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무공전서 이야기 - 정조, 이순신을 역사에 새기다
김대현 지음, 조성덕 그림, 정준영 감수 / 한국고전번역원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이순신(李舜臣)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부끄럽고 죄송하다. 이순신에 대한 책을 두 권(1. ‘이순신의 승리 비결 주역으로 풀다’, 2. ‘임진왜란 해전사’) 가지고 있는 정도고 그나마 앞의 책은 주역에 대한 관심 때문에 산 것이고, 뒤의 책은 기증받은 책이다. 최근 이충무공전서 이야기란 책을 완독했다. 이 역시 부제에 관심이 가 사서 읽은 책이다. 부제란 정조, 이순신을 역사에 새기다. 말하자면 정조에 대한 관심 때문에 구입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주역에 대한 관심, 정조에 대한 관심 때문에 책을 샀더라도 대상인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관심이 있었다고 해야 옳다. 물론 이순신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4월 한 숲해설사께 나무 해설을 듣는 시간에 역사 해설사이신 박샘께 물을 게요..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어떤 나무로 만들었는지 아시나요?”란 말을 들었으나 답하지 못했다. 변명 같지만 이순신 장군에 대해 해설할 기회가 있었다면 숙지하고 대비했을 것이다.

 

위에서 구입했다고 말한 이충무공전서 이야기에 대해 결론을 거론하자면 영민(英敏)한 저자 덕에 이순신 장군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이충무공전서 이야기는 정조 시대의 규장각 각신인 윤행임(尹行恁)이란 화자(話者)가 역사 초보인 현시대의 젊은이에게 이순신 장군과 이충무공 전서, 정조와 규장각 등에 대해서는 물론 고전과 책, 문화 지식들을 전수해주는 쏠쏠한(품질이나 수준, 정도 따위가 웬만하여 괜찮거나 기대 이상인) 책이다.

 

화자인 윤행임은 정약용과 같은 해인 1762년에 태어난 사람으로 정조에게서 정약용 만큼이나 많은 사랑을 받은 인물이다. 원래는 행임(行任)이었으나 정조의 원자(元子; 후에 순조가 되는)가 행임(行恁)으로 쓴 것이 계기가 되어 정조의 명에 따라 생각할 임()을 쓰는 행임이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호가 석재(碩齋)라는 점이다. 석재는 주역 23번째 괘인 산지박(山地剝)의 여섯 번째 효()에 나오는 말이다. 석과불식(碩果不食) 즉 큰 과일은 먹지 않고 남겨 씨로 쓴다는 말이다. 이 결과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초가지붕을 벗겨낸다

 

이 석과불식은 신영복 선생님이 억울한 20년의 수감 생활을 이기게 해준 희망의 언어다. 박탈당함을 의미하는 박()은 신영복 선생님의 억울함과도 들어맞고 나뭇잎과 다른 열매는 다 떨어지고 가장 위에 남은 하나의 열매를 수식하는 데 제격인 절묘한 언어다. 산지박 괘는 가장 아래의 1효부터 5번째 단계인 5효까지 좋지 않은 상황을 의미하는 음효(陰爻)들로 이루어졌고 가장 위층인 6효만이 그와 반대되는 양효(陽爻)인 괘다.(토막나지 않은 효가 양이고 두 개로 토막난 효가 음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책의 전체 4() 가운데 마지막 장인 4장의 두 번째 절()이 주역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이다. 주역 64괘의 가운데 63번째 괘는 이미 강을 건넜다는 의미의 수화기제(水火旣濟)64번째 괘는 아직 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의미의 화수미제(火水未濟). 우리의 삶은 하나의 과제를 마치고 나면 다른 과제의 방문(訪問)을 받는 미완의 연속이 아니겠는가.

 

()이란 이야기를 길게 했지만 정조는 1783년 스물 두 살의 윤행임의 호로 석재(碩齋)를 택해 손수 글씨를 쓴 뒤 어보(御寶)까지 찍어주었다. 당시는 윤행임이 벼슬길에 나간 다음 해였다. 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는 주역의 괘, 단사, 상사, 효사 등을 두루 꿰뚫고 있을 정도로 주역에 능통한 임금이었다. 


