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한해 동안 내게 가장 의미 있었던 글자는 무엇일까? 2음절 이상은 생각나는 것이 없고 1음절 단어를 고르라면 아무래도 평(平)이란 글자다. 우선 언급해야 할 것은 지난 11월 고석정(孤石亭), 마당바위, 송대소(松臺沼), 직탕폭포(直湯瀑布) 등 철원의 지질공원 코스에서 평화(平和)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다.

 

갑작스런 일정 변경에도 불구하고 나름으로는 잘 대처했다고 자평하며 말한 바를 소개하면 송대소의 적벽(赤壁)에서 “적(赤)이란 글자가 있지만 한자에는 이 글자 외에 붉음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더 있지요. 단(丹), 주(朱), 홍(紅), 자(紫) 등이지요.. 공자(孔子)는 중간색인 자색(紫色)이 정색(正色)인 붉은 색(‘주; 朱‘)을 빼앗는 것을 미워한다고 말했지요. 오늘 우리의 주제인 평화란 섞였다고 해서, 중간이라 해서 배제해서는 만들 수 없는 것이지요. 물론 평화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일방의 책임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요. 이 이야기가 오늘 제가 평화를 주제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평화는 일방적일 수 없지요. 조화를 지향하고 포용해야 하는 것이지요.”란 말을 한 것이다.

 

이제 지질공원 해설사 데뷔에 대해 이야기 하자. 2019년의 일이니 이미 지난 일인데 무슨 이유로 말하려는가,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2019년 9월 2일이 내 지질공원 해설사 데뷔일이다. 하지만 이 날은 그저 자격증을 받았을 뿐이니 정식 데뷔일이 아니다. 내가 지질로 첫 해설을 한 것은 2020년 1월 3일이다.

 

2019년 9월에서 1년이 넘은 2020년 11월 어느 날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만날 오리산과 680미터 고지가 있는 평강(平康)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없지 않느냐? 이제 1년이 지났으니 지질에 대해 다른 이야기도 해야 하지 않느냐?” 물론 이는 나를 겨냥해 나온 말이 아니었다.

 

시위를 당기되 쏘지 않는다는 원뜻과, 이에서 나아가 방법만을 가르치고 스스로 핵심을 터득하게 함을 이른다는 수사(修辭)로 쓰이는 것까지 두루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인이불발(引而不發)이란 말이 있지만 전기한 분은 그 지침을 그르친 것이었다. 이 분은 누구보다도 내가 시연한 좌상바위 지질 해설을 주의깊게 들은 분이었다.

 

그랬으니 내가 아우라지 베개용암, 백의리층, 재인폭포 등을 50만년전에서 10만년전 사이에 오리산 등에서 분출해 흘러온 용암으로 만들어진 명소들이라 소개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즉 불가피하게 언급했지만 짧게 필요한 부분만을 다룬 것임을 알 것이란 말이다.

 

우리는 평강에 대해 잘 모른다. 수십만년전 화산 분출로 연천에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 북한 강원도 평강군이지만 우리는 그곳에 갈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지질학자들과 해설사들, 그리고 다양한 관계자들을 두루 아우르는 당사자들이다. 이제 같은 평(平)자가 들어 있는 평양의 한 궁궐에 대해 이야기 하자.

 

평강처럼 공교롭게 같은 평(平)이란 글자를 쓰는 이 도시는 당연히 평양(平壤)이다. 평양에는 풍경궁(豊慶宮)이란 궁궐이 있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중건(重建)한 경복궁을 확장해 짓기까지 한 고종은 평양에 360칸이나 되는 풍경궁이란 행궁(行宮; 임금이 거둥할 때 머무는 별궁)을 지었다.

 

특진관 김규홍이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은 모두 두 개의 수도를 세웠으니 그것은 하늘과 땅에 충만된 화기(和氣)를 받들고 천하의 명승지를 타고 앉으며 만대의 장구한 계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周) 나라와 한(漢) 나라, 당(唐) 나라가 모두 그러했고 명(明) 나라에 이르러서는 관청을 세우고 나누어 다스려 그 제도가 더욱 완비되었습니다. 지금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 중 두 수도를 두는 제도를 시행하지 않는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라 아뢰자 고종은 짐은 벌써부터 이에 대하여 생각해 온 지가 오래되었는데 마침 중신(重臣)이 상소를 올려 논하였으니 이제 평양에 행궁(行宮)을 두고 서경이라고 부름으로써 나라의 천만년 공고한 울타리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고종은 백성들이 시의적절하지도 않고 무모하기까지 한 토목공사를 중단해 달라는 뜻으로 신문고를 치자 대궐문을 엄중하게 지키지 않아 생긴 현상이라 답한 임금이었다. 그에게 평양은 어떤 곳이었을까?

