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 박사의 ‘프로이트의 의자’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성적 갈등이 큰 문제가 되던 예전과 달리 21세기인 지금은 이미 성에 대한 문제는 더 이상 큰 갈등이 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79 페이지) 그리고 이런 글도.. “21세기인 지금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프로이트 생전의 관점 중 일부인 리비도 이론만을 가지고 공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시대착오적인 행위입니다.”(275 페이지) 수긍할 만하다.


하지만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정도언 박사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성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닌 시대로 여겨질 법하다. 이현재 교수의 ‘여성 혐오 그 후, 비체가 된 사람들’을 보면 이런 글이 있다. “남성경제의 영역에서 분명한 것은 어머니든, 처녀든, 娼女든 모든 여성들은 남성경제 안에서 거래되는 상품”이라는 글(24 페이지)이다. “남성들은 재생산용 여성과 쾌락용 여성을 이분화하여 소유함으로써 여성혐오의 지배 구조를 더욱 확고하게 만든다.”는 글(26 페이지)도 그렇다.


남성은 여성을 변함없이 성적 기준 또는 성적 지배구조적 관점에서 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여성 혐오는 여성(이라는 일반적) 대상이 아닌 여성 비체를 향한다고 저자는 말한다.(38 페이지) 비체는 “콧물, 침, 분비물을 뜻하는 비체(鼻涕)처럼 액체성을 지닌, 흐르며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하고 오염된 것이자, 기존의 언어와 질서로는 파악할 수 없는 존재”(비체: 非體)이다.(2016년 11월 11일 한국일보 더러운 주체 ‘비체’… 페미니즘의 주역이 되다)


비체는 아브젝트(abject)라 한다. 부정(否定) 접두사 a와 대상을 뜻하는 object의 합성어이다. 비체는 시뮬라크르와의 비교를 추동(推動)한다. 김혜순 시인은 “나는 그들이 붙여준 이름 그대로 마녀도, 미친 여자도, 괴물도, 매춘부도, 천사도 대모신도 아니다. 그러나 나를 가두는 각종 울타리, 미세한 권력들의 종소리 속에서 나는 미친 여자고, 괴물이고, 매춘부이고, 천사이며, 대모신”이란 말을 한다.(‘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수록 ‘어머니와 처녀라는 허구’: 163 페이지)


자신의 글쓰기는 “안과 밖, 상위와 하위의 동시적 언술“이며 자신은 ”하나의 주체에서 또다른 주체로 끊임없이 흘러다“닌다고 말하는 시인은 자신을 ”처녀이고, 어머니이고, 아기이고, 할머니”라 표현한다.(177 페이지) 내가 비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한 것은 정끝별 시인의 ‘파이의 시학’(2010년 2월 출간)이란 평론집에서이다. 서정주 시인의 ‘질마재 신화’를 비체(아브젝트)로 분석한 글이다.


시인은 아브젝트의 상상력을 “부정(不淨)에 의한 부정(否定)”으로 정의한다.(‘파이의 시학’ 33 페이지) 먹고 마시는 행위를 “죄 많은 육체의 슬픈 필요“로만 여기는 초월적이고 금욕적인 세계관에 반항하는 음식과 관련한 흥겨운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텍스트가 ‘질마재 신화’에 수록된 ‘눈들 영감의 마른 명태’라는 시라고 한다. ”어머니(육체)로부터의 분리에 저항하는 가장 대표적인 음식물 중 하나가 숨이다.“(‘파이의 시학’ 37 페이지)


또한 크리스테바가 말했듯 ”억압과 공포를 심하게 느낄수록 우리는 말을 더 많이 한다. 말이 가득 찬 입으로 말하면서 금기의 원인인 어머니를 배출하고 그 금기가 수반하는 억압과 공포를 치료한다.“(‘파이의 시학’ 50 페이지) 김혜순 시인과 정끝별 시인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어머니이다. 김혜순 시인은 ‘어머니 - 모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란 글에서 ”한 시인이 계속해서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 안의 어머니를 발견해나가는 길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53 페이지)고 운(韻)을 뗀 뒤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은 점점 더 자신의 몸으로부터 분리“되며, ”쾌락을 원해서도 안 된다.“는 말을 더한다.(60 페이지)


