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미 시인의 ‘리샨‘이란 시에서 육삭(肉爍)이란 단어를 알게 되었다. ˝...찢어진/ 머리가락을 휘날리는 병든 신부여, 피 흐르는 소리에 밤새/ 뒤척이는 우리는 육삭(肉爍)을 앓는 식물들입니다...˝

육삭(肉爍)은 양열(陽熱)이 지나치게 성해 진액이 졸아 살이 마르는 것을 말한다. 위장이 좋지 않아 뜸을 뜨는 내가 늘 염두에 두는 바이다.

정끝별 시인의 작품들 중 ‘춘수(春瘦)‘가 있다. 춘수(春瘦)는 봄 춘(春)과 여윌 수(瘦)를 쓰는 말이다. 육삭과 달리 시인이 만든 말이다. 봄 여윔 정도의 말이다. 수(瘦)는 수척(瘦瘠)하다고 할 때의 그 수이다.

˝마음에 종일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봄이 마른다/ 허리띠가 남아돈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사랑이다/ 길이 더 멀리 보인다˝

정끝별 시인의 시에 공감한다. 내 이야기라 해도 좋은 이야기이다. 사랑이 아니어도 마음이 황량해지고 입이 마르고 몸이 마를 일은 얼마든지 있다.

부끄럽고 안타깝지만 나는 마음이 몸이나 주변 환경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죽는 날까지 보살펴야 할 마음... 무엇으로? 명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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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 정조 시대를 읽는 18가지 시선
이덕일 지음 / 고즈윈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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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소장의 정조와 철인 정치의 시대는 열 여덟 가지 키워드로 정조(正租)의 시대를 조명한 책이다. 눈여겨 볼 부분은 정조 즉 이산(李祘)이 없었다면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죽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이고, 그것을 정조가 알았다는 점이다. 정조는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저주할 상황에 처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철인(哲人) 군주, 학자 군주가 되었다. 연산군(燕山君), 경종(景宗)과는 다른 길을 걸은 것이다.

 

이 책은 반대파인 노론에 의해 삭제 또는 추가된 정조실록이나 일성록등을, 비교적 정조의 육성이 많이 담겨 있는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와 이덕무의 청장관 전서등 개인 문집에 의거해 이야기를 풀어간 책이다. 정조 독살설을 소설 형식으로 서술해내는 것으로 대장정을 시작한 책은 정조가 선왕(先王)이자 할아버지인 영조에 대해 갖는 복잡한 심경을 언급하는 데서 하나의 이슈를 던진다.

 

영조가 아니었다면 세손(世孫: 정조)은 노론 벽파라는 철벽을 넘어설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영조가 없었다면 사도세자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손의 감정은 복잡했다.”(39 페이지) 이미 서문에서 역설적으로 손자가 있었기에 할아버지는 아들을 죽일 수 있었다.”(7 페이지)는 말로 파문(?)을 일으킨 저자이다. 정조의 즉위 일성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란 것이다.

 

영조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노론 벽파에 대비해 재위 40년 세손을 이복 백부인 효장세자에게 입적(入籍)시켰다. 그런 정조의 즉위 일성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노론은 경악했다. 삼십 초반의 임금(경종)을 협박해 연잉군(영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던 노론은 여든 노군주(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 시키겠다는 것은 도끼에 베어져 죽는 한이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나왔다.

 

열한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정조는 노론의 온갖 방해를 이기고 스물 다섯의 나이로 즉위했다. 국왕 즉위 방해는 대역죄(大逆罪)였으나 아무도 이를 문제삼지 않았고 정조도 침묵했다.(57 페이지) 영조와 정조에 관한 기막힌 사연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순 여섯의 영조가 2년 전 사망한 정성왕후 서씨의 뒤를 이어 맞이한,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어린 정순왕후 김씨 이야기이다.