 

고종에게 평양은 관서(關西)의 요충지이기에 방비를 강화해야 하므로 원수부(元帥府; 대한제국 때 설치되었던 황제 직속의 최고 군통수기관.. 경운궁 즉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우측에 전각이 있었으나 1904년 원수부 폐지 이후 건물이 헐렸음)로 하여금 평양 친위대를 재편하라고 명한 곳이었다.

 

대한제국 광무 6년(1902년) 평양에 지은 행궁인 풍경궁은 자혜의원으로 전용되었고 일제강점기에 멸실(滅失)된 뒤 현재는 그 터에 김일성종합대학 부속 평양의학대학이 들어섰다. 평강의 오리산과 평양의 풍경궁(터)...두 곳 모두 갈 수 없는 가운데 평강은 일반인들(예컨대 소이산에 오르는 분들)에게 익숙한 반면 풍경궁은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은 탓에 대다수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다.

 

남한 지역에 있었고 교과서에 실린 원수부도 일반인들에게는 낯설다. 교과서에 실렸는가 여부가 중요하지는 않다. 어떤 시설이든 인물이든 사건이든 무슨 맥락에서 알게 되는지가 관건이다. 망국 군주(무능함과 무책임함, 반민중적 등)로서의 고종이 주제가 아니니 짧게 말하자면 오늘 주제로 이야기 한 풍경궁은 고종의 어이 없는 허식(虛飾)을 말하는데 필요한 시설이다.

 

연천에는 장수왕(5세기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꾼 임금)의 평양 천도가 계기가 되어 축성된 호로고루가 있다. 우리는 연천이 한국전쟁 이전 북한 지역이었다가 수복된 곳이라는 데에 안도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이곳이 북한 지역이 아니기에 호로고루를 볼 수 있는 것이라는 데에 감사하게 된다.

 

평(平)은 의미 있는 뜻들을 참 많이 가지고 있다. 고르게 하다, 가지런하게 되다, 편안하다, 무사하다, 이루어지다, 바르다, 갖추어지다, 사사로움이 없다, 화목하다 등이다.

 

그러고 보면 이 단어는 올해가 아닌 내년에 더 필요한 단어다. 평화(平和)란 입('구; 口')에 밥(’화; 禾‘)이 고루(’평; 平’) 들어가는 것이라 파자(破字)해 말하곤 하지만 2021년의 나에게 평화(平和)의 시작은 음식을 평탄하게, 그리고 울체(鬱滯)되지 않게 먹는 것이다. 2020년의 마지막 날인 오늘 나는 올해보다 더 좋은 내년을 염원하며 마음이 평온한 와이제너들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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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암석(巖石)인 맨틀, 액체인 외핵, 고체인 내핵 등으로 이루어졌음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맨틀은 망토(cloak)라는 말에서 비롯된 말로 바깥 부분을 뜻한다. 한글 자판으로 설정하고 cloak을 입력하니 ‘치ㅐ마’라는 글자가 된다. 재미 있는 글자다.

 

ㅐ에 해당하는 o를 빼고 한글로 설정한 뒤 clak를 입력했다. 무언가 의미심장한 관련 단어가 결과로 도출되기를 바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clak(으)로 검색하시겠습니까?란 문구가 떴을 뿐이다. cloak에 해당하는 다른 단어로 프랑스어에서 온 manteau가 있다.

 

어원학은 모르지만 맨틀과 하나의 뿌리를 가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해서까지 단어를 기억해야 하는가? 아니 그것은 아니고 정리를 위해 수고를 감수한 것일 뿐이다.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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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하늘 - 세계 최고 과학 국가를 만든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
정성희 지음 / 사우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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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조선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의 말이다.(니덤은 미국의 천문학자 루퍼스; Will Carl Rufus‘; 1876-1946’가 세계 학계에 소개한 석각 천문도; 태조가 명해 제작한 석각 천문도를 바탕으로 연구 논문을 썼다.) 이 말은 찬사지만 아쉬움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그 이후 조선, 그리고 한국은 천문학 분야에서 정체되거나 15세기의 성과를 잇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5세기 조선은 세계 최고의 지리적 안목도 가졌었다. 이 사실은 사라진 원본 대신 모사본이 일본 류코쿠 대학(龍谷大学)에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증명하는 바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이후 조선은 16세기 초 훨씬 퇴보한 혼일역대강리지도라는 지도를 만들었다.

