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 나온 이은희의 엄마 생물학은 세 아이의 엄마인 저자 자신의 임신, 출산 경험을 하나의 기둥으로 삼아 논문과 책의 정보와 융화시켜 쓴 책이(라고 한). ‘그 책을 읽으면 어떤 생생함과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읽을 책이 많아 후일을 기약한다. 하라하라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그의 책 가운데 내가 읽은 것은 하리하라의 눈 이야기단 한 권이니 언젠가 그의 다른 책을 읽기로 한다면 흥미진진할 것으로 기대되는 엄마 생물학1순위이다


안과전문의인 이창목의 내 눈이 우주입니다도 읽고 생물학 전공자인 이은희의 하라하라의 눈 이야기와 비교해보고 싶다. 눈에 대한 책과 지구과학 책에 모두 나오는 인물이 영국의 물리학자 로드 레일리(Lord Rayleigh; 1842 - 1919). 그는 지진의 표면파, 레일리 산란(散亂) 현상을 발견한 인물이다. 이 부분에서 생각나는 글이 과거에 소리와 색은 비교 불가능한 대상이었지만 파동(波動)의 개념이 확립되면서 소리와 색은 파동의 상이한 종류로 파악되기 시작했다. 이질적 존재들이 기저 공간에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이런 공통의 척도가 요청된다.”란 글(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289 페이지)이다.지진파도 파()고 레일리 산란 역시 파()인 빛의 산란이다.


물리학자 서민아 교수의 빛이 매혹이 될 때에서도 로드 레일리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아보기 위해 몇 년만에 책을 다시 뒤졌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대신(?) ‘양자화(量子化)된 세계의 단면을 떠올리게 하는 그랜드 캐니언이란 내용을 만났다


저자는 콜로라도 강의 급류가 깎아낸 불연속적 계단 모양이 양자화된 세계의 단면을 떠올리게 하지만 너무 험준해 인간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을 듯 하고 그곳을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는 존재는 빛이 유일하지 않을까?란 말을 한다. 그랜드 캐니언에 가고 싶지만 역시 책으로 대신해야 하리라. 양승훈의 그랜드 캐니언 정말 노아 홍수 때 생겼을까?‘를 마저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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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이공계 연구원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한 바 있다. 그간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졌던 자연과학과 공학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의 필요성을 느끼는 한편 연구원들의 창의적 상상력 계발과 정서 함양을 위해 충남대학교 인문대학과 공동으로 기획한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이공계쪽 사람이 아니지만 지질공원해설사인 관계로 자연과학자들의 강의를 듣거나 관련 책을 자주 접하는 편이다. 자주(frequently)는 아니고 자연과학자들의 설명이 좀 더 정교해지고 인문학적 비유도 세련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내가 공부에 많은 부분 도움을 받은 이정우 교수님은 학부에서 섬유고분자 공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오 비교 연구로 석사 학위를, 푸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분이다. 내 글쓰기의 기본은 이분의 이력으로부터 시사를 많이 얻은 바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글도 내게 많은 지향점이 되었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학문과 생애를 다룬 리처드 요크의‘과학과 휴머니즘‘에 이런 글이 있다. 읽고 쓰는 능력은 기호적 표상을 이해하는 뇌, 예리한 눈, 그리고 솜씨 좋은 손 등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들 특성 중 어느 하나도 읽기와 쓰기를 위해 진화하지 않았다. 그것은 겨우 수천년 전에 출현한 능력이며 인구의 상당 부분에 걸쳐 널리 사용된 것은 100년 남짓에 불과하다.“ 


리처드 요크가 말한 요건들(기호적 표상을 이해하는 뇌, 예리한 눈, 그리고 솜씨 좋은 손)은 필요 조건이고 충분 조건은 분야를 넘나드는 다독(多讀)이다. 다독해야 할 부분은 좁게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이고, 넓게는 천문학, 물리학, 지구과학, 생물학, 역사, 사회학, 지리, 문학 등이다. 단 무분별에 가까운 독서 시대를 지났기에 분야를 좁혀 고전역학 & 양자역학, 지구과학, 생명과학, 철학, 역사 등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리처드 요크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굴드는 과학과 인문학이 모두 위대한 전통이며 각기 독립적인 영역을 갖지만 경계를 접하고 서로 보완해 준다고 말했다. 어제 더칼럼니스트 사이트에 내 글‘창백한 푸른 점 지구에 색(色) 역사가 있다’가 실렸다. 자연 칼럼니스트란 이름으로 올린 첫 글이다. 자연이란 말은 워낙 역사적 의미가 담긴 말이지만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의 저자 트리스탄 굴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결과 채택한 이름이다. 


