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일회(一期一會)’는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기회)이며, 모든 만남도 생애 단 한 번의 만남(인연)이라는 뜻이다. 기(期)는 동기(同期)라는 말에 쓰이는 그 기라는 글자다. 일기회(一器會)란 말이 있다. 아회(雅會)라는 말도 있다. 전자는 여럿이서 자신들의 음식을 가지고 가 만나는 모임을 의미하고 후자는 (글을 짓기 위한 모임이기보다) 아름다운 모임이다. 귀한 사람들이기에 일기회(一器會)로 모인다면 명실상부한 아회(雅會)가 되지 않을까 싶다. 늘 귀한 음식 대접을 받아 미안한 마음에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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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 - 서울의 풍경과 오래된 집을 찾아 떠나는 예술 산보
최예선 지음, 정구원 그림 / 지식너머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최예선은 여행은 물리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인 것이기도 하며 이 사회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시대를 통과하며 그 시대를 기록하고 표현하는 사람이 예술가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가 쓴 ‘오후 세시, 그곳으로부터’는 공존(共存), 애도(哀悼), 사유(思惟) 등을 키워드로 여행지를 나눈 예술 답사기이다.

 

저자는 영왕비 이방자 여사가 낙선재에서 눈을 감은 1989년을 마지막으로 창덕궁은 집으로서의 온기를 잃었다고 말한다. 창덕궁에는 우리 나라 최초로 벽화가 그려진 공간이다. 벽화라고 하지만 비단 위에 그림을 그려 표구하고 적당한 위치에 부착한 그림으로 이를 부벽화(付壁畵)라 한다. 1917년 난 화재를 수습하기 위한 조처의 하나였다.

 

1919년 고종 승하와 3.1 만세운동 등을 겪으며 공사가 지연되었고 1920년 말에 끝이 났다.(15 페이지) 해강(海岡) 김규진(金奎鎭), 창윤(蒼潤) 이용우(李用雨),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정재(靜齋) 오일영(吳一泳),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등이 화가로 참가했다.

 

공존의 두 번째 포스트는 소설가 구보가 걸었던 길로 그 가운데 하나인 미쓰코시 백화점(옛 동화백화점, 현재는 신세계백화점)과 경성부청(서울시청이었다가 서울도서관으로 쓰이는 곳)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백화점은 시인 이상과도 관련이 있는 곳이다. 얼마전 창씨개명을 위해 경성부청에 줄을 선 사람들을 찍은 사진을 본 기억이 난다.

 

저자는 신세계 백화점이 80주년이 넘었다고 광고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말한다. ”1933년에 개설한 미쓰코시 백화점을 자신의 원조로 생각하는 것일까?“(42 페이지) 책은 줄곧 저자의 분신인 구원씨의 현실이 나오고 그가 걸은 길이나 거리에서 이름을 떨친 과거의 인물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공존의 세 번째 장소는 박경리 작가의 정릉집이다. 이 집은 박경리 작가가 원주로 가기 전까지 살았던 집으로 이 곳에서 대하소설 ‘토지’가 태어났다. ”선생이 살기 위해서 선택한 동네, 정릉. 그곳은 가지지 못한 자들이 도시의 중심에서 밀려오다가 멈추게 되는 막다른 골목 같은 동네였고, 날 것과도 같은 밤이 찾아오는 산동네였다.“(56 페이지)

 

성북구 보국문로 29가길 11을 주소로 하는 이 집은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전쟁중 남편과 아들을 잃은 박경리는 44세에 이런 말을 했다. ”그동안 쓴 소설들은 ‘토지’를 위한 습작이었다.”

 

공존이란 키워드의 네 번째 장소는 원서동에 자리한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66 - 1965)의 집이다. 이 집에 아회도(雅會圖)가 있다.(‘아집도; 雅集圖’라고도 한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 - 1953),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 춘곡 고희동 등이 등장하는 그림이다. 아회란 글을 짓기 위(爲)한 모임, 아담한 모임 등을 뜻한다.

