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학자 데이비드 몽고메리의 ''에서 다윈의 지렁이(다윈은 흙을 만들어내는 지렁이를 자연의 정원사라 이름했다.) 실험, 지각평형설 등의 개념을 만난다. 지각평형설은 침식으로 인해 땅이 없어지는 몫을 상쇄하기 위해 지표를 향해 암석을 밀어올리는 것을 말한다.

 

몽고메리는 지리학은 흙이 침식되는 원인과 침식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다룬다고 말한다.(10 페이지) 지리학은 자연지리학과 인문지리학으로 나뉘니 몽고메리가 말한 지리학은 자연지리학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생명체에게는 한꺼번에 사라져 버릴 만큼 빠르지 않아야 하고 흙을 늘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침식이 필요하다."(28 페이지)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는 지각평형설은 침식이 땅을 없애기도 하지만 없어진 높이의 상당 부분을 상쇄하기 위해 지표를 향해 암석을 끌어올리기도 한다고 설명한다."(22 페이지) 이 문장에서 땅을 없애는 것이 침식인 것은 분명하지만 암석을 끌어올리는 것도 침식인가요?

 

원문이 어떤지 모르지만 자연의 평형 시스템이 암석을 끌어올리는 행위의 주체로 받아들여지네요.. 다윈의 자연선택처럼요..다윈은 자연선택에 행위자가 있는 것처럼 자꾸 오해하는 것이 괴로워 자연선택 대신에 스펜서가 추천한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정인경 지음 '뉴턴의 무정한 세계' 137 페이지)고 하지요.

 

물론 다윈은 후에 자연선택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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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쓰기와 글짓기는 별개라 생각해왔다. 악필의 변명인 셈이다. 글씨도 잘 쓰고 글도 잘 짓는 사람들 앞에서 초라하게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글씨는 그 사람(서여기인; 書如其人)이라 하지만 인품 이전에 기능의 문제라 생각한다. 그럼 지도 제작은 어땠을까?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각수(刻手)였다는 말이 있다. 목판에 지도를 새기는 능력도 갖추었었다는 말이다.

 

혜강(惠崗) 최한기 선생이 김정호 선생이 지도를 그리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주었으며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마경묵, 이강준, 박선희, 이진웅, 조성호 지음 십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땅 이야기’ 45 페이지)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가 각수였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안타까운 점은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음에도 선생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재인과 환쟁이는 난전에서 태어나고 난전에서 스러졌느니...“란 시(이달균 시인의 혁필; 革筆중에서)에 그의 얼굴이 겹친다. 난전(亂廛)이 무엇인가? 전안(廛案)에 등록되지 않거나 허가되지 않은 상품을 몰래 파는 행위나 가게를 의미한다. 김정호 선생에게 붙은 항설(巷說) 가운데 하나가 지도 제작이 나라의 기밀을 누설한 죄로 처리되어 옥사(獄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재건(劉在建; 1793 - 1880)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김정호 선생의 죽음이 몰(歿)로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만일 김정호 선생이 죄인으로 죽었다면 물고(物故)라 표현되었을 것이란 의미다.

 

만일 지도 제작이 문제가 되었다면 그에게 재정 면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도움을 준 최한기 같은 분이 처벌당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없다는 점도 김정호 선생이 죄인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는 추정을 하게 한다.

 

김정호 선생이 세종이나 정조 시대에 살았더라면 필시 실록에 실릴 정도로 칭송을 받을 수 있었다(시니어 신문 201699일 기사 역사소설 <대동여지도 고산자의 꿈> 출간‘)는 주장이 있다. 김정호 선생 이야기를 한 것은 재인(才人)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옹기장이와 사당패 재인의 사랑 이야기란 부분이 있는 책(이수광 지음 명인열전‘)에서 김정호 선생 이야기를 접하게 된 까닭이다. 재인처럼 김정호 선생도 떠돌이 인생이었다는 데에 생각이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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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冬至)가 지났다. , 한식, 추석과 함께 우리의 4대 명절로 꼽히는 절기가 동지다. 조선은 어땠을까? 태조실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동지를 맞이하여 중국의 황제 있는 곳을 향하여 축하의식을 갖고 신하들의 하례를 받다."

 

중국 황제 있는 곳을 향하였다는 말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있다. 화양서원이다. 우암 송시열을 모신 충북 괴산의 사당이다. 이곳이 특징적인 것은 남향이 아닌 북향을 취했기 때문이다. 명나라에 대한 충절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배치다.

