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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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코로나19 거리두기 생활 속에도 피어나는 정원의 꽃들, 어린 조카가 그리고 간 낙서의 비밀, 아동학대 사망사건, 목포항에서 본 세월호와 걷기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에세이&’ 시리즈의 첫 책으로 일상과 세계 사이에서 빛나는 이야기를 발굴해 사회와 조응하는 책으로 묶어 창비 고유의 색깔을 드러내는 시리즈로 꾸려질 예정이다.

 

파주로 이사하여 호수공원의 일부인 소리천을 산책한다.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하루 작업의 질은 대체로 원고 앞에서 버티는 시간의 양에 달렸다. 2010년과 2011년에 앉지도 눕지도 못할 정도의 허리 디스크 질환을 겪은 뒤로 운동을 시작했다. 의식해서 호흡하고, 먼 것을 보고, 몸을 데우고 땀을 흘려 피를 잘 흐르게 하는 운동으로 가장 유효한 것은 걷기/산책이다.

 

에세이를 읽다 보면 동거인이 자주 나오는데 이름, 성별이 안나와서 조금 궁금해진다. 저자는 쿠키를 먹는 것처럼 읽을 수 있는 일기를 목적하고 썼다. 해가 지면 경의중앙선 시간표를 확인해 동거인을 마중하러 갔다가 돌아왔다. 왕복 2킬로미터, 하루 25분 산책, 그밖엔 거의 나가지 않았다. 부족한 활동은 트레이닝앱이 추천하는 플랜을 따르며 채웠다. 요즘 거의 매일 일기를 쓰면서, 문장을 쓰는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 어느 날엔 문득 용기가 사라지고 그런날엔 소설도 일기도 쓸 수 없다.

 

파주로 이사한 지도 일년 되었다. 코로나 상황을 일년째 겪고 있다는 이야기이자 일년째, 외출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파주에 눈이 많이 많이 왔는데 눈이 내릴 때마다 눈사람을 만들고 사진을 찍어두니 그해에 눈이 몇 번 내렸는지를 셀 수 있다며 동거인은 좋아했다.

 

사람들이 전염을 두려워하는 마음에는 내가 병에 걸리는 경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겠지만 내가 매개가 되어 남을 병에 걸리게 할 수 있다는 걱정도 있다고 믿는다. 잘못을 저지르면 매우 엄하게 혼났기 때문에 어릴 적 저자는 부모를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잘못의 영역에 제한이나 기준이 딱히 없었으며 체벌의 강도나 형태가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는 점은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다.

 

타인의 삶과 죽음을 자기 삶의 지표로 삼는 일에 반대하고 있지만, 어떤 삶과 죽음은 분명 신호이자 메시지이고 그것을 신호이며 메시지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삶은 늘 있다.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잊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우리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저자는 책을 빌리거나 빌려주지 않는다. 누군가가 어떤 책을 빌려달라고 말하면 아예 주거나 새로 사서 건넨다. 책을 빌려간 사람이 책을 접고 구겨 내게 돌려준 적이 있는데 책 가운데가 눌러져 있어 책 빌려주고 안 좋았던 경험 완전 공감이 된다. 조카들이 미래에 어떤 책을 읽는다면 종이책보다는 아무래도 전자책일 것 같다고 한다. 종이책을 읽는 사람도 부쩍 줄어든 시기에 책을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종이책을 즐기고 싶다고 한다.

 

목포에 와있다. 7년 동안 저자와 동거인의 시위 집회나 광장의 경험은 모두 세월호와 관련되었다. 광장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를 묻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많이 추웠고, 많이 더웠다 라는 말밖에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길게든 짧게든 외출할 때마다 감염을 늘 걱정하기 때문인지 산보 욕심이 늘어 산보를 다루는 책을 모아 읽고 있다. 건축, 미술, 음악, 문학, 사회학, 식물학,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산보에 대해 썼으므로 읽을 것이 아직 많이 남았다.

 

남자아이들이 주도하는 모험에서 여자아이들은 만져지고 꿰뚫린다. 남자아이들은 어린아이다운호기심을 충족하고 모험을 완성하지만 여자아이들은 남에게 말하지 못할 수치로 그 일을 기억에 남긴다. 미투가 시작되고 여성들의 이야기가 이어질 때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에세이지만 가볍게 읽히지는 않았다. 어떤 날들의 기록이고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갈 수 있도록 일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건강하시기를, 불완전하고 모호하고 순진한 데다 공평하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늘 마음을 담아 썼다고 하는 저자의 마음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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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들의 이름짓기
김시래.김태성.최희용 지음 / 파람북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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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들의 이름짓기]이름짓기는 태생이나 특성을 알리는 수단에서 대상의 이미지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스토리 콘텐츠로 진화했다.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고 고객을 불러 모으는 이름엔 어떤 특별한 공식이 없는 걸까? 잘 지은 이름은 그 자체로 소중한 재산이다.