 

일기회(一器會)를 그린 그림이다. 일기회란 여럿이 각각 음식을 한 그릇씩 가지고 모여 노는 놀이를 말한다. 일행은 각자의 집에 모일 때마다 모임 이름을 달리 정했다. 원복소집, 남원속집, 동원세모 식으로. 오세창 선생 집에 모인 모임은 한동아집이라 했다.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로 그림 유학을 떠나 서양화의 기법을 배워온 예술가다. 1950년대 말 춘곡은 삼대가 함께 살아온 원서동 집을 떠나 제기동의 양옥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공존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장소는 창신동 미석(美石) 박수근(朴壽根; 1914 - 1965)의 집이다. “1910년에 완공된 덕수궁 석조전과 한국은행을 거쳐 1920년대 조선총독부, 경성역, 경성부청 등 대규모 공사 중에서 창신동의 은혜를 입지 않은 것이 없다.”(89 페이지)

 

창신동에는 채석장이 있었다. 낙산의 남쪽 줄기다. 창신동이 원래 토막집 천지는 아니었다. 동대문과 가까운 평지에 고풍스런 한옥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백남준이 태어나 자란 곳도 창신동 한옥이었다. 박수근이 창신동에 산 시기는 1953년부터 1963년까지다.

 

박완서 작가의 ‘나목’의 주인공 화가였던 박수근은 “수많은 여인들을 캔버스에 그렸는데, 모두가 다 아내의 분신이었다. 빨래 하는 아내, 푸성귀를 파는 아내, 머릿수건을 쓰고 물을 긷는 아내, 노상을 걸어 다니는 아내, 아이에게 앞섶을 열어준 아내...”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박수근을 해외 전시회에 등장할 수 있게 해준 분들이 미국대사관 문정관 부인 마리아 헨더슨, 첫 상설 화랑인 반도화랑을 세운 실리아 지머맨, 마가렛 밀러 부인 등이다. 박수근이 전쟁 후 미군 범죄수사대(CID)와 피엑스에서 초상화 등을 그려주며 가장 역할을 한 이야기가 ‘나목(裸木)’에 나온다.

 

땅이 아닌 집만 소유한 박수근 가족은 땅 주인이 철거를 강요하자 집을 포기하고 1963년 전농동으로 이사했다. 창신동 집은 그렇게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박수근의 집터‘를 알리는 얇은 표석 하나만이 남았다.(100 페이지) 박수근의 아호(雅號)인 미석은 고향의 바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는 흰색 아연으로 화폭을 겹쳐 칠하며 캔버스에 돌을 입힌다. 태초에 하나의 원소에서 시작되어 거대한 바위가 되기까지 얼마나 장대한 세월이 흘렀던가. 돌은 시간이었다.”(101 페이지)

 

애도의 첫 번째 장소는 윤동주의 시작(詩作) 공간이다. 윤동주가 서울에 머물렀던 시기는 1938년 봄부터 1942년 봄까지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4년 정도다. 연희전문학교는 소나무숲이 울창한 언덕에 지어졌다. 1917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에 작은 목조 건물로 출발한 학교였다. 저자는 “어떤 희망이 윤동주를 현해탄 너머 먼 곳으로 이끌었을까? 그것 또한 문학의 힘이었을까?”라고 말한다.(115 페이지)

 

애도의 두 번째 순서는 나혜석의 수송동 시절에 대한 글이다. 수송동에는 미술학사(美術學舍)가 있었다. 나혜석이 여성의 서양화 교육을 위해 1933년에 설립한 미술 교육기관이다. “수송동 미술학사가 있던 곳은 오래된 골목으로, 조계사와 학교 등이 있어서 변화무쌍했던 종로 거리에서도 옛 건물이 드물지 않게 보이는 위치였다.(133 페이지)

 