”지금은 이미 성에 대한 문제는 더 이상 큰 갈등이 되기 어려운 시대“라는 말에 반하는 말이다. 이래서 정신분석학이 가부장적이라는 말을 듣는 것일까? 아니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에 대한 문제는 더 이상 큰 갈등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정신분석을 가부장적인 제도가 되게 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라 해야 할 듯 하다. 물론 나는 이와 별도로 정신분석학이 자아심리학, 대상관계이론, 자기심리학 등에 의해 영토가 넓어졌다는 말(‘프로이트의 의자’ 275, 276 페이지)에 수긍하고 그런 현상을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정신분석의 영토를 넓힌 것 가운데 나에게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대상관계이론이다. 어릴 적 부모와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대상관계이론에서 대상은 사람을 의미한다.(‘프로이트의 의자’ 81 페이지, 177 페이지) 정신분석적으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인간은 늘 대상을 찾으려 한다는 말이다. 프롬은 전이(轉移)를 책임을 맡아줄 누군가를 갖고자 하는 욕구로 본다.(‘정신분석과 듣기 예술’ 157 페이지)


갖고자 하는 누군가는 어머니, 무조건적 사랑을 주는 누군가, 칭찬과 벌을 주고 훈계와 가르침을 주는 아버지일 수 있다. 프롬은 흥미로운 말을 한다. ”자신의 우상으로, 신으로 택할 수 있는 누군가를 갈구하는 모든 인간의 상황이 일반적 의미에서의 전이의 개념“(‘정신분석과 듣기 예술’ 157 페이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대상 관계이론은 어릴 적 부모와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론인데 프롬은 그 자신이 아이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사람이 있다고 해도 현재 그 자신이 충분히 독립적인 인간이 아닌 한 그런 대상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프롬은 어떤 이가 그의 어린 시절의 중요한 사람 즉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느꼈던 정서를 치료자에게 전가시키는 것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전이 개념은 ”너무 협소“하다고 말한다.(‘정신분석과 듣기 예술‘ 156 페이지) 프롬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 무솔리니나 히틀러 같은 대상을 숭배하는 것, 이념적 우상에 목숨을 거는 것 등은 전이 현상 때문이다. 프롬에 의하면 신으로 선택할 수 있는 누군가를 갈구하는 모든 인간의 상황이 일반적 의미에서의 전이이다.


프롬은 사람들은 누구나 두 가지 매우 강력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앞으로 나가려는 것으로 한 아이의 탄생 즉 어머니의 자궁을 박차고 나오려고 치받던 충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것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이다.(‘정신분석과 듣기 예술’ 152 페이지) 앞으로 나가려는 강항 경향성은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롬의 글은 스타니슬라프 그로프의 글과 비교하게 한다. 인간의 공격성을 해명하는 글에서 그로프는 프롬이 악질적 공격성(maglinant agression)이라 표현한 인간의 폭력성은 동물 왕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코스믹 게임’ 254 페이지)


인간계는 과잉 폭력성의 계가 아닐 수 없다. 어떻든 주산기(周産期: 출산 전후의 기간)의 고통을 나타내난 표현들이 정치적 위기에 처했거나 전쟁을 선포했던 군사, 정치 지도자들에게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코스믹 게임’ 256 페이지)은 흥미롭다. 그들은 적들이 우리의 목을 졸라 숨을 막히게 하고, 폐에서 마지막 숨을 짜내고, 우리에게서 생존 공간을 빼앗아간다고 비난한다고 한다. 표사(漂砂), 어두운 동굴, 복잡한 미궁,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심연, 빨려들거나 삼켜질 위험 등도 흔히 언급되는 표현들이다.


