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 비오는 가운데 J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 프런트 직원으로부터 두 권이 반납되지 않은 상태라는 말을 들었다. 의아했지만 여덟 권만 빌려 집에 왔다. 오늘 이리 저리 아무리 찾아보았지만 한 권이 보이지 않았다. 한 권은 더 읽을 필요가 있어 놓아둔 상태였고.

 

지난 57(목요일) 서울 도서관 반납함에 책을 넣을 때 혹시 J 도서관 책도 넣은 것인가 생각해보았으나 그렇다면 내게 전화가 왔을 텐데 오지 않았으니 그 경우는 아닌 것으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가능성으로 Y 도서관에 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도 했다. Y 도서관의 대출 현황을 조회하니 410, 420, 428일 등 세 차례 두 권 이상씩의 책을 반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만일 J 도서관 책을 Y 도서관 반납함에 넣었다면 연락이 왔을 것인데 역시 연락은 오지 않았다.(J 도서관과 Y 도서관은 같은 군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이다.) Y 도서관이 5월부터 리모델링 공사중인데 내가 그 5월 이후 책 한 권을 그것도 J 도서관 것을 가지고 Y 도서관에 가서 반납했을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울 지하철 유실물 센터를 뒤질 생각으로 정보를 수집해놓기까지 했다.

 

J 도서관에 전화를 해 상황을 말하기도 했다. 간부급의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J 도서관 책을 Y 도서관 반납함에 넣었다 해도 도서관 리모델링 공사로 직원들이 출근을 하지 않아 통보 자체가 아예 유예되거나 출근한다 해도 전화할 여유가 없을 테니 한번 알아보아달라는 의미였다. 그는 반납일(20)까지 시간이 많으니 다시 잘 찾아보라는 말을 했다.

 

통화를 마치고 다시 찾아보았으나 책은 나오지 않았다. 10분쯤 후 그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찾아보라는 지시를 하자 프런트 직원이 금방 찾아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아까운 돈을 들여 새 책을 사 내야 하는 것인가 싶어 마음을 끓이며 찾았던 탓에 너무 힘들었으나 해피엔딩이어서 어떻게 된 것일까요?라는 말 외의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직원은 저도 모르죠, 라 말했다. 나는 제가 실수한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네요라 답했다. 오랜 세월 책 빌리느라 친해진 직원들에게 항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책 더미에서 지난 7일 반납한 서울 도서관의 부록 자료 하나가 누락된 채 있는 것이 보여 너나 없이 실수란 일상적이구나, 란 생각을 했다. 서울도서관 직원은 코로나로 인해 드라이브 스루 대출을 하느라 도서관 정문 앞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부록 자료가 있는지 여부를 체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명백한 내 잘못이다. 덧붙인다면 J 도서관에 9권의 책을 반납하며 어떤 책들을 반납했는지 기억하지 못한 것 역시 내 잘못이다.

 

직원이 미처 반납 처리하지 못했어도 내가 기억했다면 바로 알아 차렸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너무 지나친가? 서울도서관처럼 책 반납 영수증을 발행해준다면 이런 소동은 빚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바로 반납 처리 권수를 확인하고 틀릴 경우 대조해보는 최소의 노고를 치러야 유효한 말이다.

 

지난 55일에는 답사 마치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내 책을 들고 다니며 책들을 읽다가 오래 고대하던 '그 책'을 발견하고 한참을 읽었다. 그 감동에 취해서인지 내 책을 옆 책 위에 두었던 것을 잊고 서점을 나서려다가 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다녔던 길을 되짚어 10분 이상 헤맨 끝에 책을 발견하는 해프닝을 빚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책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를 정도로 ''를 잊고 몇십 분을 몰입 독서했다는 점에서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다. 책으로 인해 행복하고 책으로 인해 헛웃음 짓는 것도 추억 거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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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아시모프의 우주의 비밀은 재미 있다. 책 자체가 재미 있을뿐 아니라 내가 아시모프의 책처럼 지질 이야기를 재미있게 써야지, 라고 생각하며 참고 서적으로 아시모프의 책을 우주의 비빌이라 기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지질의 영향으로 비밀을 비빌이라 기록한 나!)

 

이 책에서 나는 맨 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25백여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제논의 역설(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 잡지 못한다.), 아킬레스는 111/9m를 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지나면 거북이를 따라잡는다는 말로 논파한 제임스 그레고리란 수학자에 대해 알았다.