나혜석은 자신의 이혼 과정을 서술한 ’이혼고백서‘를 잡지 삼천리에 게재하고 천도교 수장인 최린을 정조유린 혐의로 고소함으로써 스스로 세간의 지탄과 조롱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134 페이지) 문헌에 기록된 미술학사 자리에는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종로 3가 기형도(1960 - 1989)의 공간은 전편을 통틀어 가장 최근의 공간이다. 기형도가 서른의 나이로 죽은 곳은 낙원상가의 한 극장이었다. 후배 박해현 기자에 의하면 기형도가 쓴 원고들은 긎고 지운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가방에는 원고 습작을 하던 파란색 노트와 알약과 편지가 들어있었다. 그즈음 기형도는 자주 두통을 호소했고 고통이 엄습할 때마다 입안에 약을 털어 넣었다.

 

편지는 그가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던 소설가 강석경이 인도를 여행하면서 보낸 것이었다. ”나는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코트 호주머니에 넣은 채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종로3가의 길모퉁이에 서 있다.”(149 페이지)

 

애도의 네 번째 장소는 2014년 5월 조각가 권진규(權鎭圭; 1922 -ㅔ 1973)의 기일에 열린 추모행사장 이야기다. 추모행사장은 성북구 동선동에 자리한 권진규의 아틀리에였다. 조각가 권진규가 타계한 것이 1973년이니 41주기였다. 아틀리에는 조각가가 타계한 후 30년 넘게 닫혀있다가 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되었다. 창작 공간인 그곳을 사용할 작가를 모집하는 공적 게시물이 보인다.

 

애도의 다섯 번째 공간은 사라진 박물관들이다. 저자는 박득순(朴得錞; 1910 - 1990)의 ’서울풍경‘(1949년 작품)이란 그림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전쟁이 터진 후의 서울은 다시는 이 풍경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이 그림에서 폭풍 전의 고요함, 파괴되기 직전의 우아함을 본다고 덧붙였다.(172 페이지)

 

그림에는 조선총독부라 불리다가 미 군정이 들어와 중앙청으로 사용하게 된 웅장한 석조 건물도 있다. 1995년 철거된 건물인데 사람들은 철거된 잔해들을 기념품이라며 가져갔다.(174 페이지) 저자는 그날 이후 사람들은 건물을 삭제함으로써 기억도 말소할 수 있음을 알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옅어지는 기억을 되살리려는 활동이 반작용처럼 등장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역사의 어느 하찮은 순간 하나도 삭제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175 페이지)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중앙청 건물의 적절한 장소로의 이전이었다. 어떻든 중앙청 이야기를 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경복궁 이야기다. 경복궁은 일제 강점기 내내 총독부의 시정(施政)을 안내하고 홍보하는 거대한 홍보관 역할을 했으며 총독부박물관과 미술관이 큰 역할을 했다. 근정전은 전몰 병사를 위한 참배 시설로 이용되기도 했다.(17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덕수궁에 있는 미술관과 석조전을 제외하고 모든 국립박물관과 미술관이 사라졌다. 해방 직후 적산(敵産)을 불편해 했던 민심 때문에 철거한 것도 아니고 전쟁으로 파괴된 것도 아니다. 국립박물관, 공예전시장, 국립미술관, 장서각 등의 용도로 사용되다가 1992년에서 1998년 사이에 궐역을 수복하고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정부의 이념으로 철거되었다. 이제 이들은 옛 신문에서 그 이름을 복기해야만 하는 잊혀진 박물관들이다.(185 페이지)

 

돈암동은 저자가 신혼을 살았던 동네라고 한다. 부부가 모두 혜화동을 좋아해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구하자고 했는데 어찌하다보니 돈암동이었다는 것이다.(191 페이지) 돈암동은 박완서 작가가 살았던 곳이다. 전쟁 직전에 광화문 쪽에서 돈암동으로 옮겨와 매일 전쟁 하듯 살다가 종전 즈음에 결혼하여 떠났으니 3년 정도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암동은 박완서의 여러 소설에서 반복재생될 만큼 깊은 흔적을 남겼다. 박완서 작가의 돈암동 시절은 스무 살 무렵이었다. 무엇보다 돈암동에는 검은 기와를 얹은 오래된 조선한옥집이 있었다. ’그 남자의 집‘의 그 남자 현보의 집이었고 ’그 산은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서 지섭의 집이었고 ’나목‘의 주인공 이경(李炅)의 집이었다. 서대문구 현저동은 박완서 작가가 피난해 살던 곳이다. 현저동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좁다란 초가들이 켜켜이 들어선, 도시빈민층이 살던 달동네라고 표현된 곳이다.