세계적인 탐험가인 굴리는 자연에서 얻은 단서들을 활용해 길을 찾아나가는 자연항법(natural navigator)전문가다. 내게 부족한 점은 자연에서 단서를 얻는 것이기에 나는 그런 점을 지향하고 배우고자 자연 칼럼니스트란 이름을 설정했다. 다행히 어제 오른 글에 대해 호평이 넘쳐 기쁜 한편 새로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지구과학 전공자들께서 날카로운(전문가적 시각으로) 평으로 내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창백한 푸른 점 이전 지구가 보였던 색(色)에 초점을 맞춘 것이 기발하거나 탁월하거나 감동적이라는 평들이 그것이다. 모두 감사하다. 다시 신발끈을 단단히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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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자연을 아우르는 지질해설사라고 자부해 왔지만 지질 글 연재 청을 받고 전공자가 아닌데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하루만에 쓰겠다고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지 20여일만에 완성해 어제 송고했다. 오늘 편집을 거쳐 글이 게시되었다. 제목은 ‘창백한 푸른 점 지구에 색(色) 역사가 있다‘다. 나에게 지질을 가르쳐 주시는 지구과학자 이 교수님, 지질 전공의 지질해설사 박 선생님을 비롯 많은 분들께서 호평을 해주셨다. 


이 교수님은 “정말 훌륭하고 멋진 글입니다. 딱딱한 전문용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저에게 긴 지구의 역사를 파노마라차럼 색이라는 주제로 표현해 주시니 정말 감동입니다. 일반 대중은 물론 지구과학교육자들도 큰 도전을 받을 글입니다. 장구한 시간을 거쳐 오늘의 지구 모습으로 변천해온 지구의 세계를 대중에게 소개해 주심에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라고 말씀해주셨다.


이 말씀에 나의 글의 성격과 위상, 의미 등이 모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감사하다. 생태를 전공한 한 분께서는 ”제가 잘 아는 분야가 아니라 깊은 피드백은 어렵지만 색상으로 이야기를 푸셔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시각일 수 있을 듯 합니다. 다만 시리즈로 발간이 된다면 간단한 주제설명으로 전체적인 흐름을 한번 잡아주셔도 좋을것 같습니다.“란 피드백을 주셨다. 나 역시 어떤 성격의 글을 쓸지 전체적인 흐름을 잡아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감사하다. 다음 달부터 본격적인 지질 여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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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오(深奧)한 앎, 부박(浮薄)한 삶‘(철학자 김영민 교수의 표현)란 말은 경쾌하면서 깊이감이 있다. 각각 이론과 실천을 상징하며 대비되는 앎과 삶이란 단어를 배치했을뿐 아니라 앎은 심오하고 삶은 부박하다니 깊이와 경쾌함은 더욱 그렇다. 위의 지적 놀이는 감람암(橄欖巖)처럼 세 음소가 모두 ㅏ음이 있고 ㅁ받침이 있는 단어를 음미하는 나의 놀이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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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문명과 과학적 사유
최화 외 지음 / 문사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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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문명과 과학적 사유는 철학자들의 사유를 모은 책이다. 근대과학이란 물리학의 발달로부터 출발했다. 갈릴레오가 현실적 사물에 수학을 적용하려 했을 때 그가 완전히 독창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천문학에서는 그보다 먼저 천체의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었고 그런 시도의 원조를 따지자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천문학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플라톤은 수학적 법칙을 천상의 세계에 대해서만 적용했고 갈릴레오는 그것을 지상의 세계에도 적용했다. 천상에만 질서가 있다는 고대의 생각을 뿌리치고(?) 지상에서 질서를 찾으려 한 것이다.(16 페이지) 베르그손은 자유는 우리가 매순간 느끼는 자유의 감정 그 자체이며 어느 정도 자유로운가는 우리 내면의 어느 정도의 깊이에서 나온 행동인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전통 형이상학이건 근대 물리학이건 모두 물질을 이용하려는 지성의 힘에 기반을 두고 세계를 설명한 시도였다면 베르그손은 새롭게 우리의 인식능력은 지성을 넘어서는 측면, 생명의 입장에서 지성의 자리를 한계지을 수 있는 측면을 지닌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철학은 이제 전통 형이상학을 완전히 뒤집어 정지체에서 운동으로, 본질에서 기능으로, 형상에서 지속으로, 공간에서 시간으로의 역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닫힌 우주에서 열린 우주로, 형태 중심에서 유전 중심으로, 성년 중심에서 연속성의 담지자인 씨앗 중심으로, 개체에서 종으로, 도덕률에서 상황으로, 무감동에서 참여로 등의 변혁이 베르그손에게서 일어난 것이다. 정지가 존재에서 운동이 존재라는 말로 바뀐 것이다. 생물은 운동하지만 자신임을 잃지 않는다. 자발적 운동은 말하자면 모순적 운동인데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운동이 베르그손이 말한 지속(持續)이며, 지속이야말로 진정한 존재라는 것이 바로 운동이 존재라는 말의 의미다