 

맨 눈으로 확인 가능한 별 이야기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네 자손이 이와 같으니라란 창세기(155)에 대한 논파 차원에서 나온 말이다. 아시모프는 맨 눈으로 확인 가능한 별의 수는 6000개 정도가 나오지만 한 순간에 지평선 위에 떠 있는 별의 수는 그 반이며, 또한 지평선 근처에 있는 별들은 아주 맑은 밤이라도 대기의 영향으로 빛이 퇴색하기 때문에 아브람이 셀 수 있었던 별의 총수는 기껏해야 2500개를 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제임스 그레고리는 거북이가 아킬레스보다 앞서 있는 거리들의 합을 111/9m라 계산했다.(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10배 빨리 달리기에 100m 경주를 하는데 거북이가 10m 앞서서 출발하게 했다.)

 

물론 나는 아킬레스가 111/9m를 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지나면 거북이를 따라 잡는다는 말보다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있는 곳에 와서 멈추었다가 다시 시동을 걸어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탄력을 유지해) 달리기 때문에 거북이를 따라잡는다는 말이 더 실제적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꺼낸 것은 오늘 동료 지질 해설사에게 방문객 한 사람이 화성(火星)이 언제 생겼는지 물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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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의 영화 감독겸 소설가 닐 조던(Neil Jordan; 1950 - )‘The Crying Game‘은 생각거리를 전해주는 작품이다. 강을 건너야 했지만 헤엄을 치지 못하는 전갈이 수영 명수인 개구리에게 자신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가 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개구리가 전갈이 자신을 쏠 것을 우려하자 전갈은 그러면 둘 다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니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한다.

 

개구리는 숙고 끝에 전갈을 등에 태우고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강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사건이 일어난다. 전갈이 약속을 어기고 개구리의 옆구리를 쏜 것이다. 개구리는 분노에 차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왜 나를 찔러 둘 다 죽게 했느냐?“ 이에 전갈은 어쩔 수 없었어. 내 본능이야란 말을 했다.

 

이 말은 결국 전갈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이를 철학은 실로 피할 수 없는 것이란 말로 설명하는 철학자가 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철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란 말은 철학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란 말이다.)

 

사실 다르게 생각한다기보다 다른 면을 생각한다고 해야 정확하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말이 성립하려면 철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든 나는 닐 조던의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로부터 특이점이란 말을 떠올렸다. 자연과학 용어인 특이점은 인문학에 원용(援用)되곤 한다.

 

무언가를 다른 것과 달리 특이하게 포착하게 해주는 것,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하게 해주는 것, 어떤 표정을 평소의 얼굴과 확연히 구별하게 해주는 것을 특이하다고 한다.(이진경 지음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 220 페이지)

 

닐 조던의 이야기에 나오는 특이점은 둘이다. 개구리와 전갈이다. 그런데 개구리 자체만으로나 전갈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의미와 가치가 결정되는 것은 어떤 이웃을 만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의 저자는 칸트적 어법의 윤리학적 명제처럼 좋은 특이성을 형성하는 특이점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라.”는 말을 한다.(249 페이지)

 

전갈이 독침을 쏜 것은 철학함에 비유된다. 철학함은 곧 비판정신과 전복적 사유가 아닐지? 최진석은 기존의 익숙하던 배치를 뒤엎고 다른 방식으로 뒤바꾸었을 때 새로움보다는 이질성이나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쁜 인문학일까? 역으로 언제나 편안하고 즐거움만 선사하는 인문학, 그래서 기존의 배치를 변함없이 유지하도록 정당화하는 담론을 제공하는 인문학은 좋은 인문학일까?”란 물음을 던지며 인문학이 지금껏 불온하기는커녕 통념의 지지대 역할에나 겨우 안주해온 점을 비판한다.(’불온한 인문학‘ 83, 84 페이지)

 

여기서의 불온하다는 말의 의미는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이 인문학의 본령을 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에 이 정도에서 그치겠다. 다만 관건은 좋은 특이점이란 말이 있으니 나쁜 특이점이란 말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이는 굳이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진리가 아닌가.

 

그럼 비판과 저항을 주제로 말할 경우 좋은 특이점이 되는 것은 무엇이고 나쁜 특이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비판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선 나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만큼 잘하고 있으며, 내가 가하는 비판이 나에게 적용될 여지는 없는가, 란 의문이 들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나는 인성적으로 문제를 가진 사람이 강의를 제의했기에 나와 뜻을 같이하는 친구에게 그런 사람의 일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듯 말했다. 자화자찬 같지만 나는 아직까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다. 물론 나에게 전해지는 이런 말이 칭찬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것은 나 홀로 이룬 성과가 아니라고 믿는다.