 

제목(’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와도 관련이 되는 ’오후, 세 시 학림다방‘편은 전혜린을 위한 장이다. 전혜린은 절친 이덕희와 함께 명동 은성주점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봉구, 김승옥 등도 은성의 단골이었다. “학림과 은성, 돌체, 그리고 모나리자 같은 다방과 카페는 상처 입은 영혼을 보듬어주던 안식처였다.”(219 페이지) “관악으로 캠퍼스를 옮긴 서울대학교가 대학로에 있던 시절에 학림은 문리대 25강의실이라 불릴 만큼 서울대 학생들이 자주 드나들던 아지트였다.”(220 페이지)

 

학림은 지난 해 나도 개인적으로 처음 들어가 본 곳이다. 일 때문에 박** 팀장님을 만난 자리였다. 고풍스러운 곳이다.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저자 역시 이런 말을 한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조심스레 밟으며 2층 다방의 문을 열었다. 다행히 창가 자리가 비어있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약속은 없지만 왠지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225 페이지)

 

사유의 세 번째 순서는 ’부박한 세상에 외치다 - 성북동 심우장(尋牛莊)과 노시산방(老?山房)‘이다. 만해 스님은 총독부가 있는 방향으로는 얼굴도 돌리고 싶지 않았기에 북향의 집을 지었다. 북사면(北斜面; 북쪽으로 향해서 비스듬하게 경사진 면)의 대지에는 북향으로 집이 앉혀지기 마련이어서 기와집의 배치가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성북동에 북향으로 앉은 집이 많다.(234 페이지)

 

“성북동은 적당한 경사가 있고 숲과 나지막한 집이 있고 좁지만 걷기 좋은 길이 있다.”(237 페이지) 근원 김용준은 자신을 노시선인이라 불렀다. 아랫 동네 물가의 수연산방에 살던 친구 이태준이 노시산방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사유의 네 번째 순서는 ’나는 아버지를 넘어서야 하느니 - 김중업과 김수근의 건축 열전‘이다. 김수근은 장충동 경동교회, 대학로의 예술극장 등을 설계한 건축가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아비와 아들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서로를 이기려 한다. 이긴다는 것은 상대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아비와 아들 사이의 갈등과 극복은 분명 사회를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해왔다. ’아버지 죽이기‘라는 오래된 테마를 건축에서도 쉽게 볼 수 있으리라. 건축이란 앞선 결과물을 파괴하고 되살리고 수정하고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면서 수천 년을 이어온 것이 아니던가.”(250 페이지)

 

2011년 가을, 서울 옥션에 최초로 부동산이 미술품 경매에 등장했다. 건축가 김중업이 친구인 이정호의 의뢰로 1968년경에 지은 가회동 주택이었다... 300평의 면적을 자랑하는 3층 건물인 이 집은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 관저로 잠시 사용되었고 1983년에는 미술관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20년간 집을 소유하던 주인은 큰 규모의 주택을 관리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집을 팔기로 결정했다...

