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혐시대의 책읽기
김욱 지음 / 개마고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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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시대는 책혐(冊嫌)시대라는 김욱의 정의(定義)에 공감한다. 혐오 대상으로서의 책은 즉각적인 실용성이 떨어지는 책이고 이 문제 극복을 위해 인위적으로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처방이다. 하기야 책혐 사태를 극복할 문제로 보지 않는 사람이 책에 대한 혐오감을 표하는 것이 아닌 이상 책혐 시대에 대한 책을 쓸 이유는 없으리라.

 

저자는 좋은 책이란 세상의 진실을 이해하도록 도와 독자를 창의적으로 각성시켜주는 책이라 말한다. 책을 읽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을 바로 안 뒤 조금이나마 나은 세상이 되도록 애쓰지 않으면 책 읽기는 무용한 중노동에 지나지 않는다. 책읽기를 통해 생각이 발전하고 창의적인 단계로 접어드는 것을 생각의 진화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는 누구나 참여해야 한다.

 

책은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 책과 화해하기, 2장 책과 마주하기, 3장 책과 사귀기, 4장 책과 헤어지기 등이다. 책읽기는 가장 강력한 쾌락이라는 것이 저자의 전제다. 그럼에도 책읽기에 나서지 않는 사람은 맛을 몰라서일 것이다. 베스트셀러 추종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책읽기 능력을 끊임없이 키워가는 것이다. 또한 책읽기를 통해 체계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로부터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책읽기 능력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키워가야 한다는 불문율 같은 깨달음이다. 저자는 애초에 우리가 낭비 없는 성공을 꿈꿀 수 없다는 전제하에 책읽기에서 상당한 낭비를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주 작은 영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실수를 한 사람을 전문가로 정의한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말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책읽기 능력을 체계적으로 키워나가는 것은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세상을 보고 답을 얻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을 의미한다. 책읽기를 통해 정보를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긴 호흡의 논리적 사고능력을 키워야 한다. 저자는 우리가 책을 읽지 못하는 또는 읽지 않으려는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감수해야 하는 뇌의 피로감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책읽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습관이 되지 않아서다.

 

한국인의 평균 독서율은 OECD 평균에 가깝지만 연령대별로 상당히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16에서 24세의 독서율은 1, 25에서 34세는 5, 35에서 44세는 8, 45에서 54세는 16, 55세에서 65세는 최하위다. 저자는 말한다.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언어능력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능력이 뒤떨어진 사람들이 다른 영역에서 고도의 경쟁력을 가지리라 보기는 어렵다고.

 

우리에게는 자기 생각의 한계를 깨는 책이 필요하다. “나를 더 강하게 키우는 것은 내 틀에 박힌 생각을 지루하게 반복하는 책이 아니라 내 생각에 감히 도전하는 책들이다.”(63 페이지) 저자는 전문가들이 자기 분야 외의 책을 읽지 않는 것을 책혐의 하나로 본다. 저자는 인문, 사회과학자들이 자연과학에 대해 무지한 것보다 자연과학자들이 인문, 사회과학에 대해 무지한 것이 사회적으로 더 심각한 문제라 생각한다.(70 페이지) 후자의 경우 사회에 이용당하는 바보가 되거나 원치 않는 죄를 지을 수 있다.

 

전공과 무관한 책읽기, 다양한 책읽기, 인간(세상)에 대한 책읽기 없이 서로 다른 사물을 결부시키는 능력은 길러지지 않는다.”(73 페이지) 인문학은 과거를 균열내고 어떻게든 인간 중심의 미래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저자는 중세의 지배 엘리트나 왕들이 감당했던 지적 수고와 책임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책읽기를 통해서라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저자도 말했듯 고통 없는 재미만을 통해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108 페이지)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거나 난해한 철학 개념을 이해했을 때 느끼는 지적 희열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책읽기를 통해 재미만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재미와 함께 하는 고통이 키워드다. 상당한 습관이 되면 적응이 용이하지만 읽기 자체가 고통이고 읽기를 통해 얻은 깨달음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모순과 불합리의 장()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명구(名句)만을 탐하는 것도 문제다. 오직 관건은 책 전체와 조응하는 맥락적 연관성 내에서 드러나는 적확한 문제의식이다. 저자의 정치(精緻)한 논리는 나는 왜 책을 읽는가, 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한다. 내가 열심히 책을 읽는 이유는 내 고유의 생각의 몫을 늘리기 위해서다. 선인(先人)들이 이룩한 방대한 지적 보고(寶庫)를 섭렵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내 생각을 펼칠 수는 없다. 물론 그 생각들 위에 내 것을 얹어야 한다.

