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花潭)이기도 하고 복재(復齋)이기도 했던 서경덕(徐敬德; 1489-1546), 그의 제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1517-1578), 그의 제자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 이 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책이 최시한, 강미 공저의 ‘조강의 노래’다.

 

"16세기 후반 조선 선조 때였다.“ 한양 삼개(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통진 현감으로 있는 조헌(趙憲; 임진전쟁의 의병장)을 보러 가는 길에 <조강에서 폭풍을 만나 겪은 일을 쓴 이규보의 ‘조강부(祖江賦)’>를 떠올리는가 하면 스승 서경덕을 뵙고 오던 때를 회상하기도 한 토정은 물의 흐름과 달의 위치를 보아 바닷물이 밀려오고 나가는 시간을 대강 짐작하면서 임진강 쪽 물살이 내리쏟는 힘을 이용하여 포구가 많은 남쪽으로 배를 몰도록 도와 사람들을 풍랑에서 구한다.(서경덕은 인종 재위시 죽었으니 이지함이 스승을 만나고 온 것을 회상한 때에 서경덕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조헌은 스승 이지함이 이규보가 썼다는 물때를 일러주는 시를 백성들에게 자세히 설명하자 스승이 천문(天文)을 읽으며 지리(地理)를 궁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지함이 삼개에서 스승을 기억하던 때 스승은 이미 고인이 되었듯 조헌이 의병장으로 참전해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사망한 임진전쟁 당시 스승 이지함 역시 고인이 된 상태였다.) 지난 해 통일인문학 시간에 인상적으로 접한 조강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조강의 노래’에서 재미 있게 읽었다.

 

”서울 서쪽에 북한 지역을 전망하는 곳이 세 군데 있다. 김포시 하성면 조강리와 가금리 경계의 애기봉 전망대, 파주시의 오두산 통일전망대,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의 평화전망대가 그들인데 모두 조강 연안에 있다.“

 

지난 해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전망은 참 인상적이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장면은 연천 호로고루에서 바라보는 얕은 임진강의 풍경 이상으로 매력적이고 가슴 뭉클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단지 강의 깊이가 더 깊어서만은 아니다. 사람이 만나고 물자가 만나고 이야기가 만난다는 상징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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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의 노래 - 한강하구의 역사문화 이야기
최시한.강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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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祖江)이란 말을 들은 지 1년이 지나지 않았다. 조강은 한강의 끝줄기, 김포를 감싸고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일정 구간의 강을 의미한다.(김포 신문 참고) 저자들은 조강은 한강 하구의 다른 이름이라 말한다. 조강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역사와 지리 공부를 하다가 강(江) 공부를 자세히 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실천하는 차원이다.

 

‘한강 하구의 역사문화 이야기’란 부제를 가진 ‘조강의 노래’가 첫 교재가 되었다. 이야기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이 책은 스토리텔링 책이다. 공저자인 최시한 선생은 소설가이자 대학 교수고 강미 선생은 소설가이자 국어 교사다.

 

머리말을 통해 우리는 이런 글을 접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창작이라고 하면 문예 창작을 먼저 떠올리고. 이야기라고 하면 허구성이 강한 소설이나 설화 위주로 생각하는 관습이 있다.” 두 저자는 이 책은 창작, 허구 등과 관련이 없으나 그렇다고 책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사실적인가, 하는 점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한다.

 

본문에 의하면 조강은 어른 강, 여러 강이 모여 이룩한 큰 강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15 페이지) 여기서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우리는 강의 시작점을 발원지라 한다, 가령 ‘한강의 발원지는 태백 검룡소고 한탄강의 발원지는 북한 강원도 평강군 장암산이다.’란 식으로.

 

여기서 말하는 원은 당연히 언덕 원, 근원 원(原)이다. 이 단어는 조(祖)라는 단어와 상응한다. 인터넷에서 무작위로 검색해본 바를 소개한다. “오늘날의 나와 내 가족이 있고 자손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는 것도 모두 ‘조상이라는 근원’이 있고 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경북 매일 수록 시조시인/ 서예가 강성태 글 ‘풀을 내리며’ 중에서)

 

원(原)과 조(祖)가 상응한다고 했거니와 원이든 조든 시간적으로 앞서 있어야 마땅한데 조상 강이라는 조강의 경우 발원지보다 시간적으로 나중에 이루어진 것이니 이상하다.

