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를 전공하지 않아서이거나 못해서이겠지만 세종은 내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왕이다. 하기야 전공자가 아니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라면 정조도, 성종도, 중종도 관심 밖에 두어야 옳으리라. 정조에 대해 집중하느라 그랬다고 볼 수도 없다. 정조에 대해 정통하지도 못했으니 면목이 없거니와 공부는 두루 하는 것이 옳으니 말이 되지 않는다 하겠다.

 

본질이라 하기 어려운 '여진족인 태조의 후손'이라는 이슈, 과학기술이란 이슈 정도에 집중 했을 뿐 세종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은 문화해설을 하는 입장으로 변명의 여지 없이 부끄러운 일이자 위험한 일이다. 물론 세종을 천문학, 음악 등의 키워드로 언젠가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사실 조금씩이라도 읽어야 후에 고생하지 않을 것이다. '후에 제대로'란 말은 불성실한 공부를 의식한 수사(修辭)인지도 모른다.

 

최근 내가 사는 연천에 뒤늦게 관심을 기울이는 나는 오늘 (중고를 파는 오프라인 매장인) 알라딘에 나온 박현모 교수의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를 구입했다. 종로 알라딘으로 건너오기 전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이석제 저자의 '세종이 꿈꾼 나라'를 읽다가 가사평, 송절원, 불로지산(佛老只山), 거여평, 부로지산(夫老只山) 등의 연천의 주요 지명들이 강무(講武)와 관련해 언급된 것을 확인했다.

 

연천이 세종의 강무가 펼쳐진 곳이라는 말은 얼마전에 들어 알고 있었다. 단 그저 기본적인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해야 옳다. 그러던 중 오늘 종로 알라딘에서 박현모 교수의 책에서 세종이 강무를 지나치게 거행했다는 내용을 접했다.(강무는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이다.)

 

비판도 지지도 아닌 있는 그대로 읽되 연천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단서를 얻는다면 좋겠다. 박현모 교수의 책을 산 것은 이런 점 외에도 세종의 아버지 태종을 비롯 황희, 박연, 정인지, 김종서 등의 신하와 세종과 비교되는 군사(君師) 정조 등 아홉 사람이 본 세종을 기록한 책이라는 점이 흥미를 끌어서였다. 기획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하는 책이다.

 

요즘 나는 이렇게 충동 구매의 대책 없음을 자탄(自嘆)하는 마음으로 책을 살 이유를 스스로 몇 가지는 제시할 수 있어야 중고일망정 구입하자고 다짐하고 있다. 빨리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송파(松坡)에 이어 광진(廣津)을 해설하게 되었는데 그간의 조선사 위주의 공부를 지양하고 고구려, 백제 등의 역사를 익힐 기회라 생각한다.

 

고구려는 내가 사는 연천의 호로고루와 임진강을 통해서도 익히고 있다. 그간 조선사에 다소 소홀해 세종을 읽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종은 정통성 없이 (반정으로) 왕이 된 까닭에 타개책으로 성리학과 사림을 택했다는 임자헌 님의 설명을 듣고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경우다. 요즘 지치고 힘들어 제대로 책을 읽지 못하지만 한국사는 그런대로 쉽게 읽고 있다.

 

귀신을 잔뜩 싣고 다닌다는 의미의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란 말로 죽은 사람들을 잔뜩 나열하는 시()를 조롱했던 이규보의 비판의식을 역사서 읽기에 비추어 보아야 하리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점에서 쉽게 읽히지만 역사서 읽기는 어렵다. 우리 역사서를 읽으면 조선이나 고려, 삼국 등의 인물들 이야기를 많이 인용하고 현대서를 읽으면 서양 사람들 인용 빈도가 높은 것이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 책을 잘 안 읽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다 보니 어휘력이 초라해짐이 느껴지고 문제의식이 사라지거나 엉성해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러니 인용 빈도가 높은 것을 우려하지 말고 열심히 읽되 내가 공들여 생각한 것 다시 말해 덜 의존적인 이슈들을 다듬는 것이 옳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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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가지 키워드로 읽는 시민을 위한 조선사
임자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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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에 집중하다 보니 근현대사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조선사에 정통하지도 못하다. 그럼 나는 왜 조선사에 집중해온 것일까? 단순히 이야기 거리를 얻으려는 것일 수는 없다.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교훈을 위해 역사를 배운다고 쉽게 말하지만 제대로 되었는지 자신하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10가지 키워드로 조선과 대한민국을 비교하는 책을 만났다. 열 가지 키워드란 주권의지, 법치국가, 페미니즘, 국제외교, 기본소득, 정치개혁, 정당정치, 개인과 국가, 세대갈등, 적폐청산과 정권교체 등이다. 저자는 조선과 대한민국을 쿠데타란 개념으로 비교한다. 잘 알려졌듯 조선은 이성계, 이방원, 수양대군 등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대한민국은 박정희, 전두환 등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저자는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했어도 무수한 문제점을 만들어냈다면 그것을 과연 성공이라 할 수 있을까? 묻는다. 그리고 이성계, 이방원, 수양대군의 쿠데타는 왕조시대의 쿠데타이고 박정희, 전두환의 쿠데타는 민주공화정체제에서 일어난 것이기에 절대 같을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가령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감행했지만 체제를 전복하지 않았기에 백성을 해칠 필요가 없고 왕위를 노리는 대신과 혈육을 경계하면 되었을 뿐이지만 박정희, 전두환의 쿠데타는 민주국가라는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격한 것이기에 즉 민이 주인인 체제를 전복했기에 국민을 해쳐야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들이 아직 조선 백성의 사고를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에서 들여다볼 말이 있다. “사회의 분화와 변모로 붕당에 여러 요소가 끼어들기는 했지만 원론적으로 말해 붕당(朋黨)의 힘은 공부에서 나온다.. 정조가 탕평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스로 공부를 엄청나게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책을 검토하고 나라의 방향을 결정할 만한 식견이 있었고, 그 식견을 신하들에게도 인정받았다.. 정조는 정치가들이 또는 대통령이 존경해야 하는 인물이라기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닮아야 하는 인물이다."(7정당정치중에서)