 

책읽기는 지적인 건축과정이다. 붕괴되지 않도록 해야 함은 물론 그럴 듯 해야 한다. 책읽기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하나의 책에서 꼬리를 물고 다른 책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한비자가 신흥봉건세력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그로서 법치(法治)를 주장했다면 공자는 한비자 이전 시대의 노예주 귀족들을 대변하는 상대적 진보 이데올로그로서 예치(禮治)를 주장했다는 사실(139 페이지)이다.

 

이런 예를 종교개혁 시기의 대립에서도 볼 수 있다, 종교개혁 세력은 신흥 상공업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했고 구교 세력은 농업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는 말이다. 저자는 역사책이 모든 것의 배경이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역사를 알기 전에 역사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149 페이지)

 

우리가 역사책을 읽는다면 우선 그 진보의 의미가 무엇이든 역사는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진보한다는 관점으로 쓰였는가, 아니면 진보란 인식할 수 없고 역사란 각 시대의 독자적인 의의와 완결성을 사실로써 이해하는 것이라는 관점에 의해 쓰인 것인가를 먼저 헤아려야 한다.(150 페이지) 조지형의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랑케 & 를 참고하면 좋다.

 

이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의 문제의식과 비교를 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쿤의 과학관(科學觀)은 근본적으로 과학적 지식의 변천 및 발전이 혁명적이라는 데 요지를 둠으로써 과학의 진보가 축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종래의 귀납주의적 과학관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김명자 번역 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역자 해설 참고)

 

상설하지 않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랑케와 카의 대립은 바슐라르(불연속)와 베르그송(지속)의 대립(이정우 지음 담론의 공간참고)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저자는 우리가 역사책을 읽는 것은 그저 역사 속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며 내일을 위해 역사 속 당대의 문제를 이해하고 끊임없이 묻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154 페이지)

 

저자는 철학책, 사회과학 분야의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하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저자는 자연과학책 읽기는 겉핥기라도 좋다고 말한다. 이 분야에서 나온 이야기 가운데 쿤 이야기도 있다. 이는 내가 앞서 언급한 바대로다. 저자는 과학자의 세계에서 혁명 이전에는 오리였던 것이 이후에는 토끼가 된다.“는 쿤의 말을 인용하며 이를 칸트의 물자체(物自體)에 비유한다. 칸트는 물자체는 알 수 없고 오성(悟性) 형식을 통해 사물을 인식할 뿐이라는 말을 했다.(181 페이지)

 

저자는 문학책 읽기는 허구로 진실을 이해하는 읽기로, 예술책 읽기는 책읽기 자체가 시비로 설명한다. ”예술을 접하고 심미적 즐거움을 느끼고, 다시 책읽기를 통해 심미적 안목을 깊이 있게 만들어 나가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보이게 되고, 귀에 들리지 않는 많은 것들이 들리게 될 것이다.“(208 페이지) 종교, 심리학책 읽기는 인간의 무/ 의식적 현상으로 규정되었다.

 

4장은 책과 헤어지기다. 저자는 책의 신비화를 저자의 전문성에 대한 맹신을 포함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나타나는 무비판적인 활자 맹신 현상으로 정의한다.(223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어떤 분야(심지어 자연과학 분야까지)도 관련 전문가 모두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필요한 것은 크로스 체킹이다.

 

저자는 자신의 기존 관념과 일치하지 않는 도끼 같은 책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저자든 독자든 자신의 생각을 지키려면 최소한 자신의 수준에서라도 다른 의견에 반론할 수 있어야 하고 반론할 수 없으면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잘 모르는 경우에는 당연히 겸손해야 한다.(225 페이지) 저자가 책을 쓴 배경, 상황, 의도를 집중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글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고종석의 표현)는 말을 염두에 두고 아름다운 책을 조심하자는 것이 저자의 처방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다. 자기식의 비판을 하는 일이고 글의 허점이나 모순을 발견하는 일이고 저자의 주장과 싸우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을 정립해가는 일이다.(233 페이지) 저자는 읽기를 분량의 문제로 치환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중요한 말을 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 속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239 페이지)

 

