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 - 수원화성 걸어본다 17
김남일 지음 / 난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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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는 수원에서 나고 자랐지만 60이 넘어서야 마침내 온전한 화성(華城) 일주를 시도하게 되었다는 김남일 작가의 책이다. 난다 출판사의 걸어본다 시리즈 17번째 책이다. 강석경의 경주, 허수경의 뮌스터, 배수아의 알타이, 한은형의 베를린 등이 관심을 끄는 가운데 김남일 작가의 책을 고른 것은 수원 화성(華城)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책은 김남일 작가의 문학적 표현과 수원 화성과 정조(正租)에 대한 서술로 이루어졌다. 화성은 원래 수원성으로 불리던 곳이다. 화성에는 치()가 있다. 꿩처럼 몸을 숨긴 채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게 성곽 바깥에 철(: 볼록할 철)자 형태로 약간 돌출시켜 만든 구조물을 가리킨다.

 

저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느낀 만큼 보인다는 말로 바꾸고 싶을 때가 있지만 어떻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의문의 일패를 당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맞지만 정감이 생겨야 알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는 느낀 만큼 알려 하고 그런 만큼 보인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곽의 낮은 담을 여장(女墻) 또는 타(), 우리 말로는 성가퀴라 한다. 성가퀴에 세 개의 총 구멍이 있다. 가운데 구멍은 근총안, 양 옆 구멍은 원총안이다. 포루(砲樓)는 포를 쏘는 누각이다. 저자는 만일 카프카가 우리나라에 살았다면 다른 작품은 몰라도 결코 ()’ 만큼은 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땅 어디에도 저 멀리 고딕체 글씨처럼 우뚝 솟은 성을 발견할 수 없었을 테니까.

 

조선의 성은 높이가 아니라 둘레와 길이로 권위를 주장한다. 저자는 우리의 성은 우뚝 솟은 성채가 아니라 상실을 또 다른 기의로 갖는다며 인조(仁祖) 이야기를 한다. 곤룡포 대신 하급관리의 남색 옷을 걸치고 정문이 아닌 서문으로 나선 인조는 그들이 정한 법에 따라 몸이 묶이거나 관을 끄는 치욕만은 면할 수 있었다.” 몸이 묶이거나 관을 끄는 치욕이란 함벽여츤(銜璧如櫬)을 말한다. 손을 뒤로 묶이고 입에 구슬을 물고 관을 뒤집어 쓰는 치욕이다.

 

젊은 저자에게 성을 오르는 일은 폐허를 밟는 일이었다. 암문(暗門)은 벽돌로 쌓은 점이 특징이다. 포루(鋪樓)는 성가퀴를 앞으로 튀어나오게 쌓고 지붕을 덮은 부분이다. 치성(雉城)에 있는 군사를 보호할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포대를 설치하는 포루(砲壘)와 동음이의어다. 1795년 정조는 야간 훈련을 직접 참관했다. 야간 훈련시에는 매화(埋火) 즉 땅에 묻은 화약이 밤하늘에 치솟았다가 마치 매화꽃이 일시에 떨어지듯 떨어졌다.

 

화성의 남문은 팔달문, 북문은 장안문, 동문은 창용문, 서문은 화서문이다. 화홍문은 북쪽 수문이다. 화령전(華寧殿)은 순조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곳이다. 연무대는 병사들의 훈련장이다. 팔달산 정상의 화성장대를 서장대로 부르고 연무대를 동장대라 부른다. 정조가 장용영 군사들을 위해 만든 국영 농장인 둔전을 대유평 또는 대유둔이라 한다.

 

수원 사람들은 팔달산을 팔딱산이라 불렀다고 한다.(29 페이지) 그런 감각으로 저자는 서문은 늘 그렇게 서 있어 서문이라 말한다. 공심돈은 안이 비어 있는 돈()이다. 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하는 망루다. 화성에는 공심돈이 셋이지만 서북공심돈을 대표로 꼽아 그저 공심돈이라는 대명사로 고유명사를 대신한다. 1797년 정월 정조는 공심돈 앞에서 우리 동국 역사상 최초의 건물이라. 마음껏 구경하라.”는 말을 했다.

 

동북각루로 지어진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화성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예전 수원에서는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 있고 남문은 남아 있고 북문은 부서졌다고 말했다.(89 페이지) 정조는 북문인 장안문을 설계도와 다르게 200미터나 옮겨 쌓도록 했다. 화산(華山)에 있다가 사도세자의 묘를 천장할 때 이주해온 200여명의 백성들의 집을 피해 짓도록 한 것인데 이로 인해 화성은 성곽이 반듯하게 원호를 그리지 않고 군데군데 삐뚤빼뚤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반사(頒賜)는 임금이 물건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정조는 흰떡, 수육, 부채, 척서단(滌暑丹), 솜옷, 털모자 등을 나누어 주었다.(: 씻을 척) 당시에 귀마개, 털옷 등은 아무나 가질 수 없었다. 정조는 즉위년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이 왕의 침전이자 서재인 존현각(尊賢閣)에 난입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을 겪었다. 노론 영수 홍상범(洪相範)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홍상범에게 매수된 호위군관, 도성 무사들, 심지어 액정서(掖庭署) 소속들까지 가담했다.

 

후일 정조가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한 것은 이런 배경에 따른 것이다. 홍상범은 책형(磔刑)으로 죽었다. 동북 공심돈은 서북공심돈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받지만 나선형 계단으로 인해 소라각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저자는 사회 과목 성적도 제법 좋은 편이었지만 행궁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몰랐고 가르쳐주는 이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화성행궁을 둘러보는 일은 기억과 기록 사이를 걷는 줄타기와 같다. 이때 기댈 수 있는 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격상되었고, 고종(1899)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함에 따라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을묘년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은 해이다. 사도(思悼)는 영조가 내린 시호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것은 1789년의 일이다. 정조는 현륭원 앞에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애통해했다.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할 정도였다.