정조의 각별한 사랑은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을 만들어 그 신하들을 각신이라 부르며 특별히 배려한 데서 가장 잘 드러났다. 규장(奎章)이란 임금의 글과 그림, 글씨 등을 이르는 말이다세조의 제갈량이라 불렸던 양성지(梁誠之)임금의 글과 글씨는 은하수처럼 만세토록 영원히 빛나므로 신하된 자라면 당연히 훌륭한 건물에 소중히 모셔야 한다.“며 그 건물을 규장각이라 이름 짓자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200년 후 숙종 재위시 규장각은 지어졌다. 단순한 왕립 도서관이었던 규장각은 1776년 즉위한 정조에 의해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영화당 부근 연지(蓮池) 옆에 새롭게 지어진 이래 임금과 신하의 대화를 기록하고 임금과 더불어 나랏일과 학문을 토론하는 경연(經筵)의 마당이 되었고 학술 편찬을 하고 임금의 명을 받아 각종 문서를 만들고 과거 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등 다양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정조의 말대로 규장각은 정치를 어지럽히는 근본 원인이 된 척신을 멀리하고, 임금을 계발하고 일깨우기 위해 존재했다. 규장각은 기본적으로 많은 책의 집결지였다. 윤행임은 규장각을, 없는 책이 없는 조선 최고의 도서관이라 여겼으나 규장각은 당시 세계의 여러 도서관들에 비하면 아주 작은 호수에 지나지 않았다.

 

규장각이 한 역할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충무공 전서를 편찬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임진전쟁) 중 그저 일기를 썼을 뿐 그의 일기를 모아 편찬해 그것에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은 규장각 신하들이다. ‘이충무공전서의 인쇄 감독을 맡은 책임자는 규장각 검서관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이다. 유득공은 서류(庶流)이지만 서얼(庶孼)은 아니었다. 서류란 그가 서얼 집안 출신이란 의미다. ()는 양반 남자와 양인(良人) 첩이 낳은 자식이고 얼()은 양반 남자와 천민 첩이 낳은 자식이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따지고 보면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의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선조 이후로는 역대 임금도 모두 서류라고 봐야 하지 않겠나?” 어떻든 유득공은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김정희 등이 그랬듯 사신의 일행으로 청나라 수도 연경(燕京)에 다녀온 사람이다. 앞서 규장각은 세계의 다른 나라 도서관들에 비하면 호수에 불과하다고 말했거니와 청나라에 간 사신들이 놓치지 않고 들러본 곳이 북경 유리창(琉璃廠)이다.

 

서울의 인사동 같은 곳이다. 유리창이란 명나라 초에 자금성을 지을 때 유약을 바른 기와 즉 유리 기와를 만드는 공장(은 공장이란 뜻이다.)이 생겨 불리게 된 이름이다. 자금성이 완공되어 공장들이 문을 닫아 빈 건물들이 생겼고 거기에 서적상들이 들어오면서 책과 문화, 예술의 거리로 바뀌었다

 

이충무공전서는 크게 이순신이 직접 지은 글과 다른 사람이 이순신을 위해 또는 이순신에 대해 쓴 글로 나뉜다. 충무(忠武)는 이순신의 시호(諡號). 그의 호()는 덕곡(德谷)이고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 정조는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정조가 특별히 존경한 인물은 이순신과 임경업이다.(임경업은 병자호란 때 의주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사에 맞서 굳게 항전한 장군이다.)

 

정조는 두 장군을 기리는 책을 만들 것을 명했다. 임경업 장군에 대한 책 이름은 임충민공실기(林忠愍公實紀‘). 특별히 이순신에 대해서는 책의 이름을 집()이라 하지 않고 전서(全書)라 이름하게 했다. 이런 예는 없었다. ‘이충무공 전서 편찬이 갖는 의미는 더 있다. ‘난중일기를 처음으로 활자화했다는 점이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순신의 초고본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이후 사라진 부분이 많다. 정조의 명을 받은 각신들은 이충무공전서에 거북선 그림을 그려넣은 뒤 상세한 치수를 담은 해설도 수록했다.

 

지금 볼 수 있는 각종 거북선은 오직 이 이충무공전서덕이라 해도 가()하다. ‘이충무공전서에는 거북선 제작법도 수록되어 있다. 이순신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린 사람은 인조다.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곽자의, 제갈량의 시호도 충무다. ()은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듬을 의미하고 무()는 적의 창끝을 꺾어 치욕을 막음을 의미한다. 무신에게 충이란 시호를 내리는 것은 최고의 예우다. 권율의 시호는 충장(忠壯), 임경업의 시호는 충민(忠愍), 김시민의 시호도 충무(忠武).