 

핵심은 정조는 정치가들이 또는 대통령이 존경해야 하는 인물이라기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닮아야 하는 인물이라는 말이다. 2장 법치국가편에서 저자는 법은 지켜야 하지만 그전에 물어야 할 것이 법은 무엇인가, 란 물음이라 말한다. 새길 말은 왕조국가인 조선에 입헌주의에 입각한 법치주의 개념이 전혀 없었는가, 란 물음이다. 조선은 상당히 짜임새가 있는 나라로 입헌주의란 개념을 가지지 못했을 뿐 유사한 개념은 얼마든지 가지고 있었다.

 

조선은 철저히 기획된 나라였다.(51 페이지) 이 말은 조선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한 사상과 방향성을 바탕으로 설계되고 건국되었다는 말(12 페이지)과 상응한다.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만들어 왕에게 올린 것을 들 수 있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이전까지의 모든 개별 법령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대대로 통치의 기초로 삼게 할 최고 법전을 만들고자 했다.(완성된 것은 성종대에 이르러서다.)

 

조선보다 나아야 할 우리나라는 법이 세력을 가진 자, 부유한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운영되고 있어서 우리에게 큰 과제를 준다. 그래서 법학자, 판검사, 변호사가 아니라 해도, 국회의원이 아니라 해도 법을 질문하고 법 정신을 고민하는 것이다. 저자는 페미니즘편에서 문정왕후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보인다. 문정왕후는 유일하게 어머니로서 수렴청정을 한 인물로 조선에서는 보기 드물게 수렴청정과 외척정치를 주도적으로 활용해 정치 전면에 나섰다.

 

문정왕후는 죽을 때까지 실질적 권력자였다. 그의 치세 기간에 을사사화가 있었다. 물론 사화라고 하지만 사림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윤임 일파를 제거하려고 한 것이기에 사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정왕후에게 쏟아지는 것은 비난 일색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정왕후 치세가 난세인 것은 유교 국가에서 불교를 되살리려 했기 때문이다. 조선이 불교를 억누른 것은 유학의 나라를 세우려 한 목적도 있었지만 재산을 국유화하려는 목적도 있다.

 

물론 그 과정이 너무 강압적이었다.(86 페이지) 명종 시대는 임꺽정이 활약한 시대다. 그 시대는 사실 임꺽정이 유독 유명했을 뿐 크고 작은 도적이 넘쳐나던 시대였다.(87 페이지) 저자는 저들 도적이 생긴 것은 도적질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추위와 굶주림에 절박하게 시달려서라는 명종실록의 말을 인용하며 유교 국가에서 불교를 되살린 것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왜 농민이 도첩(度牒)도 없는 중이 되려고 절에 들어가는지를 먼저 묻는 것이 정치하는 자의 올바른 자세라 말한다.(88 페이지)

 

저자는 문정왕후에게 아쉬운 점은 시대를 읽는 눈이 부족했던 것이라 말하며 좋은 머리와 정치적 식견으로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것은 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한계 때문이라 설명한다.(90 페이지) 저자는 문정왕후의 패착 중 하나로 외척의 정치농간을 꼽는 것에 대해 외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조선의 구조적 모순이라 말한다.(92 페이지) 외척은 왕에게 가장 중요한 뒷배였다.(80 페이지) 단종의 비극도 단지 단종이 어리고 세조의 야망이 커서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단종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다. 단종은 수렴청정 없이 곧장 친정(親政)을 행했다.

 

우리가 페미니즘 논쟁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남자 대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부디 우리사회가 조금씩 페미니즘에 익숙해지면 좋겠다고 말한다. 조선은 신분 차이와 가부장적 질서를 옳다고 본 나라였다면 대한민국은 모두가 평등하게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전제로 시작된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이 중요하다.

