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스님께서 생의 말년을 보내시고 입적하신 심우장(尋牛莊)에 간다.

스님이자 시인이셨던 분답게 당호(堂號)가 선종에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으로 비유되는 소를 찾는다는 의미의 심우장이다.

시인이 간결하고 새로운 시어를 끊임없이 찾듯 선사도 오매불망의 념으로 깨달음을 찾으니 수행자로서 시인의 삶을 사신 만해 스님의 삶은 조화롭기 그지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스님의 삶은 절대 예사롭지 않았다.

스님은 일제의 수탈 정책에 항거하는 의미로 경성 명진 측량 강습소를 개설해 측량 기술 및 측량 기기 사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출가 이후에도 기행과 파격의 삶을 거두지 않았던 만해는 오세암에서 봄을 지낸 뒤 백담사에서 사전(私錢)을 가지고 서울 계동 43 번지에서 유심(惟心)이라는 잡지를 창간한다. 1918년의 일이다.

내가 만해를 정신분석하기에는 무리이기에 말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만해의 삶 역시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만든 틀 안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평소에 거의 거론하지 않았던 만해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시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집 ‘님의 침묵‘을 하룻 밤에 쓴 파격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만해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분인데 내 관심은 그의 기행과 파란, 파격 등이 그의 시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에 닿아 있다.

눈이 내리는데도 순례를 하게 된 것은 오늘 말고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3월 1일 이전 독립정신과 문학정신을 중심으로 만해에 대한 글을 정리해야 한다.

심우장 한 곳을 방문하는 것으로 얻어낼 것은 별로 없으니 이번 나들이는 내 정신의 환기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이제 곧 한성대 입구역에 내리게 된다. 눈이 그쳐 우산 없이 걸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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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시 강의를 듣기 위해 용산 도서관에 갑니다.(매월 마지막 수요일에 열리는 이 수업은 올 한 해 계속될 것입니다.)

뇌는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고, 신(神)처럼 무겁다는 말을 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이 생각납니다.

그는 카타르시스의 하나로 시를 썼다고 말합니다. 시인들은 증상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박지영 시인/ 정신분석비평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증상은 다양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불안입니다. 불안은 공포와 비교되곤 합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불안은 알지 못하는 막연한 무언가에 대한 감정이고, 공포는 구체적인 위협대상에 관한 감정이라지요.

공포로 가득 찬 뇌에는 꿈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 말의 진위(眞僞)를 가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랑과 증오가 우리 속에 존재하며 우리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요동친다(릭 핸슨, 리처드 멘디우스 지음 ‘붓다 브레인’ 199 페이지)는 글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신경심리학자이자 명상 지도자인 두 저자는 우리 모두는 마음 속에 사랑의 늑대와 증오의 늑대라는 두 마리 늑대를 키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궁금한 것은 ‘공포와 꿈‘의 관계가 ’사랑과 증오‘의 관계와 같은가, 같지 않은가, 입니다.

공포와 꿈은, 사랑과 증오가 빛과 그림자처럼 어우러지듯 그렇게 빛과 그림자의 관계로 붙어 있거나 양가감정으로 함께 자리하는가, 란 궁금증입니다.

초기불교 명상 시간에 배운 내용 중 마음은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마음은 쉬지 않고 요동치는데 한 순간에 두 가지 이상의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애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 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쉼없이 왔다 갔다하기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공포에 점령된 영혼은 꿈을 꿀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랑과 증오는 하나의 감정이 활성화할 때 다른 감정은 의식 아래로 내려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하기에 미워할 수 있지만 공포스럽기에 꿈을 가진다(공포스러운 순간에 꿈을 가진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두려움과 불안(과 비교되는 공포까지)을 없앨 수 있는가, 입니다.

시치료(poetry therapy)는 어떨까요? 시치료의 이론적 배경은 다섯 가지라고 합니다.

통풍작용, 카타르시스, 자신에 대한 탐구과정, 감정공유에 의한 지지요법, 언어에 의한 적극적 통찰, 이해하기 등입니다.(김종주 지음 ‘이청준과 라깡’ 492 페이지)

시를 읽고 쓰기보다 분석부터 하려는 저에게도 시치료의 구원(救援)이 찾아들까요?

내일 저는 시인의 시 강의에 집중할 것입니다.(내일 강의는 이승희 시인의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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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평론가 김현 선생의 저서 가운데 ‘제강의 꿈‘이란 평론서가 있다.