하지만 공격성의 원인을 주산기로 돌리는 것은 불충분하다는 것이 그로프의 진단이다. 공격성의 뿌리는 개인의 경계를 훨씬 넘어서는 초개아적 영역에까지 뻗어있다는 것이 그로프의 주장이다. 비체를 혐오하고 비난하는 것에 단서가 될 이야기를 그로프는 한다. 육신을 지닌 존재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거부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는 태도는 전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코스믹 게임’ 269 페이지) 그로프에 의하면 물질계를 포함한 경험계들은 그저 유용한 정도가 아니라 분화되지 않은 창조 원리를 보완해주는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이다. 물론 물질 영역의 대상과 목표만을 추구하는 것도 문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만추를 넘어 겨울이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몇 군데 박물관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개인적으로 경복궁 해설을 한 콘텐츠 하게 되었다. 가고 싶은 곳은 서대문 자연사박물관과 남양주의 자연사박물관, 그리고 양주 회암사지 박물관이다.


서대문 자연사박물관은 이종필 교수가 학생들에게 관람을 하고 감상문을 제출하는 과제를 냈다는 글을 보고서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고 남양주 자연사박물관은 비교의 마음이 작용해 가고 싶은 곳이 된 경우이다.

 

양주 회암사지 박물관은 그제 친구 모친 장례식에서 알게 된 양주 회암사지 박물관 해설사의 해설을 듣고 싶어 찾으려는 것이다. 언제일지 구체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선 12월 23일 나는 이 양주 회암사지 박물관 해설사와 그분의 다섯 친구(모두 여자)분들을 상대로 경복궁 해설을 해야 한다. 모두 교양과 지적 열의를 가진 이 여섯 여자분들께 해설을 하게 된 것은 내가 지난 주 시연을 한 경복궁 단청 콘텐츠가 새롭다는 평가를 받은 덕분이다.

 

물론 그런 평가를 받은 것은 장애인 성폭력 상담사로도 활동하는 양주 회암사지 박물관 해설사에게 글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소나타 형식의 제시부를 응용해 정전인 근정전에서 시작하는 동선이 아닌 근정전을 마지막 순서로 설정한 내용이, 틀에 박힌 것을 싫어하는 그 분들의 마음에 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지만 선생님의 조언을 청해 결정할 생각이다. 새롭고 창의적이되 쉽게 풀어쓰는 내공을 발휘해야 한다. 준비하고 생각하고 스피치 연습을 해야 하는 힘들지만 행복한 시간들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궁극의 인문학 - 시대와 분야를 넘나드는 9인의 사유와 통찰
전병근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인문학이란 말(궁극의 인문학 28 페이지)을 들으면 대화의 필요성,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지능에서 중요한 것은 남이 못 본 것을 연결하거나 없던 것을 상상해내는 능력이란 말(30 페이지)은 독서와 생각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최근 나는 경복궁 단청 시연을 했다. 정전(正殿)인 근정전부터 시작해 사정전, 천추전에서 마무리하는 순서를 뒤집어 사정전, 천추전, 근정전의 순서로 했다. 소나타 형식에 맞춘 것이다. 종결주제를 가장 나중에 배치한 것이다.


뇌과학자 김대식은 인문학은 ‘왜?‘라는 질문을 하는 데에 중요성이 있음을 알게 한다. 이태수 교수의 말과 상통하는 대목이다. 인문학이란 본래 항상 근원을 캐려 드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 하게 돼 있다는 말(16, 17페이지)이다. 김대식 교수는 진정한 이과(理科)는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67 페이지) 김대식 교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진화생물학의 토대를 깔고 있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으며(71 페이지) 사회의 모든 현상을 뇌과학으로 설명하려 해서도 안된다(72 페이지)고 말한다.