 

문신은 어떤가? ()이란 글자가 들어간 사람들이 있다. 문정(文正) 송시열, 문성(文成) 이이, 문정(文貞) 조식, 문원(文元) 이언적(李彦迪), 문순(文純) 이황, 문충(文忠) 유성룡....앞서 세조 때에 규장각이란 이름이 등장했다고 말했는데 거북선 역시 태종 때 기록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기이하다. 다만 당시의 거북선이 이순신의 거북선과 같은 유형은 아니다. 임진전쟁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함선은 판옥선이었다. 전투에서 거북선이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거북선은 고작 다섯 척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거북선은 적의 지휘선을 공격하고 적 함대의 전열을 흐트러뜨리는 역할과 임무를 수행했다.

 

이순신 당시 판옥선은 200척 이상 되었다. 거북선은 이순신이 어느 날 갑자기 생각해낸,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배가 아니다. 이순신 역시 뉴턴이 그랬듯 거인의 어깨에 올라 더 멀리 본 사람이었다. 선행 조건과 성과가 있었다 해서 모두 이순신처럼 창의적이지는 못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초계(草溪) ()씨이고 아내는 상주(尙州) ()씨다. 언어유희가 허용된다면 이순신을 변방(邊方)의 인물이라 말하고 싶다.

 

미관말직도 얻지 못했던 아버지 이정(李貞)이 초계 변씨의 집인 아산으로 장가들어 그곳에서 머물렀으니 아산은 이순신의 외가이자 본가이자 생가였고 상주 방씨와 결혼한 곳이니 처가이기도 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처음 설치했던 삼도수군통제영의 줄임말인 통영은 경상남도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고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兵器)를 깨끗하게 씻는다는 의미의 두보의 시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유래한 세병관은 통제사가 근무하던 곳이다.

 

윤행임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 온양은 뒤주에서 삶을 마치기 2년 전 사도세자가 다녀간 곳으로 세종이 온천욕을 해 효험을 보고 온수현(溫水縣)에서 온양군(溫陽郡)으로 승격시킨 곳이다. 윤행임은 사도세자가 온양 행궁(行宮) 담장에 사대(射臺)를 세워 활쏘기를 한 자리에 홰나무(회화나무; ’; ’) 세 그루를 심게 한 온양 군수 윤염(尹琰)의 아들이다.(윤행임은 병자호란 당시 3학사의 한 사람인 윤집의 후손이기도 하다.) 이락파(李落波)는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적의 탄환에 맞아 생을 마친 바다라는 의미를 가진, 이순신이 떨어진 바다다.

 

이충무공전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정조이고 이순신이고, 이순신이고 정조다. 정조는 이순신을 어제 신도비와 영의정 증직 교지로 예우했다. 정조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주자학(朱子學) 신봉자였다. 정조의 마음이 백성에게 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실제 마음을 기울인 학문과 정책 방향은 주자학이었다. 정조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시도해 주자 성리학을 다시 세우려 했지만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목적을 이루려 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정조가 다스리던 시절에 그렇게 많은 신진 학자가 넓은 의미의 서학에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다.

 

윤행임은 정조가 개혁 군주가 아니면 어떤가? 정조는 이미 많은 역할을 하였네. 이제는 자네들 몫일세.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성찰하고 내일을 바라보는 것은 바로 자네들일세.”라고 말한다. 윤행임은 전라도 관찰사 재직 중 척신 김조순(金祖淳)의 사주를 받은 옥당(玉堂)으로부터 서학을 신봉했다는 탄핵을 받아 신지도에 안치되었다가 참형 당했다. 헌종 초에 신원(伸冤)되었고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이제 이순신의 승리비결 주역으로 풀다를 마저 읽고 국문학자 최원식의 이순신을 찾아서를 읽어야겠다. 민족이나 국민보다는 임금에 충성하는 신하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던 이순신을 민족의 영웅 또는 국민의 영웅으로 처음 호출한 이가 단재 신채호임을 밝힌 이 책은 대한제국이 일제의 침략으로 위기에 빠진 20세기 초에 국권 회복의 메타포로 선택된 이순신이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해방의 상징으로, 해방 이후에는 국민국가 건설의 영웅으로 받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저항의 이미지가 박정희(朴正熙) 시대에 노산 이은상(19031982)의 부용(附庸: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딸려서 붙음. 남의 힘에 기대어 따로 서지 못함)으로 개발독재의 체제 서사로 전환되었다.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것도 이때다. 이순신을 빙자하여 임시정부에서 이탈한 자신을 변호할 속셈을 감춘 춘원 이광수의 이순신의 애독자가 박정희였다고 한다. 나는 이런 인연(因緣)의 연쇄 알기를 좋아하는가? 그렇다. 하지만 사태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 알려는 것이다. 다음 번(1018) 해설(수원 화성 및 화성 행궁) 시간에 정조와 이충무공 이야기를 반영할 여지가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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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과 문장이 유연하게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글을 쓰면 해설시 외우기 유리하다는 내 말에 번역가이자 우리팀의 PD인 이 선생님이 오늘 내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말을 했다. 종국적으로 해설은 원고를 쓰지 않고 평소 공부해 이해하고 저장해둔 내용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경우 자연스러운 강연이 되는 대신 체계가 없기 쉽다. 주제에 맞춰 글을 쓰는 과정이 담보되지 않으면 메시지가 없는 글을 쓰기 쉽다. 자신만의 주제를 정해 색다른 생각을 하는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 논리적이고 매끄러운 글을 쓸 수 있고 그러면 기억하기 쉽다. 본인이 쓴 글도 두서나 주제가 없으면 기억하기 어렵다. 과제를 부여받은 사람이 해오는 결과물을 보면 핵심적이지 않은 곁가지들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할 말을 잘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기 일쑤다.