 

집주인은 예술품처럼 건축물의 가치를 판단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이 집을 소유하기를 자랐다. 요구 조건은 집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이 집은 주인을 만나지 못해 경매에서 유찰되었다.“

 

이 장에서 읽을 만한 내용은 부여박물관을 설계한 김수근(1931 - 1986)에게 김중업(1922 - 1988)이 이의를 제기한 부분이다. 즉 김중업은 부여박물관 정문이 일본 신사 입구에 세우는 기둥문인 도리이(鳥居; とりい)를 모방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김중업은 일본 신사 도리이의 변형이자 그로테스크한 조형이라고 공격하면서 인식하지 못하는 모방의 위험성을 경고했고 김수근은 백제의 선도, 일본의 공간도 아닌 현대건축가로서 건축 언어를 표현한 것이라 했다.(256 페이지)

 

이 내용을 전하며 건축가 ’조한’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적 건축의 본질은 공간에 있는 것일까? 또한 형태적 차용이나 모사는 옳지 않은 것일까? 다시금 부여박물관을 봐야할 것 같다. 공간론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나 다시금 한국적 건축이 무엇인지 물어봐야겠다.”(‘원불교신문‘ 2015년 7월 24일 칼럼 ’부여박물관 한국적 건축, 그 논쟁의 현장‘ 참고)

 

저자는 문제의 남영동 대공분실 이야기도 한다. 사유의 다섯 번째 순서는 서촌이다. 저자는 인왕산 아래 동네를 서촌이라고 부른 역사적 근거는 없다고 말한다.(269 페이지) 인왕산을 서쪽의 산 즉 서산이라고 부른 바는 있지만 조선시대에 서촌이라는 지역은 서대문, 서소문 근처를 말했다고 한다.(270 페이지)

 

저자는 여항(閭巷)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꼬불꼬불한 골목으로 이어진 가난하고 평범한 동네라고. 서촌에는 조용히 머물다 오기 좋은 화가의 아틀리에가 두 곳이나 있다. 청전 이상범과 남정 박노수의 공간이다.(285 페이지) 최예선의 ‘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는 기대 이상으로 좋은 생각거리들과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해준 책이다. 감사하다. 다만 글씨가 작아 읽기 불편했다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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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살짝 내리더니 곧 갰다가 코스 점검을 위해 하는 순회 마지막 부분에 조금 세게 내렸습니다. 등산화를 신고 참 많이 걸은 날이었습니다. 안국역에서 정독도서관까지, 정독도서관에서 서울도서관까지, 서울도서관에서 명동성당까지...서울도서관에서 명동성당까지는 군데 군데 작은 착오들이 있어 코스를 되풀이해 이리저리 참 많이 걸었습니다.

 

백팩을 메고 다섯 시간 이상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놓았고 전철을 이용하는 90분 중 한 시간 이상을 선 채 왔더니 팔다리가 두드려 맞은 것 같습니다. 매일 30분씩 등산화를 신고 저녁 산책을 하면 근육 운동이 저절로 될 것 같습니다. 2019년 1월 8시간이나 한양도성을 걸을 때도 무거운 등산화를 신었는데 당시보다 오늘이 더 힘들게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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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東柱)', '사도(思悼)', '박열(朴烈)' 등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玆山魚譜)'가 다음 달에 개봉된다네요. '동주'는 강의 때문에 보았지요. 반면 '사도'는 존재 자체를 몰랐지만 알았어도 너무 가슴 아파 안 보았을 것이 분명하고 '박열'은 알았다면 가네코 후미코와의 사랑 때문에라도 보았을 영화지요.

 

정약용(丁若鏞)이 자신보다 능력면에서 낫다고 평한 정약전(丁若銓)은 열정이나 집중력면에서 정약용에는 미치지 못한 듯 해요. 정약용은 형 정약전을 쉬엄 쉬엄 공부하는 유형이었다고 표현했네요.

 

그래도 정약전은 절해고도의 유배지 흑산도에서 좌절하지 않고 문헌을 참고하고 실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자산어보'라는 역작을 썼으니 대단합니다. 정약전이 성품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궁금해요. 같은 유배지였으나 강진과 흑산도는 큰 차이가 났을 거예요.