 

나혜석의 출생지는 화령전 인근 어디쯤이다. 저자는 나혜석의 단편 소설인 경희를 읽고 시대와 맞섰던 그녀의 당당한 불화에 감탄했다. ‘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는 독특한 책이다. 작가 개인의 기억과 문학적 표현들과 화성과 정조에 대한 사실(史實)들이 어우러진 책이기 때문이다. 시간 내서 책에 언급된 이탈로 칼비노, 나혜석, 발터 벤야민 등에 대한 책을 읽으면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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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공부할 시간 - 인문학이 제안하는 일곱 가지 삶의 길
김선희 지음 / 풀빛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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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의 나를 공부할 시간은 사마천과 괴테, 디드로와 이규경, 브루노와 최제우, 홍수전과 로자 룩셈부르크, 스피노자와 정약용, 성호 이익과 레비나스, 페트라르카와 주희를 각기 다른 주제로 묶어 설명한 책이다. 사마천과 괴테는 여행하는 삶, 스피노자와 정약용은 유배당한 삶, 성호 이익과 레비나스는 공감하는 삶 등이다.

 

세창출판사에서 나온 프레너미 시리즈가 있다. 사상적으로 대립하면서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학문을 발달시켜온 둘 이상의 사상가를 비교, 대조하여 이해를 극대화시키는 시리즈라고 한다. 니체 vs 바그너, 하이데거 vs 레비나스, 사르트르 vs 메를로퐁티, 루터 vs 칼뱅 등의 책이 나와 있다. 궁금한 것은 정약용 vs 듀이란 책이다. 시대적으로 겹치지 않은 두 사람이 함께 묶였기 때문이다. 공명하는 부분과 대조적인 부분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

 

나를 공부할 시간을 사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동양철학 스케치 2‘를 통해 저자의 역량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나를 공부할 시간에서 큰 관심을 부르는 사람들은 로자 룩셈부르크, 스피노자, 주희(朱熹) 등이다. 특히 유대교로부터 파문(破門)당한 스피노자와 오랜 유배 생활을 한 정약용이 한데 묶여 설명된 것은 흥미마저 부른다.

 

물론 정약용과 주희를 한데 묶을 수도 있고 괴테와 성호 이익을 한데 묶을 수도 있다. 정약용과 주희는 신유학에 대한 입장 차이를 주제로, 괴테와 성호 이익은 박물지적 관심으로. 그러면 전자는 대립적인 면이, 후자는 공통점이 요점일 것이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이 여행으로 큰 전환의 계기를 맞았다는 점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천문관측과 의례(儀禮)를 담당하는 태사령(太史令)이었다. 그러나 국가 제사인 봉선제에서 배제된 뒤 화병을 얻어 통한 속에서 아들에게 역사서 집필의 과제를 안기고 눈을 감았다.

 

사마천이 행한 여행이 사마천의 사기 집필에 큰 역할을 했다. 아예 저자는 사마천이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사기를 쓸 수 없었을 것이란 의미의 말을 한다. 사마천에게 여행을 권한 사람은 아버지 사마담이었다. ‘사기가운데 백이, 숙제 이야기도 있다. 그들이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은 것은 제후국인 주나라가 천자국인 은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사기의 특징은 인물과 사건 중심의 서술을 했다는 데 있다. 편년체가 아닌 기전체다. 편년체는 연도 중심의 서술 즉 왕조의 변천을 서술한 연대기란 위상을 갖는다. 괴테는 평생 수많은 곳을 여행했고 죽기 직전까지도 등산을 멈추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괴테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그의 이탈리아 여행을 든다. 괴테는 자신은 이탈리아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말을 했다.

 

괴테의 여행이 남긴 가장 본질적인 흔적은 아마도 그의 주저 파우스트에 담겨 있을 것이다.”(39 페이지) 앎을 좇는 삶의 디드로와 이규경 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을 수집하고 분류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배열하는 것은 기존의 질서나 가치 체계에 대한 재평가와 재배치란 것이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비판 및 저항으로 연결된다.

 

이규경은 간서치(看書癡) 이덕무의 손자다. 이규경의 호는 오주(五洲). 그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백과전서다. 오주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과 그 지식을 길어올릴 수 있는 여행에 대한 동경을 담은 말이다. 연문(衍文)은 군더더기 문장이란 의미다. 장전(長箋)은 길게 쓴 주석이란 의미다. 산고(散稿)는 정리되지 않고 흩어져 있는 글이라는 의미다.

 

브루노와 최제우(1824 1864)는 꿈에 이끌린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두 사람 다 비범한 꿈을 꾸고 전혀 다른 삶을 산 사람이다. 최제우가 산 시대는 순조(재위: 1800 1834), 헌종(재위: 1834 1849), 철종(재위: 1849 1863)의 시대였다. 정순왕후 김씨(경주 김씨)의 수렴청정, 순조 비 순원왕후 김씨(안동 김씨), 순원왕후의 부친 김조순 등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린 시대였다.

 

백성을 가혹하게 쥐어짠 세도정치로 파탄난 민생이 란()을 초래한 시대였다. 홍수전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변혁하는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혁명가란 이름은 실천의 결과에 관계 없이 부여되는 이름이다. 로자 룩셈부르크(1871 1919)는 폴란드 출신의 여성 혁명가다. 그는 혼란스러웠던 20세기 초 독일에서 혁명의 최전선에서 활동했지만 거의 모든 국면에서 억압받고 차별받았던 소수자였다. 마르크스 이후의 최고의 이론가, 탁월한 연설가, 진정한 혁명가 로자는 독일 민병대원의 무자비한 폭력에 희생된 비운의 인물이다. 유대인이었고 차별받는 여성이었고 어려서 앓은 좌골 관절염으로 평생 다리를 절었던 장애인이었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17세기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에서 일종의 종교적 중립지에 가까웠다. 유럽 곳곳에서 박해받던 종교 분파들이 종교의 자유와 관용을 보장한 신생 독립(스페인으로부터)국가 네덜란드로 몰려들었다. 스피노자는 예수회 출신의 반 덴 엔덴을 만나 장래 희망을 랍비에서 철학자로 바꾸었다. 가업을 잇거나 랍비가 되는 것 외에 생계를 이을 방법이 없었던 스물네 살의 스피노자는 스스로 생계를 꾸려 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신이 성장한 유대교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뒤 그는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인 렌즈 깎는 일을 하며 독립적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스피노자가 렌즈만 연마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철학을 가르치기도 했고 친구들과 꾸준히 교제했다. 헨리 올덴부르크 같은 친구와 계속한 서신 교환은 학술적 토론장의 역할을 대신했다.