 

영조는 어의궁에서 수줍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 소녀가 훗날 이 나라에 가져올 파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소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손자를 죽이고, 손자며느리는 물론 증손며느리의 피까지 손에 묻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78 페이지)

 

암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세손 시절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던 정조의 습관은 임금이 되어서도 이어졌다.(98 페이지) 정조는 재위 1년 경희궁에서 왕대비, 혜경궁과 함께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는데 이는 자객(刺客) 사건의 여파였다.(100 페이지) 정조가 넘긴 고비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주술로 저주해 죽이려 한 사건이 있었고 반정으로 내쫓은 후 은전군(恩全君: 사도세자와 영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정조의 이복 동생)을 추대하려 한 사건이 있었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 조선 왕실의 비극이었다.”(1215 페이지) 정조와 홍국영의 관계도 복잡하다. 영조 48(1772) 정시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한 홍국영은 세자시강원 설서(說書: 세자시강원의 정 7품직)로 임명받았다. 세손은 혜경궁과 정순 왕후 모두에게 인척이 되는 홍국영이 마땅치 않았지만 설서는 자신이 뽑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적응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정조는 즉위 초 홍국영을 정치적 지주로 높이 평가했다. 정조는 홍국영에게 모든 권한을 주었다. 홍국영은 소론 정권의 등장은 반드시 막고 노론이 정권은 계속 잡되 자신이 노론 영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홍국영의 정국 구상에 넘어가 무리수도 두었다. 그 증 하나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왕에게 공이 있는 신하를 그 왕에게 덧붙여 제사지내는 것)하게 한 것이었다.(141 페이지)

 

정조는 송시열을 천하의 대로(大老)이고 해동의 진유(眞儒)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이 역시 홍국영으로 인한 것이었다. 홍국영은 노론 외척 명가들을 제거하고 자신이 노론의 영수로 나서기 위해서는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조를 움직인 것이다. 정조에게 이는 두고두고 부담이 되었다. 노론은 하은주(夏殷周) 시대에는 군주가 스승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재야 학자들에 유학(儒學)의 도통이 계승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군주는 임금일 뿐이지 스승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임금이 스승이라는 군사(君師)론으로 정국을 이끌려던 정조에게는 악재가 아닐 수 없었다.

 

홍국영은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 조카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으나 후궁(원빈 홍씨)이 된 여동생이 소생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송덕상을 사주해 후사 즉 양자를 들이라는 상소를 하게 했다. 이 역시 홍국영의 무리수였다. 당시 정조 나이 28세였다. 정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정신을 차렸다. 드디어 홍국영을 충심 가득한 신하가 아닌 야망으로 가득 찬 인물로 본 것이다.(145 페이지)

 

홍국영은 원빈 홍씨의 영자로 삼은 완풍군 이담(李裀)을 정조의 후사로 삼으려 했었다.(214 페이지) 정조는 규장각 각신들을 친척처럼 대했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주목받은 인물들이 규장각 검서관들이었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리수 등 모두 서얼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검서관 자리에 서얼들을 기용하자고 한 것은 홍국영이었다는 점이다.(178 페이지)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가 이미 성인이 되었음에도 전교(傳敎)를 내렸다. 아녀자의 정사 개입은 금지되어 있으나 종사와 선대왕의 영령(英靈) 때문에 할 수 없이 한다는 말로였다. 정순왕후 김씨가 내세운 명분은 5월의 변(문효세자의 죽음)9월의 변(문효세자의 모친 의빈 성씨의 죽음)에 배후가 있다는 것으로 지목된 사람은 이담(李裀)이었다.

 

정조는 정순왕후의 한글 전교가 정순왕후의 사적 복수심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았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가 나주에서 세상을 떠난 것을 두고 하게 된 전교였다. 물론 김귀주는 사도세자 살해에 많은 역할을 했는데 정조는 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다른 죄목으로 귀양을 보냈었다.(240 페이지) 정순왕후는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 이인(李䄄)을 죽이려 했다.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이라는 것이 정순왕후의 주장이었다   

 

정순왕후와 노론이 정조를 거칠게 압박할 수 있었던 것은 노론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군의 최고 원로 구선복의 아들 구이겸이 고변에 연루되어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245 페이지) 구선복은 아들과 조카가 명백하게 관련되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 없었다.