 

한양에서 함께 출발해 나주에서 하룻 밤을 같이 보내고 각자의 유배지로 간 두 형제는 다시는 살아서 만나지 못했지요. 보겠다고 다짐해 놓고 본 영화가 하나도 없지만 '자산어보'는 꼭 보아야겠어요. 이 역시 다짐이지만 적어도 이번만은 다를 것 같은 기분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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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 - 시대를 앞선 통찰로 불운하게 생을 마감했던 우리 과학자들
이종호 지음 / 사과나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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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의 ‘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는 사대를 앞선 통찰 때문에 불운하게 생을 마감한 13인의 과학자를 다룬 책이다. 13인은 최부, 허준, 전유형, 이중환, 박제가, 정약전, 정약용, 서유구, 김정희, 김정호, 최한기, 지석영, 김용관 등이다. 관건은 ‘조선시대에 과학이 있었는가?’ 이다. 조선시대는 과학이란 말이 없었지만 저자가 선정한 13인은 과학적 마인드로 무장한 사람들이다. 또한 13인들 가운데 대부분은 유배형에 처해졌던 사람들이다.

 

최부(崔溥: 1454 - 1504)는 3대 중국 기행문인 ‘표해록’을 저술한 사람으로 갑자사화(1504년) 때 참형당했다. 최부는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였었다. 갑자사화는 조의제문과 관련해 김종직(부관참시), 김일손(사형) 등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최부는 1487년 도망친 노비들을 잡아들이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이 되어 제주도로 파견된다.(경차관은 지방에 임시로 보내던 벼술을 말한다.)

 

그런데 두 달 후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수행원 42명과 함께 배를 타고 고향인 전라도 나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맞아 중국 절강성 산문현 주산열도에 속한 대산섬에 닿는다. ‘표해록’은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최부는 놀라운 기억력과 예리한 관찰력 때문에 천재로 꼽힌다.

 

부친상을 당한 지 반년만에 모친상까지 당한 최부는 만 4년 동안 부모 상을 치른 후 성종의 부름을 받아 정5품인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임명되었으나 상중에 ‘표해록‘을 썼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성종의 비호에 힘입어 승진을 계속한다. 무오사화(1498년) 때 붕당을 조직했다는 혐의에 따라 장형(杖刑)과 유배에 처해졌던 최부는 갑자사화 때 참형된다.

 

허준(許浚; 1539 - 1615)은 ’동의보감‘을 저술한 사람이다. 허준 역시 유배에 처해졌었다. 광해군은 ’동의보감‘을 헌정한 허준의 노고를 치하해 양천 허씨에 대해서만은 앞으로 영원히 적서(嫡庶)의 차별을 두지 말라고 명했다.(47 페이지) 허준은 선조가 죽었다는 이유로 유배에 처해진다. 학자들은 허준이 유배를 가지 않았다면 ’동의보감‘이 탄생하지 못했거나 저술되었다 해도 상당히 늦어졌을 것이라 말한다.

 

’동의보감‘은 허준 일행이 선조의 명을 받아 집필을 시작한 책으로 저술 1년만에 일어난 정유재란으로 집필이 중단되었다가 허준 혼자 집필을 계속하였고 유배의 고통 속에서 광해군 시기에 완성한 책이다.

 

전유형(全有亨; 1566 - 1624)은 의병활동을 한 사람으로 의술에 능했고 이괄의 난(1624년)에 참형당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조선인이 해부를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가 바로 전유형이다. 전유형은 최초의 조선인 해부 경험자였다. 전유형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과 내응(內應)했다는 무고를 받고 참형당했다.

 

전유형은 참형 4년만에 복권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북 괴산군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이중환(李重煥; 1690 - 1752)은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한 사람으로 유배와 방랑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 갔다. 이중환의 집안은 노론과의 싸움에서 밀려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소론 출신이었다.