‘행복의 시학‘과 함께 김현 문학 전집의 아홉 번째 책으로 발간된 ‘제강의 꿈‘의 제강은 ‘장자‘에 나오는 신(神)의 이름이다.

눈, 코, 입, 귀가 없는 제강은 춤과 노래를 잘 하고 또 즐기는 특별한 재주까지 지닌 존재이다. 혼돈은 제강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제강의 꿈‘이 가스통 바슐라르를 다룬 ‘행복의 시학‘과 함께 전집의 아홉번째 책으로 묶인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동양과 서양, 신화와 미학 또는 시학의 적절한 어울림을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김현 선생을 언급하는 것은 최근 읽은 ‘은유와 마음‘에서 저자인 명법 스님이 프랑스 미학이론가들을 열거했기 때문이다.

최근 우주율동우주라는, 춤을 위주로 한 창작 연희극이 공연되었다.

이 극은 객석과 무대가 경계없이 오픈되었고 줄거리가 즉석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질서와 혼돈 사이의 기묘한 관계에 초점을 둔 우주율동우주는 카오스가 무질서가 아니라 무한 질서라는 심오한 의미를 담아낸 극이다.

물론 나에게는 우주가 어떻게 율동하는가보다 무질서와 무한질서의 차이가 더 의미있게 여겨진다.

우주율동우주를 소개한 한 기자는 우리 모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관계망 속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이 기사를 읽고 생각한 것은 최근 나온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란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많은 것이 많은 것과 연관되어 있지만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관된다는 주장은 잘못이라 말한다.(22 페이지)

젊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관되었다는 주장에 경도되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관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지지를 거둔 상태이다. 지극히 관념적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제강의 꿈‘과 ‘행복의 시학‘을 다시 읽을 생각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넘어갔던 부분들이 이해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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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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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현재의 논란은 결국 현재의 학문 권력 구조에 대한 정사(正邪) 논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전제를 가진 책이다. 역사는 현대사란 말이 생각난다. 저자는 과거나 지금이나 자신이 믿는 지주(支柱)는 진실의 힘, 하나 뿐이라 말한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 우리 역사학계는 팩트를 외면하고 조작해내는 사람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저자는 자신의 책에 담긴 내용만이 진실이라고 강변하고 싶은 마음은 없고 진실에 좀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한 흔적은 있다고 봐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한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의 다른 제목은 '읍혈록(泣血錄)'이다. 저자가 말했듯 한가한 날의 기록이란 뜻의 '한중록'과 피눈물의 기록이란 뜻의 '읍혈록'은 너무 거리가 멀다.

저자에 의하면 영조 일가에 대한 '한중록''영조실록'의 기록은 너무 판이하다. 양식 있는 역사가라면 모순되고 상반되는 자료들을 면밀히 고찰해 진실을 밝히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한중록'의 저자인 혜경궁 홍씨에게 한()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친정의 몰락이었다. '한중록'은 모두 네 편으로 구성되었다. 정조 생전에 쓴 1편과 정조 사후에 쓴 2, 3, 4편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사뭇 다르다.

혜경궁 홍씨는 1편에서는 사도세자에 대한 비난을 전혀 하지 않았다. 반면 2~ 4편에서는 사도세자를 극도로 비난했다. 정조는 사건 당시 열한 살의 어린 나이지만 사건의 진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조 치세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병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도세자의 정신병 주장은 정조 사후에야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쓴 이유는 사도세자의 비극은 영조의 이상 성격과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충돌한 결과이지 자신과 친정은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강변하기 위한 것이었다.

삼종의 혈맥이란 말이 있다. 효종, 현종, 숙종의 세 임금이 삼종이다. 혈맥이란 피의 흐름을 말한다. 삼종의 혈맥이란 말에는 세 임금의 왕위 계승이 정당하다는 방어 논리가 담겨 있다.(62 페이지) 이는 그들의 왕위 계승이 정당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뜻한다.