 

4장 국제외교편에서 저자는 조선의 명나라 의존과 대한민국의 미국 의존을 한자리에서 논한다. 광해군이 정치를 못한다는 이유로 나라를 바로잡고자 반정을 일으켰다는 명분이 무색하게 인조 정권은 나라를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120 페이지) 성종 때 들어서 모든 시스템이 완성되었지만 건국 이래 최초로 가장 안정적인 분위기에서 원자에서 세자로, 그리고 왕으로 즉위해 금수저 코스를 밟은 연산군이 전무후무한 문제적 통치를 펼치자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은 세자수업도 받지 못했고 정치 경험도 없어서 정통성과 민심을 확보해줄 지지 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명나라에 의존했고 성리학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때부터 조선과 명은 군신관계를 넘어 한 집안이자 부자관계라는 개념이 자리 잡았고 사림이 정치의 핵으로 등장했다.(122 페이지) 5장 기본소득편에서 저자는 대동법과 새로운 상상력을 논한다. 현종 대에 예송논쟁이 있었고 그보다 더욱 중요하게 그 시대는 소빙기의 영향으로 사상 최악의 대기근이 찾아든 시기였다.

 

조선은 놀랍게도 세 차례 전쟁(임진, 정묘, 병자년 전쟁)과 소빙기의 대기근이라는 참사의 시기를 조세개혁으로 돌파했다.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를 붙들고 예송논쟁을 일삼기도 했지만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유학의 기본이념도 상기할 줄 알았고 이를 실현할 집요한 경세가도 있었다.(145 페이지) 세금이 누구를 위해 얼마나 합리적으로 운영되는지 투명하게 공개되면 백성들은 세금이 증가하는 것을 덮어놓고 거부하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150 페이지)

 

저자는 항산이 있으면 항심이 있다는 맹자의 말로 기본소득을 이야기한다. 기본소득은 돈이 지배하던 세상보다 훨씬 다채롭게 개개인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해줄 것이다.(158 페이지) 6장 정치개혁편에서 저자는 정치는 사람 사이의 대화라 정의한다.(179 페이지) 정치는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기에 매일의 일상에 있다. 7장 정당정치편에서 저자는 주자학이 본고장인 중국보다 조선에서 그 꽃을 활짝 일찍 피워낸 셈이기에 민주주의는 낯설어하면서도 대의민주의의 중요 요소인 정당정치에는 친숙함을 느끼는 묘한 현상이 생겼다고 말한다.(192 페이지)

 

저자는 예송논쟁이 지나치게 이론적이고 소모적인 면이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전란으로 혼란해진 나라의 질서를 상당히 조선다운 방식으로 바로잡아가는 방식이었다고 설명한다.(197 페이지)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참여가 우리의 전통이었다.(212 페이지) 8장 개인과 국가편에서 저자는 길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별을 바라보며 다음 시대의 문을 연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한 사람을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정도전을 선택할 것이라 말한다.(221 페이지)

 

정도전은 현재의 불의와 구체제의 부패보다 그 다음에 펼쳐질 세상에 무게중심을 둔 특별한 인물이다. 이로 인해 조선은 건국부터 하고 방향을 설정한 나라가 아니라 방향이 먼저 설정되고 그에 따라 세워진 독특한 나라가 된 것이다. 정도전을 비롯한 이들이 모델로 삼은 나라는 성리학의 나라인 송나라였다. 송나라가 불교와 도교에 빼앗긴 인재를 다시 유학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의거(依據)한 것이 신유학 즉 성리학이다.(232 페이지)

 

조선은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옥새를 줌으로써 무혈 개국을 한 나라가 되었다. 당대 명문거족에 비해 내세울 것이 없었고 외가 쪽이 노비의 피가 섞여 있는 정도전(229 페이지)은 그로 인해 평생 고통을 겪었지만 그렇기에 종법제도에 관심을 둘 필요는 없었다.(239 페이지) 정도전에게 중요한 것은 관이 아닌 민이었지만 그가 백성을 주체로 인식한 것은 아니다. 그는 민을 나라의 근간으로 여겼다.(241 페이지) 저자는 정도전이 사대부로서 나라에 대한 책임을 자임하고 이를 감당하려고 자기 삶을 걸었음을 강조하며 민주주의라는 명칭에 걸맞은 책임을 요구한다.