각자의 책이란 생각할 거리, 살면서 마주치는 투쟁 대상이라는 말로 들린다. 동의한다. 덧붙일 말은 세상이란 책같은 것 말고 좁은 의미의 책이야말로 가장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장치라는 점이다. 저자는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책들에 관한 담론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전체를 숙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숙지란 관계들을 잘 알고 있느냐는 것이지 어떤 고립된 요소를 잘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그것은 그 전체의 대부분을 모른다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는 어떤 책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시공을 초월해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말이다.(242 페이지)

 

독자가 하나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그 구체적 내용을 얼마나 많이 기억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총체적 맥락을 얼마나 많이 이해하느냐의 문제라는 의미다. 이는 외국어 독해 시험에서 모르는 단어가 군데군데 있더라도 제시된 전체 글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모르는 단어들의 뜻을 유추할 수 있는 원리와 비슷하다.(243 페이지)

 

필요한 것은 다양한 책을 꾸준히 읽어 자신의 머리 속 도서관 책들간의 맥락을 이해하고 최대한 활성화시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246 페이지) 저자는 한나 모이어와 마르틴 게스만의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를 예로 들며 우리가 정작 신경 쓸 일은 두뇌의 저장용량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저장하는 과정에서 획득하는 미래를 향한 대응능력(창의력, 판단능력)이라는 답을 제시한다.(249 페이지)

 

답이라는 말에 어폐가 있겠지만 이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말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어떻든 베르그송이 언급한 기억에 대해 말할 상황이다. 베르그송에게 기억이란 단순한 암기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삶이 전개되는 모든 시간 속에서 지나온 과거 전체를 고스란히 보존했다가 현재의 순간으로 연장하여 적절하게 활용하는 정신의 유동성을 말한다.(김재희 지음 물질과 기억 반복과 차이의 운동성‘ 103 페이지)

 

저자는 본심(?)을 말한다. ”지식이 전혀 없는 지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252 페이지) 우리는 지혜로워지기 위해 지식을 추구해야 하고 미래를 위한 과거를 위해 책읽기를 해야 한다. 책 읽기의 완성이 글쓰기라 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히 중요하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내 수준 또는 이해력을 확인 및 점검하고 사유를 형성하게 하는 글쓰기는 말이 따를 수 없는 체계성과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글은 일상의 말(녹음해 재생하지 않는 한)과 달리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여지가 없다. ”글쓰기는 잔인할 정도로 자신의 한계를,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비춰준다.“(266 페이지) 저자는 생각을 완벽하게 정리한 뒤 글쓰기를 하려 하지 말고 일단 글쓰기를 해가면서 부족한 생각을 완성시키는 방법을 권한다.(267 페이지)

 

생각의 부족이나 나태함으로 아무 고민 없이 택하는 단어들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268 페이지)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현실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고전(古典)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책들이 역사의 한계를 어떻게 돌파했는지 영감을 얻기 위해서다.(275 페이지)

 

새겨 읽어야 한다. 저자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투쟁하며 얻은 답을 참고로 해야 한다. 스스로의 문제가 관건이다. 저자가 말하는 책으로부터의 해방이란 지식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지배하는 지혜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279 페이지) 내 이야기를 하고 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책을 통독하며 우리에게 지혜, 요령, 독립적 해결 능력 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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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4-19 0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내용이 너무 정리가 잘 되어서 이 책을 보지 않아도 충분한 도움이 될것 같아요!ㅎ

벤투의스케치북 2020-04-19 06:25   좋아요 0 | URL
네.. 다행입니다...
 
- 보기, 읽기, 담기
전영우 지음 / 현암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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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들숨에 포함된 산소는 나무의 들숨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나무가 광합성으로 몸체를 불리는 것은 나의 날숨에 포함된 이산화탄소를 나뭇잎의 숨구멍을 통해서 들숨으로 흡수했기 때문”.. 산림생물학 박사 전영우의 이 말은 기억할 만하다. 이는 삼라만상이 그물망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그의 숲 보기, 읽기, 담기는 즐거움과 깨달음을 포함 오감을 통해 4철 숲에서 체험한 개인의 경험이 담긴 책이다. 목차도 춘, , , 동으로 이루어졌다.(각 파트가 다섯 개의 챕터로 구성된 것도 특이하다.) 우리 숲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과 한국전쟁 후 혼란기를 거치며 황폐해진 숲을 푸르게 되돌린 것이다. 이는 세계사적으로 드문 일이다.