운동이 존재라는 말은 진정한 존재는 운동이라는 의미다. 운동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부단(不斷)히 타자화되는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운동했음에도 타자화되지 않고 자기동일성을 잃지 않는 운동이다. 기억이 지속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해준다. 그러한 생명의 존재방식은 지성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베르그손은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초()지성주의다. 지성은 주어진 것들의 배열을 달리할 수 있을 뿐이지만 창조는 배열 정도가 아니라 주어진 것 자체를 즉 없던 것을 새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 이성은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근세에 와서 더욱 주목받기 시작했다. 과학은 인간 이성이 이룩한 위대한 결과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맞추어 인간 이성을 다소 제한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도 생겨났다. 이른바 수학적, 과학적 이성 또는 과학적 합리성의 틀에 따라 이성이 마치 오성과 같이 규정되는 것이다. 근대의 과학적 합리성의 토대를 이룬 것은 바로 근대 물리학을 가능하게 한 수학(기하학)이다.(85 페이지


아인슈타인은 많은 철학책들을 읽고 철학에 대해 많이 알고 생각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철학적 배경이 상대성 이론을 만들어내는데 긴요한 기여를 했다. 아인슈타인은 또한 자신이 만든 상대성 이론이 가지는 철학적, 물리학적 함의를 설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반대로 오늘날의 물리학자들은 철학적인 문제로 간주되는 시간, 공간에 대한 물리학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144 페이지) 제네시스를 쓴 이탈리아 물리학자 귀도 토넬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등을 쓴 카를로 로벨리는 어떤가


동양과학의 발화는 주의를 끈다. 조셉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전개된 논지는 중국에도 과학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인과율에 의한 과학은 없었다. 동양과학문화에서 인과는 중요 담론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니덤은 중국과학이란 말은 자유롭게 썼다. 미국인 중국학자 나탄 시빈(Nathan Sivin)은 니덤의 생각을 비판했다. 중국인들이 자연을 정리하는 방식은 유별(類別; classification)이었다. 그들은 인과 대신 유별을 이론적으로 다듬어 나갔다


유별은 서양에도 있었지만 중국의 유별은 독특했다. 미셸 푸코는 중국의 유별을 접한 후 충격에서 비롯된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고 썼다. 그것이 그가 말과 사물이라는 지식의 분류학에 관한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였다. 동물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료로 처리하여 방부 처리된 동물, 사육동물, 젖을 빠는 돼지, 인어, 전설상의 동물, 주인 없는 개, 광폭한 동물, 셀 수 없는 동물, 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질 수 있는 동물 등등.. 


조선조 회화에 대한 인식은 시대적 정치적 배경에 따라 변화했다. 조선초기에는 조선왕조 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따라 대체로 회화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다. 국가의 기틀을 잡고 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며 왕조를 안정시키는 것이 시대적으로 당면한 과제였다. 문인사대부의 역할 또한 유교이념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며 국가안정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이는 시(), (), ()를 비롯한 예술일반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초기에는 개국에 따라 국가의 기틀을 잡고 공고히 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였기 때문에 여기적 활동인 예술 활동에 집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림 그리고 글씨를 쓰며 즐기는 일은 여기(餘技), 소도(小道), 천기(賤技), 말기(末技), 잡기(雜技)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도본말예(道本末藝), 완물상지(玩物喪志)로 대표된다. 조선 전기의 문인인 강희안(姜希顏; 강희맹의 형)은 당대 최고라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오히려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보았다