정당하다면 그런 논리가 필요 없을 것이다. 영조는 훗날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고서도 어릴 때의 세자는 실로 성인의 자질이 있었다고 말했다.(72 페이지) 영조는 세자의 자질이 남다름을 의심하지 않았다.(73 페이지)

조선시대에 세자를 교육시키기 위해 세자 시강원에는 당대 제일의 학자들이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사부는 세자의 스승이었다. 사부는 사와 부를 일컫는 말이다. 사부는 정1품 최고위직으로 사는 영의정이, 부는 좌의정이 겸임했다. 사도세자는 태어난 당일 원자로 책봉되었다.(67 페이지)

조선은 신하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한 나라였다.(57 페이지)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다는 택군(擇君)이란 말이 단적으로 그런 점을 드러내보인다.(87 페이지) 고묘(告廟)란 종묘에 알리는 것을 말한다. 왕조 국가에서 선왕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 고했다는 것은 바꿀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고묘까지 끝낸 원자 정호를 정면에서 반대한 인물이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다.

영조는 두 가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어머니 숙빈 최씨가 낮은 신분이었던 데서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종(景宗) 독살설로 인한 것이다.(115 페이지) 후자는 콤플렉스라기보다 원죄라 해야 할 것일 수도 있다. 이 원죄는 영조를 평생 따라다녔다. 영조는 복잡한 정신 상태를 가진 인물이었다.

영조에게 어머니는 효성(孝誠)의 대상이자 천인의 피가 흐른다는 자괴감을 심어준 부정(否定)의 대상이었다.(116 페이지) 숙빈 최씨는 영조가 임금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숙종 443월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노론의 지지로 왕이 되었지만 노론의 임금이 아닌 모든 당파의 임금이 되려 했다. 영조는 탕평책을 추진해 소론 영수 이광좌에게 영의정을 제수(除授)했다.(제수는 임금이 천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를 직접 임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영조는 화해의 터전 위에서 과거가 아닌 미래를 지향하는 정치에 치중했다면 훨씬 더 많은 업적을 남겼을 것이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124, 125 페이지) 영조는 결코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영조는 표면상 탕평을 추진했지만 마음 속에는 깊은 당심(黨心)과 소론에 대한 증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두 가지가 극대화하면서 사도세자의 비극이 극대화한 것이다. 영조는 다섯 살의 세자에게 양위(讓位)하겠다며 소동을 피웠다. 이 소동은 임인옥사 때 사형당한 서덕수를 신원한 자신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사직(辭職)으로 항의한, 사도세자의 스승 이광좌에게 영조가 놓은 맞불이었다.

영조는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에게 대리청정은 역모가 아니며 자신은 왕위에 초연하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거적을 깔고 전교(傳敎)를 거두어 달라고 대죄(待罪)해야 했던 사도세자였다.

이 아프고 안타까운 역사를 돌아보는데 어찌 슬픔이 없겠는가. 사도세자는 삼종의 혈맥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어질다는 의미의 선()이었다. 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치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혜경궁 홍씨는 대를 이은 노론 집안이었다.

세자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노론이었다.(162 페이지) 대비 인원왕후, 법적인 어머니 정성왕후 서씨, 생모 선희궁, 아내 혜경궁 홍씨 등이 모두 노론이었다. 사도세자는 "해는 동쪽에서 솟아 사해(四海)를 밝히고/ 달은 중천에 솟아 만산(萬山)을 비추도다"란 시를 지었다. 열 살 때의 일이다.

해와 달은 어느 특정 지역이나 특정 당파만을 비추는 존재가 아니라 사해와 만산을 두루 비추는 존재이다. 이것이 사도세자가 추구한 길이었다.(165 페이지) 무왕(武王)을 추구(엄밀하게 말해 문무겸전을 추구)한 세자의 행보도 영조와의 갈등거리로 작용했다.(171 페이지)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는 대신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려 한 차원의 포석이었다.(177 페이지) 영조가 사도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경종을 독살했다는 설에 시달렸던 영조는 자신의 병을 운운했는데 이는 경종이 병이 있어 왕위를 물려준 것이라 말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이다.(178 페이지)

영조는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을 감시에 가까울 정도로 지켜보았다. 사도세자에게는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 효성과 비범함이 있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이런 점을 자랑스러워 했다. 영조는 화협옹주(사도세자의 누나) 사후 다시 양위 소동을 벌였다.(191 페이지)