 

저자는 9장 세대갈등편에서 조선은 당하관인 젊은 대간(臺諫)들로 하여금 왕과 대신들을 모두 견제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균형을 이루게 했다고 말한다. 사간원(司諫院)은 왕의 언행과 시정에 잘못이 있을 때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서 바로잡는 간쟁(諫爭)을 맡았고 사헌부는 관료들의 잘못과 위법을 규찰해서 탄핵하는 일을 맡았다.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태종은 사간원의 인원은 줄이고 사헌부 인원은 그대로 두었다. 물론 사헌부는 경우에 따라서 왕도 탄핵했다.(252 페이지)

 

대간 임명권은 문신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에서 분리해 정5품인 이조 전랑에게 주었다.(이조 전랑 인사권을 두고 동인과 서인이 갈렸다.) 흥미로운 사실은 태종이 정승은 청렴한 것보다 왕과 정책을 토론하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뜻에 무조건 맞춰주는 것이 아니라 소신껏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진짜 충성이라고 본 것이다.(259 페이지) 토론과 비판은 단순히 잘못을 탓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로써 빚어진 현재의 문제들을 수습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조선이 젊은 관료를 대간으로 선별해서 그들의 비판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유는 그들의 치기어린 열정과 의욕이 나라를 오래오래 젊게 유지해줄 원동력이 될 것이란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267, 268 페이지) 저자는 젊은 세대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젊다고 모두 시선이 새롭다거나 새 질서로 세워진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것은 아니란 점이라는 말을 한다. 자신의 욕망으로 정도전이 내세운 궁극의 개혁 시도를 막은 태종도 새로운 내일을 열지 않으면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음을 잘 알고 구세력의 힘을 최대한 억제해 조선이 고려와는 다른 나라가 될 수 있게 했다.(269 페이지)

 

10장 적폐청산과 정권교체편에서 저자는 조선의 복잡다단한 정치투쟁의 장을 논한다. 그리고 지난 일을 덮어놓고 무조건 용서하자는 말은 진짜 용서가 아니라 덧붙인다. 이규상은 ‘18세기 조선인물지에서 역학이나 의학에 학이란 글자를 붙이는 것은 글을 알아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 사림은 조정을 장악한 이후 민생 현안을 살피기보다 도리를 가르치면 세상은 저절로 바루어진다는 막연한 생각에 의지했다.(305 페이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서로의 일에는 공식성이 있다. 열심히 배워서 남주는 것은 자기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여느 직업의 결과처럼 당연히 수반되는 부분이다. 출구와 상상력을 제시할 책임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18세기에 위기와 가능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내일을 준비하지 못하고 망국으로 치달은 조선의 역사가 안타깝다면 지금은 오늘에 대한 안목을 갖추기 위해 우리 각자 노력해야 한다.(306 페이지)

 

음미해야 할 인상적인 말은 예()란 예의와 예절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개인의 위치를 결정하고 개인이 개인과, 그리고 공동체와 맺는 관계의 적절한 형태를 정의하며 개인의 분수(分數)를 결정한다(55 페이지)는 말, 예로써 다스린다는 말은 어떤 자리가 어떤 일을 하는지 분명하게 제시되는 것을 말하고 시스템에 법의 주안점을 두는 것을 말한다는 말(58 페이지)이다. 조선사를 통해 어떤 것을 배울 수 있고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를 알려면 시민을 위한 조선사를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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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식물(속씨식물)의 화분의 기능 형태학적 연구 논문으로 박사가 된 이상태 교수의 식물의 역사에서 수 백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진 단백질, 수 천개의 뉴클레오티드로 이루어진 핵산으로 구성된 세포 이야기를 읽는다. 프랑수아 자콥(1910-1976)'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핵산이 기억과, 단백질이 욕망과 나란히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콥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핵산과 기억, 욕망과 단백질의 가공할 혼합물이다. 저물어 가고 있는 이번 세기에는 핵산과 단백질이 우리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다음 세기의 관심사는 기억과 욕망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누가 대답해 줄 것인가?"

 

자콥의 말은 환원적(reductionism)으로만 보던 생명현상을 창발적으로 보려는 생물학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환원주의는 여러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이고 간결한 설명은 감정의 분자라는 책에서 저자 캔더스 퍼트가 제시한 개념이다.

 

퍼트는 환원주의를 가장 작은 부분들을 조사한 뒤 그것들을 외삽(外揷 - extrapolation; 수학에서 원래의 관찰 범위를 넘어서서 다른 변수와의 관계에 기초하여 변수의 값을 추정하는 과정)하여 전체에 관한 보편적인 가정을 이끌어냄으로써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로 설명했다.

 

'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의 번역자는 서양과학의 토대를 이루는 환원주의적 성격은 지속적 과학 발달과 더불어 학문에 대한 전문성을 요구하게 되어 유전학과 생화학, 생물학과 물리학, 인문학과 자연과학, 과학과 예술의 각 분야에서 소수의 전문가와 다수의 문외한들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콥은 생명현상을 레고 놀이에 비유했다. 생명계는 레고 놀이와 유사한 것으로 요소들이 거의 고정된 조합체로 형성된 것이며, 복잡한 작용 방식을 결정하는 유전자나 유전자군의 조각들이 다양한 배열에 따라 조립된 것이란 의미이다.

 

진화에 의해 수반된 복잡성은 이미 존재했던 요소들이 새롭게 재정비되어 형성된 것으로 새로운 형태, 새로운 표현형의 출현은 종종 이 동일한 요소들의 참신한 조합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의미다.