 

전기한 선생님 때문에 감사하다. 번역을 오래 해오셨기에 글도 잘 쓰시겠지만 자신의 글을 쓰는 것과는 다르리라. 이 선생님은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 편하다는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의도를 헤아리기 어려울 때가 있고 헤아렸다 해도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잘 헤아렸다면 표현을 제대로 하겠지만 잘 헤아렸다 해도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가 없지 않다. 참 어려운 것이 생각하기고 쓰기다. 오늘 미니 시연에서 내 순서는 후반부에 배치되었다. 시간이 지체되어 마지막 순서에 하게 된 우리는 짧게 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천천히 해도 되었지만 내용을 점검하고 기억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빨리 휘몰아치듯 시연했다. 아이 컨택과 초() 스피드 문제를 지적받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개의치 않는다. 내게 배려심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충실하고 새로운 내용이 소통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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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한 여성이 某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동영상을 찍다가 도로 위에 굴러 떨어졌으나 주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없어서 심각한 중상조차 입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어떤 통신원의 기사를 읽었다참 어이 없다무엇조차 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렇게 했어야 한다는 말이다가령 기본권조차 부여받지 못했다는 말은 기본권은 당연히 누려야 한다는 전제 하에 쓰는 말이다이런 논리대로라면 그녀는 중상을 입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물론 기사 작성자는 중상을 입었어야 한다는 의미로 저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중요한 사실은 경찰이 저런 이상한 말을 했다면 그것을 전하는 통신원으로서는 순화하고 다듬어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저작권이 걸린 문제도 아니고 의도를 곡해할 우려가 있는 것도 아닌선하고 바른 의도의 정정이 아닌지저 기사를 보고 우리나라의 기레기들을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어쩌다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면 말고 식으로 불순하고 사악한 의도로 사태를 왜곡하고 조작하는 기자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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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節藻梲, 산절조절이라 읽는다. ()은 마디 절로 많이 쓰이지만 이 성어(成語)에서는 지붕 받침대인 두공(枓栱)을 의미한다. ()이 두공을 뜻하는 것은 사전을 통해서는 알기 어렵다. ()은 동자기둥을 뜻한다. 공자(孔子)는 신분을 뛰어넘는 규모의 일무(佾舞)를 추었다는 이유로 계손(季孫)씨를 질타했듯 신분에 맞지 않는 장식을 했다는 이유로 노나라 대부 장문중(臧文仲)도 질타했다. 산절조절했다는 것은 두공에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 수초 무늬를 그려넣었다는 뜻이다.

 

한 학인은 늘 쓰던 말의 의미와 그 말에 담긴 이치를 새로이 공부할 때 느끼는 기쁨이 주역을 공부할 때 얻는 빼놓을 수 없는 재미라고 말했다.(‘내 인생의 주역‘ 397, 398 페이지)나도 강하게 동의하는 바이다. 주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기한 재미는 한자를 공부할 때 전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재미다. 흥미로운 점은 오타로 인해 가장 많이 힘이 드는 경우가 주역을 공부할 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가령 간유배(艮有背)를 간기배로 잘못 기록한 한 책을 보고 아, 주역에서는 유()라는 글자가 기라는 음으로도 읽히는가보다란 생각을 했다. 문제는 그럴 경우 그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다. 이는 우리가 순서의 의미로 많이 아는 차()가 주역에서는 거처나 장소 등을 의미하고, 왼쪽을 뜻하는 좌()가 내치다는 의미로 쓰이고 고()의 경우 알린다는 의미가 아닌 뵙고 청하는 것을 의미할 경우에는 곡으로 읽히는 것 등을 감안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 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지을 ; 자를 앞에 두고 차를 다음에 두면 조차; 造次라는 말이 된다. 조차는 조차간; 造次間의 줄임말로 아주 짧은 시간, 아주 급한 때를 의미한다. ’조차; 造次가 아주 급한 때를 의미한다면 전패; 顚沛는 정신이 없어 엎어지고 자빠지는 순간을 의미한다. ‘; 는 물이 쏟아지는 것, 넘어지는 것 등을 의미한다.