 

당시 스피노자를 충분히 비난하지 않는 사람들은 비판을 받았을 정도로 스피노자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유대 기독교적 세계관과 전통 신관을 전면 부장한 그의 행보 때문이었다. 스피노자는 이 세계가 초월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로 이원화된 것이 아니라 일원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본 자연은 목적이나 의도 없이 무한히 생성 변화하는 이 세계 자체다. 현실 세계 외에 초월적 세계가 없다는 의미다. 이 세계는 신이라는 실체(다른 사물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존재와 그 특성이 그것 자체에 의해서만 설명되는 것)가 변용된 모습으로 이를 양태라 한다. 그에게 세계 자체가 신이다. 스피노자는 인격적이며 오로지 사유로만 존재하는 신 관념을 버리고 자연의 물질성까지 신의 속성으로 바라보았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 전체가 신의 양태며 따라서 모든 것이 신 안에 들어 있다. 신은 자연의 원인이지만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이다. 신이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말을 원인과 결과가 함께 하는 바다와 파도의 관계로 비유해 설명할 수 있다. 바다가 파도의 원인이지만 바다는 파도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자연 역시 결과로 존재하지만 원인인 신 안에 존재한다.

 

이 자연 세계는 인격적 신의 초월적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과관계의 법칙으로 질서잡힌 합리적인 세계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은 우연적이며 유한하다. 그런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사물은 자기를 지키려 하며 자기 안에 머무르려는 노력(코나투스)에 의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코나투스가 정신에 관계될 때 의지라 하고 정신과 육체 모두에 관계될 때는 충동이라 한다.

 

충동을 의식하면 욕망이 된다. 충동과 욕망을 구분할 줄 모르는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이는 결국 자연의 필요성에 따른 행위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해서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 의지하고 욕망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노력하고 의지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 판단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유배되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정약용을 스피노자와 유사한 사람으로 본다. 그가 산 시대는 정조, 순조, 헌종 시대였다. 정조와의 좋은 시절이 끝나고 순조, 헌종 시대에 그는 많은 고난을 겪었다. 정조는 정약용이 서른 아홉에 유배되기 직전까지 그의 최대 후원자였다. 정약용을 이해하려면 정조만큼이나 광암 이벽(정약용 형수의 남동생)을 알아야 한다. 이벽은 성호 이익의 제자 권철신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다.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는가 여부는 아직도 논쟁거리다. 그에게 서학은 현대적 개념의 종교였다기보다 새로운 학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배 기간 내내 정약용은 가난과 병을 짊어져야 했다. 몸이 갇힌 만큼 정약용은 강렬한 의지로 자신의 학술을 완성해 나갔다. 정약용이 그토록 많은 저술을 남긴 것은 유배 기간이 길어서만은 아니다.

 

강진에는 어머니 종친인 해남 윤씨들이 살았는데 처음에는 죄인으로 유배 온 정약용을 외면했지만 결국 그를 후원했고 정약용은 해남 윤씨 가문의 장서들을 연구에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남 윤씨 자제들이 제자로 들어와 정약용의 저술을 돕기도 했다. 정약용의 작업 중 상당 부분은 제자들과 공동 작업을 통해 이루어낸 것이다. 정약용은 제자들이 필사하고 분류하고 정리해 놓은 전거들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저술을 완성해 나갔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온 것은 1818년 가을,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그 후 1836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정약용은 언젠가 자신의 학문이 세상에 쓰일 날을 기대하며 저술을 정리했다. 이 당시 그가 선호했던 호는 후대를 기약한다는 의미의 사암(俟菴)이었다.(: 기다릴 사)

 

그의 사상 전체가 시대와 불화했다거나 시대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급진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정약용 철학의 가장 큰 특징은 당대의 지배 학문이었던 주자학과 거리를 두었다는 점이다. 그가 젊어서 접한 천주교는 그의 정치적 생명을 끊었지만 그 안에 담긴 새로운 세계관은 정약용에게 유학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했다.

 

]성호 이익에게 가난은 일상적인 삶의 조건이었다. 레비나스와 이익은 공감하는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페트라르카와 주희(朱熹)는 읽고 쓰는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페트라르카는 거의 중독에 가까울 만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읽고 또 썼다. 주희(朱熹)도 페트라르카처럼 평생 읽고 쓰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 학자 중 하나다.

 

주희가 태어났을 때 송나라는 금나라의 침입으로 온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53세의 주희는 태주의 지사였던 당중우라는 인물을 집요하게 탄핵하다 직위도 잃고 사상적으로도 탄압받았다. 주희는 말년에 학문적 활동을 금지당하는 위학(僞學)의 금()을 겪기도 했다. 이런 불운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주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읽고 쓰는 삶에 헌신했다. 주희는 성리학의 집대성자다. 주희가 당한 위학지금은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물론 주희가 받은 모든 탄압과 불명예는 주희 사후에 대부분 풀렸다.

 

모든 삶의 가능성을 한쪽으로 기울여, 읽고 쓰는 삶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읽고 쓰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지루하고 반복적인, 그토록 오랜 시간을 투자해도 성취를 보장할 수 없는, 노력에 성과가 비례하지 않는, 무엇보다 평생토록 끝나지 않을 일에 자신을 헌신하게 하는 것일까... 읽고 쓰는 삶을 택한 이들은 상당한 이상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어쩌면 현시의 자기보다 더 큰 자기를 상상하는 몽상가들일지도 모른다”(246, 247 페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읽고 쓰는 삶을 택하는 사람들은 부박하고 과시적인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고, 당장 생활을 바꿀 현실적인 힘과 영향력을 만드는 데 힘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페트라르카도 주희도 묵묵하게 긴 호흡으로, 담담하게 먼 시각으로 자기와 세계에 대한 실천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읽고 쓰는 과정을 통해 얻을 효과가 보다 일찍, 보다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엄밀히 말해 읽고 쓰는 삶이 아니라 성공하는 삶을 택한 것에 가깝다.(24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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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 1 : 조선 왕릉 편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 1
이종호 글.사진 / 북카라반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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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왕조의 왕릉()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조선이 유일하다. 지난 2009년 북한의 두 기를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북한의 두 기는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 정종과 정안왕후 김씨의 후릉이다.) 조선 왕릉의 공간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정자각을 중심으로 크게 2개로 나눌 수 있다. 제향 공간과 능침 공간이다.