육순을 앞둔 영조가 과거의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였다. 영조가 양위를 선언하자 가장 다급해진 사람은 사도세자였다. 홍역을 앓고 있던 사도세자는 병색이 채 가시지 않은 몸으로 눈비를 맞으며 작은 가마를 타고 급히 송현궁으로 향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무려 13일을 버틴 후에야 양위하겠다는 뜻을 거두었다.(199 페이지) 영조는 나주벽서사건의 당사자를 능지처참시키는 현장에 사도세자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세자에게 소론에 대한 분노를 고스란히 전하려는 의도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경종 때 자신을 역적으로 몰았던 소론에 대한 분노를 고스란히 전하려 했다.(217 페이지) 영조는 나주벽서사건을 일으킨 윤지의 아들 윤광철이 사지가 잘려 피가 튀는 참혹한 모습을 사도세자에게 보게 했다. 영조는 광기의 인물이었다. 세자는 영조가 이성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세자는 이 살육전의 한 가운데에 영조의 과거가 있고 황숙(경종)의 비극이 있다고 생각했다.

영조는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 상황에서 선왕(경종)이 자신을 지극히 사랑했고 자신은 경종을 극진히 공경했다는 말을 셀 수 없이 많이 했다. 이는 영조의 경종 독살설을 강하게 추정하게 하는 증거였다. 영조는 나주벽서사건을 소론 전체를 적당(賊黨)으로 모는 계기로 삼았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경종 시절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은 문제가 있는 행위로 생각했다.(220 페이지)

사도세자에게 노론이 경종을 대신해 영조를 세제가 되게 해 대리청정을 하도록 한 것을 택군으로 규정했다. 사도세자는 그런 와중에서도 소론이 세제(영조)를 도운 것을 생각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복수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행위라 생각한 것이다. 세자는 정치보복을 막고 소론을 보호하기 위해 고심했다.(221 페이지)

세자의 눈에 영조는 이성을 잃고 노론에 끌려다니는 것으로 보였다. 세자는 분명한 태도로 영조와 노론에 저항했다. 노론은 세자가 자신들과 다른 정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하고 소론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222 페이지)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 투서사건으로 소론은 재기불능 상태에 몰렸다.(229 페이지)

토역경과 사건으로 국문을 받던 신치윤은 영조와 인윈왕후 김씨를 겨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갑진년(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한 1724) 이후 게장을 먹지 않았소" 그는 경종이 대비와 영조가 올린 게장과 생감을 먹고 죽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했다.(232 페이지) 문무를 겸비한 세자는 북벌을 꿈꾸었다.

세자가 자신의 세계관을 갖게 되면서 영조와 갈등이 빚어졌다. 노론은 세자를 모함했고 이로 인해 세자에 대한 영조의 신뢰도 차차 무너졌다.(251 페이지) 부왕의 신뢰가 차차 식어가자 세자는 영조에 대한 진현(進見)을 꺼리게 되었다.

영조는 다섯 살의 세자에게 양위(讓位)하겠다며 소동을 피웠다. 이 소동은 임인옥사 때 사형당한 서덕수를 신원한 자신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사직(辭職)으로 항의한, 사도세자의 스승 이광좌에게 영조가 놓은 맞불이었다.

영조는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에게 대리청정은 역모가 아니며 자신은 왕위에 초연하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거적을 깔고 전교(傳敎)를 거두어 달라고 대죄(待罪)해야 했던 사도세자였다.

이 아프고 안타까운 역사를 돌아보는데 어찌 슬픔이 없겠는가. 사도세자는 삼종의 혈맥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어질다는 의미의 선()이었다. 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치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혜경궁 홍씨는 대를 이은 노론 집안이었다.

세자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노론이었다.(162 페이지) 대비 인원왕후, 법적인 어머니 정성왕후 서씨, 생모 선희궁, 아내 혜경궁 홍씨 등이 모두 노론이었다. 사도세자는 "해는 동쪽에서 솟아 사해(四海)를 밝히고/ 달은 중천에 솟아 만산(萬山)을 비추도다"란 시를 지었다. 열 살 때의 일이다.

해와 달은 어느 특정 지역이나 특정 당파만을 비추는 존재가 아니라 사해와 만산을 두루 비추는 존재이다. 이것이 사도세자가 추구한 길이었다.(165 페이지) 무왕을 추구(엄밀하게 말해 문무겸전을 추구)한 세자의 행보도 영조와의 갈등거리로 작용했다.(171 페이지)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는 대신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려 한 차원의 포석이었다.(177 페이지) 영조가 사도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경종을 독살했다는 설에 시달렸던 영조는 자신의 병을 운운했는데 이는 경종이 병이 있어 왕위를 물려준 것이라 말하려한 결과였다.(178 페이지)