김대식 교수는 반복된 생활이나 뻔한 생각들보다 새로운 경험, 새로운 생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87 페이지) 정보를 수동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역동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뇌 인지 능력에 좋다고 한다. 다양한 운동, 신선한 공기, 멀티 비타민, 충분한 수면, 건강한 음식, 소식 등도 중요하다. 유발 하라리는 생물학은 역사의 기초에 해당한다고 말한다.(95 페이지)


유발 하라리는 인간은 힘(지배력)을 얻는 데는 극도로 우수하지만 그 힘을 자신의 행복으로 바꾸는 데 있어서는 그 만큼 우수하지 못할 뿐더러 훨씬 능력이 떨어지기에 힘은 선조들보다 훨씬 강력하지만 그들보다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96 페이지) 하라리는 인간의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상상력은 인간 특유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라리는 농업혁명을 인간 불행의 씨앗이라 말한다.


기지(旣知)의 사실이다. 농업으로 인해 인류는 쌀과 같은 단일 식물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영양실조, 병해충은 물론 사회적 서열화와 착취, 가부장제 등의 길을 열었다. 하라리는 단순히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개별 인간을 초월하는 법칙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인간 사회의 규범이나 가치체계라고 한다면 무엇이든 종교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라리는 역사에 어떤 명확한 방향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18 페이지) 하라리는 지금은 어느 때보다 역사 공부가 필요한 시점이라 말한다. 하라리는 인간의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상상력은 인간 특유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라리는 단순히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개별 인간을 초월하는 법칙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인간 사회의 규범이나 가치체계라고 한다면 무엇이든 종교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지기 위해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하라리의 결론이다.(122 페이지) 하라리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의 손아귀를 느슨하게 하고 우리 머리를 좀 더 자유롭게 사방을 둘러볼 수 있게 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더 많은 가능한 미래들을 볼 수 있게 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122 페이지) 역사를 모르면 역사의 우연적인 것들을 진정한 본질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서양사학자 주경철은 역사가 반복된다는 생각을 흔한 오해 중 하나라고 말한다. 반복된다면 예측이 가능할텐데 그렇지가 않으며 지난 경험을 아무리 잘 알아도 예측이 전혀 안된다는 것이다.(128 페이지) 주경철 교수는 역사는 학교 수업이나 교과서를 통해 알아온 것이 아니라 문학(과거), 티브이 사극, 영화, 인터넷(현재) 등 가외(加外)의 것을 통해 알았다고 말한다.(135 페이지) 주경철 교수는 전문 연구자들의 노력과 일반인들의 역사 인식, 양자가 모두 튼튼하고 서로 교감해야 하는데 양자 모두 부실하고 관계도 미약해 보인다고 말한다.(136 페이지)


주경철 교수는 사실 그대로의 역사라는 건 세상에 없고 해석된 역사가 진리라 말한다. 문제는 이렇게 말하면 양자가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자료)과 상상은 배타적이지 않다. 최대한 많은 사실을 확보해야 상상이 가능해진다.(141 페이지) 주경철 교수는 역사는 해석된 기억이자 꼼꼼한 상상이라 말한다. 역사가는 예측이 아닌 해석을 한다는 것이 주경철 교수의 결론이다.(142 페이지)


김대식 교수가 진화생물학, 뇌과학 환원주의를 잘못된 것으로 보았듯 주경철 교수도 자본주의를 정의라고 보는 것도 원흉으로 보는 것 모두 문제라 말한다.(151 페이지) 인지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과학이 이성적으로 전진하는 것은 과학자 개인들이 대단히 이성적이어서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동료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박하는 과정(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려면 동료 리뷰: peer review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을 통해 합리성이 발현된다고 말한다.(189 페이지) 과학자들도 어쩔 수 없이 자기 이론을 편애한다.