 

업무상 일면식 없는 사람과 만나면 성명부터 먼저 주고받는 것처럼 이름은 최초의 브랜드인 셈이다. 모든 것은 이름을 통해 의미를 부여받고 정체성을 갖는다. 소비자는 소비에 앞서 브랜드 네임을 먼저 본다. 브랜드 네이밍은 고객이 해당 브랜드를 인식하고 기억할 수 있게 도와준다.

 

사람 이름처럼 상품을 의인화해 소비자에게 친밀감을 주는 방법도 있다. 알라딘, 파파존스는 친근한 느낌이 있고 삼성이나 ‘LG’처럼 간단하게 지어진 이름이 우리의 기억 속에 잘 남는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의 이름처럼 기억하기 좋은 글자 수는 대체로 2~4글자 정도다.

 

MZ세대가 즐겨 사용하는 무신사무진장 신발 사진이 많은 곳이라는 커뮤니티로 시작했다. 이름을 줄여 브랜드 이름으로 사용해, 온라인 패션 플랫폼 1위 기업이 되었다. 박준 시인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시집이 있다. 이름이 밥이다. 상황, 목적, 의미에 맞는 적절한 이름 짓기가 필요하다.

 

파주의 대형 카페 이름은 말똥도넛이다. 우리 지역 김해공항에도 말똥도넛이 있어서 여행 갈 때 꼭 들려보고 싶다. ‘인스타그램은 자신도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꿈이 담긴 이름이다. 해시태그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고, 다양한 콘텐츠를 시도할 수 있다.

 

성공하는 네이밍의 숨은 법칙 퓨즈(fuse)의 접점을 찾아라

이름 지을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4개의 키워드가 있다. 재미있고(fun), 독특하며(unique), 이야기가 있고(storytelling), 본질을 담은(essence) 이름이 그것이다. 머리글자를 따면 퓨즈(fuse)가 된다. 좋은 이름, 팔리는 이름을 짓고 싶다면 감수성의 시대를 주도해 가는 네이밍 작법 퓨즈를 기억하라. 제품의 정체성은 시대 불문의 필요조건이다. 이름짓기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분명한 작업이다.

 

오늘의 집은 라이프 스타일 슈퍼 앱이다. 이름만 봐도 집 인테리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정육 시장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정육각은 브랜드 네이밍부터 창업의 남다른 통찰력과 감각이 돋보인다. 매대에서 수많은 다른 책 사이에서 손이 갈 수 있게 제목에 책의 주제, 목적, 관점과 톤이 한눈에 드러나야 한다. 책은 이름 자체가 경쟁력이다. 그다음은 목차다. 이전의 책과 비슷하거나 동일한 제목을 피해야 한다.

 

지역의 지리적 자연적 특성을 반영한다. 밤이 많이 나오면 밤골, 외진 곳에 있으면 동막골이다. 동물과 관련해 이름을 짓는 방식으로 용, 호랑이, 여우, , 까치, , 학 등의 이름을 사용한 지명은 수없이 많다. 뱀사골, 삼학도, 호무골 등이 있다. 불교와 관련해 전국 도처에 극락면, 미륵면, 절골 같은 이름이 즐비하다.

 

평양냉면집 메뉴판에 붙어 있는 거냉이란 말의 뜻을 보자. ‘취빙은 글자 그대로 얼음을 빼달라는 말이다. 차가운 냉면에서 냉의 기운을 제거해 너무 차지 않게 만든 냉면을 거냉이라고 한다. 국가의 이름은 여러 요소가 결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은 삼한대한제국민국으로 변해 이루어졌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이라는 이름을 완전히 소유하기 위해 애플 컴퓨터훨씬 이전인 비틀스가 만든 음반사인 애플과 상표권 분쟁을 오랜 기간 벌이게 된다. ‘A’로 시작하는 데다 누구나 알고 쉽게 부를 수 있어 친근하게 일상에서 접하는 이름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는 세간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미국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의 영구결번으로 유명한 요기 베라라는 야구 선수다. 마포구 염리동 아이스크림 가게인 녹기전에는 누구나 듣자마자 특별함에 감탄한다. 이 가게는 단지 아이스크림을 많이 파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작은 가게를 넘어 하나의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름에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을 깨닫는다. 이 책은 여러 분야의 기획자나 브랜드 마케터, 창업자에게 매우 유용하다. 이름 짓기가 많이 어려운데 필자들의 노력이 엿보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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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늙을까, 왜 병들까, 왜 죽을까 - 내 안의 세포 37조 개에서 발견한 노화, 질병 그리고 죽음의 비밀 서가명강 시리즈 38
이현숙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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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서가명강시리즈 서른여덟 번째 책이 출간됐다. 이 책은 내 안의 세포 37조 개에서 발견한 노화, 질병, 죽음의 비밀을 이현숙 교수가 30여 년간 연구한 우리 몸속 비밀을 알기 쉽게 담아냈다.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가고 병들다가 죽는다. 이런 생로병사의 비밀에 관해 공부하는 것이 바로 생명과학이다. 생명과학의 비밀을 알려면 먼저 세포를 알아야 한다. 모든 세포는 세포에서 유래한다. 바깥에 세포벽이 있고 그 안에 세포막이 있고 세포막 안에 DNA가 있다.