 

정자각의 계단은 정면이 아닌 측면에 둔다. 참배자가 서쪽(왼쪽)을 바라보며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동쪽 계단은 신계(神階)와 어계(御階)2개이고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의미로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뒷문을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신계는 기본적으로 3단이고 양옆에 구름무늬와 삼태극을 조각한 석고(石鼓)가 있다.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딛는다. 정자각 북서쪽에 제례를 끝내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예물을 묻는 예감(瘞坎)이 있다. 진시황 때는 천자의 무덤을 산이라 했고 한()에서는 능이라 했다. 조산(祖山)은 혈()에서 가장 멀리 있는 용의 봉우리를 말한다. 안산(案山)은 집터나 묘의 맞은편 산을 말한다.

 

가장 큰 문무인석은 철종의 예릉, 장경왕후의 희릉에 설치된 3미터 높이의 석상이다. 비교적 후대에 속하는 철종의 능 석물이 크게 만들어진 이유는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꿈꾸며 위엄 있게 만들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망주석은 자손이 번창하라는 의미로 세운 것으로 일반인의 묘소에도 세운다. 멀리서도 쉽게 알아보도록 하는 의미가 있다.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태조 이단(李旦)의 능은 구리 동구릉의 건원릉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하지 않았다면 조선 왕릉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원릉은 고려 왕릉 가운데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노국공주의 정릉(正陵)을 모델로 조성했다. 동구릉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건원릉은 능호가 유일하게 두 글자인 능이다.

 

건원릉에는 소전대(燒錢臺)가 있고 태종 이후에는 예감으로 대치되었다. 건원릉 봉분에는 특이하게도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심어져 있다.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의 능이 현릉(顯陵)이다. 문종이 세조와 연관된 의관 전순의에 의해 반하(半夏)를 즐겨 먹은 꿩고기로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꿩은 닭, 오리 등과 함께 기름이 과다한 고기로 종기가 났을 대 금기임에도 전순의는 문종에게 꿩고기를 계속 먹게 했다.

 

현릉의 석물들도 많이 퇴화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화강암은 강도가 7로 매우 단단하지만 장석, 운모, 석영 등으로 되어 있어 풍우에 퇴화하기 쉽다. 장석은 빗물에 오래 노출되면 녹아버린다. 이 까닭에 화강암은 기본적으로 내장재로 쓴다. 수많은 서양 건물이 수천 년이 넘었는데도 원형이 보존된 이유는 균질한 재질의 석회암이나 대리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선조와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의 능이 목릉(穆陵)이다. 선조는 41년을 재위했다. 광해군은 권정례(權停禮)로 세자가 되었다. 권정레는 약식(略式)을 의미한다. 의인왕후는 인종 비 인성왕후, 명종 비 인순왕후를 극진한 효성으로 모셨고 후궁 소생인 여러 아이에 대해서도 지극한 은애(恩愛)를 보이는 등 부덕을 갖추었지만 소생 없이 사망했다.

 

선조 능의 석인은 조선 시대 석인 중 가장 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608년에 장인(匠人)을 구하기 어려워서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종(顯宗)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 숭릉(崇陵)이다. 현종은 봉림대군이 선양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태어났다. 조선 역대 왕들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조선 역대 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 현종이다. 명성왕후 김씨의 사나운 성격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종이 명성왕후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현종 사후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왕이 사망하면 곧바로 실록 편찬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 작업이 선대와는 달리 지지부진해 숙종의 독촉을 받고 비로소 숙종 3년에 완성된다.

 

1680년 서인이 (1674년 갑인예송으로 집권한)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자(경신환국) 서인 중심의 실록 개수청이 설치되었고 1683년에 현종개수실록 28권이 완성되었다.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은 수정 실록이고 현종은 유일한 개수 실록이다.(수정실록은 본래의 실록에서 일부 내용을 고치는 것, 개수실록은 처음부터 완전히 뜯어고치는 것이다.)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 원릉(元陵)이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서오릉에 능지를 마련하고 봉분 두 자리를 만들어 우측을 비워두었지만 정조가 신하들의 적극 추천을 받아 동구릉 내에 영조의 능지를 마련했다. 원래 원릉 자리는 효종의 능침으로 한 번 썼던 자리였지만 풍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쓸 수 있었다.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 휘릉(徽陵)이다.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의 능이 혜릉(惠陵)이다. 동구릉 내에서 유일한 원()이다. 경종 즉위 후 단의빈에서 단의왕후로 추존되었다. 헌종(憲宗)과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의 능이 경릉(景陵)이다. 문조(文祖)와 신정왕후 조씨의 능이 수릉(綏陵)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이 홍릉(洪陵)이다. 순종과 순명효왕후 민씨, 순정효왕후 윤씨(해평 윤씨)의 능이 유릉(裕陵)이다.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 남양주의 사릉(思陵)이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바르다는 뜻으로 능호를 사릉이라 했다. 조선 왕릉의 능침은 기본적으로 도래솔(소나무)이 둘러싸고 있다. 사신사(四神砂)의 현무(玄武)를 나타낸다. 현무는 소나무의 수피가 오래되면 검은색으로 변하고 두껍게 갈라져 거북 등 같은 모습이 되는 것에서 연유한다.(116 페이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 광릉(光陵)이다.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 명릉(明陵)이다. 숙종의 능과 인현왕후 능침 사이 양측에 문인석과 석마 한 쌍이 있다. 다른 능의 문인석과 달리 키가 실물 크기인 170센티미터 정도로 간소하게 만들라는 숙종의 명에 따라 조성된 것이다.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 경릉(敬陵)이다. 소혜왕후 한씨의 큰 고모가 명에 공녀로 갔다가 영락제의 후궁이 된 청주 한씨(한확의 여동생)로 영락제가 죽자 순장되었다고 하지만 처형과 다름 없는 자살이라는 말이 있다. 경릉은 조선 왕릉 중 봉분의 지름이 가장 크지만 봉분에 병풍석, 난간석, 망주석, 석수, 무인석이 없어 매우 간소하다.