조너선 하이트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직감하고 그 느낌을 사수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애써 사후 정당화의 근거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190 페이지)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21세기는 전통적인 계층적 지식구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적 지식(을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229 페이지) 빅데이터 분석가 송길영은 여성이 변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교육을 제공하고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변한 것이라 말한다.(276 페이지)


한문학자 정민 교수는 글이란 보태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경험을 이야기한다. 정민 교수는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간결성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군더더기를 빼는 것이다. 형용사와 부사를 적게 쓰라는 말이다. 정민 교수는 한 글자만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이정우 교수는 주희朱熹의 세계는 음표 하나만 빠져도 전체가 무너질 듯한 조화로운 교향악의 세계라는 말을 한 바 있다.: ‘인간의 얼굴‘ 124 페이지)


정민 교수는 글에는 여운이 있어야 한다, 절대 다 말하면 안 된다, 그러낼 듯 감춰라,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의미가 전달되는 글을 써라 등의 옛 말을 전한다.(300 페이지) 정민 교수는 독서에서 가장 착각하기 쉬운 것 중하나가 다독(多讀)의 개념이라 말한다. 같은 책도 여러 번 읽어야 할 책이 있고 그냥 한번 보고 지나가야 할 책이 있고 목차만 봐도 대개 알 만한 책이 있고 한두 장만 읽어보면 더 볼 것도 없는 책도 있는데 천편일률적인 독서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314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에 참여한 필진이 공개되었다. 내 궁금증은 내가 읽은 역사책의 저자와 참여 필진들이 얼마나 겹치는가, 이다. 단 한명이고 근현대사가 아닌 조선사를 담당했지만 기분은 좋지 않다.

조선사 담당 필진은 세 사람이다. 한 기사는 현대사 집필을 맡은 7명 중 순수 역사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런데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에 참여해 역사 왜곡(이 말이 거슬린다면 편향된 역사의식 표출이라 하자)을 한 것이 순수 역사학자가 아니어서는 아님을 감안하면 문제 있는 기사가 아닐 수 없다.

역사관에 문제를 보이는 것은 계급의식 때문이다. 어떻든 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의 조선사 부분을 맡은 사람의 책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유연하게 처신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 책들을 읽는 것 못지 않게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 글쓰기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논한 책들을 읽을 생각이다. 그래서 역사에 담긴 숨은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애쓸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성혐오, 그 후 - 우리가 만난 비체들
이현재 지음 / 들녘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현재의 '여성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은 여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실에 개입하고 싶었고 차이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저자가 비체(abject)라는 개념을 재고하면서부터 용기를 내 쓴 글이다. 어떤 규정된 오늘 상도 아님을 의미하는 비체라는 말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의해 학술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개념이다. (부정어를 의미하는 a와 대상을 의미하는 object가 만난 단어인 abject.)


최근 나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는 입장을 내세웠으나 그것은 약자에 대한 폭력 즉 권력관계에 의한 것이니 약육강식 만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반박을 받았다. 물론 그는 약자에 대한 폭력이라는 말을 했을 뿐이다. 문제는 약자에 대한 폭력은 괜찮다는 투로 말하는 그의 태도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약자에 대한 폭력의 한 부분이 아닐지?


비체는 흐르고 있기에 경계없는 존재, 공포감을 주는 대상이자 더러운 존재로 여겨져왔다. 비체들은 통일된 이념을 갖지 않으며, 남성과의 경쟁에도 익숙할 뿐 아니라 페미니즘을 거부하면서도 페미니즘의 전략을 수행한다.(13 페이지)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비체의 해방적 잠재성에 주목해아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이론적 언어는 한계를 가지고 그런 한에서 잠정적일 수 밖에 없다.(15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문제는 뿌리 깊고 광범위한 여성혐오, 그리고 여성혐오를 비판하는 여성들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특정 생각이 담론화하는 방식을 문제삼는다. 저자는 게일 루빈, 뤼스 이리가레, 우에노 치즈코 등의 논의로 여성이 대상화, 타자화되는 메커니즘을 논한다.


저자는 여성혐오의 구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못하는) 논자들을 지적한다. 여성혐오의 구조가 강고하다는 사실을 강조할수록 그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음을 자인하는 셈이 아닌가?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집단 내의 다양한 차이들을 논한다. 남성이 남성들이듯 여성 역시 여성들인 것이다. 타자 배제적인 여성적 주체가 되지 않고서 타자화/대상화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관건이다. 마사 누스바움에 의하면 혐오는 우리의 믿음과 관련된 문제이다. 혐오는 상대가 공격이나 손상을 주지 않을 때에도, 특별히 부당하게 취급되지 않은 경우에도 발생한다.


