 생각하면 지체 없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친구. 대학교 1학년에 만나 지금까지 절친으로 지내왔고 그의 아내와도 친하다. 그의 아내는 드문드문 만나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우리를 신기해한다. 생각해 보면 함께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군 입대 시기가 달라 대학시절 4년을 온전히 같이하지 못했다. 졸업 후 전화 통화도 가끔, 만남도 1년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하다. 그런데 그의 아내 말처럼 신기한 건 공유한 추억이 많지 않고, 취미가 다름에도 만나면 하루 종일 수다가 가능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편하다. 내가 존경하는 둘도 없는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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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이었습니다만 - 가끔 달달하고 자주 씁쓸했던 8년 8개월의 순간들
진고로호 지음 / 미래의창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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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급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 8년 8개월 동안의 공무원 생활기를 네 컷 만화와 글로 담아낸 <공무원이었습니다만>이다.

'업무의 구체적인 시스템과 세세한 고충까지 알지는 못하니 말이다. 결국 전할 수 있는 것은 백육만 분의 일의 이야기뿐이다. 내가 만난 여러 사건과 인물들이 서로 합쳐지고 각색되어 편집된 아주 주관적인 이야기. (p. 6)'

복지부동, 사무적, 고지식, 관성에 젖은.... 아무래도 공무원을 규정할 때 연상되는 단어는 부정적 뉘앙스의 단어들이다. 그렇지 않은 표현도 공무원과 잇대어 놓으면 부정적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책을 들여다보니, 공무원의 입장에서 보니 많이 다르다. 백육만 명의 고민이 들여다 보인다. 사무적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감정 소모가 심해서였다. 만나는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 그 사연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아팠고, 기억으로 남아 힘들어서 사무적이려고 노력하는 그들이었다.

서비스 업종을 경험한 나로서는 버라이어티 한 대면 서비스의 어려움에 특히 공감했다. 감정 노동자의 스트레스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다. 상황이 벌어졌을 때 기업은 그나마 기댈 곳이 있지만 공무원은 개인의 위기 대처 능력 이외에 의지할 게 없다는 데 놀랐다.

공무원 사회가 우리가 생각하듯 건조하지만은 않았다. 여느 조직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을 느끼며 스스로를 다독여가며 보람을 갖고 하루하루를 버틴다. 공무원이 아닌 직장인들처럼.


저자는 연금을 받게 되는 근속 10년을 앞두고 인생을 모험으로 여기는 길을 선택한다.

'공무원을 그만둔 다음 한량으로 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일이 하고 싶었다. '그만두고 싶다'는 탄식이 '꼭 그만두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변하기 시작한 건 새로운 꿈이 생겨서였다. (p. 283)'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싶었고, 그 꿈은 안정 속에서 불안보다는 불안 속에서 안정을 택하는 용기를 주었다. 생계의 불안을 감수하더라도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안정을 찾는 길을 선택했다. 확실한 건 없지만 하지 못함의 후회가 더 크리라 확신했기에, 이제까지 자신을 겁쟁이로 만든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신을 믿기로 했다. 버티는 삶도 멋지지만 한발 물러나는 삶도 비겁한 건 아니었다.


내 지인의 자녀들 중에도 공무원이 되려 공부하는 청년들이 더러 있다. 공무원이란 직업이 내 삶에 무엇을 가져다 줄지를 고민했으면 한다.

'자신에게 맞는 직업은 당신의 삶을 향상시킨다. 그러한 직업은 당신 성격의 가장 주요한 특성을 발달시키기 때문에 개인적인 성취감을 느끼게 한다. 즉,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한다는 것은 원하는 방식대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그 일이 자기 자신을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폴 D. 티거·바버라 배런, <나에게 꼭 맞는 직업을 찾는 책>, 백영미 옮김, 민음인, 2016. (p. 283)'

젊으니까. 꿈, 도전, 모험 선택이 가능한 나이니까. 죽음을 앞두고 후회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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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때 가볍게 산다
장성숙 지음 / 새벽세시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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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공감하는 글을 만나면 잠시 멈추고 되새겨보는 일이 독서의 즐거움이다. 그렇게 되새기더라도 쉽게 잊어버리니 문제다. 그러고는 또 다른 책을 읽다가 비슷한 느낌의 글을 만나면 또 멈추고 되새기며 즐거워한다.

심리학 상담 교수로 상담 활동을 30년 이상 한 장성숙 작가의 책 <그때그때 가볍게 산다>에는 잠시 멈추게 하는 글이 수두룩하다. 익숙하지만 마음을 울리고, 자신을 돌아보게끔 하는, 행복한 삶을 위한 글들이...


3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삶을 대하며 상담해온 장성숙 교수가 제시한 행복을 위한 원칙은 도망치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미워하지 않으며, 애쓰지 않는다. 이렇게 네 가지다.

도망치지 않는다.
'즉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언제 어디서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자기를 자유롭게,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 자신감이 자라난다고 보는 것이다. (p. 48)'

후회나 분노뿐인 과거나 불안과 두려움의 미래에서 헤매지 않는다. 조심스럽기보다는 현재에서 도망치지 않는, 당당하게 나를 드러내며 삶의 주도권을 내가 쥐고 살아간다.

기대하지 않는다.
'갈등이란 전적으로 그 사람의 그릇 크기에 비례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대상이 아무리 마땅찮아도 이쪽에서 그러려니 하고 품어 주면 아무런 걸림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p. 67)'

어떤 대상이든 기대를 품지 않는다. 지나치게 기대한 나머지 실망하여 인간관계를 그르치지 않는다. 우리 삶의 질은 인간관계에 좌우된다. 인간관계 유지를 최우선으로 한다.