 

숲은 수풀의 줄임말이지만 나무와 풀은 물론 토양, 동식물, 바람, 미생물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숲은 천연림 vs 인공림, 단순림 vs 혼효림, 동령(同齡)vs 이령(異齡)림 등으로 나뉜다. 열대림, 난대림, 온대림, 한대림 등으로도 나뉜다. 대부분의 우리 숲은 온대림이다. 온대림 중 가장 흔한 것이 소나무 숲이기에 소나무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제목에 나오는 숲 보기와 읽기는 과학적 지식에 근거를 두지만 담기는 개인의 감성에 바탕을 둔다. 사람이 감별할 수 있는 냄새의 종류는 40만 가지이지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너무 부족하다. 층층나무는 봄 숲에서 가장 늦게 잎을 피우는 나무다. 모든 나무, 풀이 한꺼번에 꽃을 피우고 싹을 틔운다면 봄 숲의 정경은 오히려 밋밋할지도 모른다.(31 페이지)

 

넓은 잎이 바늘잎보다 더 빠르고 더 쉽게 흙으로 돌아간다. 넓은 잎나무의 잎은 보통 휘발성 물질을 함유하지 않기 때문에 낙엽 속에 여러 종류의 미생물이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기 때문이다.(42 페이지) 책에는 슴슴하다(싱겁다), 아스스하다(차거나 싫은 것이 몸에 닿았을 때 약간 소름이 돋는 느낌이 있다) 등의 단어들이 나온다.

 

숲의 공기와 도시의 공기가 다른 점은 테르펜(향기로운 휘발성 기름)과 피톤치드의 존재 유무로 알 수 있다.(51, 52 페이지) 음이온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런 존재들로 혜택을 베푸는 숲은 숲과 내 자신이 둘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준다.(53 페이지) 염분 섭취가 필요한 야생 동물들은 염분을 많이 함유한 나무를 본능적으로 안다고 한다.

 

야생 동물은 짠맛을 내는 나무를 배우지 않아도 알아내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가 숲에서 짠맛을 느낄 수 있는 나무가 많지 않다. 염부목(鹽膚木), 목염(木鹽) 등의 이름을 가진 붉나무가 유일한지도 모르겠다.(90 페이지)

 

단풍은 하늘을 이고 있는 산정에서 불붙기 시작해 인간 세상에까지 내려온다. 꼭대기에서 아래로 단풍이 20 퍼센트 정도 들었을 때를 첫 단풍이라 하며, 80 퍼센트 이상 물들었을 때를 절정기라 한다. 첫 단풍 이후 보름쯤 지나야 절정의 모습을 나타낸다. 우리나라 단풍은 보통 하루에 50 미터씩 고도를 낮추고 25 킬로미터씩 남하한다고 알려졌다.(98 페이지)

 

단풍은 자연의 은밀한 작업이다. 색소체가 파괴되어 나타나는 것이 단풍이지만 색소체를 보유한 개개 나무의 생리적 조건 못지 않게 주변 환경도 중요하다. 평지보다 산, 강수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곳, 양지쪽, 일교차가 클수록 화려하고 아름답다. 한 해 좋았다가 다음 해 좋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99 페이지)

 

같은 단풍나무라 해도 나무줄기 위치에 따라 잎의 색이 각기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99, 100 페이지) 한 나무에서도 잎이 자리잡은 위치, 시기 등에 따라 제각각의 단풍이 든다.(100 페이지) 저자는 모든 것이 다 변할 때 변하지 않는 것이 존재함으로써 그 차이가 더욱 부각되는 세상 이치를 말한다.(106, 107 페이지)

 

이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야란 말을 풀어쓴 것 같다. 저자는 소나무는 늘 푸른 것만은 아니라 말한다. 소나무도 낙엽을 떨군다.(111 페이지) 아주 짧은 시간일망정 녹색 솔잎과 황갈색 솔잎은 부조화를 이룬다. 목조 건물에 쓰이는 단청의 두 바탕색은 석간주(石間硃)라는 붉은 색과 뇌록(磊綠)이라는 청록색이다.