 

정성희의 세종의 하늘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던 15세기 조선의 천문학을 다룬 책이다. 조선은 자신들이 천명(天命)을 받은 왕조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고구려 천문도를 이용했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바로 그렇게 이성계가 4세기 무렵 고구려 평양에서 각석(刻石)한 천문도 비석의 탁본을 바탕으로 천문관서인 서운관 관원에게 명해 탄생한 천문도다.(지도가 땅의 모습을 구현; 具顯한 것이라면 천문도는 하늘의 모습을 구현한 것이다. 태조본 석각 천문도에는 입성; 立星이란 별자리가 있고 태조본을 토대로 만든 숙종본 석각 천문도에는 건성; 建星이란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같은 별자리이지만 고려 시대에는 왕건(王建)의 건 즉 세울 ; 을 피휘해 뜻이 같은 설 ; 자를 써서 별자리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사정이 이렇다면 조선 건국세력은 고려 천문도를 고구려 천문도라 주장한 것이 된다.)

 

하늘의 형상을 차()와 분야(分野)에 따라 그린 그림이란 뜻의 이 천문도는 1241년 중국 남송시대에 제작된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 다음으로 오래된 유산이다.(차는 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적도 부근을 서에서 동으로 나눈 12구역을 말하고, 분야는 하늘의 별자리를 12구역으로 나누어 땅의 해당 지역과 대응시킨 것을 말한다.)

 

전통시대 동아시아 군주는 하늘의 천문 현상을 단서로 삼아 올바른 정치를 펼쳐야 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늘의 현상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늘이 인간사회에 보내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제왕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하늘이 상과 벌을 내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45 페이지) 세종도 임금이 덕을 닦으면 일어날 일, 월식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시경(詩經)’의 말을 믿었다.(54 페이지)

 

전통시대 사람들은 신하가 군주의 권능을 침해할 때 일식(日蝕/ 日食)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동양에서는 일식을 용이 태양을 삼키려는 것으로 이해해 용을 쫓아 태양을 구하는 구식례(救食禮)를 치렀다. 우리 조상들은 일식을 신하를 상징하는 달이 임금을 상징하는 해를 잠식하는 현상 또는 강한 음기가 쇠약한 양기를 압도해서 생겨나는 현상으로 보았다. 구식례는 퍼포먼스였다. 북을 치고 활을 쏘는 등 달을 향해 공격을 하고 제단에는 희생(犧牲; 종묘제사 등에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을 바쳤다.

 

반면 가뭄에 대해서는 일식과 달리 존귀한 양()이 비천한 음()을 소멸시킨 현상으로 생각하고 조용히 기우제를 올리며 비가 내리기를 수동적으로 요청하는 등 난리를 치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는 종을 만들어 쳤다. 시간을 알려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새 왕조가 들어선 것을 알리려는 데에 더 큰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해가 지면 28번의 종을 쳐서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人定)과 새벽이 되면 33번의 종을 쳐서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파루(罷漏) 가운데 인정은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파루는 우리 고유의 것이다.(64 페이지) 조선시대에 시보(時報)는 민간에 대한 통치 수단이자 지배층의 시간 관리를 위한 방편이었다.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을 궁정 천문학 또는 왕립 천문학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88 페이지)

 