 

’택리지‘의 제목은 ’논어‘ 이인(里仁)편에 나오는 군자는 살만한 곳을 찾아 거한다는 의미의 가거지(可居志)에서 따온 것이다. 저자는 조선시대에 이중환처럼 박해당한 사람은 많았지만 이중환처럼 나름대로 자신의 분야를 개척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고 하며 그 대표적 인물로 정약용을 꼽았다.(108 페이지)

 

박제가(朴齊家; 1750 - 1805)는 ’북학의‘의 저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 중 중국에 가장 많이 다녀온 인물이 박제가다. 박제가는 중국에 모두 네 차례 다녀왔다. 박제가가 마지막으로 연행길에 오른 것은 순조 1년인 1801년으로 윤행임(尹行恁), 이덕무와 함께였다.

 

연경에서 돌아온 박제가는 그의 4차 연경행을 주선했던 윤행임이 실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를 원망했다는 이유로 엄혹한 심문을 당한 뒤 함경도 경성으로 유배당했다. 박제가의 사망 연도는 1815년과 1805년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스승이자 동지인 연암(1737 - 1805)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해서 죽은 것으로 본다.

 

박제가는 당대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파격적 경제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박제가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 이지함이 해외통상을 강조했음을 떠올렸다. 이지함은 일찍이 외국과의 무역을 장려해야만 전라도가 부유해질 것이라 주장했다. 조선의 명분론자들은 상업을 멸시했다. 장사를 하면 속임수가 생기는 등 순박한 조선사회가 변질될 것이라 생각했다.

 

정약전(丁若銓; 1758 - 1816)은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의 형으로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저자이다. 정약전의 호는 손암(巽庵)이다. 손(巽)은 주역의 한 괘이거니와 손암은 주역을 읽고 점치며 흑산도 유배 시기를 견뎠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한 뒤 1801년 신유사옥으로 정약종이 순교했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각각 흑산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정약현이 맏이, 정약전이 둘째, 정약종이 셋째, 정약용이 넷째다.)

 

정약전이 신유사옥에 연루된 것은 이벽(李蘗; 1754 - 1785)과 교유하면서 서학과 천주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인 데다 외사촌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교회의 제사 금지령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神主)를 불태우는 등 조정과 갈등을 빚은 사건에서 발단이 되었다.(이벽은 정약현 부인의 동생이다.)

 

당시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사람 가운데 살아서 나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 서문에서 당당히 자신을 박물자라고 적었다. 정약전은 이런 말을 했다.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 있어서 흑산이란 이름이 무서웠다. 집안 사람들 편지에는 흑산을 번번이 자산이라고 쓰고 있다. 자(玆)는 흑(黑)자와 같다...“

 

최근 ’玆山魚譜’를 자산어보가 아닌 현산어보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玆)를 검다는 뜻으로 읽을 때는 현으로 읽는다는 것이 근거다. 하지만 玆는 이 자, 검을 자, 검을 현 등으로 쓰인다.(검을 자로도 쓰는 것이다.) 저자는 학문이 한창 무르익을 40대 중반에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다행한 일이라 말한다.(165 페이지)

 

정약전이 잠수부나 잠수 장비가 없었던 시절 맨몸으로 물속까지 들어가야만 알 수 있는 일을 자세하게 적을 수 있었던 것은 해녀 덕분이다. ‘자산어보’에는 홍어, 상어뿐 아니라 각종 생물에 대한 기록에서 물고기를 해부한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에서 ‘자산어보’를 인용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1930년대의 수산학자 정문기는 ‘한국어보도’를 통해 ‘자산어보’를 근대 어류학의 시조로 평했다.

 

정약전은 자신이 과학자라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현실적 여건에서 해박한 선구적 지식인이자 박물자로서의 최상의 방법을 찾았다. 이는 그가 과학의 순교자라 불리기에 합당하다는 의미다.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은 수원 화성을 건립한 실학자이자 과학자이다. 18년의 유배 생활을 한 인물이다. 정약용은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강진에 유배된다. 순조 1년인 1801년의 일이다. 정약용이 수원화성 축조를 위해 고안한 거중기 등은 비록 중국에서 입수한 서양의 과학서적을 참조하기는 했지만 실제 제작한 것은 조선만의 독창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고안한 것은 기술 분야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이 극히 낮았던 조선 후기에서 과학 기술의 눈부신 성과로 평가된다. 정약용은 당시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한 서양 책 즉 중국에서 간행한 서양 과학 책들을 섭렵했다. 정약용은 광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여 렌즈나 안경의 이치에 대한 글을 남겼다.