 

BRCA2라는 암 억제 유전자가 있다. 망가진 세포에서는 BRCA2가 비균등 분열을 하면서 유전체가 잘못 나누어진다. 이것이 암의 원인이다. 염색체의 균등 분열이 잘못되는 여러 가지 메커니즘은 새로운 염색체들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옛날부터 염색체가 이상하면 암이라는 걸 알았던 것을, 현대에는 초정밀 염색 기법과 이미지 기법을 통해서 이제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암이란 무엇인가? 먼저 암이란 무한 증식을 하는 것이다. 하나의 세포가 그대로 있다고 하면, 암이 덩이를 만들지도 않기 때문에 그 세포는 괜찮다. 암은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딸세포들을 만들어낸다. 무한 증식하는 것이다.

 

1962년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 맥스 퍼루츠는 단백질과 DNA 구조를 보고 그 구조를 규명하면, 물리 화학적인 구조를 규명하면 생명의 신비를 밝힐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생명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오늘날의 분자 생물학이 되었다. 그의 제자인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은 DNA의 구조인 이중 나선이 왜 유전자인 것을 설명하는지를 밝혀냈다는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DNA 자체에 돌연변이가 생기는 것과 염색체 자체에 문제가 생기는 것, 두 가지가 암의 원이 된다. 염색체의 분리 현상이 잘못되는 것도 암의 현상이라서 염색체 분리 작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쓰고 있던 항암제 중에 택솔이라는 게 있다. 택솔은 주목이라는 소나뭇과에서 나왔으며 굉장히 독성이 강한데, 이거싱 염색체 분리 작용을 건드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포 분열을 망가뜨린다. M기에 작용한다. 그래서 세포를 다 죽여버리는 것이다. 세포 분열의 메커니즘이 암세포가 발전하는 데 핵심이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저자가 박사 때부터 연구한 것은 BRCA2라는 유전자다. 그러나 누구도 BRCA2의 기능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BRCA2는 세포가 분리될 때 염색체가 제대로 분리될수록 조절하는 데도 참여한다. 유전자가 망가지면 점점 세포가 분열할수록 돌연변이가 많이 생겨서 암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암이 생기려면 DNA에 문제가 생겨야 한다. 만성 바이러스도 암의 원인이 될수 있고, 가족력이라는 것도 분명히 있다고 한다.

 

레너드 헤이플릭의 실험이 있는데 세포 노화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죽는 것이 아니라 대사를 더 하지 않고 에너지도 아주 조금만 만들어 내면서 세포 분열을 안 하는 현상이 노화의 가장 기본적인 세포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텔로미어와 관련이 깊다. 텔로미어는 염색체의 말단을 뜻한다.





텔로미어에 중요한 유전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TTAGGG 같은 의미없는 서열이 반복된다. 텔로미어는 염색체 말단이 복제를 통해 짧아지더라도 중요한 유전자들에 손상이 되지 않게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상대적으로 DNA의 텔로미어 길이가 얼마나 짧아지고 있는지 혹은 짧아지는 것이 지연되고 있는지 등이 텔로미어의 건강도와 직결된다. 텔로미어의 손상은 암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손상을 확인하면 의학적으로 암 조직을 확인하기 이전에 초기에 암 발병에 대한 신호를 얻을 수 있다. 개인 맞춤형 면역 항암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으니 암을 정복하지는 못하더라도 다스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노화와 질병을 예방할 수 있을 뿐. 어떻게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까? 바로 세포에 있다. 세포를 알면 미래가 두렵지 않다고 한다. 생명과학 연구가 얼마나 위대한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과학은 재미없다고 느끼는데 이 책은 암과 노화에 대해 이해가 쉽도록 도표와 그림을 넣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세포에 대한 과학적 탐구와 건강이 궁금하다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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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기린을 보러 갔어
이옥수 지음 / 특별한서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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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기린을 보러 갔어]는 청소년의 영원한 멘토, 사계절문학 대상 수상 작가 이옥수 신작이다.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에도 서로 마음을 터놓고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혼 가정의 송이는 중학교 3학년이다. 한송이꽃집을 운영하는 엄마 혜경 씨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 송이는 엄마 휴대폰에 북극곰과 주고 받은 메시지를 몰래 보게 되었던 것이다. 꽃집 옆에 김광석헤어와 홍 이모네 홍삼 가게가 있다.

