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정신분석가의 책에서 읽은 '잠자는 사람을 깨우고 수면제 먹을 시간이 되었다고 말하는 의사' 이야기로 서두를 뗀 뒤 내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답시고 말을 들려주는 것이 그 의사처럼 이미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도움이 필요하기라도 하듯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는 글로 시작하는 장문(長文)의 편지를 써 보냈는데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되었는지 그 사람으로부터 에너지가 바닥 나 있으니 어떤 어떤 류()의 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는 답을 받고 나만 생각한 것 같아 죄송하다는 사과를 하고 난 만큼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 그것은 글이 고백하는 류인지 자랑하는 류인지 도움을 주려는 류인지 받으려는 류인지 모를 작품(!)이 된 것이기보다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추스르지 못했기 때문이나 더욱 문제인 것은 그가 지금껏 내 글을 읽어준 감사함이 새삼 감지되기에 미안함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이렇듯 분명함에도 나는 다시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홀로 씁쓸함을 되새기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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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Roy)는 왕이란 의미를 가진 말이다. 연천 전곡리 선사 유적지 내의 로이 카페(주먹도끼 빵을 만들어 파는 카페)의 로이와 같은 단어다. 피츠로이(Fitzroy)는 왕의 자식이란 뜻. 흔히 왕의 사생아들이 성()으로 썼다고 한다. Fitz는 케네디 가문의 아들 존이란 의미의 존 F 케네디의 그 F.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는 영국의 해군장교, 수위측량사, 기상학자로 박물학자인 찰스 다윈이 타고 해외로 나간 '비글호'의 선장이었다. 다윈이 동승한 비글호는 남미 대륙의 해안선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나선 해군 측량선이었다. 수위 측량사 피츠로이가 해안선 지도 제작을 위해 출범한 비글호의 선장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닌 듯 하다. 피츠로이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보고 불경스러운 책이라 말했다.(찰스 다윈 지음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84 페이지)

 

자연이 있는 그대로 고정불변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지질학에서 먼저 나왔다.(장철수, 이재성 지음 아주 명쾌한 지질학 수업’ 14 페이지) 지질학에서 변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이 나온 이후 생물은 안 그럴까? 란 의심을 품기 시작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이었다.

 

찰스 다윈은 비글호에서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론을 탐독했다. 물론 라이엘은 다윈의 진화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지구의 시간은 균일하며 변화가 없음을 강조했던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라이엘의 시간관을 전면적으로 비판한 사람이 스티븐 제이 굴드다. 급격한 변화에 의해 새로운 종이 갑자기 출현하면서 진화가 일어났다는 의미의 이 이론을 단속평형론이라 한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종의 형태는 짧은 시간에 폭발적으로 변화하지만(단속; 斷續) 그 후 대부분의 기간에는 거의 변화하지 않는 정적인 상태가 지속될 것(평형; 平衡)이라는 의미다.(리처드 요크, 브렛 클라크 지음 '과학과 휴머니즘' 26 페이지) 단속(斷續)이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한다는 의미다. 나는 굴드의 단속평형론을 지지한다.

 

나는 내가 굴드의 이론을 지지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 생각하지만 때로 단속적인 내 공부, 그리고 너무도 다른 여러 결의 마음 때문에 그런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령 나는 "얼굴 없던 분노여, 사자처럼 포효하던 분노여, 산맥을 넘어 질주하던 증오여, 세상에서 가장 큰 눈을 한 공포여, 강물도 목을 죄던 어둠이여, 허옇고 허옇다던 절망이여"(이진명 시인의 시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중에서)라는 시어를 너무도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말로 나를 수식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단속평형의 의미가 이렇게까지 쓰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것도 내 단속적인 마음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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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쓰는 조경학개론
이규목 외 지음, 김연금 엮음 / 한숲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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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造景)을 영어로 landscape architecture라 한다. 건축, 산업, 도시 분야는 협력이 긴요한 분야임에도 제도적으로나 공공사업 시행에 있어서 영역간 침범이 자주 일어난다. 조경의 기본 성격이 포괄적이고 범위가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조경은 자연을 다루고 건축은 인공물 즉 건물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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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은 외부 공간을 다루고 건축은 내부 공간과,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부분을 다룬다. 조경은 수평적이고 건축은 수직적이다.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대개 환경을 개발하고 이용하고 고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조경가들은 친환경적이다. 조경은 나무의 생리적 특징 등을 공부하는 유일한 분야다. 조경의 주요 설계 대상이 정원이라면 건축의 주요 설계 대상은 주택이다.