 

조선시대에 사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현대 사진기의 전신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 바늘구멍상자)를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라 이름 붙여 연구했던 때다.

 

풍석(楓石) 서유구(徐有; 1764 - 1845)는 조선의 브리태니커 사전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저술한 사람으로 유배를 자청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는 579개의 문제와 18명의 신하가 제출한 답이 적혀 있다. 채택된 답이 가장 많은 사람이 풍석 서유구다. 총 181개(31.3%)다. 정약용은 117개로 20.2%다.

 

정조는 서유구에게 ”책을 열자 바로 개안(開眼)하는 느낌이다. 근거가 분명하고 충분하며 언어가 걸맞고 정연하여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이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는 평을 내렸다. 서유구는 파주 장단 등지로 낙향한 후 정약용과는 달리 경학과 경세학을 철저히 외면했다.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결과다.

 

그가 택한 길은 당대의 사대부들에게 잡학지식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서유구는 오비거사(五費居士)를 자처했다. 인생에서 다섯 가지를 낭비했다는 의미다. 1. 젊어서 공부한 시간, 2. 출사해 규장각 각신으로 보낸 시간, 3. 집안이 몰락해 향촌에서 농사와 농학에 매진한 시간, 4. 조정에 다시 불려가 벼슬한 시간, 5. 임원경제지를 편찬한 시간 등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 - 1856)는 금석학의 태두다. 역시 유배 기간을 보냈다. 김정희가 제주 유배길에 오른 것은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1830년(순조 30년) 8월 윤상도가 호조판서 박종훈, 전 유수(留守) 신위, 어영대장 유상량을 탐관오리로 탄핵했다. 탄핵을 한 윤상도는 오히려 옥에 갇혔다. 후에 김정희 아버지가 억울하게 윤상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꾸며졌고 김정희도 사건 종료 10년 무렵 안동 김씨들에 의해 관련자로 거론되어 가혹한 심문을 받고 제주 유배길에 처해졌다.

 

9년의 제주 유배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용산 한강변에서 거했다. 3년 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옹방강 등으로부터 금석학에 대해 영향을 받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김정희가 금석학에 본격 관심을 보인 것은 북한산에서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하고서부터다.

 

김정호(金正浩; 1804? - 1866?)는 조선 최고의 지리학자다. 김정호가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팔도강산 방방곡곡을 3번이나 돌았고 백두산에는 8번이나 올라갔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최남선의 ’고산자를 회함‘이다. 평민 출신의 김정호는 양반 출신의 혜강 최한기와 신분을 뛰어 넘어 교유했다.

 

혜강(惠崗) 최한기(崔漢綺; 1803 - 1877)는 조선의 박식가였다. 최한기는 천 여권의 책을 썼지만 현전하는 것은 120권 정도다. 최한기가 그렇게 많은 책을 쓴 것은 소장하고 있던 서양 과학책 덕분이다. 최한기는 직접 과학 기재들을 만들어 실험하고 연구했다.

 

지석영(池錫永; 1855 - 1935)은 종두법을 보급한 사람으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가 친일 경력 때문에 삭제되었다. 지석영의 업적 중 한글 보급을 빼놓을 수 없다. 지석영은 주시경과 함께 한글 가로쓰기를 주창한 선구자이다. 지석영은 일본어를 잘했다. 친일 정권의 한 축이 되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는데 적극 가담했고 이토 히로부미 추도사를 낭독했다.

 

김용관(金容瓘; 1897 - 1967)은 과학운동의 기수다. 사회진화론의 맥락에서 한국 과학의 진보를 역설한 사람이 김용관이다. 평생 가난한 삶을 살다가 간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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