 

각설(却說)하고 오늘날 조강은 잊힌 강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수운(水運)이 쇠퇴한 탓도 있지만 지도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 강과 연안의 삶을 한국인의 기억에서 지운 것은 한국전쟁이다. 1953년 7월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르면 대부분 조강 유역에 해당되는 한강하구의 약 70킬로미터는 휴전선(군사분계선)이 없는 중립 수역으로 쌍방의 민간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하면서 자기 측 지역에 정박할 수 있는 민간 선박 공동이용 수역이다.

 

그런 휴전선 양쪽 2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DMZ)가 오히려 중무장지대가 되었듯이 조강 연안은 출입 통제구역이 되었다. 조강은 철책에 갇혀 그 자체가 휴전선이나 비무장지대와 다름없게 되어 민물과 갯물이 뒤섞인 곳에 사는 다양하고 희귀한 어족들과 재두루미, 개리, 저어새 같은 대륙의 하늘을 오가는 철새들만의 터전이 되고 만 것이다.(17 페이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강 권역은 외세 침략의 현장이자 그에 맞서 흘린 피와 눈물로 더께가 앉은 곳이기도 하다. 조강은 애초부터 공동이용 수역이므로 남북이 양해만 하면 언제든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다.(17 페이지) 책에는 포천 현감직을 사임한 토정 이지함과 그의 제자인 통진 현감 중봉(重峯) 趙憲)이 나온다.(통진 출생의 조헌은 왜란을 예측하고 대비책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700명의 의사와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한양 삼개(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통진 현감으로 있는 제자 조헌(趙憲)을 보러 가는 길에 <조강에서 폭풍을 만나 겪은 일을 쓴 이규보의 ‘조강부(祖江賦)’>를 떠올리는가 하면 스승 서경덕을 뵙고 오던 때를 회상하기도 한 토정은 물의 흐름과 달의 위치를 보아 바닷물이 밀려오고 나가는 시간을 대강 짐작하면서 임진강 쪽 물살이 내리쏟는 힘을 이용하여 포구가 많은 남쪽으로 배를 몰도록 도와 사람들을 풍랑에서 구한다. 이지함은 이규보 선생이 지었다는 물참(밀물 때)에 관한 시를 통진 백성들에게 자세히 가르쳤다.

 

이양선(異樣船)들은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조강(조수 간만의 차가 커 접근이 쉽지 않았고 갯벌이나 모래가 많아 좌초하기 쉬웠던) 대신 대신 염하(강화해협)를 이용하다가 조강 수로를 막아 조선 조정을 압박하는 방법을 택했다. 흔히 병인박해(1866년)를 병인양요(1866년)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하지만 프랑스가 조선을 택한 것은 러시아와 영국을 모두 견제할 수 있는 곳이 조선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의 어두운 그림자는 조강 연안의 여러 포구들(조강포, 마근포, 강령포 등)에 유독 짙게 드리웠다. 1899년 초가을 인천과 노량진 사이에 경인 철도가 개봉되니 그 철마를 구경하러 가자는 말이 전국에 돌던 때였다.(123 페이지) 밀물 때 한번에 수백 척이 부산하게 출항을 준비했던 조강포의 모습은 이제 옛날 일이 되고 말았다.

 

한양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대는 시선(柴船; 조강 연안의 황해도 땅과 강화도, 통진 같은 데서 장작, 숯, 생선,젓갈 따위를 모아 싣고 한양을 오가던 배)들도 육로가 발달함에 따라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세금을 곡식으로 거두어 배로 나르던 조운제도가 점차 사라지다가 갑오개혁(1894년)을 계기로 아주 없어져버리고 화폐로 대신하게 된 것도 큰 타격이었다.(124 페이지)

 

조강은 경인선과도 관련이 있다. 경인선은 한국 최초의 철도이자 일본이 해외에 개통한 최초의 철도였다.(조선에 철도 도입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주미대리공사 이하영이었다. 물론 조선의 철도 부설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이 철도로 대한제국의 수도로 향하는 병력과 물자 수송의 길목을 틀어쥐게 되었다. 조강이 오랜 동안 맡았던 역할을 차지한 것이다.(140 페이지) 근대 문명의 상징인 철도는 대한제국 백성에게 고통과 굴욕을 안겨주었다. 철도 건설 부지를 헐값에 넘겨야 했고 턱없이 낮은 품삯을 받으며 노역에 동원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를 둘로 나눈 삼팔선(북위 38도선) 바로 아래에 있는 데다 서해와 인접하였기에 조강 연안의 마을들은 곧바로 전쟁터가 되었다. 전쟁 중에도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포탄이 떨어져도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다. 농사일을 하다가 대포나 총 소리가 들리면 몸을 피하고 그치면 나가서 일을 했다. 소리가 잠잠해질 때를 택하다 보니 나중에는 밤에 나가 일을 하기도 했다.