 

잘 알려졌듯 ; 는 제왕의 고향을 의미하는 풍패; 豐沛라는 말에서 만날 수 있는 말이다. 풍패는 한고조 유방이 태어난 곳이자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킨 곳이다. 풍패가 제왕의 고향을 의미하는 것은 이런 연유들로 인해서다. 이성계의 연고지 전주에 있는 객사에 풍패지관; 豊沛之館이라는 현판이 있다. 1606년 명나라 황손의 탄생을 반포; 頒布; 널리 펴서 알게 함.. ; 나눌 반)’하러 온 사신 주지번; 朱之蕃이 썼다는 글씨다. 전주를 유방; 劉邦의 고향에 비유한 이름이다.)

 

곁가지가 길었는데...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문제는 주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면 간기배란 간유배의 오타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그러면 이리 저리 헤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 헤아림 때문에 공부가 되었다. 배망면낙(背邙面洛)이란 말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의미라는 점도 흥미롭다. 낙양(洛陽)은 망산(邙山) 즉 북망산(北邙山)을 뒤로 하고 낙수(洛水)를 앞에 두고 있다는 의미다.

 

황하의 지류인 낙수는 산시성과 허난성을 흐르는 강이다. 낙양이 배산임수를 하고 있으니 망산 남쪽에 낙양, 거기에서 더 남쪽에 낙수가 흐른다는 말이다. 이를 산남수북(山南水北)이라 한다. 산의 남쪽, 물의 북쪽이 양()이라는 의미다. 한양(漢陽)은 낙양이라는 말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중국의 경우 서고동저(西高東低) 지형으로 인해 강이 대부분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그리고 물이 넘치면 대개 남쪽으로 흐른다. 물이 넘치는 남쪽은 습해서 음()이고 상대적으로 건조한 북쪽은 양()이 된다. 풍패지관이란 말도 배산임수란 말도 한양이란 지명도 모두 중국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반영한다. 최근 겸재 정선의 그림을 소중화(小中華) 사상의 구현으로 정의한 미술책을 읽었는데 함께 알아볼 만한 이슈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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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번째 괘인 수택절(水澤節)괘까지 읽었다. 물이 위에 있고 연못이 아래에 있는 괘 또는 연못에 물이 가득한 형국이다. 이 괘를 보며 박상륭 작가의 '죽음의 한 연구'에 나오는 마른 늪을 떠올렸다. 마른 늪보다 절제하는 연못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60번째 괘라니 잘 건너온 듯 하다. 이제 풍택중부, 뇌산소과, 수화기제, 화수미제가 남았다. 수화기제와 그 뒤에 나오는 화수미제가 말해주듯 하나의 책을 읽고(건너고) 나면 새롭게 건너야(읽어야) 할 책이 나타나게 된다.

 

이미 건넜음을 뜻하는 기제(旣濟) 다음에 아직 건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미제(未濟)가 오는 것은 태평[] 다음에 막힘[]이 오는 것, 기다림[] 다음에 송사[]가 오는 것과 패턴이 같다. 어떻든 책 선택은 내가 하지만 때[]와 자리[]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다 읽고 어떤 책을 읽을지 아직 떠오르는 바가 없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주역에 개안(開眼)하게 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고 주역도 충분히 독공(獨工)이 가능함을 알게 해준 책이다.

 

수택절은 가장 쉬운 효사들로 구성된 괘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절제에 대해 말하는 '수택절'의 택은 한 없이 받아들이는 연못이 아니라 수용 가능한 만큼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아낌 없이 흘려보내는 연못이다. 이 괘의 주지(主旨)와 다르게 나는 수택을 수택(手澤) '손의 자취' 또는 '손때'라 읽는다.(은 연못이기도 하고 자취이기도 하다.) 중천건에서 수택절까지 왔으니 물때가 끼듯 책에, 그리고 시간에 자취, 흔적, 고투 등이 그려졌음이 분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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