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은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내에서 점등식이 열린 해이다. 1884년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報聘使)가 에디슨 회사를 찾은 뒤 일원이었던 유길준이 고종에게 보고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고종은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든 건청궁에 전등이 점등되었다는 사실은 내가 들은 가장 오래된 해설 내용 중 하나일 것이다. 4년전의 일인데 당시 강사는 에디슨의 악행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강사는 오직 진기한 뉴스거리에 초점을 맞추어 말했을 뿐이다. 잘 알려진 대로 에디슨은 직류 발전기의 발명자이고 니콜라 테슬라는 교류 발전기의 발명가다. 직류 발전기에 엄청난 투자를 한 에디슨은 교류발전기가 상용화될 경우 막대한 금전적 타격을 입을 것이 너무나 뻔했으므로 교류 전기가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개들에 전기 충격을 가하는 악마 같은 짓을 벌였다.

 

에디슨은 사형수에게까지 악행을 저질렀다. 에디슨은 직류 전기는 사람을 아무런 고통 없이 죽일 것이라 호언했다. 하지만 그런 장담과 달리 사형수는 처참하게 구워지며 죽었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교류 발전기가 살상 도구라는 에디슨의 주장에 의구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 구절을 보며 나는 의아함을 갖는다. 그들은 직류냐 교류냐가 문제가 아니라 동물이든 사람이든 생명체에 전기적 충격을 가하는 짓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오래 전 대기(待機)가 많은 일을 하던 때 벌어진 사건이 기억난다. 함께 일을 하던 동료들은 무료해서 장기를 두거나 티브이를 보기도 했다. 장기판 주위에 훈수꾼,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그러자 티브이를 보는 사람들은 볼륨을 높였다. 두 무리는 서로 상대가 먼저 소리를 높였다고 주장했다.

 

내가 한 마디 했다. ”티브이도 안 보고 장기를 두거나 구경하지 않는 사람들은 안 보이시나요?“ 내가 한 말은 예컨대 당신들은 통합적 시각이 없다는 말이었다. 물론 나는 내 말이 모기를 보고 칼을 빼어 드는 것을 의미하는 견문발검(見蚊拔劍)의 말일 수도 있었음을 반성한다.

 

현대 물리학은 전기(電氣)와 자기(磁氣), 파동(波動)과 입자(粒子),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하나의 시각으로 본다. 우리에게도 이런 시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닌 통합의 눈으로 사태를 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빛은 전기의 장()이 변화해 자기의 장()을 낳고 자기의 장이 전기의 장의 변화를 낳는 과정을 반복하며 공간 내에서 나아가는 전자기적 파동이다.“(정인경 지음 뉴턴의 무정한 세계‘ 176 페이지)

 

그러니 전기, 자기만이 아니라 전기, 자기, 빛이 하나라 보아야 한다. ”맥스웰은 셋(전기, 자기, )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단일한 힘의 현현이라는 획기적으로 변화된 관점을 제시했다.“(브루스 왓슨 지음, 이수영 옮김 ‘ 289 페이지 조금 변형)

 

맥스웰의 방정식은 더 놀라운 사실을 나타냈다. 전자기 효과가 전달되는 시간과 속도를 계산해보았더니 방정식에서 도출된 전자기파의 속도는 아르망 피조가 측정한 빛의 속도와 완전히 일치했다....이 결과가 일치한다는 것은 빛과 자기가 같은 물질의 작용이라는 것과 함께 빛이 전자기 법칙을 따라 장을 통해 전달되는 전자기파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정인경 지음 뉴턴의 무정한 세계‘ 175, 176 페이지)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을 어찌나 존경했는지 자기 서재에 맥스웰의 사진을 걸어둘 정도였다.”(로빈 애리언로드 지음 물리의 언어로 세상을 읽다‘ 17 페이지) “맥스웰 이후 물리학자들은 자연계의 4가지 근본력, 곧 전자기력과 강력과 약력과 중력을 하나의 이론으로 통합하기 위하여 헤아릴 수 없는 노력을 쏟아왔다.”(월터 르윈 지음 나의 행복한 물리학 특강‘ 237 페이지)

 