 

다시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의 저자에 의하면 어떤 결과도 언제나 나와 나 아닌 다른 특이점들이 함께 만들어내고 나는 언제나 원인인 동시에 결과.(250 페이지) 공감하는 바이다. 덧붙일 것은 그럼에도 나의 주체적 노력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나는 참된 인식은 자기 부정의 연속으로 인식이란 자신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표상을 더 참된 표상으로 끊임없이 변환하는 과정”(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209 페이지)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자신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표상을 더 참된 표상으로 끊임없이 변환하는 과정을 베케트 식으로 말하면 다시 더 낫게 실패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번에 참된 인식에 실패하더라도 다음 실패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낫게 하라는 의미로 들린다. ’인간의 얼굴의 저자는 자기 부정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역시 공감한다.

 

인간의 얼굴의 저자는 대중은 일정한 나이에 달하면 더 이상 정신의 발전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자연과학 대 인문과학을 73으로 해서 50대가 될 때까지 3천권 정도를 집요하게 읽음으로써 정보가 서로 링크되게 해 양이 질로 바뀌는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글(박문호 지음 , 생각의 출현‘ 481 페이지)과 비교하고 싶다.

 

일정한 나이라는 말과 ‘50대가 될 때까지란 말을 비교하고 싶은 것이다. 일정한 나이에 달하면 더 이상 정신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부하지 않음으로써 질문 거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그렇기에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나쁜 순환의 궤도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의 저자는 물음의 특이성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답들을 방향짓는다는 말을 한다.(244 페이지) 물음의 특이성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말은 책쓰기에도 해당한다. 마르크스와 스라파 등의 경제학자와 함께 이윤율 등의 개념을 언급하며 복잡한 경제 수학 풀이를 시연하는 국문학자 김인환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지식의 영역에서는 어디까지나 책의 안내를 받으며 기본 개념을 습득하고 문제의 구조를 이해하여 사태를 실험하고 측정함으로써 새로운 지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지식의 영역에서 우리가 할 일은 책을 읽고 새 책을 쓰는 것이다.”(‘글쓰기의 방법’ 117 페이지)

 

()은 아무리 잘해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는 데 그치게 된다. 질문 하고 나 스스로 설정한 의문을 따라 궁리해야 내 이야기의 길을 만들 수 있다. 내가 이 늦은 나이에 수불석권(手不釋卷)하는 것은 앎의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를 돌아보는 것이 일상적일 만큼 왠만한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이()보다 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를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대의명분을 주장하기보다 불의한 일을 마주치면 내 몫을 포기한다고 해야 더 맞을 것이다. 내가 모임의 일원 가운데 이기적인 사람을 두고 비판하자 전기한 친구는 자신도 그 사람이 이기주의적임을 종종 느끼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이타적이거나 공동체적인 인간도 아니라는 말을 했다.

 

이보다 의를 생각하되 물러서는 내 습성은 어쩌면 겨울의 살얼음을 건너듯 사방이 두려운 듯 조심하며(; ), 신중하게 사방을 경계해 경거망동하지 말라(; )는 의미의 여유당을 당호로 삼은 다산 선생처럼 조심하고 두려워 하는 마음이 많다.

 

이런 글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위선적이지 않은 인간은 없다.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르기에 인간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위선됨을 끝까지 응시하려고 한다. 위선적이지 않은 척하는 게 아니라 왜 자신은 위선적인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물고 늘어진다.”(오길영 지음 아름다운 단단함’ 28 페이지)

 

내게는 그렇게 무엇인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공부다. 그것은 나를 묻는 것으로 시작해 결국 내 주위의 세계를 묻는 것으로 이어진다. 전기했듯 어떤 결과도 언제나 나와 나 아닌 다른 특이점들이 함께 만들어내고 나는 언제나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기 때문이다.

 

글을 성의 없이 쓰는 주위 사람을 보고 쓴 글로 인해 알라딘에서 2만원의 적립금을 받았다. 어떤 결과도 언제나 나와 나 아닌 다른 특이점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현실을 증거하는 사건일 수 있다.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분께 어쩔 수 없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 글을 읽고 글의 무게 앞에서 다시금 할 말이 저절로 줄어든다는 피드백을 해준 전기한 친구에게도 그렇다. 무게감 있는 글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나를 두고 쓴 글은 완성형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전기한 아름다운 단단함의 글을 응용해 말하자면 글과 글을 쓴 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갭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좋은 특이점이 되어준 친구는 물론 의도는 바람직하지 않았지만 결국 좋은 특이점이 되어준 분에게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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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펭귄은 북극곰과 함께 살 수 없을까? - 북극과 남극의 모든 것 내인생의책 자연을 꿈꾸는 과학 1
일레인 스콧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내인생의책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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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가장 춥고 가장 높고 가장 바람이 많이 부는 대륙이 남극 대륙이다. 남극은 대륙이지만 북극은 여러 대륙의 해안에 둘러싸인 얼어붙은 바다다.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와, 히말라야가 있는 아시아 대륙의 평균 높이가 884미터인 데 비해 남극 대륙은 평균 2500미터다.