누스바움에 의하면 혐오에 대한 핵심적인 관념은 전염이다. 혐오 대상은 전염성이 있는 오염물로 간주되는 것이다. 비체가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그것이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비체는 경계를 넘나드는, 그래서 더럽다고 여겨졌던 것이며 잡힐 수 없기에 공포스러운 것이다.(3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여성들이 비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 우리는 또한 여성 혐오를 벗어나는 다양한 비체화의 전략들을 가시화할 수 있다. 젠더 패러디, 가면 쓰기, 잡년 되기와 비참하게 되기, 여성성의 재전유 등은 비체 되기의 전략들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패러디를 원본의 모방이 아니라 모방의 모방으로 보았다. 젠더 정체성에는 어떤 원본도 없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미러링 역시 젠더들의 패러디이다. 관건은 패러디를 수행하는 비체가 기존의 지배적 남성 주체와 어떻게 다른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녀/ 창녀 구분을 넘어서는 것도 필요하다. 여성들간의 관계만으로도 충족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레스비어니즘, 성의 정상성을 이야기하는 모든 지배적인 사고에 의문을 던지는 퀴어 되기의 전략 역시 여성 혐오에 대항하는 다양한 실천들이다. 문제는 비체가 된다는 것은 혐오의 타깃이 된다는 것이다.


비체는 주체적 인식틀을 벗어나는 급진적 타자이다. 비체 혐오의 깃발은 사랑이라는 욕망의 이름표를 달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양한 비체 되기 전략들은 소통이나 연대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저자는 우리 시대를 도시화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51 페이지) 도시화는 전 지구, 전 행성 곳곳에 스며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도시가 아니라 도시적인 것, 도시적 사회 안에 살고 있다.


전지구적 도시화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의 확산을 의미한다. 저자는 도시화를 감정노동과 불가결의 것으로 보며 노동 현장에서 생산에 필요한 감정은 과도하게 요구되는 반면, 불필요한 감정은 억압되고 억제된다고 설명한다. 도시는 권력이 집중되는 곳이기보다 문화의 거점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신념, 젠더 정체성에 대한 관념들은 다양하게 얽혀 있다. 도시적인 삶은 그야말로 다양한 신념체계들과 대면하는 과정에서 내가 이해하기 힘든 급진적 타자를 경험하는 과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58 페이지)


도시화는 다양한 문화의 거점화를 의미하지만 우리는 아직 도시적 삶 속에서 타자에 대한 폭력을 피해 가는 문화와 규범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59 페이지) 도시적으로 산다는 것은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감정을 안고 산다는 것이며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감정의 격동을 안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59 페이지)


여성 비체들은 여성혐오가 지닌 혐의를 폭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여성혐오의 논리를 그대로 차용한다.(71 페이지) 저자는 여성 비체들이 여성혐오 세력과의 완전한 동일시(미러링)로 인해 비체성이 탈각(脫殼)되는 것을 우려한다.(73 페이지) 저자는 감정적 결속만으로도 자족한다면 이들은 말을 원치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 없는 한 연대 세력은 형성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75 페이지)


저자는 경계를 넘나드는 비체의 탈경계성은 역설적으로 언어적 경계를 필요로 하며, 비일관성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하고, 궁극적인 목적을 상정하지 않는 변이의 과정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설득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76 페이지) 저자는 인정(認定)이 나와 타자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한 라캉의 말대로 나는 어느 정도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물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해서 타자의 욕망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와 타자의 욕망이 어디서 결합할 수 있는가, 이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모든 타자들과의 연대를 이룰 수 없음에 주의하자. 새로 부상한 비체들의 말 만들기는 기존의 페미니즘으로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고 혼종(混種)의 성격을 띨 수도 있으며 다양한 입장 차이로 나아갈 수도 있다.(79 페이지) 저자는 페미니즘들의 역사는 잡히지 않는 여성 비체를 주권의 사각지대에 남겨놓지 않기 위한 시도였다고 말한다.(79 페이지)