 

자콥의 책에는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도 나온다. 강을 건너야 하는 전갈이 헤엄을 치지 못하자 개구리에게 부탁해 업고 강을 건너달라고 부탁한다. 개구리는 전갈에게 넌 나를 찌를 것이라 말한다. 그러자 전갈이 그러면 둘 다 빠져죽을 테니 그러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개구리는 반신반의하며 전갈을 업고 강을 건너게 된다.

 

중간쯤에 이르자 전갈이 개구리를 찌르는 사태가 일어나고 만다. 개구리는 죽어가면서 물었다. 왜 나를 찌른 것이냐고. 전갈은 천성 탓이라 답했다. 이 이야기를 전하며 자콥은 전갈은 찌르느냐 마느냐라는 두 가지 선택 외의 다른 가능성은 없기에 자유의지가 전혀 없는 멍청이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전갈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 역시, 우리의 수준에서 우리의 방식대로, 우리의 본성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콥은 생물학의 역사는 유물론과 환원론, 그리고 생물계 구조와 기능의 단위체를 향하여 계획 없이 나아가는, 혼돈스런 긴 행로와도 같다는 말을 한다. 자콥에 의하면 파리는 생물학의 가장 근본적 문제들 중 하나인 배() 발생 연구를 위해 선택되었다.

 

자콥은 생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자콥은 이 동물이 특별히 특성 종양을 가지고 있어서 연구 대상으로 선택되었다고 말한다. 828일 광화문 해설 시간에 염상섭 좌상을 주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나로서는 그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단편 소설에서 개구리가 실험대상으로 나오지만 생물학 실험 또는 연구의 주된 대상은 파리와 생쥐였다.

 

눈에 띄는 것은 다음의 공통점이다. 식물에 대해 관심과 궁금증이 많은 분들을 위해 오래전부터 전문적이지만 그리 어렵지 않은 내용으로 책을 쓰고 싶었다는 이상태 교수의 글과 자콥이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작지만 위대한 책을 썼다는 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의 번역자의 글이다.

 

쉽고 간결하고 의미까지 잘 담는다면 금상첨화이리라. 물론 우리는 우리 역시, 우리의 수준에서 우리의 방식대로, 우리의 본성 속에 갇혀 있다는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쉽고 간결하고 의미까지 잘 담은 책이 아니라 해도 실망하거나 힘들어 할 필요는 없다. “생각하는 노동이자 온몸으로 수행하는 수련인 독서”(여성학자 정희진씨의 말)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새롭게 받아들인 타자의 글을 자신의 기존 지식장에 재배치하는 지식 생산 과정에 쉬움까지 요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나친 생각이다. 아직 접하지 못한 책을 만나면 좋은 벗을 얻은 것처럼 생각하고, 이미 접한 책을 만나면 옛 벗을 만난 듯 하라(독미견서 여봉양사; 讀未見書 如逢良士, 독이견서 여우고인; 讀已見書 如遇故人)는 말을 조금 바꿔 어려운 책이라도 만나면 좋은 벗을 만난 것처럼 생각하고, 전문적인 의미를 쉬운 표현으로 담아낸 책을 만나면 옛 벗을 만난 듯 여기면 된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그런 대세와 무관하게 늘 쉽게 쓰도록 애쓰는 것은 내가 자발적으로 스스로 부과한 과제이자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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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도서관 숲
김외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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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인류가 99 퍼센트의 시간을 함께 한 생명의 터전이다. 나도 당연히 그런 조건의 산물이다. 내가 로망으로 여기는 곳이 있다. 침엽수림인 전나무 숲길이다. 침엽수는 활엽수에 비해 피톤치드를 더 많이 생산한다. 활엽수림에 비해 부엽토(腐葉土)가 적어 부족한 양분을 보충하기 위해 아미노산 생산에 필요한 피톤치드를 대량 생산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 바이오메틱 연구소의 실험 결과 밝혀진 사실이다. 붓다 사후 앞에 칠엽수(七葉樹)가 우거진 칠엽굴에서 결집을 한 이야기(마로니에 공원)와 학림(鶴林)을 이야기했었다. 보리수 아래에서 석가모니가 수행을 할 때 숲 속 피톤치드가 깨달음에 이르도록 큰 도움을 줬다고도 볼 수 있겠다. 상상으로 알아야 할 바다. 물론 숲은 석가모니의 고행 장소이기도 했다.

 

피톤치드는 후각에 작용한다. 후각이 미각, 청각, 촉각, 시각보다 먼저 우리의 몸에 작용한다. 향기는 인간의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숲은 바다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자산이다. 남해 물건리의 방조어부림이 대표적이다. 물건리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 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란 고두현 시인의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란 시에도 나오는 곳이다.

 

놀랍게도 이 방재림은 조선시대인 350년 전에 시작되었다. 도시에도 당연히 숲은 보물섬 같은 곳이다. 도시 숲이 경쟁력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숲의 총량과 행복감의 총량은 상당 부분 비례한다. 인류의 삶은 철저히 자연에 의존해왔고 반드시 자연에 의존해야 하기에 자연을 찾는 것은 본능적이고 근원적이다.