성종실록에도 회화는 잡기(雜技)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비록 회화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다 해도 이런 인식이 그림을 비롯한 예술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로 이어지지 않았다. 완물상지를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작품 활동에만 매달려 도를 구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회화에 대한 인식은 조선후기에 두드러진다. 조선후기는 양란을 거치며 국가적 위기상황이 있었지만 왕조가 안정되었으며 도시가 발달하고 경제적으로도 발전하여 문화적 욕구가 상승한 시기다


사회 전반적으로 문화적 수준이 높아졌으며 그 결과 조선초기의 회화인식과는 달리 회화할동을 공공연한 문인의 활동으로 내세울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미수 허목, 표암 강세황, 추사 김정희 등에서 회화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수 허목은 무릇 기예의 오묘한 경지란 전념하지 않으면 터득할 수 없다며 그림도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집중적인 노력과 지속적인 탐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문을 하는 태도로 회화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회화가 더 이상 완물상지로 폄하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그림에 속기가 없고 고상하며 글씨 또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평한 강세황은 영조의 말에 따라 절필(絶筆; 그림 그리는 것 그만 둠)했던 인물로 문인화의 기본 개념으로 속()과 아()를 들었다. 조선후기 문인화론의 완성은 김정희에서 이루어졌다. 김정희는 강세황을 비판했다. 사실 그대로 그리는 것을 지양(止揚)한 것이다. 동기창(董其昌)은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란 말을 했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의 여행을 떠나라는 말이다. 김정희도 가슴 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는 김정희가 처음 쓴 말로 서권기의 핵심은 다독(多讀)이다. ()을 칠 때 서권기가 필요했다. 조선에는 난이 서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을 직접적으로 관찰하고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중국의 화첩(畫帖)을 보고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사난(寫蘭)의 어려움이 제기되었으며 난은 특히 사의를 드러내는 화목으로 여겨졌다. 이런 배경에서 난초의 사의성은 학식과 문자적 의미와 연관을 갖게 된다. 서권기는 자신의 뜻을 잃지 않고 지켜나간다는 의미로도 쓰였다


김정희가 말하는 문자향 서권기란 문인화가 갖추어야 하는 학식 인품 등 여러 덕목을 통합적으로 포함하는 다의적 용어로 쓰였다. 김정희는 회화에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적용하여 논하며 회화를 도의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게 하며 학문과 동등한 지위를 갖추게 했다. 격물치지는 사물에 가까이 이르러 그 사물의 이치<; >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회화를 격물치지의 수준에서 논의하면 그림은 더 이상 잡기가 아니며 그림에서도 도를 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뛰어난 학문과 예술의 경지는 단지 실사구시의 방법을 따르고 격물치지적 태도를 취하는 것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학습을 통한 깨달음을 내면화하고 실천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한 내적 성숙이 필요하다김정희는 그림 그리는 자에게는 무자기(毋自欺) 즉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우리는 종종 말에 속는다. 말들은 우리가 무심코 창 밖을 바라볼 때 거기에 있는 창문 유리창처럼 결코 투명한 매체가 아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지도는 영토가 아니고 개란 관념은 짖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박하게도 저 창문처럼 말들을 투명한 것으로 믿기를 좋아한다. 그런 말들은 투명한 듯 보이지만 이미 상당한 두께를 가진 색유리와 같다. 나아가 그것은 심지어 우리의 유용성과 행위의 관점에서 실재를 조각내고 절단해 명사, 형용사, 동사로 굴절시킨다. 물론 이러한 굴절은 그 자체 오류는 아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 또한 실재의 일부이며 우리 지성의 결과인 과학이 파악한 세계는 실재의 반을 표현한다


단 이것으로 나머지 반을 모두 설명하고자 할 때 문제와 오류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물리 화학적 체계로, 유기체현상으로 모두 설명을 하고자 할 때가 그렇다. 베르그손은 햄릿이라는 걸작은 사실상 전혀 예측불가능한 창조적인 작업(지속, 직관, 생명이 갖는 본질적인 특성)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햄릿이 나오고 난 이후에야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쓸 가능성을 갖고 있었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햄릿과 동시에 또는 이후에 성립되는 가능성을 과거로 역투사한 것이며 착각에 불과하다. 즉 회고적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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