 

휴전 협정에 따르면 비무장지대가 끝나는 임진강 하구부터 강화도 말도까지로 정해진 한강하구의 수역은 중립 지역이다. 대부분 조강 지역에 해당하는 그곳은 교전 쌍방의 민간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는 공통이용 수역이다. 정전협정 당시부터 휴전선도 없고 DMZ도 없는 지역인 것이다. 남북이 대치하는 휴전 상황에서 조강은 그 자체가 휴전선이자 DMZ가 되고 말았다.(146 페이지)

 

조강은 남북 분단의 상처 그 자체가 되어 죽음과도 같은 정적에 빠져버렸다.(148 페이지) 강물의 휴전선, 강물의 비무장지대가 된 조강 유역을 평화지대로 만들고 공통으로 이용하기 위한 노력이 없지 않았다.

 

조강이 만남의 장이자 평화의 강, 나아가 공동 번영의 강이 될 날을 모두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150 페이지)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책은 창작, 허구 등과 관련이 없으나 그렇다고 책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사실적인가, 하는 점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 이해되었다. 사실과 상상력의 관계에 유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토리 개발의 필요성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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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趙光祖)평전’(이종수 지음)을 통해 ‘소학(小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소학‘은 주희가 편집한 책이고 김굉필의 스승인 김종직이 중요성을 강조한 책이다. 김종직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이 ’소학‘을 좋아해 소학 동자를 자처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주희의 ‘근사록(近思錄)’으로 학문의 중심을 잡고 ‘소학(小學)’을 널리 장려하라고 아뢰었다. 역대 임금들 중 성종이 ’소학‘을 즐겨 읽었다. 성종은 승정원에서 경연(經筵)에서 읽을 책으로 ’대학연의‘를 추천했지만 이를 듣지 않고 굳이 소학을 고집했다. 그것은 ’대학연의‘에 따르자면 부부 불화는 수신 및 제가에 실패한 성종 자신 탓이 되고 ’소학‘에 따르면 중궁 탓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윤희진 지음 ’제왕의 책‘ 참고)

 

윤희진은 이 내용을 전하며 고개가 끄덕여지는 흥미로운 해석이지만 성종에게 소학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해석했다. 즉 성종이 ’소학‘을 택한 것은 김종직으로 대표되는 사림파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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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평전 - 조선을 흔든 개혁의 바람
이종수 지음 / 생각정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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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 - 1519). 꽤 이른 나이부터 행동의 기준을 세상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배움과 판단에 의거한 도(道)에 둔 사람이다. 경기상업고등학교 내의 청송당 터에서, 운현궁에서 익선동으로 넘어갈 때 볼 수 있는 집터 표지석에서 잠시 이야기했을 뿐 본격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조광조는 출생지인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묻혔고 인근 심곡서원에 신주가 모셔졌다. 조광조는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목숨을 잃었다. 실록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중종 14년인 1519년 11월 15일 조광조가 옥에 갇힌 후 사관이 참여하지 않았다.

 

조광조 세력은 붕비(朋比; 붕당을 세워 자기편을 두둔함)의 죄를 받았다. 대명률에 따르면 참형에 해당하는 중죄다. 어제까지 아무 일 없다가 하룻만에 붕비의 죄명을 받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조광조는 중종으로부터 친히 국문받기를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광조의 스승은 김굉필(金宏弼; 1454 - 1504)이다. 조광조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에 처한 김굉필을 직접 찾아가 제자 되기를 간청했다. 소학(小學)을 좋아해 스스로 소학(小學) 동자라 칭했던 김굉필은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었다.(소학은 성리학의 대가 주희가 지시해 편찬한 책이다. 역대 경전 가운데 좋은 말씀을 가려 뽑아 수록한 선집 형태의 책이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제자인 사관 김일손이 스승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항우에게 죽임당한 의제를 애도하는 글)을 사초(史草)에 싣자 연산군이 조카 단종을 죽인 세조를 비난하는 글이라 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 등을 죽인 사건이다. 김굉필도 김종직의 제자 가운데 하나다.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의 계보가 형성된 것이다.

