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보낸 하루 라임 틴틴 스쿨 3
김향금 지음 / 라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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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경성에서 보낸 하루’에 이어 읽게 된 책이다.(출간 연도는 ‘경성에서 ~’가 먼저다.) ‘어느 화창한 봄날 한양에 가서 하루를 보낸다면?‘이란 가정 아래 걸은 한양 산책기다. 조종산(祖宗山)이란 용어가 나온다. 물에도 근원(발원)지가 있듯 산도 출발점이 있는데 그런 산을 조종산이라 한다. 한반도의 조종산은 백두산이다.

 

한양은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도시다. 한양 도성 안에는 원칙적으로 경작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양 사람들은 날마다 필요한 먹을거리, 생활용품 등을 도성 밖에서 들여왔다.

 

북과 징으로 시간을 알리는 것을 보자. 5경 3점을 예로 들자. 5경은 새벽 3시 - 5시다. 북을 다섯 번 치고 징을 세 번 친다.(이것을 다섯 번 되풀이한다.. 경; 更, 점; 點. 경의 아래 단위인 점은 1경을 5등분한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양반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누구의 처, 애미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실제로 역모에 가담한 집안 여성이 노비가 될 경우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핑계는 아닌 듯 하다는 말이다.

 

양반가는 노비 없이는 단 하루도 굴러갈 수 없었다. 노비는 양반가의 재산 목록 1호였다. 노비는 사고팔 수 있었고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었고 다른 이에게 기증하거나 선물할 수도 있었다. 부모 중 어미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된다. 이를 종모법이라 한다.

 

노비 부부의 주인이 다르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어미를 따른다. 어미쪽 주인에게 아이 소유권이 있다. 노비 주인은 자기 집 남종이 다른 집 여중과 혼인하는 것을 꺼린다. 남의 재산을 불리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노비 가족이 서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자주 발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54 페이지) 원래 노비(奴婢)의 노는 사내종, 비(婢)는 계집종을 의미한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난 대로인 육조(六曹) 거리는 조선의 행정 타운이다. 좌우에 의정부, 한성부, 이호예병형공의 육조와 같은 관아(官衙)가 배치되었다. 큰길 후방으로는 하급 관청이나 왕실에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는 내수사(內需司), 내자시(內資寺), 내섬시(內贍寺), 제용감(濟用監), 사복시(司僕寺; 병조 소속으로 말과 목장에 관한 일을 맡던 관아) 같은 관아가 군데군데 있다.

 

조선의 탈것을 보자. 초헌(軒)은 판서가 타는 외바퀴 수레다. 평교자(平轎子)는 정승이 타는 수레다. 한성부가 전국의 호적 업무(호패 발급 등)를 맡았다. 그래서 한성부에 호적청(戶籍廳)이 있었다. 마의청은 동물병원이다.

 

반수(泮水)는 성균관의 동서에서 흘러내린 물이 남쪽에서 합쳐진 물을 말한다. 중국 주나라 때 대학 주변에 물을 흐르게 한 전통을 따른 것인데 조선은 제후국이어서 반만 흐르게 한 것이다.(오늘날에는 아스팔트로 복개되었다.) 매단다는 의미의 현(懸)자를 쓰는 현방(懸房)은 푸줏간을 말한다.

 

한양에서는 반수 건너편 사람들을 반촌 사람들이라 했다. 신분은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다.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이라는 학자가 자신의 사노비 백여 명을 성균관에 바쳤다. 이 사노비가 반촌 사람들의 조상이다. 그런 인연이 있어서 안향의 후손이 성균관에 입학하면 반촌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인인 양 여겨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반촌 사람들은 성균관과 관련된 온갖 잡일을 하며 산다. 그들은 공자 제사상에 올리는 고기와 유생들의 식사로 제공되는 고기를 공급하다 보니 몇몇 반촌 사람들이 소를 도살하고 고기를 판매한 것이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성균관의 기숙사다. 노론 집안 유생들은 서재에, 소론과 남인, 소북 계열의 유생들은 동재에 거했다.

 

한양 사람들이 과거에 크게 유리했다. 3년마다 치르는 정규 시험인 식년시(式年試)의 경우 합격자의 30에서 40퍼센트가 한양 사람들이다. 별시는 한양 유생이 절대 유리했다. 한양 사람이 아니고서 별시 정보를 제때 알기 어려웠고 알았다 해도 시간과 비용 때문에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별시가 식년시보다 선발 인원이 많았다.)