 

두 바탕색이 소나무를 상징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건물 기둥에 칠하는 석간주는 보통 적송의 붉은 줄기 색과 같고 건물 지붕틀의 뇌록은 소나무 잎과 같은 청록색이다.(114 페이지) 단청을 상록하단(上綠下丹)으로 수식한다. 나무들은 봄철에 그해 가을도 아닌 다음해 피울 꽃눈을 준비하거나 불볕 더위가 한창인 여름에 다다음해 터뜨릴 솔방울을 준비한다.(134 페이지)

 

다른 많은 나무들과 달리 참나무는 단풍 든 잎을 낙엽으로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갈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등 참나무 숲 가족은 열심히 생산한 도토리가 다람쥐와 어치의 겨울 식량으로 저장된 것에 유감이 없다.(135, 136 페이지) 다람쥐와 어치는 기억력이 좋지 않아 묻어둔 도토리를 다 찾지 못한다.

 

겨울 숲은 수묵(水墨)의 세계다. 겨울 숲의 진수는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에서 찾을 수 있다. 우중월정(雨中月精) 설중오대(雪中五臺)란 말이 있다. 비오는 날은 월정사에서 바라본 풍경이 최고고 눈 오는 날은 오대산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최고라는 말이다. ‘숲 보기, 읽기, 담기는 서정적인 책이다.

 

나무나 숲의 역사보다 시적인 감수성으로 개별 나무들에 대한 느낌과 향유의 언어를 전한 책이다. 그럼에도 정보(지식)로 취할 것들도 꽤 있다. 사람이 감별할 수 있는 냄새의 종류는 40만 가지라는 말, 넓은 잎이 바늘잎보다 더 빠르고 더 쉽게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 꼭대기에서 아래로 단풍이 20 퍼센트 정도 들었을 때를 첫 단풍이라 하며,

 

80 퍼센트 이상 물들었을 때를 절정기라 한다. 첫 단풍 이후 보름쯤 지나야 절정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말, 단풍 형성에는 색소체를 보유한 개개 나무의 생리적 조건 못지 않게 주변 환경도 중요하다는 말 등이다. 저자의 최신작인 우리 소나무등을 읽을 필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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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 - 1682)의 집을 방문해 정원 그림을 그렸다는 소치(小痴) 허련(1809 1892)이 당나라 시대 사람 왕유(699 759) 1000년 이상 차이 나는 사람을 본받아 이름을 허유로 바꾸고, () 역시 왕유의 자를 따라 마힐이라 이름한 것은 그의 스승 김정희(1786 1856)가 청나라 시대 사람 옹방강(1733 1818)을 사모해 그의 호 담계(覃谿)를 따라 보담재(寶覃齋.. ‘에는 귀중하게 여기다란 의미가 있지요.)라 이름 한 것을 연상하게 하지만 김정희가 허유에게 너의 그림이 내 그림보다 낫다고 한 것처럼 허유는 본받음 면에서 스승이 50년 정도 선인(先人)인 옹방강을 본받은 것과 달리 무려 1100년 선인(先人)인 왕유를 본받아 스승을 일거에 뛰어넘었지요.. 허유는 소치 외에 노치(老痴)란 호도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나이들어서까지 꾸준히 어리석었다는 뜻인가요?

 

이런 겸양은 조선인의 취향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거의 모두가 그에게서는 너무나도 상대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는 스승 김정희와는 극적으로 다른 바이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소치는 김정희가 대치(大痴) 즉 원나라 화가 황공망의 호를 따라 지어준 것이니 명명(命名)의 독자성은 없지만 인품이 원만, 자애로웠다니 제대로 된 동정(同定)이 아닐 수 없습니다이렇게 쓰고 나니 문제가 있습니다. 허련의 허유로의 전환에 김정희의 영향력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느 정도인지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허련이 허유로 이름을 바꾼 것을 허련이었다가 후에 허유로 바꾸었다고만 기록하고 정확한 시점을 이야기하지 않아 답답합니다. 정확한 시점, 김정희의 영향 등과 관련해 정보주실 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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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과 몽촌토성 : 침묵에서 깨어난 한성 시기 백제의 도읍지 신나는 교과연계 체험학습 16
김기섭 지음, 서은경 그림, 이이화 감수 / 주니어김영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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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시기 백제의 도성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다. 북성(北城)인 풍납토성은 39만 제곱 미터, 남성(南城)인 몽촌토성은 48만 제곱 미터의 면적이다. 백제는 고구려와 부여 백성들 일부가 남하해 한강 유역에 세운 나라다. 한성 시기는 기원전 18년에서 기원후 475년까지 약 500년간 지속되었다.