 

숲에 가면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나무가 소나무다. 소나무는 1930년대 우리나라 산림면적의 75퍼센트를 차지했으나 80여년 후인 현재는 25퍼센트로 줄어들었다. 우리나라의 소나무는 지역에 따라 줄기가 곧게 자라는 성질(통직성; 通直性)과 굽어 자라는 성질(만곡성; 彎曲性)을 지녔다.

 

금강산에서 울진까지 동해안을 따라 자라는 소나무는 습기를 가득 머금은 습설(濕雪)의 무게에 부러지지 않고 잘 견디도록 줄기는 곧추서고 가지는 짧고 가늘게 변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숲을 개간하면서 잘린 소나무는 죽지만 참나무는 더욱 많은 가지가 나와 자랄 수 있다. 참나무는 산 높이에 따라 각기 터를 잡고 있다. 가장 아래서부터 상수리, 굴참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가 자란다. () 사이의 하이브리드가 가장 발달한 나무가 참나무다.

 

변종과 잡종이 많이 식별하기 어려운 참나무류에서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는 종이 겨울철 떡갈나무다. 잎자루와 가지의 경계에 생기는 떨켜세포가 잘 형성되지 않아 시든 잎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떨켜세포는 시든 잎을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게 한다.) 참나무 섬유소를 분해하여 먹고 사는 것이 표고버섯이다.

 

나무 둘레를 굵게 하는 형성층이라는 세포분열층이 퇴화한 대나무는 조직 해부학적으로는 풀이지만 형성층이 있다가 퇴화한 것이기에 볏과의 나무로 인정한다. 대나무는 나무도 닮고 풀도 닮은 중간적 식물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쪽도 닮지 않은 독특한 생활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감자와 유사한 생태로서 바로 땅속줄기에 의해 오랜 세월 영양 번식하면서 군락이 성장하기 때문에 좀체 꽃이 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60년마다 대나무가 꽃 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꽃 없이도 오랜 세월 잘 번성하던 대나무가 갑자기 군락 전체가 고사(枯死)하기로 작정하고 꽃을 피우는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나무 씨앗은 중력을 이기며 바람을 타고 DNA를 전파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버드나무는 5월이 되면 종자의 운반 거리를 늘리기 위해 씨앗에 솜털(종모; 種毛)을 날려보낸다. 그런데 종모를 꽃가루로 오인한 사람들이 앨러지를 염려해 버드나무류 가로수를 많이 제거했다. 식물은 복잡한 뇌를 포기한 대신 정교한 호르몬으로 주위를 인식하고 반응하며 햇빛과 양분을 얻고 꽃과 잎을 피우며 종자를 결실한다.

 

물리화학적인 생체 메커니즘을 이용하여 중력을 거슬러 30미터 높이에 물을 뽑아 올리고 추위에 대비하여 단풍과 낙엽을 지우며 영하 70도의 혹한에도 얼지 않도록 세포의 삼투압도 조절한다. 은행나무가 한때 지구상에서 사라진 나무로 인식되었듯 메타세콰이어도 그랬다.

 

두 나무처럼 백합나무도 살아 있는 화석 수종으로 불리는 나무다. 겨울이 되면 나무들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수분이 얼지 않도록 세포액의 농도 즉 삼투압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부지런히 한다. 나무는 물이 얼면 견딜 수 없는 열대 수목부터 영하 70도까지 견딜 수 있는 한 대성 수목에 이르기까지 종이 실로 다양하다. 버드나무와 자작나무 가지는 적당한 조건만 갖추어주면 영하 269도씨의 액체 헬륨에도 견딜 수 있다.

 

물은 서서히 차가워지면 빙점 이하에서도 얼지 않는 과냉각(過冷却; overcooling) 현상이 일어난다. 분비나무의 겨울눈은 영하 30도까지 과냉각한다. 그런 다음 세포 내부의 세포액 속에 당 함유량을 늘리고 삼투압을 높여 얼지 않게 한다. 나무가 내동성을 확보하는 두 번째 방법은 세포액의 수분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나무는 육상 생물종의 80퍼센트가 멸종한 K - T(중생대 백악기 - 신생대 팔레오기) 시기와 빙하기 추위 속에서도 진화했다.

 

페로몬이 같은 종에 작용하는 화학물질이라면 카이로몬은 다른 종에 작용하는 화학물질이다. 나무는 사실 귀머거리다. 식물은 움직일 수 없는 관계로 청각이 별 쓸모가 없다. 소리에 반응하는 식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애기장대가 대표적이다. 애기장대는 애벌레가 자기 나뭇잎을 갉아먹는 아삭아삭하는 소리가 나면 애벌레가 싫어하는 머스터드 오일이란 물질을 뿜어낸다. 물론 이는 매우 특별한 상황이다.