 

예종과 안순왕후 한씨(한백륜의 딸)의 능이 창릉(昌陵)이다.(예종의 첫 번째 비가 한명회의 딸인 장순왕후 한씨다.) 창릉이 선정될 때 신하들은 위치가 나쁜 것을 알고도 방조했다. 정인지가 반대했지만 거부되었다. 원조(元祖)인 중국과 달리 우리 땅을 배경으로 우리가 만든 풍수를 자생풍수라 한다.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이 익릉(翼陵)이다.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의 형인 김만기가 그의 아버지다. 익릉은 서오릉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 홍릉(弘陵)이다. 서삼릉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 현재의 능역으로 조성되었다. 처음으로 조성된 능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이다.

 

원래 태종의 헌릉(獻陵) 옆으로 택지가 결정되었으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졌고 이후 중종의 정릉이 자리잡았다가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宣陵)으로 옮겨갔고 아들인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孝陵)이 조성되었다. 이후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인 예릉(睿陵)이 조성되면서 서삼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효릉은 축협 관할 안에 있어 비공개라고 한다.)

 

예릉(睿陵), 희릉(禧陵), 효릉(孝陵)은 구역이 다르고 넓어 발품을 팔아야 한다. 예릉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이다. 강화도령으로 더 유명한 조선 25대 임금 철종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인 전계대원군의 아들이다. 은언군은 아들 상계군이 반역을 꾀했다는 이유로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은언군은 강화도에서 사사됨. 철종이 태어난 곳은 한성부 경행방. 철종이 다른 가족들과 함게 강화도로 유배간 것은 14)

 

원범이라는 이름의 강화도령이 왕이 된 것은 그의 나이 19세 때로 23세의 헌종이 후사 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원범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세도정치를 펴던 안동 김씨들이 원범을 자신들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철종은 14년간 재위했는데 3년은 대왕대비인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고 그 이후로는 안동 김씨들의 세력에 눌려 허수아비 왕으로 살았다.

 

철인왕후 김씨는 21세에 원자를 낳았으나 6개월만에 사망했다. 철인왕후도 안동 김씨였다. 그녀를 왕비로 천거한 사람이 순원왕후였다. 안동 김씨인 철인왕후도 안동 김씨 세력들을 위해 주청을 계속하는 바람에 철종으로부터 신의를 잃었다. 철종은 이후 철인왕후를 찾지 않았다. 철인왕후는 철종이 죽은 지 15년만에 후사 없이 사망했다.

 

예릉은 조선 왕조의 상설 제도를 따라 설치한 마지막 능이다. 고종과 순종의 능은 황제 능의 법식을 따라 설치했다. 예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연결된 쌍릉이다. 무인석과 문인석이 한 단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참도는 원래 2도였으나 고종이 대한제국 시절 태조, 장조, 정조, 순조, 문조를 추존한 뒤 진종, 헌종, 철종을 황제로 추존하며 3도로 만들었다.

 

조대비가 중종의 정릉(靖陵) 초장지에 매몰했다가 땅 밖으로 나온 석물을 재사용해 예릉을 만들었다. 예릉 좌측에는 문효세자(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의 효창원과 장조(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인 의소세손의 의령원이 있다. 효창원은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 안에 있었고, 의령원은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있었는데 각각 1944, 1949년에 이장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중종의 후궁 숙의(2)에 봉해졌다가 단경왕후의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역적으로 몰려 사사된 데 이어 단경왕후도 폐비되는 바람에 왕비가 된 행운의 인물이다. 장경왕후는 세자인 인종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경복궁 별전에서 사망했다.(빈은 정 1, 귀인은 종 1, 소의는 정 2, 숙의는 종 2, 소용은 정 3, 숙용은 종 3, 소원은 정 4, 소원은 종 4.)

 

장경왕후의 첫 능지는 태종의 헌인릉 옆의 산줄기였다. 장경왕후는 15153월에 사망했다. 왕과 왕비의 능 조성 방식에 따르면 5개월 장을 치러야 하는데 두 달만인 4월에 매장을 마쳤다. 5월에는 좋은 날이 없고 6월은 장마철이라 땅이 질 염려가 있고 장지로 갈 때 물이 불어나 건너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장경왕후의 능 조성은 중종이 맡았다. 장삿날 한강에 500척으로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넜다.

 

장경왕후의 능은 중종 32년인 1537년 서삼릉 자리로 옮겨졌다. 중종과 장경왕후의 딸 효혜공주(인종의 누나)와 김안로의 아들 희가 혼인을 했다. 김안로 즉 중종의 사위는 권력을 남용하다가 영의정 남곤 등에 의해 탄핵을 받고 유배갔다가 복귀해 장경왕후 국장 당시 책임자였던 남곤을 공격하기 위해 풍수지리상 돌이 광(구덩이) 밑에 깔리면 불길한데 희릉 광 밑에 큰 돌이 깔렸는데도 공사를 감행했다는 이유로 천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 말이 듣지 않던 중종도 자신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 것이라는 말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김안로는 위세가 왕을 넘어설 정도였고 문정왕후의 폐위를 꾀하기까지 했다. 이에 중종은 조광조를 제거할 때처럼 밀지를 내려 기습적으로 김안로를 잡아들였다. 김안로는 유배당한 뒤 곧 사사되었다.