사실 자연계의 4가지 근본력을 통합하려는 물리학은 철학 만큼이나 형이상학(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연구하는 학문)적으로 보인다. 이는 진리는 하나이고 하나여야 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이진경 지음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 399 페이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기했듯 궁극의 진리를 찾으려는 무리(無理) 차원이 아니라 포괄할 수 있는 것들을 가능한 한 두루 담아내려는 차원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앞 부분에서 말한 바 있는 에디슨 일화에서 우리가 취할 점은 무엇인가? 경복궁 건청궁 내에서 일본이나 중국보다 먼저 전등을 밝혔다는 사실만을 전할 것이 아니라 그 배경과 역사적 연원, 의미, 그리고 에디슨으로 대표되는 탐욕스런 사업가는 물론 목적이 없고, 제안자 자신이 진화는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해지는 것이고 때로 퇴보도 의미한다고 밝혔음에도 그로부터 사회진화론(목적과 방향을 설정해 진보하는 사회를 추구하는 이론)을 이끌어내 약한 나라들에 대한 침략과 수탈을 정당화한 제국주의 세력(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이다.)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건청궁과 전등 이야기를 했지만 이는 누구보다 먼저 나에 대해 하는 말이다. 지난 1128일 광화문과 세종대로 일대를 문학 작품으로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해설을 마치고 미흡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령 구보(仇甫, 丘甫) 박태원(朴泰遠; 1909 1986)은 경성역 등에서 황금을 좇아 흥청이는 천박한 세태를 보며 환멸감을 느꼈다.

 

내가 해설한 광화문 일대의 주요 포스트 가운데 하나가 구() 동아일보 사옥이다. 지금은 일민미술관으로 쓰이는 이 건물 외벽에 ‘1920 기억극장 황금광시대(黃金狂時代)’(20201081227)을 알리는 세로 현수막이 걸려 있다. 채만식의 레디 메이드 인생을 건축과 철학을 전공한 김소연(‘미치지도 죽지도 않았다; 파란만장, 근대 여성의 삶을 바꾼 공간의 저자이기도 한)이란 분이 주인공의 구직활동(동아일보 사옥에서의)에 초점을 두어 재가공한 작품(‘건축, 근대 소설을 거닐다수록)을 설명하는 데 그쳤다.

 

사전 답사를 두 번이나 했지만 내 생각에 빠져 못 보았거나 청계천(구 동아일보 사옥 옆의 청계광장에서 세운상가까지)에서 구보 이야기를 했기에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후자라 해도 문제다. 청계천에서 내 해설을 들은 분들과 1128일 들은 분들은 다르고 같다 해도 상황이 다른 부분이기에 필요한 부분이었다.)

 

물론 조금 늦은 깨달음이지만 아예 알아차리지 못한 것보다 나은 것이라 생각하면 속상해 할 필요는 없다. 송재학 시인은 건달불이란 시에서 이런 말을 했다.

 

“1887년 경복궁에서 처음 켜진 전깃불은 물불이거/ 나 묘화(妙火)였다 향원정 연못의 물을 이용한 화력/ 발전이었기에 물불이라 했고, 기묘함 탓에 묘화란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자주 켜졌다 꺼졌다 하면서/ 하릴 없이 애를 태워 건달불이라는 비웃음도 얻었다/ 게다가 이 전깃불은 대국이 아니라 오랑캐의 물건이/ 라던,...” 곧 다시 준비하고 찾고 쓰고 답사해야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은 평화로운 시간이다. 연이은 어렵고 부담스러웠던 해설들을 마치고 나니 시도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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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류와 지류..本流支流라 쓴다. ()에서 연원한 것이니 가지 지()자를 쓰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자를 쓴다. 는 지탱(支撑)하다 외에 가르다, 갈리다, 헤아리다, 계산하다, 가지, 근원(根源)에서 갈라진 것 등을 의미한다. 지탱하다가 한자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탱이란 자가 드문데...

 

탱화(幀畫)가 있고 탱천(撐天)이 있다. ()과 탱()은 비슷한 듯 다르다. 은 영정(影幀)이란 말에 쓰이고 탱화(幁畵)란 말에도 쓰인다. 그나저나 지류(支流)는 다른 강이나 개울에 합류하면서도 바다로 직접적으로 흐르지 않는 물줄기를 가리킨다고 한다. 처음 알았다. “바다로 직접적으로 흐르지 않는이란 말이 키워드다. 그런데 나는 지류를 바다로 직접적으로 흐르지 않고 다른 강이나 개울에 합류하는 물줄기라 해야 자연스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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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임순 님의 식민지의 적자들’, 광화문 해설을 준비하다 알게 된 책이예요. 정독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어요. 그의 책을 너무 늦게 알았네요. 절판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아쉽네요. 빌려 읽고 있지만 노작(勞作)을 쓴 저자에게 예의를 갖추려면 책을 소장하는 것이 순리이니 말입니다.