고종 21년인 1884년부터 돈화문과 금천교 사이에 대포를 설치하여 종 대신 포를 쏘아 시간을 알렸다. 1895년부터는 인정과 파루에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는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대신 오정과 자정에만 시간을 알려주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조선과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지상 세계를 지배하는 왕의 권력이 하늘에서 온다는 믿음 때문에 시간을 독점적으로 측정해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 시간을 독점적으로 측정해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행위를 관상수시(觀象授時)라 한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평정한 것을 비롯 사돈인 심온을 제거하는 등 손에 많은 피를 묻힌 태종은 그래서인지 하늘의 재이(災異)에 민감했다. 재이란 천재(天災)와 지이(地異)를 이르는 말로 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을 지칭한다. 태종은 누구보다도 하늘이 재이를 내려 인간을 꾸짖는다는 천견(天譴) 사상을 굳게 믿은 왕이었다. 조선 천문학을 크게 발전시킨 세종도 천견사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반면 세조는 왕이 근신한다고 해서 혜성이 사라진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천인감응론에 바탕을 둔 재이론이 점차 극복되어간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였다. 서양과학의 수용 등으로 자연관이 변화한 결과다. 과거 동아시아에서 하늘의 일은 천자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고 천자만이 대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제후국인 조선의 관상수시는 사대의 예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제후국 조선이 독자적인 역법을 갖는 것은 종주국에 대한 저항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천문을 정사(政事)에 정확히 반영하기 위해 1년의 시간을 들여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간의대를 설치했다.(103 페이지) 그런데 세종은 비용을 많이 들여 백성들이 힘들게 지은 간의대를 헐고자 했다. 세종은 처음에는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라고 했다가 반대가 극심하자 결국 중국 사신이 볼 수밖에 없어 본래부터 옮겨 지으려 했다는 말을 했다.(103, 106, 108 페이지) 간의대는 세종의 의지대로 경복궁 북서쪽으로 이전되었다.(109 페이지)

 

세종이 만든 간의대는 중국 원나라 천문가인 곽수경이 1279년에 건립한 사천대(司天臺)를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109 페이지) 곽수경의 업적 중 가장 찬란한 것은 수시력(授時曆)이란 역법을 만든 것이다.(114 페이지) 수시(授時)서경(書經)’에 나오는 경수민시(敬授民時)에서 유래했다. 공경히 백성이 때를 잘 맞추도록 한다는 의미다.(115 페이지) 수시력의 완전정복은 조선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조선 세종 대 이순지와 김담이 편찬한 칠정산내편으로 인해서다.(칠정산은 움직이는 7개의 별을 계산한다는 의미로 일곱 개의 별이란 해와 달 + 목화토금수성이란 다섯 행성을 의미한다.) 이는 곽수경의 수시력 계산법을 정확히 파악하고 조선 실정에 맞게 교정한 역법이다.(116 페이지) 건국 이후 조선은 명나라의 시간을 사용했다. 조선시대 동지사행(冬至使行)은 명 황제가 반포해주는 달력을 받기 위해 연경(북경)에 가는 일이었다. 문제는 명나라 수도 연경과 조선 한양은 위도가 달라 시간이 달랐다는 점이다.(광화문; 37348, 북경; 3956)

 

세종은 백성의 불편을 해소해주는 것이야말로 하늘을 공경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안 임금이었다. 세종은 일식 시작 시각을 15분 어긋나게 예측한 이천봉(李天封)을 곤장으로 다스렸다. 물론 15분 오차는 이천봉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중국과 시간이 다른 탓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종은 조선은 중국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현실에 맞는 천문 체계를 정비하기 시작했다.(91, 92 페이지)

 

세종은 즉위 2년 후인 1420년에 경복궁에 내관상감을 설치하고 첨성대란 이름의 관측대를 세웠다. 우리 역사에서 천문 관측대는 고구려,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에도 설치되었다. 태조와 태종은 시간, 인력, 경제적 부담 등 때문에 왕립 천문대 건립 염원을 이루지 못했지만 세종은 달랐다. 세종은 이미 장영실 등의 천문가들을 중국에 보내는 등 천문대 건립 준비를 했다.(일행이 본 천문기기는 명나라 것이 아니었다. 1279년 원나라 곽수경이 만든 천문기기였다.; 133 페이지)

 

세종의 천문 사업은 1432(세종 14) 간의대 건설을 시작으로 총 7년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1433년에 간의대(簡儀臺)가 축조되었고 1434년에 자격루(自擊漏)와 앙부일구(仰釜日晷), 1437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낮과 밤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주야 겸용 해시계), 1438년 흠경각(欽敬閣) 옥루(屋漏) 등이 완성되었다. 1420년 천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한 지 18년만에 오랜 꿈이 실현된 것이다.(105 페이지)

 

세종이 이룩하고자 한 천문학은 바로 원나라 곽수경이 이룩해놓은 첨단 천문학이었다. 찬란했던 곽수경의 사천대는 명나라가 들어서자 운행을 멈추었다. 명나라는 천문이나 과학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천문학은 원나라의 천문학을 그대로 답습했다. 과학에서 답습은 퇴보를 의미한다.(116 페이지)

 

“15세기 조선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는 니덤의 말을 인용했거니와 이는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천문학에서 퇴보했기 때문이다. 물론 명의 퇴보만이 아니라 세종의 프로젝트가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니덤은 한국은 15세기 초와 17세기 초에 천문학이 큰 도약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15세기 초는 세종의 프로젝트 덕이고 17세기 초는 인조와 효종이 통치하던 시기로 서양 천문학 전래가 계기가 되었다.