 

별시 가운데 임금이 봄, 가을에 문묘에 참배하고 난 뒤 치르는 알성시도 있다. 1776년 규장각을 세운 뒤 정조가 규장각 각신의 사무실로 만든 것이 이문원(文院)이다. 이문원 바깥 기둥에 현판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비록 대관과 문형(文衡; 대제학)일지라도 전임 각신이 아니면 당 위에 오르지 말라. 손님이 오더라도 일어나지 말라.

 

문신 가운데 4품 이상은 ~ 대부, 5품 이하는 ~랑이라 한다. 정3품 이상은 당상관, 그 이하는 당하관이다. 당상은 대청 위를 말한다. 흥인문 안팎으로 연못이 두 개 있다. 동지(東池)다. 흥인문 안쪽의 연지가 있던 동네가 지금의 연지동이다.

 

종루가 있는 시전(市廛) 거리를 운종가라 한다. 난전(亂廛)은 길거리 가게다. 좌의정 채제공이 건의해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한 것을 신해통공이라 한다. 피맛길을 따라 기와집의 담장이 늘어선 주택가를 걷다 보면 이문이 나온다. 도둑을 막기 위해 동네마다 설치한 문이다.

 

18세기 중후반부터 혜민서와 활인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개인 의원과 약국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질 좋은 약재 중에서 궁중에 진상하고 남은 것이 민간으로 흘러나와 팔리기도 했다. 종묘의 오른쪽 동네와 그 아래로 종로 4가에 걸쳐 있는 시장인 배오개(이현) 시장에는 채소가, 숭례문 밖 칠패 시장에는 생선이 팔렸다.

 

배오개 시장에서 파는 채소, 과일, 약초는 한양도성 안팎에서 재배한 것이다. 원래 한양도성 안에서는 농사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인구수가 늘어나면서 찬거리 수요가 증가하자 도성 안팎에서 채소 농업이 활발해졌다. 채소, 과일, 약초 농사가 돈벌이가 되자 양반 사대부 중에서도 채소밭을 가꾸기도 했다. 배오개 시장은 1760년 무렵 영조가 배오개 근처의 민가 수를 늘리기 위해서 시전 설치를 허가해 생겨난 시장이다.

 

마포 나루 이야기를 보자. 나루는 나룻배들이 강을 건너는 양쪽 지점을 말한다. 나루터는 배가 닿고 떠나는 곳을 말한다. 마포 나루는 경강(京江)에서도 전국의 배들이 모이는 중심지이다. 조선의 3강은 용산강, 서강, 한강이다. 5강은 3강 플러스 마포, 망원이다. 8강은 5강 플러스 두모포, 서빙고, 뚝섬이다.

 

얼굴이 까맣게 탄 사람은 마포 새우젓 장수고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은 왕십리 미나리 장수다. 서쪽인 마포에서 오는 새우젓 장수는 아침에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도성 안으로 들어오니 얼굴이 타고, 동쪽인 왕십리에서 오는 미나리 장수는 아침 햇빛을 등지고 도성 안으로 들어가니 목덜미가 탄다는 의미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말이 있다. 남촌의 술, 북촌의 떡을 알아준다는 말이다. 대전별감(大殿別監)은 왕의 잔심부름을 하는 하예(종)이다. 무예별감(武藝別監)은 왕의 호위 무사다. 대전별감은 조선 최고의 멋쟁이다. 항상 유니폼과 같은 관복을 입어야 하는 양반들처럼 지루한 옷차림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시사(詩社)는 한시를 짓는 모임이다. 원래 양반들이 하는 모임인데 인왕산 기슭에 경아전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천수경이 유명하다. 송석원의 주인이었다. 서민, 양반, 중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잘 그린 것이 ’조선에서 보낸 하루‘의 특징이다.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 1685~1776)의 ’독서하는 여인’이란 그림이 눈길을 끈다.(윤덕희는 공재 윤두서의 아들이다.) 인정(人定)은 종을 쳐 통금을 알리는 것이다.(28번) 파루(罷漏)는 쇠북을 쳐 통금해제를 알리는 것이다.(33번)

 