 

남극 대륙은 바다에 둘러싸여 고립된 거대한 얼음 땅이다. 극지방에는 동쪽도 서쪽도 없이 남극에서는 항상 북쪽을 보게 되고 북극에서는 항상 남쪽을 보게 된다. 극지방에서는 겨울과 여름 밖에 없다. 적도에서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지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여름 낮 시간이 길어진다.

 

북극(북위 66.5)에 이르면 한밤에 해가 뜨는 땅이 나타난다. 하지에는 아예 해가 지지 않는다. 북극점에서는 6개월 내내 해가 지지 않는다. 남극은 해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적도에서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낮의 길이는 점점 짧아지고 남위 66.5도인 남극권에 이르면 해는 언제까지나 지평선 아래에 가라앉아 있고 대륙은 어둠에 잠겨 있다.

 

1600년 윌리엄 길버트란 과학자가 지구 자체가 거대한 자석이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지구는 막대자석이라기보다 전자석에 가깝다. 지구 중심에는 철과 니켈로 이루어진 단단한 내핵이 있다. 내핵의 바깥쪽인 외핵은 너무 뜨거워 액체 상태로 있다. 여기서 지구의 자성(磁性)이 생겨난다.

 

극지방의 과학자들은 태양풍과 지구 대기의 관계, 지구와 태양의 관계를 알아내기 위해 오로라를 연구한다. 오로라는 태양풍과 함께 날아온 대전입자(플라스마)가 지구 대기의 공기 분자와 충돌하면서 다채로운 빛을 발생시키는 현상이다.

 

오늘날 남극과 북극에는 탐험가보다 과학자들이 더 많이 있다. 북극 지방에는 이누이트와 바이킹이 정착해 살았지만 남극대륙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인류가 세계 곳곳으로 이주하기 전 이미 남극 대륙은 꽁꽁 얼어 있었고 변덕스러운 바다에 고립되었다. 동물들은 달랐다.

 

펭귄은 남반구에만 산다. 현재 펭귄이 서식하는 지역 가운데 가장 북쪽이 갈라파고스 제도(諸島). 갈라파고스 제도는 적도에 가깝고 남극에서 832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남아프리카에도 펭귄이 산다. 펭귄들은 자신들을 잡아먹던 공룡, 악어 등이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하자 날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펭귄은 작은 물고기와 크릴(작은 새우)처럼 생긴 생물들을 잡아먹고 범고래와 바다표범 같은 새로운 적들을 경계하는 법들을 배웠다. 유럽의 탐험가들은 큰바다오리를 펭귄이라 블렀는데 그것은 핀 윙(핀처럼 작은 날개)이라는 뜻이었다. 훗날 탐험가들은 남극대륙에서 그와 비슷하게 생긴 날개 없는 새를 펭귄이라 불렀다.

 

북극은 남극보다 기후가 온화해서 많은 동물들이 산다. 북극곰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는 바다표범이다. 북극곰은 동면하지 않는다. 북극곰은 먹이를 구하기 힘들어지면 걸어다니거나 사냥할 때조차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 심장 박동이 느려진다. 과학자들은 북극곰의 이런 상태를 걸어다니는 동면이라 한다.

 

만약 북극곰이 남극대륙으로 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남극의 추위에서 꿋꿋이 살아남을 것이다. 잡아먹을 펭귄도 많다. 하지만 북극곰 암컷이 새끼를 키우기에 적당한 굴을 팔 곳이 없다. 남극대륙의 추위는 북극의 겨울보다 훨씬 혹독하여 새끼 곰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기가 힘들 것이다.

 

물론 북극곰을 남극대륙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새로운 종의 동물을 남극에 데려오지 못하게 하는 남극 조약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북극점과 남극점은 지구상에서 가장 명확한 장소다. 북극점은 북위 90, 남극점은 남위 90도에 위치한다. 두 극점은 광대한 얼음 벌판에 들러싸여 있다.