 

식물은 클래식과 록 음악을 구분할 수 없어도 냄새를 맡을 수는 있다. 나무는 후각신경이 없는 대신 에틸렌 수용체를 통해 공기 중의 휘발성 화학물질을 감지한다. 나무들은 햇빛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한다. 키를 크게 하는 싸움이다. 하지만 햇빛을 많이 받는 만큼 나무 상층부는 수분 부족을 겪게 된다. 물을 빨아올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의미다.

 

단풍에 대해서도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나무는 왜 가을에 에너지를 소비하면서까지 붉은 색의 안토시아닌 색소를 만들어낼까? 2009년 이스라엘과 핀란드의 공동 연구진의 연구에 답이 있다. 그들은 대륙에 따라 단풍색이 달라지는 이유를 두 지역의 상이한 지질 변동에서 찾았다. 연구진에 따르면 식물은 약 3500만년전부터 곤충을 물리치기 위해 안토시아닌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수차례의 빙하기가 닥쳤다. 이로 인해 유럽과 북미 대륙의 운명이 갈렸다. 북미대륙이나 동아시아에서는 수목들이 빙하기의 혹한을 피해 따뜻한 곳으로 남하할 수 있었지만 유럽은 알프스 산맥에 가로막혀 남하하지 못하고 멸종한 것이다. 이 가설을 설득력 있게 볼 필요가 있다.(유럽의 자생 수종은 80여종, 우리나라의 자생 수종은 1200여종)

 

즉 유럽은 빙하기에 나무들은 물론 곤충들까지 알프스 산맥에 가로막혀 대부분 멸종한 탓에 나무가 곤충이 싫어하는 붉은 색(이 색은 노란색에 비해 진딧물이 1/6 밖에 접근하지 못하는 색이라고 합니다.)(에너지를 소비하면서까지) 굳이 만들 필요가 없게 된 것이고 이로 인해 노란색 단풍이 우세해진 것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나무가 붉은 색의 안토시아닌 색소를 만드는 것은 생태적 생존 전략의 일환인 것이다.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송이가 과거와 달리 가스를 연료로 하는 환경 변화로 인해 솔가리를 긁어가지 않아 본의 아니게 맞는 비옥한 환경 때문에 개체가 줄어들고 있는 것도 먹고 먹히는 식물과 곤충처럼 두루 얽힌 인연의 그물을 생각하게 한다. 한편 자작나무는 산불 등 자연재해를 입은 지역에 가장 먼저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여 토양을 회복시켜 주는 수종이다.

 

자작나무는 백색의 껍질이 옆으로 벗겨지는데 거제수나무도 회백색의 껍질이 벗겨지기 때문에 두 나무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자작나무 껍질에 짙게 배어 있는 베툴린(Betuline)이란 정유물질은 불에 잘 타면서 습기에 강하기 때문에 젖는 나무로도 불을 피울 수 있을 정도다. 이 때문에 등산길이나 숲 속에서 야영할 때 비에 젖은 나무 중 모닥불 땔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자작나무가 유일하다.

 

추위에 약한 단감나무를 키우려면 추위에 강한 고욤나무 종자로 기른 대목(臺木)에 단감나무 가지를 접붙이고 찬바람을 막아주는 곳에 심어야 한다. 이것도 인연(因緣)일까? 우리나라에서는 떫은 감은 임산물로, 단감은 농산물로 분류하고 있다. 감은 본래 임산물이었지만 단감은 단단한 상태의 열매를 수확하여 시장에 출하하기 때문에 물렁하게 익은 땡감의 홍시보다 유통 비용이 적게 들고 상품성이 오래 지속되어 소득원이 되기에 단감만 농산물로 분류하게 되었다.

 

나이테는 나무 그루터기에서 동심원 형태로 나타나는 성장 고리를 말한다. 열대 지역의 나무는 성장주기가 1년 단위가 아니기 때문에 나이테는 없고 다만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곳은 성장주기를 표현하는 성장테가 생기게 된다. 뿌리가 지탱해주긴 하지만 나무가 그렇게 가늘고 높게 자라면서 중력이나 강한 바람의 혹독한 압력을 수백년 견딜 수 있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나무의 구조조직과 리그닌, 셀룰로스 등 화학 성분에 있다. 목재를 철근 콘크리트 전주(電柱)에 비유하면 셀룰로스는 철근, 헤미셀룰로스는 골재, 산소가 포함된 유기화합물질인 리그닌은 시멘트에 해당한다. 고등식물은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리그닌을 합성하여 지상의 중력이나 바람에 대항하면서 다른 식물보다 훨씬 키가 크고 곧으며 단단하게 자랄 수 있게 되었다.

 

나무의 화학성분은 셀룰로스 50%, 헤미셀룰로스 25%, 리그닌 25% 등이다. 한지의 주원료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닥나무다. 닥나무의 내피섬유는 세포막이 두꺼워 잘 썩지 않고 질겨서 긴 인피섬유를 얻을 수 있다. 닥나무를 물에 찌고 껍질을 벗기면 백피를 얻고 이를 약 30 40cm 크기로 잘라 가마솥에 잿물을 넣고 쇠죽을 끓이듯 8시간 정도 삶는 증해(蒸解) 과정을 거치면 닥나무 펄프를 얻을 수 있다.