한성부가 다스리는 곳은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까지였다. 성저십리란 한양도성 밖 십 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선 전기 한양은 도성 안은 도시, 성저십리는 농촌으로 뚜렷이 구별되었다. 관례적으로 한양 주민은 도성 안쪽(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만을 가리켰다. 조선 후기에는 성저십리로 한양의 공간이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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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은 내륙의 제주도, 제주도는 동양의 하와이라 하지요. 하와이 말로 아아 용암은 거칠고 딱딱한 용암, 파호이호이 용암은 부드럽게 굽이치는 용암이라죠. 농담으로 용암대지를 맨발로 걸을 때 아아 소리가 나면 아아 용암이고 그렇지 않으면 파호이호이 용암이라지요. 정동 프란체스코 회관 앞에서 본 소녀 좌상이 기억에 남는데 오늘 서울의 한 구청 앞에 설치된 '신을 신지 않은 소녀 입상(사진)'을 보았어요.

 

소녀상은 우리로 하여금 아픈 시기를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일 것입니다. 이상 시인의 '날개'의 주인공은 아내가 자신에게 주는 것이 각성제인 아스피린이라 생각하다가 문득 수면제인 아달린인 줄도 모른다고 생각하지요. 그 생각이 납니다. 아달린이 아닌 각성제로 기능할 정신의(눈에 보이기에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 아스피린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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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로 이런 저런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다. 적어도 한 달 전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그렇다고 내 유튜브 시청 역사가 한 달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클래식 음악을 오래전부터 유튜브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한 달이란 짧은 기간에 많은 유형의 프로그램을 옮겨다녔다. 프로야구 스토브리그, KBS 역사 스페셜, EBS 지질 프로그램, 두 살 정도부터 올라 현재 다섯 살 정도가 되었을 오뉴라는 귀여운 아이(너무 귀엽고 똑똑해 다른 아이들은 건너뛰게 한) 프로그램. 유머 또는 개그, 서울대 정선근 교수의 근육/ 관절 프로그램, 위장 건강 프로그램, 답사 프로그램, 스피치 비법 전수 프로그램, 심리상당 프로그램 등...

 

요즘은 시쓰기 강의와 철학 강의(황수영 샘의 베르그송 강의, 진태원 교수의 스피노자 강의, 백승영 교수의 니체 강의 등) 정도를 주로 듣는 다운사이징에 성공했다. 주역(周易)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시간을 낼 생각이다. 등단에 뜻이 있어 시쓰기 강의를 듣는 것은 아니다. 이해를 위해서이고 해설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글쓰기 강의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대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아직도 글쓰기는 넓게 읽고 특정 책은 깊이 읽는 독서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거의 대부분의 글쓰기 강의가 ‘두괄식으로, 짧게, 쉽게 쓰라’는 말로 콘텐츠를 채운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게시 순서대로 실시간으로 듣는 것이 아니기에 언제 오른 것인지 모르지만 어제 시쓰기 강사께서 자신의 강의로 인해 오프라인에서 유료 시쓰기 강의를 하는 시인들에게 피해가 초래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하는 것을 들었다.

 

공감한다. 누구나 알 듯 유튜브는 무료 강의다. 그래서 자유롭다. 구독자가 많으면 금액으로 보상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구체적인 조건은 잘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기에 경쟁도 치열하고 선진(先進) 유튜버들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한다. 쉽게 보이지만 자신만의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모든 강의가 유료냐 무료냐의 기준이 아니라 완성도를 기준으로 선택되기를 바란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처럼 수준 높은 문학도들이 운집한 그라운드에서 무료라고 듣고 유료라고 듣지 않는 수준 낮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더구나 대부분의 시쓰기 프로그램 구독자들은 등단을 목표로 하는 분들일 테니 필요한 것을 듣지 필요하지 않거나 퀄리티 없는 프로그램을 무료라고 듣지는 않을 것이다.

 

재작년 가을 D 데이 하루 전 갑작스럽게 숭의전 해설 의뢰를 받고 수년 전 들렀던 그곳의 구조를 유튜브로 보고 정리한 기억이 난다. 유익한 경험이었다. 유튜브에 관계되는 일은 이렇듯 즐겁다. 만들어 게시해 구독자가 상당수에 이르면 더 즐겁겠지만 그 어려운 일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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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건축가들 - 식민지 경성을 누빈 ‘B급’ 건축가들의 삶과 유산
김소연 지음 / 루아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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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건축가들’은 철학과 건축공학을 전공한 김소연의 책이다. 박길룡, 박동진, 강윤, 김해경, 나카무라 요시헤이 등을 다루었다. 부제는 ‘식민지 경성을 누빈 B급 건축가들의 삶과 유산‘이다. 당시 조선인은 학교(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신무성은 총독부의 방침은 내선일체라고 부르짖었지만 구역질이 날 정도로 못마땅하기만 했다고 증언했다.