 

조경가들이 하는 일은 광범위하다. 이런 점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1. 외부 공간에 어느 정도 관심과 흥미를 느끼는까? 2. 실용적 도면을 그리는 데 흥미와 숙련도는 어느 정도 갖추었는가? 3. 미술과 조각 등에 대한 흥미도는 어느 정도인가? 4. 식물, 수학, 지리, 역사, 사회학 등에 대한 흥미는 어느 정도인가?

 

5. 쓰기와 말하기의 숙련도는 어느 정도인가? 6. 타인으로부터 얼마나 신뢰를 받는가? 7. 문제해결의 논리성을 갖추었는가? 8. 대중의 욕구에 얼마나 민감한가? 9. 예술적 욕망에 대한 민감도는 어느 정도인가? 10. 독립심을 갖추었는가? 11.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경으로 받아들이는 정도는 어느 만큼인가? 12.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조경도 예술적 측면이 있어서 양식(樣式: 예술적 풍조)이 있다. 조경 분야에서 양식이 성립된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다. 르네상스 양식이 전 유럽으로 퍼질 무렵 프랑스는 대담한 바로크 스타일을 취했다. 앙드레 르노트르란 조경가가 유명하다. 보르비콩트 성()의 정원을 만든 사람이다. 이 정원을 보고 루이 14세가 의뢰해 설계한 궁전이 베르사유 궁전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정원 양식은 풍경식이다. 프레데릭 옴스테드와 캘버트 보가 영국 리버풀 버큰헤드 공원을 참고해 설계한 공원이 센트럴 파크다. 중정(中庭)을 스페인 말로 파티오라 한다. 중정은 건축물로 싸인 정원을 말한다. 서양이 인본주의적이었다면 동양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했다. 서양에서는 풍경화라 하고 동양에서는 산수화라 한다.

 

서양화에는 감상자가 그림에 그려져 있지 않지만 동양에서는 그려져 있다. 외국에서는 정원 설계가가 정원을 설계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사대부들이 담당했다. 사대부들은 정치에도 관여했고 시서화에도 능했고 성리학에도 정통했고 정원도 만들었다. 중국 정원은 대비 효과가 상당히 크다. 음양 대비가 그것이다.

 

일본 정원의 대표적 특징은 가레산스이(고산수양식). 마른 산수란 의미다. 돌을 세워 폭포를 만든 뒤 모래로 물 흐름을 표현했다. 건축 분야에서 모더니즘이 나타난 것은 기술 발달의 결과다. 철근 콘크리트를 만든 사람이 조제프 모네다. 도축장이었던 곳을 공원으로 만든 것이 프랑스의 라빌레트 공원이다.

 

고분벽화를 통해 알려진 이집트의 정원은 현세가 아닌 내세로 가지고 갈 정원이다. 테베 시장을 역임한 센네페르가 무덤에 그린 정원은 포도밭 정원이다. 중앙에 포도밭이 있는 유일한 예이다. 기독교 정원 양식은 없다. 종교와 관련한 정원 양식은 이슬람 정원이 유일하다. 중세 정원인 수도원의 약초원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성경의 에덴동산을 재현한 것은 오히려 이슬람 정원이다.

 

비스타는 보이는 시점이 강조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양쪽을 폐쇄하는 공간 구성 기법이다. 미적 구성 원리에서 가장 지배적인 것은 통일성과 다양성이다. 공간에 사람이 들어가 무언가를 하면 환경이 된다. 반면 경관은 사람들이 어느 시점에서 보는 한 덩어리의 대상이다. 경관을 영어로 landscape라 한다. 지리학에서는 사람이 손댄 경관을 문화경관이라 부른다.

 

미적 가치와 생태적 가치는 상충할 수 있다. adscape란 광고 간판만 보이는 경관을 말한다. wallscape는 방음벽 사이를 다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답답한 경관을 말한다. flatscape는 무미건조한 경관을 말한다. 현재의 경관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에 오늘이라는 켜를 덧대는 일이다. 경관이란 과거부터 수많은 변화를 거치며 쌓아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계획은 글로 하는 것이고 설계는 도면으로 하는 것이다. 여러 필자 중 한 사람인 최정민은 논리와 직관은 이분(二分)의 대립적 사고 체계가 아니라 호혜적 사고 체계라고 말한다. 조경에도 생태학적 접근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생태학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에른스트 헤켈이다.