 

전통 시대의 달력은 역서, 월력, 책력 등으로 불렸다. 이는 오늘날의 달력 이상의 농경 및 길흉화복 등의 정보가 담긴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앞 부분에서 장영실 일행이 명나라에서 보고 온 것이 원나라의 천문기기였다고 했거니와 이는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었다. 명나라 천문대였다면 경비가 삼엄해 제대로 조사해볼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133 페이지)

 

장영실의 임무는 곽수경이 만든 보루각과 흠경각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대로 모방하여 제작하는 것이었다.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은 천문의기 제작을 총감독한 이천(李蕆), 이론적 뒷받침으로 역법을 교정한 이순지(李純之), 천문의기를 제작하고 개발한 장영실(蔣英實)이라는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범 7년만에 완성된 천문 프로젝트도 놀라운 성과였다.(166 페이지)

 

구루(晷漏)란 말이 있다.(167 페이지) ()는 앙부일구(仰釜日晷)란 말에서 보듯 해시계를 의미하고 루()는 자격루(自擊漏)란 말에서 보듯 물시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구루는 해시계와 물시계를 이르는 말이다.(일구라는 원문 그대로 풀이하면 해 그림자다.) 가마솥 시계라는 의미의 앙부일구는 세계 유일의 오목 해시계다. 세종대에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임진왜란 때 모두 없어지고 17세기 후반인 현종-숙종 대에 다시 제작되었다.(204 페이지) 경복궁 사정전 앞,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 창경궁 풍기대 앞의 앙부일구는 17세기 후반에 만든 앙부일구 복제품이다.

 

일성정시의는 주례(周禮)’원사(元史)’ 등의 경전과 역사서에 소개된 별을 이용한 시간 측정 방법을 참조하여 세종 대에 독창적으로 제작한 시계다. 낮에는 태양의 운동을 통해, 밤에는 별의 움직임을 이용해 태양시와 항성시를 측정하는 장치다.(220 페이지)

 

세종의 하늘은 조선 역사와 과학을 조화롭게 다룬 책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 천문학은 첨단 과학이었다. 전기했듯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은 궁정 천문학 또는 왕립 천문학이다. 15세기 우리의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그 이후 정체되었다. 이는 궁정 천문학 또는 왕립 천문학의 한계 때문이라 짐작된다. 세종이 우리의 역법이 중국의 역법과 다르다는 사실을 안 것이 우리의 글이 중국의 글과 달라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우리 글을 만들려고 결심하게 된 데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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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이란 말을 처음부터 종묘제사 등에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을 의미하는 것으로 배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에게 익숙한 희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다른 사람이나 특정 목적 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이나 재산, 명예와 이익 등을 바치거나 버리는 것 또는 그것을 빼앗긴다는 의미리라.

 

많은 사람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지만 희생이란 말이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이라 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에게 그 반대는 무엇인가, 라 물은 적이 있는데 대부분 몰랐다. ‘궤식; 饋食이 답이다.

 

일식을 日蝕으로도 쓰고 日食으로도 쓴다는 사실을 오늘 알았다. 그럼 전통 시대 우리 조상들이 일식과 가뭄에 대해 다른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있었을까?

 

우리 조상들은 일식을, 신하를 상징하는 달이 임금을 상징하는 해를 잠식하는 현상 또는 강한 음기가 쇠약한 양기를 압도해서 생겨나는 현상으로 보고 구식례(救食禮)라는 퍼포먼스를 치렀다.

 

북을 치고 활을 쏘는 등 달을 향해 공격을 하고 제단에는 희생(犧牲)을 바친 것이다. 반면 가뭄은 일식과 달리 존귀한 양이 비천한 음을 소멸시킨 현상으로 생각해 조용히 기우제를 올리며 비가 내리기를 수동적으로 요청하는 등 난리를 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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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
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 이수영 옮김 / 삼천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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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을 한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가 "우리 나라가 독립한 이래 가장 위대한 애국자는 침식을 가장 많이 막아낸 사람이다."란 말도 했다지질학자 데이비드 몽고메리(David Montgomery; 1961-)의 ''에서 접하게 된 말이다. ‘은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이라는 부제를 가진 책이다.