영조는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을 감시에 가까울 정도로 지켜보았다. 사도세자에게는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 효성과 비범함이 있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이런 점을 자랑스러워 했다. 영조는 화협옹주(사도세자의 누나) 사후 다시 양위 소동을 벌였다.(191 페이지)

육순을 앞둔 영조가 과거의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였다. 영조가 양위를 선언하자 가장 다급해진 사람은 사도세자였다. 홍역을 앓고 있던 사도세자는 병색이 채 가시지 않은 몸으로 눈비를 맞으며 작은 가마를 타고 급히 송현궁으로 향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무려 13일을 버틴 후에야 양위하겠다는 뜻을 거두었다.(199 페이지) 영조는 나주벽서사건의 당사자를 능지처참시키는 현장에 사도세자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세자에게 소론에 대한 분노를 고스란히 전하려는 의도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경종 때 자신을 역적으로 몰았던 소론에 대한 분노를 고스란히 전하려 했다.(217 페이지) 영조는 나주벽서사건을 일으킨 윤지의 아들 윤광철이 사지가 잘려 피가 튀는 참혹한 모습을 사도세자에게 보게 했다.

영조는 광기의 인물이었다. 세자는 영조가 이성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세자는 이 살육전의 한 가운데에 영조의 과거가 있고 황숙(경종)의 비극이 있다고 생각했다. 영조는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 상황에서 선왕(경종)이 자신을 지극히 사랑했고 자신은 경종을 극진히 공경했다는 말을 셀 수 없이 했다. 이는 영조의 경종 독살설을 강하게 추정하게 하는 증거였다.

영조는 나주벽서사건을 소론 전체를 적당(賊黨)으로 모는 계기로 삼았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경종 시절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은 문제가 있는 행위로 생각했다.(220 페이지) 사도세자에게 노론이 경종을 대신해 영조를 세제가 되게 해 대리청정을 하도록 한 것을 택군으로 규정했다. 사도세자는 그런 와중에서도 소론이 세제(영조)를 도운 것을 생각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복수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행위라 생각한 것이다. 세자는 정치보복을 막고 소론을 보호하기 위해 고심했다.(221 페이지) 세자의 눈에 영조는 이성을 잃고 노론에 끌려다니는 것으로 보였다. 세자는 분명한 태도로 영조와 노론에 저항했다.

노론은 세자가 자신들과 다른 정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하고 소론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222 페이지)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 투서사건으로 소론은 재기불능 상태에 몰렸다.(229 페이지)

토역경과 사건으로 국문을 받던 신치윤은 영조와 인윈왕후 김씨를 겨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갑진년(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한 1724) 이후 게장을 먹지 않았소" 경종이 대비와 영조가 올린 게장과 생감을 먹고 죽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232 페이지) 문무를 겸비한 세자는 북벌을 꿈꾸었다.

세자가 자신의 세계관을 갖게 되면서 영조와 갈등이 빚어졌다. 노론은 세자를 모함했고 이로 인해 세자에 대한 영조의 신뢰도 차차 무너졌다.(251 페이지) 부왕의 신뢰가 차차 식어가자 세자는 영조에 대한 진현(進見)을 꺼리게 되었다.

세자가 노론의 행위를 몹시 미워하자 김상로가 "동궁께서 신임사건(경종 1- 2)에 대하여 그릇된 소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자 세자는 황숙(경종)께서는 무슨 죄입니까라고 물었다. 이로 인해 영조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252 페이지) 세자가 영조의 상처이자 콤플렉스인 경종 독살설을 건드린 것이다.

영조는 아들과의 갈등을 스스로 해소하지 못하고 신한들을 끌어들였다. 세자는 영조와 달리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주벽서사건과 4대신 정려 상서 사건을 통해 뚜렷하게 드러난 세자의 반노론 친소론의 자세는 노론으로 하여금 세자의 즉위에 두려움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온양 행차를 통해 세자의 위의(威儀)가 드러났다. 세자가 포악하다는 말, 정신병이 있다는 말을 조직적으로 전파한 노론은 급해졌다. 세자는 드러난 일에 대해서는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 무인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291 페이지) 노론은 세자의 진현 거부와 관서행이 표면적으로 해결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298 페이지)

다른 계책을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노론은 세자가 영조가 급서했을 경우 노론이 자행할지도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해 마련한 자구책을 역모로 모는 방법을 강구하기로 했다.(301 페이지) 나경언을 사주해 엄청난 일을 고하게 한 것이다. 세자의 난행과 비행은 역모를 꾸미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영조는 신하들 앞에서 세자를 준열하게 책망했다.