 

직장에서도 차별은 이어졌다. 승진이 어려웠고 건축 청부업자들도 조선인이 공사 감독을 하면 얕보았고 월급도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50퍼센트 정도 더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조선인의 관청 취업률이 높았던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였다. 조선인 건축가들에게 기회가 온 것은 회사령이 철폐된 1920년대 후반부터였다.

 

당시 건축가는 가치중립적인 의미를 가진 기술자로 여겨졌을 뿐이다. 경운동 민병옥 가옥, 화신백화점 등을 설계한 박길룡은 조선인 최초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 조선인 최초 조선총독부 건축기수였다. 당시 화두는 민족이었다. 박길룡이 설계한 화신백화점의 주인인 친일 자본가 박흥식은 민족을 내세워 소비자를 끌어들였다. 박길룡은 안타깝게도 43세의 나이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박동진은 해방 이후 영락교회, 고려대학교농과대학 본관 및 서관 등을 신축한 건축가다. 박길룡과 박동진은 한 살 차이다.(박길룡; 1898년생, 박동진 1899년생) 박동진은 3.1 운동에 가담한 대가를 심하게 치렀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 옥고(獄苦)를 치르고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했다가 5년이 지난 1924년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박길룡이 건축가 입장에서 온돌만을 절대 유지합시다라고 했을 때 박동진은 온돌 폐지론을 주장했다. 박길룡은 절충적이고 타협적이었고 박동진은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이었다. 물론 온돌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는 온돌은 심각하게 삼림을 훼손했다. 당시 온돌 망국론까지 등장했다.

 

온돌은 바닥면에서 직접 열을 받기 때문에 움직임이 둔한 좌식생활을 초래했고 그로 인해 조선인은 게을러져서 망국의 빌미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1920년대에 조선에 온 일본인들이 심하게 온돌을 비판했다. 하지만 조선의 추운 겨울을 몇 번 겪은 뒤에는 ”온돌은 한겨울에 따뜻할 뿐 아니라 취사까지 할 수 있다. 여름에는 바위에 누운 듯 시원하다. 다다미보다 청소가 쉽고 먼지도 없어서 더 위생적이다.“란 말을 했다.

 

일본인들의 온돌 수요가 늘자 일본 민간업자들은 개량 온돌을 만들었다. 박길룡과 박동진 둘 다 좋아했던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온돌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일본의 제국호텔 욕실과 미국 주택에 온돌을 설치했다.(두 건축가가 라이트를 좋아한 것은 라이트가 설계한 건축이 형태와 기능이 지역의 자연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88 페이지)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박동진은 온돌을 무기력한 국민성과 구태의연한 주거문화의 상징으로 여겼다. 박동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건축은 전통과 인습에 얽매인 건축에 반항하는 모더니즘 건축이었다. 그런데도 박동진의 대표작은 고딕 양식으로 지은 석조 건축인 지금의 고려대학교 본관인 보성전문학교 본관과 도서관이다.(박동진이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을 설계하며 민족의식 운운하자 건축주인 인촌 김성수는 기술자가 도면이나 잘 그리지 무슨 인생관이냐고 말했다. 그러자 박동진이 발끈해 기술자에게도 조국이 있고 민족이 있다고 받아치자 김성수가 사과했다고 한다.: 109 페이지)

 

영락교회도 고딕 양식이다. ”박동진에게 고딕 양식의 석조 건축은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높일 수 있는 건축물이었다. 박동진이 주로 사용한 석재인 화강암은 조선에서 풍부하게 나오는 양질의 재료이면서 전통 건축의 문제점인 비내구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재료였다. 고딕 양식 또한 일본인들이 주로 사용한 르네상스양식과 다른 서양의 건축 양식이었다“(민현석 지음 ’서울감성여행2‘ 73 페이지) 물론 박동진은 아무리 일본기관에서 밥을 벌어먹지만 결코 민족의식에 배치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강윤(姜沇)은 일제강점기 태화기독교사회관을 신축한 건축가다. 독립운동 공훈으로 200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고 2006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박인준(朴仁俊)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공학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 건축가다. 가회동 윤치왕 주택이 박인준의 대표작이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김세연은 건축 구조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건축가다. 경교장이 대표작이다.