 

()이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흙이나 돌로 쌓은 담장 또는 그런 담으로 둘러싼 곳을 말한다. 칠지도로 유명한 근초고왕(13) 때 백제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영토를 넓혀 가며 한반도의 서쪽과 남쪽 지역에서 위엄을 떨쳤다. 근초고왕 때 고구려와 벌인 전쟁(평양성 전투)에서 백제는 고국원왕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 일로 광개토왕대왕비에는 백제가 아닌 백잔(百殘)이라 기록되어 있다. 잔은 잔인하다는 의미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대군에게 성이 함락당하고 개로왕(21)은 목숨을 잃었다. 다음 왕인 문주왕은 도읍을 웅진(공주)으로 옮겼다. 웅진 백제는 475년에서 538년까지 지속되었다. 무령왕(25) 때 안정을 찾았고 다음 왕인 성왕(26) 때 도읍을 사비(부여)로 옮겼다. 국호는 남부여로 고쳤다. 사비 백제는 538년에서 660년까지 지속되었다.

 

백제는 한성에 도읍을 세운 첫 나라다. 시기를 보아서도 백제의 최전성기는 한성 백제 시기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았고 가장 먼저 망한 나라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 주몽은 부여 사람이었다. 주몽은 부여 왕자들이 시기해 죽이려 하자 졸본 부여로 도망쳐 왔다.

 

당시 졸본 부여의 왕은 주몽을 눈여겨 보았다가 둘째 딸 소서노와 결혼시켰다. 졸본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은 왕이 되었고 소서노 사이에서 비류, 온조를 낳았다. 그런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 사이에서 낳은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주몽이 죽고 유리가 왕이 되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비류는 미추홀에 자리 잡았고 온조는 한강 유역에 자리를 잡았다. 온조는 54개 부족 국가인 마한 땅을 점령하는 등 점차 세력을 키워갔지만 비류는 그러지 못했다. 비류가 도읍으로 삼은 미추홀이 농사가 잘 안 되어 백성들의 삶이 힘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비류가 이끌던 세력도 온조가 흡수해 백제가 되었다.

 

백제는 왜()와 가까이 지냈다. 왜에 한자와 유교를 전해준 것이 백제고 갖가지 기술을 가르쳐준 것도 백제다. 칠지도(七枝刀)는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칼이다. 백제는 개로왕 때 장수왕의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도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는 위기를 맞는다. 개로왕이 죽은 곳이 아차산성이다. 아차란 말이 붙은 것은 조선 명종이 홍계관이란 점쟁이를 실수로 사형시킨 곳이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5(을축년) 대홍수 때다. 1990년대 강남에 아파트 단지를 짓는 중에 성벽 안쪽을 파헤쳤다. 1997년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백제의 초기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그 후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다. 몽촌토성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8년 올림픽 개최로 인해 공원이 조성되는 과정에서였다.

 

풍납토성은 하늘에서 보면 성벽이 일직선이다. 흙을 층층이 다져 가며 성을 쌓는 방식을 판축법이라 한다. 몽촌토성 안팎에는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 김구의 신도비가 있다. 몽촌역사관, 집자리 전시관도 있다. 몽촌토성은 위에서 보면 성 모양이 찌그러진 마름모꼴임을 알 수 있다.

 

성과 성 밖을 물로 가로막은 것을 해자라 한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작은 성을 보루라 한다. 성곽의 기초적 형태로 적군이 성벽을 타고 올라오지 못하게 하도록 나무를 땅에 박아 가로, 세로로 엮어 만든 담을 목책이라 한다. 성벽 중 다른 곳보다 3에서 5미터 정도 높게 쌓은 곳을 토단이라 한다.

 

몽촌토성은 산에 쌓은 성, 풍납토성은 평지에 쌓은 성이다. 산에 쌓았기에 구불구불하고 불규칙하다.(몽촌토성) 평지에 쌓은 성이기에 일직선이다.(풍납토성) 백제 왕들은 제사를 자주 올렸다, 시조인 동명왕과 하늘에 드렸다. 남쪽에 제단이 있었다.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토기는 구은 강도나 흙의 질에서 약간의 차이가 난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기에 한성을 함락시키고 평지성인 풍납토성 대신 산성인 몽촌토성에 주로 머물렀다. 몽촌토성은 방어용으로 지은 성이다. 풍납토성은 백성들이 사는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성이다. 몽촌토성은 낮은 곳은 판축법으로 쌓아올리고, 높은 곳은 삭토법으로 깎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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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함, 리듬감, 체계 등 세 가지가 결여된 3()의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글쓰기도 숱한 노력이 담보되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기법에 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의가 없는 사람이 글을 그렇게 쓰리라 생각한다. 좋은 옷을 차려 입고 패션 감각을 발휘해 멋을 내려고 하듯 글쓰기에서도 멋이라도 내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못 쓰지는 않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강하다.