 

광석 원장은 엄마에게 축하할 일이라고 했다. 광석은 아내와 사별하고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준서를 홀로 키우고 있다. 식탁에 꼴뚜기가 풍년이다. 준서도 엄마가 해주는 꼴뚜기 반찬이 맛있다고 한다. 건어물 사장 대호 씨는 인심이 좋고 쪼잔하지 않아서 좋다고 말했다.

 

송이는 아빠를 만나러 가는 날이 귀찮이지기도 했다. 각자 다른 집에서 호적 메이트로 살다가 정해진 날에만 이렇게 불쑥 만나는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 왜 법에서는 면접교섭권이라는 걸 만들어서 이렇게 나를 옭아매냐고 씩씩댔다.

 

아빠에게 엄마가 연애하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엄마 상대가 될 사람이라면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말했다. 광석 원장이나 홍 이모, 아빠, 할머니 등 어른들은 송이의 마음을 몰라주고 엄마 하는 대로 나두라고 말을 하니 혼자 애만 태우고 있었다.

 

어느 날, 상인 친목 나들이를 다녀오다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때 건어물 사장이 북극곰이고 대호 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송이는 학교도 결석하고 엄마를 간호했다. 엄마는 퇴원을 하면서 가게 문을 열기 전에 겨울 기린을 보러 가자고 했다. 기린은 눈이 맑고 목이 길어서 외롭고 슬퍼 보인다. 맑은 눈망울에서 애처롭고 애뜻해 보이고 슬프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했다. 기린을 보니 이 세상에서 나만 힘들게 살아가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단다.

 

송이는 최애 반찬 꼴뚜기가 싫어졌고 대호 씨도 싫다. 엄마가 술을 한잔 마시고 각자 제 길 찾아서 찢어지는 게 낫다고 한 말에 무작정 버스에 올랐는데 아빠 가게 앞이었다. 새 엄마 사이에 태어난 한우리를 안고 있는 아빠를 보고 발길을 돌렸다. 가출 쉼터를 찾아갔지만 부모님 연락처를 대라는 말에 그곳도 나왔다. 기린을 보러 가자 마음 먹었다. 기린을 보면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까, 용서할 수 있을까.

 

송이는 엄마 연애의 방해꾼이라서 괴롭다. 필요충분 조건만 채워주는 엄마를 죽여야 할까. 하지만 내 엄만데,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웠다. 대호 씨가 가게에 안 왔으면 좋겠고 좁은 곳에서 둘이 붙어 있는 것 보면 열불이 나서 연애를 하든 뭐든지 안 보는 데서 하면 좋겠다.

 

졸업식 날, 아빠는 아빠의 부모님은 자식들 먹여 살리는데 급급해 자식들과 얘기를 한 적이 별로 없었고 부모님께 사랑을 받아본 적 없어서 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그럼에도 잘 커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북극곰에게 엄마를 빼앗기는 게 싫은 송이와 홀로 송이를 키우며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엄마와 오해를 풀 수 있을까.

 

엄마에게 왜 하필 겨울 기린이야 물으니 외롭고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상황 속에서 두 다리로 바닥을 단단히 딛고 서 있는 것이 참고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송이는 아직은 자신이 없지만 기린의 눈을 닮을 수 있을까. 그 눈빛을 동경하다 보면 언젠가는 엄마의 연애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꺼내지 않은 마음까지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엄마와 딸이 기린을 보는 시각은 다르다. 엄마는 삶의 외로움과 슬픔을 송이는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현실을 읽었다. 그러나 다름을 인정하고 견뎌내며 나아가는 힘이면 된다고 했다. 이 책은 무조건적 이해보다는 서로 마음속에 있던 말부터 꺼내며 소통하면서 이웃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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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 수업 - 느끼는 법을 잊은 당신에게
정여울 지음 / 김영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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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 수업]은 삶을 견디는 힘과 세상을 새롭게 느끼는 힘을 길러준 감수성 훈련의 기록이다. 저자는 매일 훈련해온 감수성 덕분에 행복한 글쟁이로 살아가고 있다. 훈련 방식은 더 많이, 더 자주 느끼고, 깨닫고, 읽고 쓰고 듣고 말하며, 타인과 함께 공감하기다.