 

희릉은 병풍석이 없고 12칸의 난간석만 둘렀지만 조선 전기의 능제를 충실히 따랐다. 효릉(孝陵)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인종은 희릉에 안장된 장경왕후의 맏아들이다. 태어난 지 7일만에 어머니를 잃었다. 인종은 재위에 오른 다음 해인 1545년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종은 세자 시절 반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아버지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의 소생 복성군이 이미 장성한 상태였고 야심이 많은 문정왕후 등에 둘러싸여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복성군과 경빈 박씨는 세자를 저주하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사사되고 김안로가 집권함에 따라 세자의 지위는 안정되었다.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자 위기감을 느낀 김안로가 중전 폐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어 다시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24년의 세자 시절을 보낸 뒤 중종이 죽은 1544년 왕위에 올랐으나 중종의 상을 치르는 동안 거의 음식을 대지 않아 급격히 쇠약해져 병이 들었다. 병세가 심했음에도 극구 약을 먹지 않았다. 1546년 병세가 더욱 심해지자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후사 없이 재위 8개월만에 경복궁에서 사망했다. 경원대군이 명종이다.(예종: 13개월 재위)

 

인성왕후 박씨는 64세까지 살았다. 인종은 성품이 바르고 착했다.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한밤중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여러 마리의 쥐 꼬리에 불을 붙여 동궁으로 들여보냈기 때문이다. 인종은 계모 문정왕후의 소행임을 직감했지만 자신을 길러준 문정왕후의 뜻을 어기는 것도 불효라 생각하고 꼼짝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중종이 애타게 부르자 계모에게는 뜻을 따르는 것이 효이지만 아버지께는 불효라 생각하고 불길을 뛰쳐나왔다.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의 옆에 묻혔다. 명당 중의 명당이었는데 문정왕후가 남몰래 그곳에 며칠간 물을 붓게 했다. 능에서 물이 나온다는 소문이 나자 마침내 명종 17년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졌다. 승려 보우가 승려들을 동원해 중종의 왕릉을 옮겼다. 공사를 맡은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이 엄청난 돈을 빼돌렸다.

 

1501년 생인 유명한 세 사람이 있다. 남명 조식, 퇴계 이황, 문정왕후(文定王后). 남명 조식은 시호가 문정(文貞)이다. 남명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해 광해군 때 성세를 누리다가 인조반정과 더불어 죽거나 유배를 갔다. 조식은 수제자 정인홍이 광해군과 손잡고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바람에 오명을 썼다.

 

조식은 56세에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사양하면서 문정왕후를 일게 과부로, 임금인 명종을 어린 고아라 불러 파문을 일으켰다.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자신 때문에 왕이 된 것을 감사하라고 하며 매를 들기도 했다. 인종의 장지가 서삼릉으로 정해진 것은 인종의 유언 때문이다. 인종은 내가 우연히 병을 얻어 부왕께 끝까지 효도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망극한 심정을 어떻게 모두 말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부왕과 어머니 장경왕후가 계신 정릉 근처에 내 묘를 써라. 또한 내 장사는 소박하게 지내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물론 처음 중종은 장경왕후 옆에 묻혔는데 문정왕후가 중종을 지금의 삼성동으로 옮겼다. 문정왕후가 중종을 희릉에서 삼성동 정릉으로 옮긴 것은 자신이 그 옆에 묻힐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능을 선릉(宣陵)이라 하고 중종의 능을 정릉(靖陵)이라 하는데 선정릉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도굴되기도 했다.

 

정릉은 특히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 자주 침수되었다. 이에 명종이 어머니를 태릉에 안장해 결국 문정왕후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등 그의 비 세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과도 함께 있지 못했다. 중종은 삼성동 정릉, 단경왕후 신씨는 홀로 양주 온릉에, 장경왕후 윤씨는 홀로 서삼릉 희릉에 문정왕후 윤씨는 아들 명종과 함께 노원구 태강릉에 자리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중종이 왕후들과 사방으로 흩어진 까닭에 직계자손이 끊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중종 아들 명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는 중종의 서자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에게 돌아갔다. 명종이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아들들을 불러 익선관을 써보라 했다. 하원군, 하릉군은 별 말 없이 익선관을 썼지만 셋째인 하성군은 왕이 쓰는 것을 함부로 쓸 수 없다고 거절해 명종의 마음에 들었다.

 

하성군이 선조다. 덕흥군은 사후 덕흥대원군이 되었다. 인성왕후가 사망하자 선조가 인종 곁에 인성왕후를 장사지내며 왕릉의 개수를 명해 병풍석을 둘렀다. 면석에는 십이지신상을, 우석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했는데 수많은 왕릉 조각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선조의 아버지 덕흥군과 인종이 형제간이다.)

 

숙종 30년 효릉에 검은 담비가 나타나 수라간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자 종이 불을 지펴 연기를 내 잡으려다 불을 냈다, 불은 능상까지 번졌다. 불을 낸 사람은 사형당했고 가족, 관리자. 참봉 등은 천민으로 강등되어 귀양을 갔다. 이에 숙종은 3일간 업무를 중단하고 모든 관리들이 제사 때 입는 옷을 입었다. 효릉 인근에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의 묘가 있다.

 

원래 이 묘는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었으나 경희대 공사 때 희릉 옆으로 옮겼다. 연산군 어머니가 묻힌 곳은 회묘였다가 연산군이 즉위해 회릉으로 고쳤고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자 다시 회묘가 되었다. 파주 심릉은 공순영릉이다. 순릉(順陵)은 성종 비 공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넷째 딸이다. 공릉(恭陵)은 예종 비 장순왕후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셋째 딸이다.

 

장순왕후의 후임자가 청주 한씨 한백륜의 딸 안순왕후 한씨다.(세조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를 위해 지은 궁이 창경궁이다.) 영릉(永陵)은 진종(효장세자)과 효순왕후 조씨의 능이다. 온릉(溫陵)은 단경왕후 신씨의 능이다. 파주 장릉(長陵)은 인조와 인렬왕후 한씨의 능이다. 김포 장릉(章陵)은 원종(정원군)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태릉(泰陵)은 문정왕후의 능이다. 강릉(康陵)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의릉(懿陵)은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헌릉(獻陵)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다. 인릉(仁陵)은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선릉(宣陵)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정릉(靖陵)은 중종의 능이다. 정릉(貞陵)은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영릉(英陵)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능이다. 영릉(寧陵)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다. 장릉(莊陵)은 단종의 능이다. 융릉(隆陵)은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혜경궁 홍씨)의 능이다. 건릉(健陵)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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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투성이 과학 - 지금 이 순간 과학자들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진짜 과학 이야기
스튜어트 파이어스타인 지음, 김아림 옮김 / 리얼부커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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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난감한 일이다. 그래도 무언가 얻는 바가 있으리라. 실패를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생물학 교수 스튜어트 파이어스타인은 과학 분야에서 실패가 갖는 의미와 가치 등을 논한다. 파이어스타인에 의하면 과학은 실패 그 자체가 목표인 학문이다. 사실상 모든 과학적 노력은 실패 그 자체를 목표로 한다는 것인데 이는 과학적 발견과 그것으로 얻은 사실들은 임시적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끊임없이 개정되고 있다. 과학에서 틀렸는데도 쓸모가 있는 경우가 있다. 개체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ontogeny recapitulates phytogeny)는 말이다. 오랫동안 사실이라고 알려졌던 이 말은 알(또는 자궁) 속에서 어떤 유기체의 배아가 발생하는 전체 과정이 그 유기체가 진화해 온 모든 단계를 다시 거치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다.