홍봉한은 세자를 죄인과 같은 뜰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청했다. 이는 세자와 나경언의 대질을 막아 세자의 변명 기회를 봉쇄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312 페이지) 세자가 나경언과의 대질을 요구하자 영조가 세자를 크게 꾸짖었다. 영조는 세자와 나경언의 대질을 나라를 망칠 일로 규정했다.

저자는 대리청정하는 저군(儲君; 왕세자)을 상민이 고변했는데 세자를 역모자로 모는 현실 자체가 나라를 망칠 일이라 말한다.(313 페이지) 세자는 나경언의 고변은 사실로 받아들여진 반면 자신은 변명 기회조차 얻지 못하자 억울하고 분했다.

세자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일개 남의 십 청지기가 대리청정하는 저군을 상대로 혼자 이런 일을 벌였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나경언은 저군을 고변한 이상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경언은 자신이 세자를 모함(謀陷; 나쁜 꾀를 써서 남을 곤경에 빠트림)했다고 자백했다.(314 페이지)

나경언이 모함한 것이 밝혀졌지만 세자에게 돌아온 것은 영조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영조는 세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변명 기회도 주지 않았다.(314 페이지) 세자는 나경언이 고변한 후 아흐레째 매일 새벽이면 동궁 관원들과 함께 시민당 뜰에 나와 거적을 깔고 앉아 영조의 명을 기다렸다.(319 페이지)

그러나 영조는 세자에 대한 분노를 철회하지 않았다. 영조는 세자의 무엇에 그토록 분노한 것일까? 영조는 세자를 정적이자 왕위를 위협하는 역적으로 보았다.(322 페이지) 영조는 세자 문제를 혜경궁 홍씨의 주장과 달리 정신병이 아닌 정치와 군사 차원으로 보았다.(326 페이지) 혜경궁 홍씨는 세자를 정신병자로 몰았다.

노론이 세자가 즉위하면 자신들이 위험해질 것이라 생각했다면 세자는 영조가 죽으면 자신을 죽이리라고 생각했다.(328 페이지)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신이 죽으면 3백년 종사가 망하고 네가 죽으면 종사는 보존될 것이니 네가 죽는 것이 옳다고 말하며 자결을 명했다.(333 페이지)

영조가 세자에게 왜 자결하지 않냐고 하교를 내리자 세자는 용포를 찢어 목을 맸고 이에 세자시강원의 강관들이 풀어주기를 몇 차례 되풀이했다.(336 페이지) 이때 뒤주가 뜰 가운데 놓였다. 영조에게 뒤주에 세자를 죽이면 된다는 착상을 전한 인물이 세자의 장인 홍봉한이었다.

홍봉한이 세자를 죽인 범인이란 말은 타당한 말이다. 세자는 영조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세자는 결국 뒤주 속에 들어갔다. 뒤주에 큰 못이 박히고 동아줄이 단단하게 둘러처졌다. 세자는 폐하여 서인(庶人; 벼슬이 없는 일반 백성)이 되었다.(339 페이지) 세자는 영조 38년 윤 513일부터 21일까지 뒤주에 갇혔다. 홍봉한은 자신이 죽인 사위 앞에서 악어의 눈물을 흘렸다.(346 페이지)

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신음하는 동안 그를 풀어달라고 요청한 대신들은 아무도 없었다.(347 페이지) 오히려 세자의 측근들이라는 이유로 윤숙과 임덕제는 유배당하고 서필보, 정중유 등은 목이 잘렸다. 세자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조재호는 위리안치되었다. 세자의 가족들 중 세자를 살려달라고 애절하게 빈 인물은 세손(정조) 뿐이었다.(350 페이지)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이 홍봉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시에도 많았다.(353 페이지)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지리할 정도로 반복한 말이 있다. 그것은 '세손을 위하는 우리 부친(홍봉한)의 고심혈충을 누가 알리오'란 변명이다. 홍봉한이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는 것이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은 결국 세손(정조)을 제거하려고 했다. 물론 사조세자를 죽인 노론이 아무리 강성해도 삼종의 혈맥을 배제할 수 없었다. 혜경궁은 당론에 따라 남편을 버렸지만 아들마저 버리라는 당론은 따를 수 없었다.(358 페이지) 그래서 세손에 대한 풍산 홍씨의 단일 전선은 흔들렸다.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은 세손은 정사(政事)를 알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했다. 세손이 왕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었고 세손을 제거하겠다는 선언이었다.(359 페이지)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홍인한마저 변호했다. 세손을 위해 홍인한이 대리청정을 반대했다는 부분 역시 노회한 혜경궁의 모순된 거짓에 불과했다.