 

이때 사용되는 잿물은 대나무의 셀룰로스 성분만 남기고 종이를 누렇게 변색시키는 리그닌 성분과 기타 불순물 등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227, 229 페이지) 리그닌은 반응성이 높아 공기나 빛 등에 노출되면 쉽게 산화한다. 예부터 한지를 만드는 사람은 손이 희고 깨끗하다고 한다. 닥나무에 멜라닌 색소를 만드는 티로시나아제를 억제하는 카지놀 에프라는 미백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30만년 전에는 숯을 발명하여 불씨를 보존하고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는 청동기 시대를 거쳐 1만년전부터 숯 에너지로 철 생산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철기시대를 열 수 있었다. 철제 농기구 사용으로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었으며 이는 인구 증가와 교역 활성화를 촉진시켜 도시형 문명 구축에 이바지했다.(234 페이지)

 

산림에서 벌채한 원목을 땅에 그냥 두면 산불로 불쏘시개가 되거나 썩는다. 결과적으로 수목이나 토양에 저장되어 있던 탄소가 이산화탄소가 되어 대기 중으로 달아나고 만다. 이런 목재를 수집하여 숯으로 구워둔다면 목재 속의 탄소가 불활성화되어 고체 상태로 영구히 묶어둘 수 있다. 숯은 탄소 덩어리여서 영구히 썩지 않는다.(238 페이지) 숲은 천연 정수기, 공기청정기, 에어컨이 되어 우리가 사는 세상에 깨끗한 물과 공기를 선사한다. 또한 온실가스를 줄이며 거친 기후를 달래어 우리 삶의 환경을 쾌적하고 청정하게 만들어준다.(249 페이지)

 

저자는 인간은 숲의 종족이라고 전제한 뒤 기독교 창세기에 나오는 생명 나무는 대추야자나무를 신성하게 여긴 역사적 흔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268, 269 페이지) 과학의 진군을 멈출 수 없다면 최소한 방향만이라도 공존으로 수정해야 한다.(272 페이지) 인간은 숲의 종족이기에 숲을 건강하게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최고의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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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달팽이, ()는 개구리다. ()는 달팽이 위에서 싸우는 하찮은 싸움이란 의미의 와우각상쟁(蝸牛角相爭)이란 말에 나오는 글자다. 개구리를 뜻하는 와()란 글자를 보면 무교회주의자 김교신 님의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의미의 조와(弔蛙)’란 글이 떠오른다.

 

1942성서조선에 실린 이 글은 기도터인 반석(磐石) 아래에 살던 개구리들이 겨울 혹한에 얼어죽고 두, 세 마리가 살아 있으니 전멸을 면하였다는 심회(心懷)를 밝힌 글이다. 일제는 이 글에 나오는 혹한을 일제의 조선 지배정책으로 읽고 성서조선의 폐간을 단행했다.

 

()은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 나오는 송백(松柏)의 글자다. 얼마전까지 소나무와 잣나무로 풀었는데 소나무와 측백나무 또는 침엽수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세한도의 세한은 날이 추워져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는 의미의 논어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에서 유래한 말로 백을 잣나무가 아니라 측백나무로 보는 것은 공자는 평생 잣나무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연원한다.(공자의 주 활동 무대였던 산둥성에는 잣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은 송무백열(松茂栢悅)에 나오는 글자다.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말이다. 백이 측백나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어릴 적 햇빛이 적게 비치는 것을 좋아하는 음수(陰樹)로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빛을 가려주면 잘 자라는 잣나무에게 맞는 말이다.(, 공히 사전에는 측백나무, 잣나무로 풀이되어 있다.)

 

한 유명 나무 전문가는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의미의 송무백열을 A(잣나무)B(소나무)의 성공(成功) 즉 무성(茂盛)을 기뻐하는 것이니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것과 대비된다는 말로 풀이한다. 하지만 잣나무가 소나무의 번성을 기뻐하는 것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기에 반기는 것일 뿐이다.

 

나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관계에서 쫓겨난 임금 연산군의 폐비 신씨(愼氏)와 중종의 원비로 역시 쫓겨난 단경왕후 신씨(愼氏)의 관계를 떠올린다. 두 사람은 고모와 조카 사이다. 신씨 가문의 두 폐비가 친정에서 만난 것은 엄밀히 말하면 동병상련이란 말로 수식해야 하지만 송무백열이란 말로도 수식할 수 있다.

 

전자가 다하면 후자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중종의 비 신씨가 반정공신들에 의해 쫓겨난 것은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이 중종반정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수근은 여동생의 남편 연산군 편에 섰다.(중종의 비가 쫓겨난 것은 그녀가 후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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