 

대신 '우리 역사 소설은 이론과 논쟁이 필요하다'와 최근작인 '3.1과 반탁' 등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고 소장해야겠어요. 광화문 해설 포스트 중 이순신 동상이 있지요. 공임순 님은 이순신 장군을 소환한 글들을 분석한 글에서 전통은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무엇을 어떤 식으로 계획하고 불러냈는가라는 선택과 배제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말을 했어요.

 

덧붙여 우리 사회의 좌, 우파 모두 이순신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스스로를 박해받는 수난자로 자리매김했다는 말을 했어요. 공임순 님은 김훈의 칼의 노래를 스스로를 가해자가 아닌 수난자로 인식하는 우리의 집단 심성을 아주 잘 파고든 작품으로 규정했어요. 저는 원래 김훈 작가 싫어했어요. 많은 사람이 읽는다고 무조건 안 읽거나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 많은 사람이 읽는다는 이유만으로 김훈 작가를 읽지 않았지요.

 

공임순 님의 책을 보니 김훈 작가는 남성이 절대적으로 우월하고 압도적으로 유능하다고 본다는 말을 한 바 있네요. 그를 고독한 남성 영웅 멜랑콜리의 심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한 공임순 님의 시각은 설득력 있다고 보입니다. , 이제 정독을 해야겠습니다. , 해설 마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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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척 한다, 잘난 척 한다 등의 말을 듣고 한 마디 한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는 척, 잘난 척 하지 않는 것이겠다. 만일 자신들은 그렇게 하면서 남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거나 남의 그런 모습은 못마땅해 한다면 이율배반적이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 아는 척 하지 않는가? 이렇게 묻는다면 문제적인가? 영국의 박물학/ 과학사회학 학자 조지프 니덤(Joseph Terence Montgomery Needham; 1900 1995)의 질문이 떠오른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란 대작을 집필한 니덤은 왜 중국에서는 과학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란 질문을 던졌다. 정인경 교수는 니덤의 질문은 유럽이 본래 우월하기 때문에 과학혁명이 일어났다는 안일한 대답을 피하기 위해 한 질문이지만 무엇이 일어났을 때 그 이유를 묻는 것은 있을 수 있어도 왜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묻는 것은 있을 수 없기에 문제라는 말을 했다. 가령 어떤 집에 불이 났다면 왜 불이 났는지를 물을 수는 있어도 불이 나지 않은 집에 대해 왜 불이 나지 않았는지를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정인경 지음 모든 이를 위한 과학사 강의’ 122 페이지)

 

철학자 베르그손은 이를 추후적 사고의 오류라 설명했다. 물론 나는 그럼에도 그들은 어떤 이유로 아는 척 하지 않는가?”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는 척 하지 않는 이유는 1. 겸손해서인가? 2. 귀찮아서인가? 3. 콘텐츠가 부실해서인가? 4. 자신이 애써 공부한 지식을 남에게 주고 싶지 않아서인가? 어떤 경우든 문제적이다.

 

겸손해서 그렇다면 그나마 낫지만 이 경우도 모임에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귀찮아서 지식을 공유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능동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귀찮아서 공부나 글쓰기도 반드시 해야 하는 것만 마지 못해 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해설사들은 다 수준이 같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이다.

 

콘텐츠가 부실하다면 상대에게 아는 척 한다고, 잘난 척 한다고 말하지 말고 자신의 지식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 순리다. 여우가 따 먹으려 했으나 높아서 그렇게 하지 못한 포도를 보고 저 포도는 신포도일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은 자신의 지식이 부실하니 지식 있는 사람을 질투하는 것인가?

 

애써 공부한 것이기에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든 공부한 것을 나누는 선학들이 있기에 지식을 얻고 공부할 수 있는 것임을 감안해 보라. 자신은 혜택을 입고 나누지는 않는 것은 이기적이다. 물론 누린 만큼 베풀 수는 없다. 능력면에서든 시간적인 면에서든 방법면에서든.