 

책은 개념과 낱말, 장소와 사물, 인물과 캐릭터로 구성되었다. 저자는 아무리 충격적 상황에서도 그동안 내가 읽고 배우고 경험한 사건들속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내고, 그 모든 순간의 깨달음을 지혜롭게 종합해 영민하게 대처할 수 있다.

 

수없이 타인에게 실망할지라도 우리는 혼자선 자신을 위로할 수는 없는 존재이며, 타인에게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상처의 뿌리일지라도 결국 사람만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팬데믹 시대를 견디게 해준 작은 위로는 식물을 바라보는 기쁨이라고 한다. 식물을 키우는데 재주가 없었지만, 꽃다발이나 화분을 선물 받을 때마다 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속에 진정한 휴식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까운 사람에게 진심으로 친절하기는 왜 이토록 어려운 걸까. 티격태격, 겉은 무뚝뚝하고 속만 따듯한 츤데레같은 사랑 말고, 겉과 속이 비슷하게 다정하고 예의 바른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걸까.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낳아줘서 고마워. 내 엄마가 되어줘서 정말 고마워. 사랑해. 가장 따스한 사랑이 마침내 우리를 버티게 한다.

 

매일 진지한 글을 쓰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면, 리뷰형 글쓰기를 추천한다. 매일 아주 짧은 글을 한 편씩 읽고 그 글에 대한 느낌을 써보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꿈꾼 삶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는 글쓰기를 해보는 것이다. 내가 쓴 글을 세 번 정도 읽은 뒤 문장을 가다듬고 더 나은 표현을 찾아내기 위해 궁리한다.

 

저자는 힘들 때마다 미래의 나를 향해 구조신호를 보낸다. 미래의 나는 매번 온힘을 다해 나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지금보다 자유롭고 강인한 미래의 나를 통해 매일매일 치유되고 있다. 슬픔을 견디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일으키고 돌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살아가면서 이방인이 될 때도 있는데 타인의 도움도 필요하지만,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는 못한다. 불교의 자비심과 기독교의 이웃 사랑에 공통으로 숨어 있는, 인류를 살리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 챙김의 비결이 아닐까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매일 상처받지만, 타인을 통해 매일 위로받기도 한다. 뉴스에서 쏟아지는 온갖 비난의 말들은 날카롭지만, 다정한 사람들이 건네는 말, 나를 지켜주는 책 속 문장, 영화나 드라마 속 명대사는 따스하다.

 

가끔은 사람들이 실현 가능성을 따지는 데서 벗어나 상상하고 토론하며 마음껏 꿈꾸었으면 좋겠다. 남들의 비웃음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제 갈길만 바삐 걸어간 돈키호테처럼.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낭만은 도달할 수 없는 꿈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런 낭만을 품고 살아가는 삶에는 언젠가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아스라한 희망이 있다.

 

교통기관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기차는 자체로 먼 곳에의 그리움을 상징하는 미디어였다. 주인공이 기차를 타고 가면서 수많은 에피소드를 겪는다는 설정은 근대 초기 문학작품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광수의 <무정> 속 주인공, 닥터 지바고의 눈 덮인 설원에서 라라를 향한 그리움과 슬픔에 가득 차 기차를 타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에서 시마무라가 요코를 처음 만난 장소도 기차 안이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에게 기차가 유혹에서의 도피를 상징하는 공간이라면, 브론스키에게 기차는 도망치는 그녀를 붙잡는 추적의 공간이다.

 

저자의 감수성에 큰 영감을 준 사람이 수전 손택이다. 손택의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비평가가 되지 않았을 것 같다. 손택은 비평가에서 소설가로, 에세이스트에서 연극연출가로 활동했지만, 그녀에게는 모든 글쓰기와 사회적 실천이 공작새의 찬란한 무지갯빛 날개처럼 한 몸에서 우러나온 여러 개의 변화무쌍한 스펙트럼이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어떤 고통에도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세상 모든 꽃을 잘라버릴 수는 있어도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라고 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찾기 힘들다면, 당신에게도 감수성 훈련이 필요하다. 가장 나다운 삶의 감각을 깨우고 싶다면 이 책을 펼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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