 

특정한 날에 중국을 향해 의식을 치르는 것을 넘어 처음부터 중국을 바라보도록 건물을 설계한 것이다. 동지가 4대 명절의 하나인 이유는 길고 길었던 겨울의 어둠이 조금씩 줄어드는 시점일이어서 희망을 떠올리기에 마땅하기 때문이다.

 

태종실록에는 동지이기에 임금이 문소전(文昭殿)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는 구절이 있다. 문소전은 경복궁에 조성된 태조의 첫 번째 비 신의왕후 한씨의 사당이다. 그러니 태종이 어머니 사당에 나아가 참배한 것이다. 태종실록에는 동지는 양()의 기운이 생기는 날이고 군자가 즐거워하는 날이라는 구절이 있다.

 

지금 우리가 따뜻한 겨울을 염려하듯 당시에도 날씨 걱정을 했다. "이미 동지(冬至)를 지났으므로 마땅히 추워야 할 터인데도 따뜻하고 마땅히 눈이 와야 할 터인데도 비가 오니 음양(陰陽)이 어긋나는데 어찌 감응(感應)을 부른 바가 없겠습니다?”(성종실록), “요즈음 일기가 불순하여 동지(冬至)가 지나도 기후가 봄과 같고 장마가 멎지 않습니다. 가을 장마도 좋지 않은 것인데 하물며 겨울 장마이겠습니까?....임금이 하늘을 받들어 대함이 지공무사(至公無私)하다면 어찌 천변이 있겠습니까?”(중종실록)

 

나이 때문인지 성탄이 온 것보다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 동지(冬至)가 지난 것이다. 겨울이 아직도 적어도 한 달 이상 남았지만 동지가 지났으니 어려운 시기를 이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작은 목소리로 축 성탄(聖誕)이라는 말을 읊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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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도시 SG컬렉션 1
정명섭 지음 / Storehouse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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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의 3도시는 상징하는 바가 큰 소설이다. 개성공단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어서 관심과 흥미를 끈다. 1도 아니고 제2도 아닌 제3이란 중간지대인 개성공단을 의미한다. 개성공단(開城工團)이란 남북이 합의해 북한의 황해북도 개성시 봉동리에 조성한 공단을 말한다.

 

우리의 자본 및 기술, 북한의 노동력이 결합된 경제협력 모델이었지만 20162월 남북관계 경색에 따라 폐쇄된 상태로 있다. ‘3도시의 배경이 개성공단인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그것은 주인공의 외삼촌이 개성공단에 입주한 기업주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개요는 이렇다. 헌병수사관과 민간조사업자 경력을 거친 30대 중반의 강민규는 탐정 사무실을 운영한다. 강민규는 어느 날 개성공단에 입주한 60대 초반의 외삼촌(원종대)의 방문을 받는다. 운영하는 일터에서 원재료와 생산품이 빼돌려지니 범인을 잡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강민규는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터에 외삼촌의 제의를 수락하고 개성공단 공장 관리과장이란 직함을 받고 현장의 일원이 된다.

 

강민규로서도 남북한 사람이 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풍경을 보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바였다. 외삼촌은 강민규에게 범인을 잡으려 하지 말고 물증만 확보하라는 말을 건넨다. 외삼촌이 강민규에게 사건 해결을 의뢰한 것은 개성이 북한 지역이기에 공장에 CCTV를 달 수 없는 데다가 직원들에게 지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강민규와 갈등을 빚던 법인장 유순태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뜻밖에 강민규가 유순태 살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다. 그는 사회안전원들에 의해 체포되어 가면서 무엇보다 호위총국에서 어떻게 유순태의 죽음을 눈치챘으며 어떻게 자신을 바로 범인으로 체포했는지 의아해 한다.

 

소설의 흥미를 돋우는 것은 수사를 맡은 남의 강민규와 북의 호위총국의 오재민 소좌간에 벌어지는 팔팔한 대화다. 개성증후군이란 말도 주의를 요한다. 혈압 상승, 수면 장애를 비롯 다양한 불안 증상과 분노 조절장애를 동반한 병으로 개성공단에 특징적인 질환이다.