국내의 경우 여성혐오의 부상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의 경제적 위기감 및 신자유주의의 확산을 기점으로 분석된다. 중요한 것은 여성 혐오는 남성들이 여성과 경쟁하게 되면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의문은 경제적 위기로 인한 불안감은 왜 분배투쟁으로 연결되지 않고 여성혐오로 나타났는가, 이다.(84 페이지) 주목할 것은 평등주의자 퇴색하고 무한 경쟁만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경제적 불안이 난민, 이주민, 유색인, 성소수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로 투사(投射)되었다는 것이다.(84 페이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정치개혁의 실패와 신자유주의의 가속화를 제도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의 것이자 자연적인 것으로 느끼게 하는 전략이 먹혔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대안적 질서를 생각하기보다 실망과 좌절, 허무와 무관심 등에 빠지거나 혐오와 같은 반동적 복고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다. 임옥희는 이런 상황을 정치적으로는 반동, 심리적으로는 퇴행의 시대로 규정했다. 앞에서 강남역 살인 사건을 이야기했는데 피의자는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저자는 성취원리에 따르는 도시적 삶 속에서 경제적 차원의 요구는 인정의 수사학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91 페이지) 문제는 성취원리가 제도적, 물질적 차원들과 결합하지 않은 채 개인적 경쟁 관계만을 부추기도록 작동하면서 병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인들은 자신들의 자아를 계발하여 변신하기 바쁜 개별화된 개인으로만 남는다. 홀로 자기계발을 함으로써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부담을 안는 시대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이다. 저자는 도시적 삶의 양식이 되어 가는 과열된 성취원리에 따른 개인의 경쟁을 성취인정을 둘러싼 투쟁으로 명명한다.(93 페이지)


저자는 여성을 혐오하는 집단들이 강한 인정욕망을 드러내는 일차적인 이유를 성취원리, 성취인정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인정(認定) 행위가 궁극적인 변화와 연결되지 않은 채 과거의 관계를 재생산하기만 한다면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99 페이지) 규범적 인정은 언제나 물질적 변화와 함께한다. 제도적, 물질적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자아계발의 경쟁은 불평등을 재생산할 뿐이다.


이데올로기적 인정의 폐해는 젠더관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저자는 남성 독자들이 있다면 자문하라고 요구한다. 즉 여성의 자율성과 권리를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대학 내 압도적인 남성 전임 교수 비율을 조정하거나 여성에게 부과되는 양육과 돌봄의 책무를 시정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거나 성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거나 여성노동의 저임금화를 극복할 물질적 토대를 고민하는 일을 방기하거나 외면하고 있지 않는가? 라고.(10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개인들로 흩어져 과열된 성취인정에 몰두하는 남성들은 끊임없는 자기과시의 경쟁에 몰두하게 되고 무한 경쟁에서 위기감을 느끼는 남성들은 집단적 남성성을 고착시키는 젠더관계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를 상쇄하려 한다.(102 페이지) 이데올로기적 인정의 논리 안에서 남성의 정체성과 젠더관계를 교란하는, 새롭게 부상하는 여성 주체는 비체로서 혐오된다.(104 페이지)


저자는 젠더 내부의 개별적 차이를 고려하는 가운데 젠더 정체성에 대한 성찰적 변화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107 페이지) 신자유주의 시대는 개인들이 물질적, 제도적 보완장치 없이 유동적 성취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시대이다. 위기감에 내몰린 남성들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보다 자신의 우월성을 확보해줄 지배적 남성성을 유일한 안전 장치로 활용한다.(107, 108 페이지) 물질적, 제도적 변화를 부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비체로 혐오되는 것이다. 물질적 안전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성취원리는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뿐이다.(108 페이지)


저자는 소리를 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과열된 상호 인정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상호성, 자율성의 상호확장이 가능한 미래의 젠더관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110 페이지) 여성혐오를 극복하는 인정 투쟁은 분배투쟁과 교차되는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110 페이지) 저자는 구성적 외부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구성적 외부란 우리를 구성하는 외부라는 의미이다. 집단적 정체성이 형성되려면 우리와 그들의 구분이 불가피하다. 이로부터 그들이라는 외부는 우리를 구성하기 위한 필수 전제라는 말이 가능하다.