혜경궁의 비극과 모순은 남편은 버릴 수 있으나 아들은 버릴 수 없었다는 데서 출발한다. 열한 살에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본 세손은 스물 다섯이 되어 즉위했다. 즉위 일성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란 말이었다.(370 페이지)

혜경궁은 조선 왕가의 연인들 중 누구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그것은 진정 애통해야 할 억울한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억울한 죽음의 가해자를 위한 것이었다.(378 페이지) 정조는 때를 기다렸다. 그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왕조 국가 조선의 파탄으로 보았다. 노론 일당 전체의 정치 구조로는 미래로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384 페이지)

정조는 노론의 서울이 아닌 국왕의 서울, 사도세자의 서울, 백성들의 서울을 만들기로 했다. 정조에게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존재는 벗어날 길 없는 뫼비우스의 띠였다.(407 페이지) 정조는 아버지의 원한을 씻으려면 어머니가 울고 어머니를 위로하자니 지하의 아버지가 통곡하는 형국이었다.

노론은 경종을 독살했으며 선왕 영조를 그릇된 길로 오도했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당이었다. 노론은 시대의 요구와는 달리 극도의 사대주의와 신분제 강화, 남녀차별 극대화의 세력이었다. 정조는 아버지가 노론에게 죽임을 당한 이유 중 하나가 너무 서둘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조는 초인적인 의지를 지닌 인물이었다.

안타깝고 원통하게도 정조는 독살되고 만다. 정조는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고 나선 노론의 이시수에게 조만간 결말이 날 것이란 말을 했다. 저자는 조만간에 결말이 날 것이란 정조의 말이 노론의 결심을 재촉한 것일까? 아니면 조선은 이미 정조가 아니라 그 누구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폐부 깊숙이 썩었던 것일까? 란 말을 한다.(414 페이지)

나는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과 정조의 독살을 모두 안타까운 역사의 비극으로 본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대동 국가였다. 그렇기에 사도 세자 역시 왕으로 즉위했다면 아들 정조처럼 개혁군주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눈물을 흘리며 읽었을 만큼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는 아프고 슬프고 분한 마음을 갖게 하는 책이다. 그러나 사도세자와 아들 정조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고 아파하는 이상으로 노론의 행태에 분노하며 책을 읽었다. 역사의 지층을 탐사하는 이덕일 님의 혜안과 용기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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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용어로 말하자면 인플루엔자와 감기는 ‘서로 소(素)‘이다. 무관(無關;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한 것이다.

그들의 무관은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혼자 가는 먼 집‘에 수록된 ‘혼자 가는 먼 집‘ 중 일부)이란 허수경 시인의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결코 서로 소가 아니다. 나는 지금 사흘째 몸살과 맘살을 앓고 있다. 몸살이 맘살을 부른 것이다. 심란(心亂)하고 아프다.

그래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어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를 읽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은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당습(黨習)을 하지 말라고 분부한 부분이다. 당파에 기울어 다른 당을 배척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영조는 다섯 살의 세자에게 양위(讓位)하겠다며 소동을 피웠을 만큼 소인이었다.

이 소동은 임인옥사 때 사형당한 서덕수를 신원한 자신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사직(辭職)으로 항의한, 사도세자의 스승 이광좌에게 영조가 놓은 맞불이었다.

영조는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에게 대리청정은 역모가 아니며 자신은 왕위에 초연하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거적을 깔고 전교(傳敎)를 거두어 달라고 대죄(待罪)해야 했던 사도세자였다.

이 아프고 안타까운 역사를 돌아보는데 어찌 눈물이 없겠는가. 나는 곧 출근을 해야 한다. 눈물을 거두어야 할 시간이다.

허수경 시인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혼자 가는 먼 집‘에 실린 ‘마치 꿈꾸는 것처럼‘ 중 일부)란 말을 했지만 인생에 병가(病暇)라도 내고 싶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혼자 먼 집을 가는 나는 참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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