 

아들 구이겸이 상계군과 은언군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낸데다 조카 구명겸은 이율, 홍복영 역모 사건에도 관련되었기 때문이었다.(257 페이지) 정조는 하나 남은 이복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단식까지 해야 할 정도였다. 정조가 주목한 것은 남인들이었다. 하지만 남인들은 천주교로 발목이 잡혔다.(261 페이지) 노론은 천주교를 남인 제거의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정조는 국법으로 천주교를 탄압하는 것을 반대했다.(271 페이지) 정조는 정학(正學)이 바로 서면 사학(邪學)은 사라질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사학이 성행하는 것은 성리학자들의 처신이 바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남인 일각에서 천주교를 가장 거세게 공격했다. 정조는 문체반정 정책으로 천주교로 인한 남인의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293 페이지) 이것으로 1권은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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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양자(量子) 뿐 아니라 과학에 별 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에 평행 우주를 소재로 한 아즈마 히로키의 장편 소설인 ‘퀀텀 패밀리즈(quantum families)‘조차 낯설게 느껴진다.

한 때 오컴의 면도날과 브레너의 빗자루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오컴의 면도날은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말한다. 이때 면도날은 필요하지 않은 가설을 잘라내는 도구를 상징한다.

반면 브레너의 빗자루는 스스로 탁월한 아이디어나 명쾌한 통찰을 지녔다고 믿는 사람은 먼저 과감히 발표한 뒤 미해결되거나 채 이해되지 않은 것은 빗자루를 이용해 양탄자 아래로 쓸어버리면 된다는 생각이다.

신학자이자 철학자 오컴(Ockham)과 분자생물학자 브레너(Brenner).

과학을 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오컴의 면도날과 브레너의 빗자루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대립이 책 읽기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현 국면에 바로 도움이 되는 이슈 분석을 위해 소용이 되는 책들만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미래를 대비해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책들이라도 다소 헤프고 무분별하게 읽을 것인가, 이다.

그런데 현재만을 보거나 미래만을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니 이슈가 있다면 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들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들을 읽을 것인가, 가 아닐지?

하지만 이 역시 현명한 문제 설정이 아니다. ‘나‘는 사회 속의 존재이고 사회의 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가 사회비평서인 ‘동물화하는 포스트 모던‘에서 시도한 오타쿠 분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오타쿠를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PC, SF, 특수촬영, 피규어(figure: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입체조형물) 등의 서브컬처에 탐닉하는 사람들이라 설명한다.

아즈마는 오타쿠들이 허구를 중시한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그들이 허구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해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허구와 현실을 저울질한 결과라 설명한다.

책은 어떤가? 허구와 현실의 중간? 아니면 두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는 것? 알 수 없다.

* 이 글에 예스24 블로거의 한 과학 교수께서 오컴의 면도날과 브레너의 빗자루를 책읽기에 비유한 것이 신선하다고 하며 그러나 두 개념이 대립되는 개념이라 생각해오지 않았는데 (내가 그런 글을 쓰니) 그런가 싶기도 하네요란 댓글을 달았다.

이에 나는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며 두 개념이 처음에는 대립하지만 두 개념 모두 결국 불필요한 것들을 소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니 하나로 수렴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란 답을 했다.