 

생태학(ecology)과 경제학(economy)은 집, 생활의 장을 의미하는 eco라는 공통의 단어를 어원으로 한다. 장혜정은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 피라미드 이론을 다른 각도로 본다. 즉 안정화 욕구, 사회적 욕구, 자기표현 욕구, 미적 욕구, 자기실현 욕구를 위계 서열로 볼 것이 아니라 자아를 겹겹이 둘러싼 피부층으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동진(東晉)의 곽박(郭璞)이란 사람이 쓴 장서(葬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죽은 이는 생기에 의지해야 한다. 땅속에 묻힌 사람은 정기를 받아야 하고 그 정기는 자손에게로 이어진다.” 이규목은 풍수란 죽은 사람의 묘자리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땅을 이해하고 읽고 해석하는 방법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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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스케이프(flatscape)란 평탄하고 무미건조한 지역을 말한다. 이 단어는 조경(造景)을 의미하기도 하고 한 도시에서 눈에 띄는 곳을 의미하기도 하는 랜드스케이프(landscape)란 단어와 대비되는 단어다. 지역에도 당연히 차별은 존재한다.

 

해설하는 사람은 그 무미건조한 곳도 흥미와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인식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 하리라. 어떻든 그런 목표하에 해설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자신감이 지나치게 넘치는 것으로 보일까?

 

아름다움은 풍경(대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시선(감상자)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둘 사이의 적절한 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면 이야기거리도 별로 없고 특별히 볼거리도 없는 곳을 새롭고 흥미로운 곳으로 인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일 수도 있겠다.

 

물론 그럼에도 어디서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료를 찾는 데 전력을 다하고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엮어 맛깔스러운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 어제 숲해설 수업 첫날 이야기를 하자 지인이 나에게 나무 잘 아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열심히 배울 생각입니다.“란 말로 운을 뗀 뒤 개별 나무나 꽃들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 알 필요는 없고 제한적이지만 주제에 부합하는 몇몇 나무와 꽃 이야기를 엮어 일관된 스토리로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무나 꽃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 해설의 주목적은 아니다. 만일 그것이 주목적이라면 인공 지능에게 해설을 맡기는 것이 훨씬 효울적이다.

 

숲해설 강사들이 만일 지금 이 글을 읽는다면 너무 자신 만만하고 편향된 생각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신경 쓰지 않는다. 설령 이론과 실기를 통과하지 못(해 망신을 당)하더라도 나는 내 생각을 고수할 계획이다.

 

어제 수업을 시작으로 212시간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많이 고민하고 많이 찾아다닐 생각이다. 장담도 하지 않고 막막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나무와 꽃을 잘 아는 것도 노력이 반영된 결과니 나도 노력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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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독일로 가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하기 시작해 후에 박사가 된 국문학과 출신의 시인 허수경 님이 타계한 지 2년이 되었다. 내일(69)은 시인의 생일이다. 그에 맞춰 유고 산문집 오늘의 착각이 나왔다. 시인의 시집 혼자 가는 먼집을 풍천소축(風天小畜)과 산뢰이(山雷頤) 괘로 분석한 서평을 쓴 적이 있는 나는 이화원(頤和園) 이야기를 생각하며 연결점을 느낀다.

 

이화원은 청나라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서태후가 지은 여름 별장이다. 땅을 파내 거대한 호수를 만들고 거기서 나온 흙으로는 산을 쌓았다. 분명 산과 무덤은 다르지만 나는 가산(假山)이란 말로부터 무덤을 떠올린다.

 

왕릉을 발굴하는 불운 혹은 행운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말을 한 시인은 마을이 있는 곳에는 무덤도 있다. 꽃이나 음식이나 술을 들고 무덤을 방문하는 일은 죽은 자와 인연이 있던 산 자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 하는 일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무덤을 방문하는 이는 도굴꾼 아니면 고고학자들”(‘모래 도시를 찾아서‘ 106 페이지)이란 말을 더했다. 좋은 시로 큰 울림을 전해준 시인을 오래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 정신의 고고학자라도 되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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