 

연산군은 세조의 증손자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이지만 세조의 등극을 문제시한 선비들을 벌하지도 않았고 문제제기를 수용하지도 않았다. 조광조가 생각하는 학문은 사장(詞章; 시문 짓기)이 아닌 경학(經學; 경서를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그런 그가 사장(詞章) 시험에 불쑥 응시해 장원을 차지했다. 조광조에게 문장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 쌓이다 보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조광조는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유교를 따르자는 기치를 내건 개혁을 주장했다.(58 페이지) 신하들에 힘입어 왕이 된 중종은 공신들에게 질릴 만큼 질린 임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보다 더한 권력을 누리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모두 죽었다. 중종이 조광조를 만난 것은 이 이후다.

 

재위 10년차의 중종은 요순시대의 이상적인 정치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유생들로서 대책을 논하라는 알성시 책문을 내렸다. 이에 조광조는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며 선한 것을 선하다 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 하는 이치가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답했다.

 

또한 임금은 대신에게 정치를 위임해야 한다고 답했다.(이는 정도전의 논리와 통하는 바다.) 알성시에 급제한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典籍)에 제수된 지 석달만에 사간원 정언(正言)을 제수받았다. 조광조는 사간원 정언에 제수받은 지 이틀만에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을 파직해달라는 청을 올렸다.

 

고작 6품의 초임 간원이 자신이 속한 부처의 장관을 포함한 언관 모두를 탄핵한 것이다.(84 페이지) 중종 시대에는 재해(災害)가 많았다. 이에 반정이 잘못 되었으니 단경왕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중종은 답하지 않았다.

 

“구언(求言; 임금이 신하의 직언을 구함)한 뒤 아뢴 바가 비록 광패(狂悖; 행동이 도의에 벗어나서 미친 사람처럼 사납고 막됨)하더라도 잡아다 추문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니 상소 내용이 비록 그르다 하더라도 죄를 줄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었지만 중종은 두 사람(박상, 김정)을 유배에 처했다.

 

중종은 죄를 주지 않으면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모를 것이기에 죄를 준다고 답했다. 조광조는 두 사람의 말이 지나치면 쓰지 않으면 될 것을 죄는 왜 주는 것인가, 물으며 대간이 오히려 죄주기를 청하였으니 파직할 것을 청했다. 중종과 조광조는 의견이 어긋났다.

 

중종이 다른 정언(正言)들은 용납하였는데 어찌 조광조만이 용납하지 않느냐 말하자 조광조는 사람들의 의견이야 저마다 다를 수 있는 법, 그들이 용납했다고 자신 또한 그래야 할 까닭이 있느냐 말했다.(103 페이지) 결국 조광조의 뜻대로 사건은 정리되었다. 하지만 의견이 둘로 나뉜 것은 여전했다. 조광조는 경계심의 대상이자 기대감의 대상이 되었다.

 

조광조는 이듬해 3월 홍문관 부수찬(종 6품), 후에 수찬(정 6품)의 자리에 올랐다. 경연관(經筵官)으로서 임금의 경연에 함께하게 된 것이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근사록(近思錄)’으로 학문의 중심을 잡고 ‘소학(小學)’을 널리 장려하라고 말했다. 당시 하급관원이라도 실력이 남다르면 핵심적인 경연관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저자에 의하면 연산군은 성군포기선언을 했고 어려운 책을 읽으라고 한 경연 스승 정여창을 미워하다가 유배 끝에 부관참시까지 했다.(116, 117 페이지) 세자 시절이 없었고 정국이 혼란스러워 마음 편히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던 중종은 조광조가 경연관으로 참여한 몇 년간 열심히 공부했다.

 

조광조는 홍문관 부수찬(종 6품)이 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아서 당상관인 정3품 부제학에 올랐다. 부제학은 홍문관의 실질적 책임자다. 정몽주, 성삼문, 박팽년 등에 대한 처우 문제가 불거졌다. 성균관 유생들은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은) 김굉필 등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이자, 김정, 기준, 정응, 김구, 윤자임, 박훈, 박세희, 김식 등이 조광조 세력이었다. 문묘(文廟) 종사(從祀)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모셔진 신하에게 왕도 무릎을 꿇어야 했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 오르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군신의 도가 사제의 도로 바뀌는 것이다.