 

여름철 극지방은 해가 지지 않는다. 해는 하늘에서 수평 궤도를 그리며 돈다. 누구도 북극점에 계속 서 있을 수 없다. 북극점은 사실 북극해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 이 얼어붙은 바다 위에 서 있을 수는 있지만 발밑 얼음 덩어리가 계속 움직이기 때문이다.

 

북극점은 얼음이 떠다니는 바다에 있기 때문에 표지가 없지만 남극점은 표지가 있다. 하지만 남극점의 표지는 해마다 바꾸어야 한다. 남극점 표지는 하루에 2.8센티미터 움직이는 빙하에 못 박혀 있다. 해마다 남극점의 새 위치를 표시하는 행사가 열린다.

 

북극해에는 높이 솟아 있는 데번이라는 섬이 있다. NASA가 호턴 화성 계획이라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 섬에는 2300만년 전에 생긴 운석 구덩이가 있다. 과학자들은 데번 섬의 흙과 암석들이 화성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즉 화성이 어떻게 현재 상태가 되었는지 알기 위해 데번 섬의 암석 토양을 연구하는 것이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작가인 아서 클라크의 이름을 딴 아서 클라크 화성 온실도 있다.

 

북극에는 40만년 동안 얼음 밑에 고스란히 묻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보스톡 호가 있다. 북극의 만년설 위에 생긴 물웅덩이는 열을 흡수한다. 얼음은 열을 반사하지만 물은 열을 흡수한다.

 

이렇게 해서 만년설은 더욱 빠르게 녹는다. 물은 만년설을 갈라지게 한다. 결국 얼음장 전체가 떨어져 나가며 빙하분리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으로 지구 대기는 더욱 많은 습기를 품게 되고 지구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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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와 히데키(湯川秀樹)194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다. 어제 한 개구리 책에서 모호한 문장을 보고 그를 생각했다.(‘애매; 曖昧는 일본식 한자고 모호; 模糊는 우리 한자다. 그래서 모호란 말을 썼다.

 

모호란 말을 쓰는 데는 하나의 덕이 더 있다.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Mohorovicic discontinuity)이란 용어를 떠올릴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이렇게라도 지구과학 공부에 도움이 되는 말을 끌어다쓰는...)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이란 지각과 맨틀 사이의 경계면을 말하는 것으로 크로아티아 태생의 유고슬라비아의 지구물리학자 모호로비치치에 의해 발견되었다.

 

원더풀 사이언스의 저자 나탈리 앤지어는 맨틀이란 외투를 의미하는 독일어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말을 했다. 맨틀이란 지각 바로 아래에 있으면서 (외투처럼) 외핵을 둘러싸고 있는 두꺼운 암석층이다.

 

유가와는 논문의 영문을 몇 번이나 수정했다. 그는 군더더기를 싫어해 문장을 계속 간결해서 수정하는 것을 넘어 문장에 적합한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해 단어 선택에 극도로 신중을 기했다. 이런 태도는 영어 논문은 물론 일본어 보고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문장을 쓰면 완성된 문장은 어느 한 단어도 삭제할 수 없고 교체할 수 없게 된다. “시퍼렇게 간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문장이 완성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는 훗날 명문장가로 알려졌다. 유가와는 이론은 세 가지 요건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1) ’관계 있는 모든 현상을 설명해야 한다‘, 2) ’아름다워야 한다‘(단순명쾌해서 아름다워야 한다.) 3) ’증명할 수 있는 실험을 논문에서 제시해야 한다등이다.(고토 히데키 지음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204, 205 페이지)

 

유가와 히데키에 대한 글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다음의 말이다. ”주희(朱熹)의 세계는 음표 하나만 빠져도 전체가 무너질 듯한 조화로운 교향악의 세계이다. 그것은 또한 세계의 영원한 질서와 시간 속에서의 운동을 화해시키고 있다.“(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124 페이지)

 

전기한 모호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수원청개구리는 일본과 한국의 청개구리가 지리적으로 격리되기 훨씬 전인 250만년전에 청개구리로부터 갈라져나온 것으로 추정되었다.“, ”일부 청개구리 집단이 원래 육지였던 황해 어딘가에 살다가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오랜 기간 섬에 고립되어 수원청개구리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훨씬 전이라고만 했을 뿐 구체적 숫자를 말하지 않은 점, 지리적으로란 말은 군더더기란 점(지리적으로 격리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청개구리로부터 수원청개구리가 갈라져 나온 뒤 일본과 한국의 청개구리가 격리되었다는 뜻인지? 그렇다면 그렇게 쓰면 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훨씬 전이란 수사(修辭)를 쓰려고 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어떻든 수원청개구리에 대해 알게 되어 다행이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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