 

아인슈타인은 평생 실패와 함께 살았다. 때로는 실패가 성공보다 더 많은 이해를 가져다준다. 실패가 없으면 과학도 없다. 진화 그 자체도 경이로운 실패의 결과물이다. 지금껏 지구상에 얼굴을 비췄던 생물 종의 99% 이상은 현재 멸종했다. 닐스 보어는 전문가란 굉장히 좁은 분야에서 가능한 온갖 실수를 전부 저지른 사람이란 말을 했다.

 

사무엘 베케트는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말을 했다. 잘 실패한다는 말은 일부러 성공을 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베케트는 이미 성공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잘 실패한다는 말의 의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는 의미였다. 무지란 자기 자신에 대한 미스터리가 풀리지 않고 남아 있는 장소다. 잘 실패한다는 것은 뻔한 것 너머를 바라보거나 우리가 아는 것 그 너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것을 본다는 의미다.

 

잘 실패하려면 질문을 던지고 결과를 의심하며 불확실성에 푹 젖어 들어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실패란 그것이 습관이 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좋은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이 깊은 무지를 드러내는 방식은 실패 뿐이다. 실패에서 실패로 엮이며 나아가는 반복적인 과정이야말로 과학이 진보하는 방식이다.

 

조금씩 개선되며 나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피드백을 조금 덜 전문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바꾸면 실수 교정 작업이다. 세렌디피티란 개념에 대해 저자는 한 마디 한다. 세렌디피티는 예상하지 못한 행운, 우연한 발견이란 의미다. 사실 소위 말하는 행운의 발견은 열심히 일하다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나온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과학적 진보는 단순하고 매혹적인 행운에 의해 갑자기 나타나기보다 멍들고 깨지는 사건과 실패, 길고 힘든 수정 작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과학은 난처함과 혼란, 회의주의, 실험이라는 환경을 자양분으로 먹고 자란다. 이것과 다른 방식은 과학을 경직시키고 근거 없는 믿음을 퍼뜨릴 것이다. 성공이 대단하고 흥미로울수록 그것을 얻기는 어렵고 실패로 이어질 확률도 높아진다.

 

훌륭한 과학자라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발견하는 데 능해야 한다. 실패는 더 새롭고 더 훌륭한 문제를 찾아내는 가장 믿음직한 원천이다. 실패할 확률이 높을 때 과학의 지지자들은 열정을 보인다. 우리는 성공적인 과학에 대해서만 배우지 실패한 과학은 배우지 않는다. 이러면 과학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학을 이루는 모든 사실들은 사람들이 수많은 실패를 딛고 힘들게 얻은 결과다.

 

과학은 단지 교과서 속에 깔끔하게 박제되어 보존 처리되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인류의 모험이다. 그리고 모든 인류의 모험이 그렇듯 과학에는 실패라는 조그만 구멍들이 송송 뚫려 있다. 실제로 이뤄지는 과학은 잘못된 방향 전환과 막다른 골목, 그리고 한때 사실이었다가 틀린 것으로 판명되는(가끔은 그것이 다시 옳았다고 드러나기도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기후 과학, 세포, 생물학, 물리학, 화학, 수학을 막론하고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속도로 온갖 실수담이 생겨나는 중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과학의 진보다. 과학자들은 여기저기 손대고 꾸물대고 찔러보는 놀이와 비슷한 일을 한다, 이것은 부자연스런 행동이 아니라 몹시 진지한 일이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보통 같은 곳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한데 모은다. 이들은 범주를 넘나들며 작업해 새로운 해법을 찾는다. 이것은 꽤 흥미로운 사후 관찰이기는 해도 창의성을 실제로 발휘하기 위한 처방이라 볼 수는 없다. 결국은 어떤 아이디어를 지녀야 하고, 그것을 서로 떨어진 다양한 영역에 적용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이미 아는 지식이 새로운 질문을 창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여러분이 확실한 해법을 찾는 중이지만 잘 되지 않는다면 실패야말로 대안적인 답을 찾도록 마음을 열어줄 것이다.(163 페이지) 무능력한 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에게 겸손을 가져다주고 자아를 초심에 들게 하며, 근면함을 되찾게 하고, 결국에는 자신감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거와 달리 오늘날은 실패에 투자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19세기에는 오직 자산가들만이 과학자 직업으로도 먹고살 수 있었다. 과학자(scientist)라는 단어 자체도 이런 사람들을 기술하기 위해 생겨난 말이다.(1833년 케임브리지 출신의 박식가 윌리엄 휴얼이 만든 말이다.)

 

저자는 창의적인 사고를 허용할 정도로 실패에 대한 여유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뭔가를 답하면 거기서 의문이 다시 생겨난다. 그렇기에 언제나 해답보다는 질문이 더 많다. 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도 숱하다. 하지만 어떤 시점에서는 끝을 내야 한다, 그래야 일이 진척된다. 파이어스타인의 이그노런스’(부제: ‘무지는 어떻게 과학을 이끄는가’)를 읽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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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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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왕조 시대의 산물인 궁녀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는 것은 궁녀란 지극히 내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록에 궁녀들이 등장하는 일 자체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기에 왕이 먼저 말하기 전에는 등장할 까닭이 없었고 왕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은밀한 사생활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궁녀 문제를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왕이 만부득이 궁녀 문제를 언급해야 할 때는 궁녀들이 모반, 저주, 간통 등의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다. 이런 가운데 계축일기’, ‘한중록’, ‘인현왕후전등 조선 시대 궁중 여성들이 남긴 기록과 모반 대역죄인들을 조사한 법정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등을 참고로 궁녀들에 대해 쓴 책이 신명호 교수의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궁녀.