 

그런 사람들은 글은 의미만 통하면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게 쓴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그럼 글을 잘 쓰는가? 돌아보게 된다. 나는 똑똑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은 저절로 되는 듯 싶은 주술(主述) 및 시제(時制) 일치를 퍼즐 맞추듯 하려 애쓰고, 주의를 기울이고, 기법이 전부가 아니라 생각해 좋은 내용을 담으려고 열심히 읽은 인문, 자연과학, 문학, 철학 등의 내용을 반영하고 긴 문장과 짧은 문장을 적절히 교차시키려 하고 고치고 또 고치고 힘들게 쓴 글이 오해 거리를 남기면 안 되기에 불명료한 부분이 없도록 보고 또 본다.

 

다른 분야에서는 미적거리기 일쑤이지만 글은 그나마 생각나면 바로 바로 쓰는 편이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감성적인 언표까지 담아내려고 했었던 바 한때 나는 이런 나의 습성을 무한소(無限小) 미분(微分)을 통한 운동의 함수화가 매순간의 운동체의 위치 파악을 가능하게 한 사건에 비유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명한 비유도 아니고 겸손의 예법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스피노자의 초상화를 보는 순간 자신의 전생은 물론 내생까지도 환하게 꿰뚫게 되었노라 한 내 사숙(私淑)의 스승이 이런 말을 했다.

 

"문자로써는 벨 수 없는 법이다. 말은 슬프게도 칼보다 쉽게 나오는 것, 그리고 이 쉬움이 허영의 첩경이다.”(김영민 지음 공부론‘ 175, 176 페이지) 글쓰기에서 멋이라도 내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못 쓰지는 않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강하다고 했거니와 이 말은 아예 칼보다 쉽게 나오는 글 자체가 허영의 산물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물론 허영이 꼭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최근 황산의 글쓰기의 모험 - 철학자들과 함께 떠나는을 주문했다. 이 책을 낸 출판 관계자가 이런 말을 했다. ‘인문학 공부를 하는 것과 인문학 기반이 단단한 글을 쓰는 건 같지 않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공부가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작용만 초래할 가능성도 크다. 애써 공부한 것을 써먹으려다 글이 쓸데없이 현학적이 되거나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를 생각했다. 현학적이라 해도 내용이 탄탄하고 시의적절하다면 굳이 문제는 아니리라. 최근 읽고 있는 책이 오디세이아. 트로이 전쟁에 나선 오딧세이의 미인 아내 페넬로페는 남편이 살아 있음에도 구혼 대시를 한 남자들을, 영웅 라에르테스를 위해 수의를 짤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해놓고 밤에는 횃불을 곁에 두고 그것을 푸는 방식으로 속였다.(라에르테스는 페넬로페의 시아버지다.) 처음 읽었을 때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다시 읽으며 느끼게 되는 것은 그런 단순한 속임수가 어떻게 3년씩이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란 점이다.

 

스타벅스의 사이렌 이야기를 하며 가끔 페넬로페 이야기까지 하곤 했는데 그것이 민담 모티프가 그대로 유입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무엇이라고 답했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탄탄한 설득력을 갖춘 글이 결국 좋은 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유명 영화감독이 쓰레기를 쓰겠다고 마음 먹으니 써지긴 써졌다는 말을 했다는 기사를 최근 읽었다.

 

물론 이 사람은 글을 참 잘 쓰는 사람이다. 쓰레기를 쓰겠다고 마음 먹으니 써지긴 써졌다는 말은 완벽주의 때문에 글을 시작하기 전까지 과하게 구상하고 궁리하는 등 자신을 참 많이도 괴롭히다가 결국 완벽과는 거리가 먼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라고 전한 말이다. 나도 잡스런 글은 쉽게 쓰지만 부탁 받는 글이나 중요하게 응모하는 글은 시작점을 잡으려고 많이 고생하는 편이다. 이렇듯 참 많이도 힘들고 이야기 거리가 많은 것이 글쓰기다. 밝은 눈으로 작은 실마리를 날카롭게 잡아내는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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