 

저자는 정광필이 사육신 추장(追葬)과 문묘종사를 반대한 것은 혹시 조광조 무리의 정치세력화를 염려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란 말을 한다. 조광조는 스승 김굉필에 대한 문묘 종사 반대 논리를, 스승은 자구(字句)나 파헤치는 학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는 말로 물리쳤다.

 

김굉필은 제대로 된 학술서 하나 남기지 못한 인물이다.(김굉필이 문묘에 종사된 것은 광해군 시기에 이르러서다.) 조광조의 생각들을 따르다 보면 조선을 처음 만들어가던 정도전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어떤 나라를 꿈꾸는가, 무엇에 정치의 기본을 둘 것인가, 군신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자세가 그렇고, 그 물음에 대한 답 또한 그렇다.

 

두 사람 모두 큰 그림을 그리는 설계자였으니 정도전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첫 기초를 세웠다면 조광조는 100년이 지난 조선을 다시 증축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168 페이지) 당연히 이해가 얽혀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조광조는 소격서(昭格署) 혁파 상소에서 ”대저 시비를 가리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사정(邪正)을 살피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미혹(迷惑)하지 않는 것을 강(剛)이라 하고, 확실하게 의심없는 것을 단(斷)이라 합니다. 무릇 이 네 가지는 모두 임금의 일상 생활에 한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을 보존하여 변함이 없으면 사물(事物)을 접응(接應)함에 있어 갈피를 못잡고 주저하는 병통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어찌 이런 것이 있으시겠습니까?“라 말했다.

 

중종은 ”조종조(祖宗朝)에서 혁파하지 못한 일을 내 어찌 스스로 잘난 체하여 고치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중종 시대에 재해가 많았거니와 심한 지진이 있었다. 조광조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소인이 인사(人事)를 잘못한 탓이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누가 보아도 조광조를 지칭한 상소였다.

 

조광조는 아직도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지 못하느냐고 상소했다. 중종은 조광조가 사직하더라도 소격서 혁파는 윤허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소격서는 고려에서 시작된 것이니 없앤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말했으나 중종은 그 퇴로(退路; 출구전략?)를 걷어찼다.

 

조광조는 소격서 혁파건으로 계속 상소했다. 결과론인지 모르지만 소격서(혁파)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란 의문이 든다. 결국 중종은 소격서 혁파를 윤허했다. 두 달 후 조광조는 사헌부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치적 부담이 큰 자리였다. 사실 소격서는 재해의 원인으로 지목되었었다.

 

이제 위훈삭제(僞勳削除)건이 남았다. 중종 당시 책봉된 정국(靖國) 공신들에 대한 책봉을 거두어 제자리로 돌려놓자는 것이었다. 중종 반정은 가장 많은 공신이 책봉된 사건이었다. 중종과도 밀접히 관련된 문제였다. 더구나 주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미 준 선물을 거두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조광조는 자신들의 세력을 제거하려다가 발각된 김우증(金友曾)에게 참형을 선고하지 않음으로써 대간들에게 탄핵당하기까지 했다.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 제도 시행을 추천했다. 천거로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다. 현량과는 조광조가 출사 이전부터 구상했던 정책 중 하나다. 조광조의 개혁 구상 가운데 유일하게 사심 어린 정책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다.

 

조광조는 중종이 정국공신 개정을 불편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종을 위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공도 없이 공신이 된 자들이 호의호식하는 것은 백성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이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었다.

 

조광조도 공신 책봉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4등 공신만 개정하자는 타협책도 제시되었다. 공이 없이 공신이 되었다며 스스로 공신 개정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중종은 반정 당시 경황이 없어 공신 책봉에 문제가 있었음을 뼈아프게 시인하며 개정을 명했다. 117명 중 76명이 개정 대상자로 정해졌다.

 

기묘년(1519년) 11월 15일 조광조는 전격 체포되었다. 조광조에게 중죄를 적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를 지지해온 사람들이 함께 죄를 받겠다고 청하고 나섰다. 조광조는 감사(減死)되었다. 사건의 발단이 남곤 등의 참소가 아니라 임금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임금이 몰래 일을 꾸며 자신의 신하를 제거하려 했으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비겁한 처사였다.