 

피살된 법인장은 바로 개성증후군을 앓았었다. (강과 오)은 법인장과 공혁수 조장이 심하게 다투었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리고 북의 여 관계자로부터 법인장이 개성공단의 물건이 외부로 유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개성공단 안에 수만의 사람들이 있으니 문제가 생기고 뇌물도 다반사고 금지를 위반하는 모험이 따르고 로맨스도 생긴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약육강식의 정글 또는 먹이사슬 같은 구조를 상상하면 좋으리라. 소설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알려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포함한 남과 북의 진면목이 조금씩 드러난다는 점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추천한다. 남과 북의 새로운 양상을 소재로 한 즐길만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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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의 '3도시'를 읽고 있다. 개성공단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 개성은 신해방지구(新解放地區)라서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아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신해방지구란 한국전쟁 이전 대한민국 영토였다가 종전과 더불어 북한 영토가 된 곳들을 말한다. 개성은 개풍군, 황해도 연백, 옹진 등과 함께 38도선 이남 지역이었기에 북한 영토가 아니었다반면 연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 양양처럼 38도선 이북 지역이어서 북한에 속했다가 대한민국 영토에 속하게 된 곳은 수복지구라 한다


개성은 연천보다 위도가 낮다. 분명한 사실인데도 생소하게 느껴진다.(개성; 북위 37° 5800, 동경 126° 3300/ 연천; 북위 38° 5' 39", 동경 127° 4' 33") 개경이 시계의 중앙이라면 철원은 2라는 글자고 연천은 중앙과 2라는 숫자의 중간 정도에 자리한다. 어떻든 왕건이 개경(=개성=송악=송도)에서 물길로든 육로로든 궁예가 있는 철원을 향해 갈 때 연천은 중간 지점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개성이 북한 지역이니 당연히 연천보다 위도가 높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지도에서 보듯 연천이 개성보다 위도가 높고 그렇기에 개경에서 철원을 가려면 일부러 먼 길을 우회하지 않는 한 연천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왼쪽에 지도, 오른쪽에 역사책을 놓고 공부해야 함을 일깨우는 좌도우사(左圖右史)의 의미를 음미하지 않을 수 없다.

 

경성, 홍제원, 고양, 파주, 장단, 개성, 평산, 서흥, 봉산, 황주, 평양, 안주, 가산, 정주, 철산, 의주에 이르는 사행로(使行路) 또는 연행로(燕行路)라 불렸던 의주대로에 개성도 포함되어 있다. 지난 10월 파주 오두산(鰲頭山) 전망대에서 개성시를 보았다. 거리 때문에 어렴풋하게 보이는 도시를 통해 어떤 감회를 가질 계제(階梯)는 아니었다. 다만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장면을 비교적 길게 보며 마음에 담아두려 했었다.

 

개성에는 무엇이 있을까? 만월대가 있고 을밀대가 있고 송악산이 있다. 아니 이렇게 말하기보다 2013년 개성이 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하리라. 개성 성곽, 개성 남대문(南大門), 만월대(滿月臺), 개성 첨성대(瞻星臺), 고려 성균관(成均館),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선죽교, 표충비, 왕건릉, 칠릉군(七陵群), 명릉(明陵), 공민왕릉(恭愍王陵) 등이 개성 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장경희 문화재전문위원의 고려왕릉에는 칠릉군이 아닌 칠릉떼라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떻든 만일 개성 여행이 허락된다면 왕릉들은 가장 나중에 보겠다. 개성 성곽, 개성 남대문(南大門), 만월대(滿月臺), 개성 첨성대(瞻星臺), 고려 성균관(成均館),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선죽교, 표충비 등이 먼저다.

 

지금껏 내가 가본 능은 대부분 조선 왕릉이다. 경주의 신라 왕릉군, 연천의 신라 경순왕릉 등이 예외라면 예외다. 내가 가본 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선왕릉은 고려 왕릉의 전통을 계승한능이고 전통적인 풍수사상을 배경으로 웅장한 석물과 건축물 그리고 울창한 숲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장경희 지음 고려왕릉’ 174 페이지)된 것들이기에 고려왕릉들은 그 연관점에 초점을 맞춰 보아야 하리라.

 

고려왕릉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을 중심으로 한 개풍 및 장단 지역, 강화도에 대부분 분포하고 있다. 강화 석릉(碩陵), 강화 곤릉(坤陵), 강화 홍릉(洪陵), 강화 가릉(嘉陵) 등이 강화도에 있는 고려왕릉이다.(주역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 이란 이름을 사용한 곤릉은 역시 고려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이다.)