저자는 비체를 지배적 젠더 체계 내부에서 혐오되기 위해 만들어진 구성적 외부라 말한다.(115 페이지) 이 구조가 얼마나 강력한지 성토하는 대신 구성적 외부인 비체들에 의해 체계가 균열되는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115 페이지) 저자는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라캉 해석에 따라 가부장제에서 남근을 가지려는 자와 남근이 되고 싶은 자로서의 성차가 어떤 소외를 겪게 되는지 살펴본다. 저자에 의하면 라이트의 라캉 해석은 가부장적 조건에서조차 여성들은 상징계의 안팎을 드나드는 비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117 페이지)


라이트에 의하면 남성들은 상징계 안에서 거세되고 소외된 채 이러한 결핍을 여성에 대한 환상으로 대신한다. 저자는 도시화와 함께 가부장제의 조건들이 변화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여성과 남성들이 정해진 성차의 종속과정을 좀 더 벗어날 가능성 역시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11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도시화가 과열됨으로써 여성혐오라는 퇴행이 생기기도 했지만 젠더의 영역 구분을 뒤흔드는 더 큰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저자는 비체를 지배적 젠더 체계를 교란하는 유령이라 부른다.(122 페이지)


저자는 비체에 의한 비체의 혐오를 여성 혐오 집단의 혐오보다 더욱 통탄하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수치심이 완전해지고 완전한 통제력을 지니려는 원초적 욕구에 기원하는 한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공격성- 나르시시즘적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격렬하게 비난하거나 폄하하게 될 수 있다고 보았다.(125 페이지) 혐오하는 자가 자기 정체성의 뚜렷한 경계를 지키기 위해 대상을 혐오하듯 수치심을 갖는 자는 완벽성과 완전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존성을 드러내는 타자를 공격할 수 있다.


혐오하는 자가 대상을 비체로 보는 믿음 체계를 갖고 있다면 수치심을 느끼는 자는 대상을 자신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환경으로 규정한다.(125 페이지) 저자는 비체들간의 소통에서 동정심은 한계를 갖는다고 본다. 동정심은 자신이 타자에 비해 우월한다는 전제하에 베푸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저자는 동감 역시 인간의 유사성 또는 동일성을 전제로 하지만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상상적으로 타자에게 동감하기에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타자의 차이를 보지 못하게 하는 바 한계를 갖는다고 말한다.(129 페이지)


저자는 공감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공감에 의해 추동되는 배려의 윤리는 자아와 타자의 결합과 상호의존성을 흔쾌히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공감은 타자를 판단하거나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태도를 가리킨다.(132 페이지) 자아와 타자가 다르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공감은 타자의 곁에서 타자의 경험에 참여하는 가운데 타자의 다름을 경험한다.(132 페이지) 저자는 공감이 비체와의 관계, 그리고 비체들간의 연대를 추동하는 윤리적 감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133 페이지)


저자는 버틀러는 자아가 있고 타자가 자아 밖에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아는 오히려 타자의 발견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말할 것이라 말한다.(135 페이지) 저자는 공감을 통한 연대는 소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136 페이지) 저자는 공감은 어렵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본다.(137 페이지) 저자는 도시 사회를 부정적인 것으로 본 한편 도시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이 도시화 그 자체에 내재해 있다고 본 르페브르를 예로 들며 자신의 논의도 같은 차원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혐오도 분노도 아닌 공감을 이야기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