미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적을 꼽으라면 분노라고 말한다. (p. 128)'

상대방에게 마음을 두어 이해하며 수용의 폭을 넓힌다. 자신의 의사를 알려 소통의 토대를 마련하여 분노를 잠재운다. 다투지 않는 이유는 포기가 아니라 수용이기 때문이다.

애쓰지 않는다.
'사람의 기품은 다름 아닌 '만족'에서 오는 것 같다고. (p. 171)'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여건이나 대상과 굳이 맞서려 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과도한 경쟁으로부터 빚어진 긴장에서 벗어난다. 의지하고 싶은 대상이 있다면 의지하며 홀가분하게 감당할 만한 일을 하며 가볍게 산다.


나의 행복은 밖이 아니라 내게 있다. 돈이 많다면 행복할까? 좋은 직장이 행복을 줄까? 외모가?...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행복할까? 아니, 나의 마음가짐이 행복의 열쇠다.

그때 이러한 조건이었다면? 여러 가지 '만약에'가 우리를 휘두른다. 당당함에서 도망치며, 괜한 기대를 하며, 성급히 그르다고 판단하고는 미워하며, 굳이 애쓰며 살기에 불행하다. 그때그때 좀 더 가볍게 살 일이다. 많은 걸 내려놓고, 짐을 내려놓고, 만약에를 내려놓고, 가볍게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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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표상의 지도 - 가족, 국가, 민주주의, 여성, 예술 다섯 가지 표상으로 보는 한국영화사
박유희 지음 / 책과함께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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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를 연구하고 영상문학을 가르치는 박유희 교수의 <한국영화 표상의 지도>는 '한국 영화를 대상으로 가족, 국가, 민주주의, 여성, 예술에 대한 표상을 살피며 우리의 기억에 새겨져 있는 이미지들의 연원과 맥락을 짚어보는' 책이다.

1부 '가족'에서는 가족의 표상을, 어머니, 아버지, 오빠, 누이라는 네 개의 주제로 다루고, 2부 '국가'에서는 일본, 미국, 북한을 중심으로 국가들의 표상을, 3부 '민주주의'에서는 3 · 1운동, 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4부 '여성'에서는 첫사랑, 무당, 여간첩, 여성 법조인, 여성 노동자라는 다섯 개의 키워드로 중심으로 여성의 역사를 살펴보고, 5부 '예술에서는 예술가 영화를 중심으로 한국영화에서 예술을 어떻게 인식해왔는지 그리고 예술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다룬다


'한국영화에서 가부장제 이념은 '어머니'를 통해 가장 적극적으로 재현되었다. (...) 어머니의 자리가 아내보다 우선한다. 또한 딸은 어머니를 예비하는 존재로서 가족이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곤 했다. (p. 21)'

한국영화에서 가족에 대한 나의 표상은 아버지는 가부장으로서의 위상이 미비하다. 억척스레 일하며 가계를 꾸려나가는 건 대개 어머니다. 아들은 책상머리에 앉아 누나가 벌어온 돈으로 공부만 하고 가족은 책임지지 않는다. 나중에 성공하더라도 가족은 나 몰라라 자기 처자식만 건사하는 그런 이미지다.


'한국영화에서 나타나는 국가들은 대개 분단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강대국이다. 여기에는 냉전을 주도했던 미국과 소련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이 포함되며 냉전질서에 따라 적대국과 우방으로 구분된다. (p. 128)'

최근에는 영화에서 우리에게 한없이 좋은 이미지인 미국의 이면(裏面)이 드러나고, 한없이 나쁜 이미지의 북한의 이면이 드러나지만 예전엔 미국은 모든 면에서 선(善)이고 북한은 모든 면에서 악(惡) 그 자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전개는 한국영화에서 대중 정의와 법치주의가 만나는 과정과 맥을 함께 해왔다. (p. 233)'

1970년대 영화가 나에게 주는 이데올로기 이미지는 전쟁, 반공이었다. 그나마 2000년대 들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들이 속속 개봉해 민주주의의 이미지가 광주로 새겨졌다.


'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영화의 진화는 여성 재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 339)'

영화에서 내 기억의 시대별 여성의 이미지는 청순가련형에서 억척스럽게 일하는 여성, 팜므파탈, 차별에 저항하는 여성, 전문직의 여성 순(順)으로 변한다.


'수많은 예술가 중에서 왜 이들이 선택된 것일까? 이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친일이나 해방 이후의 이념 문제와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 둘째, 그들의 굴곡진 생애와 극적인 죽음이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는 점이다. (p. 461)'

영화로 내게 이미지화된 우리 예술인은 외국 예술인에 비해 생각이 나질 않는다. 박유희 작가가 살펴본 바로도 70여 편에 불과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아마데우스 급의 예술인을 조명한 한국영화를 기대한다.


영화가 영상을 제공하는 장르이다 보니 시대를, 인물을, 사회적 이슈를 대중의 기억 속에 이미지화하는 역할에 영화가 제격이다. 더욱이 영화가 출현한 이후 대중에게 표상을 만들고 확산하는 데 영화는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 의미에서 표상을 주제로 한국영화사의 시대별 변화 과정과 우리 기억 속의 심어진 이미지를 쫓아 깔끔한 글 솜씨로 정리한 박유희 교수의 <한국영화 표상의 지도>를 읽는 일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 책을 쓰면서 까다로웠을 작업의 수고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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