 

이라 했지만 원제는 ’Dirt’. Dirt는 먼지는 물론 흙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몽고메리는 지질학자로서 나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앞서간 사회가 그 시대의 흙에 새겨놓은 기록을 살펴보면 좋겠다.”고 말하는가 하면 지형학자로서 나는 지질연대를 통해 지형이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자연 경관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연구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흙이란 무엇인가흙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반응하는 역동적 시스템(24 페이지)이고 우리 행성을 이루고 있는 암석그리고 암석에서 용해되어 나온 영양소와 햇빛에 기대어 사는 식물들과 동물들의 인터페이스“(28 페이지).

 

암석을 배우는 입장으로 흥미를 가질 만한 분류도 몽고메리에 의해 제시되었다화강암이 풍화하면 모래흙이 되고 현무암이 풍화되면 점토질 흙이 된다석회암은 녹아서 사라지면서 얇은 흙층과 동굴이 있는 암석지대를 남긴다.(31 페이지중요한 점은 지구의 기후대는 흙과 식물군락이 진화하는 템플릿이란 점이다.

 

이 부분에서 기후와 흙과 식물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성경의 모세초기 미국의 인물들 등에 이르는 다양한 사람들을 사례로 거론한 몽고메리가 말하는 바는 흙의 침식 속도와 재생산 속도의 갭이다당연히 너무 빠른 침식 속도는 위험 요소다.

 

몽고메리는 점점 빨라지는 흙의 침식은 그 흙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거덜낸다고 말한다.(202 페이지몽고메리는 문화와 예술과학 같은 다른 모든 것의 밑바탕은 충분한 농업 생산물로 번영의 시기에는 이 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농업이 비틀거릴 때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문제는 흙이 천천히 사라지기에 농부들이 그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바라보기 어렵다는 점이다.(211 페이지몽고메리의 이야기는 왕가리 마타이(Wangari Maathai; 1940-2011) 이야기로도 이어진다에티오피아 시골에서 환경을 살린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분이다평생 500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은 분이다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최초의 아프리카 여성이다


지질학자로서 지형이나 암석보다 흙그리고 흙의 침식과 재생의 관계에 천착한 몽고메리의 노고는 박수를 받을 만하다. 1958년 미국 농무부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미국 농지의 거의 2/3가 흙의 유실 허용치를 넘어 무시무시한 속도로 침식되고 있다.(241 페이지)

 

몽고메리는 흙의 침식이 고대 사회들을 무너뜨렸고 오늘날의 사회도 심각하게 뒤흔들 수 있다는 무시 못 할 증거 앞에서도 지구적인 흙의 위기와 식량 부족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경고는 허공으로 흩어진다고 말한다.

 

1980년대 초반 미국의 농업경제학자 레스터 브라운(Lester Brown; 1935-)은 현대 문명이 석유보다 흙을 먼저 다 써버릴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246 페이지몽고메리는 토지 생산성은 자본과 노동과학의 투입에 따라 무한정 높아질 수 있다는 엥겔스의 오류를 지적한다.

 

물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농업의 모든 진보는 노동자를 착취하고 흙을 착취하는 기술의 진보라는 생각을 드러냈다엥겔스의 생각은 마르크스를 만나기 전의 생각이다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만남을 들뢰즈와 가타리의 그것과 비교할 만하다들뢰즈와 가타리의 만남은 번개와 피뢰침의 만남이라 말해진다들뢰즈는 가타리가 번개였다면 자신은 피뢰침이었다고 말했다


여러 인용 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미국의 지질학자 토머스 체임벌린(Thomas Chrowder Chamberlin; 1843 - 1928)의 말이다. ”흙이 사라지면 우리 또한 사라진다암석을 그대로 먹고 사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모를까.“

 

지질학이란 상당히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현상이나 대상을 다루는 학문이다몇 센티미터의 흙을 만드는 데 걸리는 천 년“(332 페이지)은 수십만년수백만년에 비하면 짧지만 우리의 삶에는 아주 긴 시간이 아닐 수 없다책 전편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흙이 보충되기보다 빨리 흙을 잃는 농법은 사회를 무너뜨린다.”(339 페이지)는 말이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말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한 문명을 끝장내는 데 이바지하지만 한 문명을 뒷받침하려면 반드시 기름진 흙을 제대로 유지해야 한다.“(346 페이지)는 말이다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자명하다저자가 지질학자이기에 암석에 대해 말할 법 하지만 흙을 이야기한 것은 지질 또는 지리적 관점을 넘어 우리 문명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한 결과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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