 

고려 왕릉들이 풍수사상에 의거해 들어섰거니와 나머지 것들은 어떤가? “주산 아래 좌청룡과 우백호로 둘러싸인 만월대의 터는 개경의 혈자리로서 부소 명당(扶蘇 明堂) 혹은 송악 명당이라 일컬어지는 곳”(한국역사연구회 지음 고려 500년 서울 개경의 생활사’ 36 페이지)이란 글을 보면 풍수는 기본임을 알 수 있다.

 

고려 500년 서울 개경의 생활사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거론한다. 이 지도는 조선 태종 2년인 1402년에 만든 세계지도다. 책이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백두산 자체가 우리 국토의 종산(宗山)으로 여길 만큼 신성하고 대단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고 백두산 아래에서 산맥이 단절되어 사실상 백두산의 맥이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없다는 내용이다. 백두산부터 뻗어오는 산맥은 한양까지 미치지 못하고 가평에서 끝이 난다는 설명도 있다.(41 페이지) 풍수도 나름으로 차이가 있다는 의미의 지적이다.

 

그런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다른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중국, 일본, 아라비아, 아프리카, 지중해, 유럽까지 그려넣은 이 지도는 중국 중심의 천하관념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지도다.(김용만 지음 조선이 가지 않은 길’ 17 페이지) 그런데 16세기 초 조선은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를 만들었다. 조선과 중국 중심의 이 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천양지차(天壤之差)의 지도다. 이 지도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반영된 지도다.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은 채 관념을 통해 재구성하는 퇴행“(김용만 지음 조선이 가지 않은 길’ 27 페이지)의 결과라는 말을 듣는다. 그럼 풍수는 어떤가? 다시 말하면 성리학적 세계관이 조선을 관념의 세계로 밀어넣은 것처럼 풍수 역시 그랬을까?’란 말이다.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가 만들어진 16세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6세기는 명당 논리가 마을로 확산한 시대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면 마을은 물론 주택까지 풍수를 따지지 않는 공간이 없게 됐다. 문제는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으로 이뤄진 명당이 흔치 않았기에 인위적으로 지형을 명당에 가깝게 만드는 비보풍수(裨補風水)라는 개념이 등장했으나 산을 쌓고 물길을 내는 대역사를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실제 모습이 어떠한가에 상관없이 사람의 소망에 맞추기 위해 지형을 명당으로 변형해 그리는 그림식 지도가 유행했다는 사실이다.(2018922일 연합 뉴스 수록 "산줄기 강조한 조선 고을 지도는 명당 논리 산물")

 

성리학 신봉자든 풍수 신봉자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은 같다. 왕건이 우리나라 풍수의 원조인 도선국사(道詵國師; 827 - 898)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논자도 있다. 시기나 지역으로 보아 도선이 왕건이 아닌 견훤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도선의 주요 활동 무대는 오늘날의 전라도로 견훤의 후백제 지역이었고 도선이 죽기 5년 전에 견훤은 이미 왕이 되었지만 왕건은 소년이었다는 점을 든 것이다.(왕건이 도선에게 비기를 전수받은 것은 893년으로 이때 왕건은 17세였다.)

 

중요한 사실은 왕건에게든 견훤에게든 풍수가 전해졌다는 점이다. 조선 시대에 성리학과 풍수지리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친 쌍두마차였다면 통일신라와 그 이후에는 선종(禪宗)과 풍수지리가 쌍두마차였다. 겉으로는 주자학을 내세우고 속으로는 양명학을 신봉했음을 의미하는 외주내양(外朱內陽)이란 말이 있다.

 

물론 선종과 풍수, 성리학과 풍수라면 토대는 풍수지리, 상부구조는 선종이란 의미의 토풍상선(土風上禪), 토대는 풍수지리, 상부구조는 주자학이란 의미의 토풍상주(土風上朱)라 해도 좋을 것이다.

 

과학을 내세우는 현대에도 풍수는 면면히 영향을 미친다. 지금 내 책상에는 경순왕릉이 1순위로 다루어진 이규원의 대한민국 명당이란 책이 놓여 있다. 경순왕릉 해설을 위해 빌린 책이다. 자세한 설명이 무색하게 내게 풍수는 낯설고 어렵다. 기회가 되면 개경에서 연천을 거쳐 철원까지의 길을 걸으며 하나의 풍수 지식이라도 갈무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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