 

박길룡과 김세연은 환상의 파트너였다. ’설계는 박길룡, 구조는 김세연’으로 통했다. 김세연이 구조 계산한 것으로 알려진 건물은 미쓰코시백화점, 화신백화점(종로구 공평동 종로타워 자리에 있었던 건물로 현재는 철거되었다.), 조지아백화점(丁子屋.; ちょうじ; 현재 롯데영플라자), 경성제국대학본관(현재 예술가의 집) 등이다. 김윤기는 조선인 최초로 와세다대학에 입학한 사람이다. 1960년대에 다섯 번이나 장관을 역임했다.

 

이천승은 ”만주국으로 간 수재”라는 평을 듣는다. 해방 이후 우남회관, 조흥은행 본점 등을 설계한 건축가다. 김해경은 ‘시인 이전에 건축가, 이상 혹은 김해경’이란 제목으로 편성되었다. 저자는 이상의 삶과 작품 모두 살아서는 몰이해, 죽어서는 신화가 되기에 딱 좋았다고 말한다. 이상에 대한 해석은 다양해도 공통분모가 하나 있었다. 모더니스트라는 것이다. 그냥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최초의, 최고의. 이상은 돌연변이 시인 취급을 받기 전까지 멀쩡한 건축가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나오고 조선총독부 건축기수로 일했다. 건축과를 수석 졸업한 이상은 건축 일을 하면서도 그림, 시, 소설을 쓴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고희동이 이상의 학교 미술 교사였다. 이상은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백부(양아버지)가 반대했다. 이상이 건축을 전공한 것은 백부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김해경이 이상이라는 필명을 처음 쓴 것은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 앨범에서였다.

 

김세연이 구조계산한 미쓰코시백화점이 준공되었을 때 이상은 의주통 공사현장에서 썼던 첫 장편 소설 ‘12월 12일’을 ‘조선‘이란 잡지에 연재했다. 박길룡이 설계한 경성제국대학 본관이 완공되었을 때 이상은 일본어로 쓴 시 ’이상한 가역반응‘과 ’조감도‘를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다. 같은 해 자상(自像)을 그려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입선했다. 1933년 이상은 스물네 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총독부 건축기수 자리에서 사직했다.

 

1933년 건축계를 떠나 1937년 도쿄에서 사망할 때까지 4년간의 삶은 일탈과 기행(奇行)으로 일관했다.(김해경이 일본에서 하도 이상한 행동을 해서 이상하다는 의미에서 이상이라 불렸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1936년 10월 이상은 탈출구를 찾아 일본으로 더났다. 그가 도쿄에서 얻은 것은 환멸이었고 잃은 것은 건강이었다. 1937년 2월 이상은 일본 경찰에게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병보석으로 겨우 풀려났다.

 

이상은 1937년 4월 17일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귀환했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한국전쟁 뒤 공동묘지가 사라지면서 유해마저 유실되었다.

 

장기인은 우리말 건축용어 정리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필동 한국의 집을 설계한 분이다. 나카무라 요시헤이는 천도교중앙대교당을 설계한 건축가다. 다쓰노 긴코의 제자였던 요시헤이는 조선은행의 현장감독으로 이름을 남겼다. 1912년 조선은행이 준공된 뒤 나카무라는 일본으로 귀국하지 않고 황금정(을지로)에 나카무라 건축사무소를 열고 독립했다. 윌리엄 메렐 보리스는 YMCA 회관을 설계한 건축가다. 저자는 건축은 사물이 아니라 사연이라는 말을 한다. 책처럼, 내 상태와 마음에 따라 매번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와닿는다는 것이다.(26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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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한 전문직업인으로부터 과한 찬사를 받았다. '어떤 분이기에 몇 시간의 대화를 통해 접한 내 초라한 지식을 감탄스럽다고 평하실까?' 지식이 부족해서일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감동의 눈으로 대하지는 않으리라.

 

넓은 아량으로 인생을 즐기며 감동하는 사람이기에 나 같은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리라. 어떻게 해야 할까?

 

"선생님은 아직 저를 잘 모르십니다. 몇 번 더 만나 대화하면 저에 대해 실망하실 것입니다. 얕고도 좁은 제 관심사와 지식의 실체를 여지 없이 보실 것입니다. 과한 기대는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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