이 분은 아킬레스와 거북의 대결(제논의 역설)과 중간화석에 관한 진화론자와 창조론자의 대립을 연결지어 설명한 내 글에 참신하다는 댓글을 다셨던 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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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참담하게 죽은 것이 친부살해적 광기와 적대감을 보이기까지 하다가 부왕 군주 영조에 의해 당한 죽음이 아니라 나주벽서사건으로 전권을 장악한 노론이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이후 정식으로 왕으로 즉위할 경우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판단해 사실을 조작하고 모함해 일으킨 정치권력 차원의 죽임임을 주장한 이주한 지음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을, 일본의 사상가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한 불 속에 들어가 밤을 줍는 즉 화중취율(火中取栗)의 심정으로 읽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하이든의 현악4중주 ‘종달새‘라도 들려올 듯한 맑고 무연한 하늘을 감상하시니 부러운 마음이 커 유신시대에 단 하나의 혈육이던 이모에게서 대학 등록금을 훔쳐 상경한 ‘나‘ 강하원이 생활비 마련이 시급해 우연히 인쇄소에서 잡일을 하게 된 뒤 그 인쇄소를 근거로 지하운동을 하던 문화혁명회의 일을 돕던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을 주조로 하는 최윤 작가의 작품인 ‘회색 눈사람‘의 한 구절인 ˝어쩌면 이 계절의 하늘은 이토록 무연히 맑을까.˝란 문장을, 문화혁명회의 한 멤버인 안이란 성을 가진 사람이 일할 때 가끔 틀어놓던, 높낮이도 없고 비슷비슷하게 연결되어 하오의 잠 같기도 하다고 강하원이 회고한 에릭 사티의 음악과 함께 읊어보니 마치 시화(詩畫)전이 아닌 설악(說楽)전에라도 온 듯 하다고 느껴지는 것을 계기로 이렇듯 사는 것은 스스로 위안을 찾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런 긴 호흡의 문장을 쓴 것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에 나오는 284자에 이르는 긴 문장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숭산. 충청남도 예산에 솟은 산이다. 높지 않다. 해발 495m. 그래서다. 선원도 정상에 바투 자리하고 있다.˝ 같은 짧게 이어지는 문장들로 채워진 어느 필자의 책이 싫어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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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런 유형의 상처를 다시 받지 않을 것‘이란 생각과 ‘나는 저런 유형의 사랑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 갇히는 인간 심리를 누군가 말했다

황주리 화가는 오래 전 나온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에서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 자살을 못해 술집이 더욱 붐빈다는 한 시인의 시를 인용한 바 있다.

인용된 시에 의하면 사람들이 술집을 택하는 것은 그들 나름으로 제3의 길을 택한 것이다.

배부른 소크라테스를 자칭하는 황주리 님은 ˝이 가을 낙엽을 줍는 대신 자살을 하지 않고도 견뎌낼 수 있는 삶의 기쁨 같은 것을 주워 봐야 겠다.˝고 말한다.

어떻든 필요한 것은 사랑의 달콤함만을 보는 단견과 아픔만을 보는 또 다른 단견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이리라.

문제는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랑‘, ‘아픔을 기꺼이 안는 사랑‘을 선택하기에 현실은 너무 변했다는 점이리라. 특히 헬조선의 현실에서는.

최근 흥미 있게 읽은 책이 준 카르본과 나오미 칸의 ‘결혼 시장‘과 우에노 치즈코의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이다.

‘결혼 시장‘에서 저자들은 결혼이 수요와 공급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시장 거래 같은 것이라 주장한다.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에서 저자는 남성이 가족을 부양하고 여성은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는 전통적 결혼형태는 고도성장기에 만들어진 예외적 사례이며 지금과 같은 저성장 시대에는 맞지 않는 개념이라 설명한다.

이런 쓸쓸한 현실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론 나는 두 책의 논지를 전면 수용하지는 않는다. 사랑의 아름다움을 믿기 때문이다.

지금 이주한의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을 읽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신병을 앓다가 당한 개인 차원의 죽음이 아니라 나주벽서사건으로 전권을 장악한 노론에 의한 죽음 즉 정치권력 차원의 죽음임을 알게 된다.

사랑도 그렇다.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는 그런 점에서 시의적절하다. 저자는 마르크스가 상품을 가지고 벌인 일을 감정에, 적어도 낭만적 사랑의 감정에 적용해 보려한 것이라 말한다.

사회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실존적 의미의 사랑의 예들은 의외로 많을 것이다. 그런 예들을 찾아내고 싶다.

물론 사랑의 상처는 개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지극히 사회적임을 역설하는 에바 일루즈의 논의에 공감하며 시작해야 할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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