 

조광조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조광조를 쓰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중종은 조광조 사사(賜死)를 명했다. 사사의 명이 전해지자 조광조는 오히려 태연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광조는 함께 사사에 처해지게 된 동료들과 달리 우리 임금을 만나고 싶을 뿐이라며 눈물을 멈추지 않았고 인사불성이 될 만큼 술에 취했다.

 

공초(供招;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한 말)에 의하면 조광조(趙光祖; 1482 - 1520), 김정(金淨; 1486 - 1521), 김식(金湜; 1482 - 1520), 김구(金絿; 1488 - 1534) 등은 붕당의 죄를 지었고 기준(奇遵; 1492 - 1521), 윤자임(尹自任; 1488 - 1519), 박세희(朴世熹; 1491 - ?), 박훈(朴薰; 1484 - 1540) 등은 그들을 추종한 죄를 지었다.(265 페이지)

 

어떻든 이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넘기지도, 이 기막힌 처지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조광조의 논의가 궤격(詭激; 언행이 온당하지 않고 과격함)하다는 말에도 수긍할 수 없으며 우리의 근심은 오직 나라를 위한 것이었을 뿐 사사로이 부화(附和; 줏대 없이 남의 의견을 따름)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조광조는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것은 오직 임금의 마음뿐, 그것만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임금께서도 자신에게 그 믿음을 허락하신 것이었는데, 지금 다른 참소로 인해 군신간의 의리를 저버리시는 것이 아니냐 호소했다.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했고 함께 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유인숙(柳仁淑; 1485 - 1545), 공서린(孔瑞麟; 1483 - 1541) 등은 조광조와 같은 벌을 받겠다며 옥에 가둬달라 청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사사건건 조광조의 정책을 막아서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1462 - 1538)마저도 조광조를 위한 탄원을 멈추지 않았다. 탄원 물결은 정광필이 영의정 자리에서 체직(遞職)당한 뒤에 멈추었다. 조광조는 경기도 평택 농성(農城) 땅에 유배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사사되었다. 조광조는 자신이 죽거든 먼 길 가기 어렵지 않게 관을 얇게 만들라고 명했다.

 

의아한 것은 중종의 태도다. 조광조의 정책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라 생각했다면 왜 제때 말하지 않은 것일까? 결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그렇게 돌변하다니..조광조의 죽음은 이상하다. 아무도 청하지 않은 죽음을 임금이 홀로 결정한 것이다. 사관은 중종을 마치 두 임금 같았다고 기록했다.

 

연산군 시대의 두 사화(士禍)는 어쨌거나 폭군이라 비난받던 임금이 남긴 결과였다. 하지만 기묘사화는 요순시대를 따르겠다던 임금의 결정이었다. 중종은 스스로 발탁하여 믿고 의지했던 신하들을 일방적으로 배반한 신의(信義) 없는 임금이 아닐 수 없다.

 

중종은 아무래도 조광조에게 질투를 느낀 것 같다. 용의주도하고 치밀하고 흠 잡을 것 하나 없는 조광조에 비해 군주임에도 자신은 참 보잘 것 없다고 느낀 것 같다. 저자는 중종의 다스림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도,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도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고 말한다.(290 페이지)

 

“중종이 알았다면 섭섭했겠지만” 조광조는 중종 승하 다음 해인 인종 1년(1545년)에 복권되었다. 조광조는 선조에 의해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광해군 2년에 스승인 김굉필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조광조는 단지 더 나은 정책과 제도만이 아닌, 조선의 정신과 그 방향을 고민했던 인물이다.“(29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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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불편한 책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다. 내용 이야기가 아니라 편집 이야기다. 최근 읽은 두 권의 역사책이 모두 중요한 부분을 흰 바탕에 검은 글씨가 아닌 푸른색이나 짙은 녹색 바탕에 흰 글씨로 처리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읽기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정작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읽기 불편하니 아쉽다. 그런가 하면 어떤 책은 판형은 작은데 무리하게 볼륨감을 키우려고 뻣뻣한 종이를 써 손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미끄러워서 잡기 불편한 책도 있다.

 

책읽기도 노동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눈, 손, 머리 등등에 무리가 가는 노동. 논란의 여지도 있는 이야기도 하고 싶다. 요즘 벽돌책이 많이 나온다. 필요해서 두꺼운 책이 있는가 하면 핵심을 선별하지 못하는 요령부득의 장황함 때문에 책이 두꺼워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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