 

상대를 무시하며 아는 척 하는 것이 문제다. 나는 아는 척을 잘 하기에 공손하게 말하려 한다. 내가 상대를 무시했는가?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를 보고 잘난 척 한다, 아는 척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격지심(自激之心)을 발동시키는 것일 뿐이다. 세상 상식과 속설에 대해서는 그렇게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고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유독 지식적인 면에서는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인가? 그렇다면 참 이상하다.

 

그들은 지식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인가? 그래서 나 같은 장삼이사가 고급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기는 것인가? 내가 신성모독이라도 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오히려 새로울 것 없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듯 늘어놓는 사람들이 놀랍게 보인다. 이해하기 어렵다.

 

나라면 닳고 닳은 이야기는 부끄럽기도 하고 재미도 없어서 못한다. 단 나도 그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도 어설프고 부끄러웠고 초라했고 사소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지금 그런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만일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안주(安住)하고 결국 정체(停滯)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진경 교수는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사용한 기하학적 서술방법을 과학에 대한 환상을 주려는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지만 어느 시기 이후 스피노자가 하려고 했던 것이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과 비슷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생리학적 윤리학 즉 자연학적 윤리학의 구상이 바로 그것이다.(이진경 지음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 170 페이지)

 

나는 스피노자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에 니체가 스피노자를 통해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내용을 인용하지는 않았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치열하게 노력하되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려고 이진경 교수의 말을 인용했다.

 

공부하지 않으면 지식이 부족해서 문제가 아니라 이상한 논리를 고집하기에 문제다. 그리고 감히 말하자면 공부는 느낌이나 정서적인 면으로 치우치려는 자신을 바로잡는 과정이다. 물론 논리만 고집하는 것도 문제다. 그렇게 되면 메마르고 거친 세상을 만들게 된다. 나에게 아는 척 한다, 잘난 척 한다 등의 말을 한 사람들은 생각을 촉발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좋은 말로 생각을 촉발하는 사람들이 더 필요하고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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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0201111) 연천 옥계리 드라마미술전시장에서 있었던 생태 연못 만들기 행사에 참가했다. 이곳은 군남초등학교에 통합된 구() 옥계 초교에 새로 마련된 드라마 소품 전시장이다. 방송국 소품 담당으로 일하시다 연천으로 귀촌한 노** 선생님께서 그간 모은 시설과 도구, 소품, 장비들을 망라해 운영하는 곳이다.

 

연천에 살면서도 잘 알지 못했던 문화 시설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 내게는 지난 달 18일 동기 이 선생님과 권 선생님 덕에 처음 가게 된 은대리성 만큼 의미 있는 곳이다. 은대리성도 그렇고 드라마 미술 전시장도 그렇고 단순한 관방(關防; 변방 방어를 위해 설치한 요새; 은대리성) 시설, 문화 시설(드라마미술전시장)이 아니라 연천의 역사 및 문화적 감수성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곳이다.

 

드라마미술전시장의 여러 전시품들 가운데 상락아정(常樂我淨)이란 글이 눈에 띄었다. 무상하게 변하고 고통스럽고 무아(無我)인 세상과 다른 항상하고 즐겁고 나란 실체가 존재하는 정(; 깨끗)열반을 표현한 말이다.

 

생태연못을 만들다 보니 부엽 식물, 부유 식물, 침수 식물과 함께 정수 식물을 이야기 하게 되었다. 정수는 물을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의 정수(淨水)가 아닌 정수(挺水). marginal plant란 영어 번역어와 돋다, 나오다 등의 의미를 가진 한자어 정()을 함께 고려해 물가에 살며 부레옥잠, 개구리밥, 수련, 물수세미 등에 비해 높이 솟아있기에 붙은 이름이 아닌가 추측한다.

 

정리하면 지난 해 지질해설사가 된 이래 내가 처음 가본 연천의 주요 공간들은 이렇다. 물문화관, 한탄강댐, 당포성, 호로고루, 은대리성, 잠두봉, 유엔군 화장장, 차탄천 주상절리, 임진강 주상절리, 백의리층, 베개용암, 연강나룻길, 오미뜰 공원, 효연재(曉然齋) 등이다. 아직 못 가본 곳이 많다. 시간이 나면 숭의전, 당포성, 임진강 주상절리 길을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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