 

추안급국안에는 궁녀들이 대거 등장한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궁녀 충원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가 살아 있었고 양녕의 폐세자로 인해 세종과 왕비는 새 궁녀들로 하여금 모시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신빈 김씨는 사이가 참 좋았다. 공노비 출신의 신빈 김씨는 세종에게서 아들 여섯(딸 둘은 일찍 사망)을 낳았다.

 

연산군의 궁녀로 후대 왕을 낳지 못한 장녹수(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의 가비였던)와 광해군의 궁녀로 역시 후대 왕을 낳지 못한 김개시(노비의 딸)는 나쁜 궁녀의 대명사다. 연산군은 눈에 확 띄는 미녀도 아니고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로 연상이기까지 한 장녹수를 딱 한 번 보고 바로 입궁시켰다. 김개시는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김개시는 어릴 적 입궁하여 상궁이 되었으나 후궁이 되지는 못했다.

 

광해군의 궁녀로 있다가 선조의 궁녀가 된 뒤 다시 광해군에게로 간 김개시는 광해군의 제조상궁으로서 당대의 실력자 이이첨과 함께 당시의 정치판을 좌지우지했던 실세였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걸림돌이었던 인목대비를 무력화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스스로 알아서 했다. 갑신정변 5년 전인 1879년 김옥균의 동조자로 입궁한 이우석은 체격도 크고 힘도 세 양산박의 수호지의 여장부 이름인 고대수로 불렸다.

 

37세의 그녀는 기운이 세고 용모는 단정하지 못하였기에 무수리를 맡았다. 무수리는 출퇴근이 가능했다. 궁중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첩자로서는 무수리가 제격이다. 조선시대에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추존 왕 덕종 비 소혜왕후, 예종 비 장순왕후, 안순왕후, 성종 비 공혜왕후, 인조 비 인열왕후 등을 배출한 청주 한씨 가문이다.

 

세조 비 정희왕후, 폐비된 성종 비 제헌왕후, 성종 비 정현왕후, 중종 비 장경왕후, 중종 비 문정왕후를 배출한 파평 윤씨 가문도 다섯 명이지만 폐비된 제헌왕후를 제외해서 그런지 2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태종 비 원경왕후, 숙종 비 인현왕후, 고종 비 명성왕후, 순종 비 순명효왕후를 배출한 여흥 민씨 가문이 3등이다.

 

소혜왕후의 고모(한확의 여동생) 청주 한씨가 명나라 영락제의 궁녀 생활을 하다가 영락제가 죽자 순장되었다. 명나라에 보내는 공녀는 사대부 가문에서 골랐고 청나라에 보내는 공녀는 공노비 가운데서 골랐다. 청주 한씨가 영락제의 사랑을 받았던 까닭에 오빠 한확은 승승장구했다.

 

오따 줄리에는 임진왜란 중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간 여성이다. 오따 줄리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의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추종하는 파를 이기고 패권을 차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총애를 받았다. 히데요리를 추종하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패배한 사무라이들이 할복하는 관행을 깨고 항복하지 않았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고니시는 공개처형된 후 효수되었다.

 

오따 줄리에가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니시 부인을 시중들 때였을 것이다. 도쿠가와가 천주교 금지령을 내렸는데도 줄리에는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발각되어 체포된 뒤 외딴 섬으로 유배를 갔다. 줄리에를 사랑한 도쿠가와도 그녀의 신앙을 버리게 하지 못했다. 오따 줄리에와 반대의 경우가 굴씨(屈氏).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명나라가 멸망한 후 귀국할 수 있었다.

 

이때 소현세자는 명나라 궁녀와 환관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에게 준 선물이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의 황녀였던 굴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자성의 반란으로 숭정제가 자살하자 굴씨도 따라 죽으려 했고 이에 주황후가 말려 자살하지 않고 민가에 숨었다가 청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혔다. 주황후는 자살했다. 굴씨는 인렬왕후 조씨(자의대비)의 궁녀가 되었다.

 

70의 나이에 굴씨는 조선에서 숨을 거두었다. 굴씨는 자신을 서쪽 근교의 길에 묻어달라고 했다. 굴씨는 그곳에 자신을 묻어주면 왕의 군대가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최회저도 소현세자를 따라와 궁녀가 되었다. 80 넘어서까지 살았다. 조선의 숭명반청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숙종 25년에 정식 상궁 교지를 받았다. 왕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소속된 궁녀들만 관할했을 뿐 관할 밖의 궁녀에 대해서는 선발권조차 없었다. 긍녀의 충원도 각 처소에서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왕의 대전, 왕비전, 대비전, 세자전 궁녀들이 각각 독립적이었다는 의미다. 궁녀들이 충성을 바치는 1차 대상도 왕이 아니라 자신들을 거느린 주인이었다. 그들은 운명공동체의 관계를 맺었다.

 

세자가 왕이 되면 세자궁의 궁녀들이 대전 궁녀가 되고 왕이 죽으면 궁녀들은 왕의 장레를 치른 후에 여승이 되거나 대궐 밖으로 나가 여생을 보냈다. 각 처소별로 궁녀 수를 명시한 것은 성종 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궁녀 수가 늘어났다. 이는 왕실 구성원이 늘어나는 것과 더불어 각 처소의 궁녀 조직이 점차 비대해지고 업무량도 늘어난 까닭이다.

 

즉 왕족들이 각 처소별로 독립 생활을 하며 음식, 바느질, 자수, 빨래, 청소, 양육 등 궁중의 실생활에서 요구하는 각종 여성 노동이 증가했다는 의미다. 궁녀는 왕의 개인 종이기도 하고 동시에 경국대전에 규정된 공적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궁녀는 왕의 개인 노비인 내수사(內需司: 조선시대 왕실 재정의 관리를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궁중에서 쓰는 미곡·포목·잡화·노비 등을 관리했다.)의 여자 중에서 충당할 수도 있었고 공노비나 일반 국민 중에서 충당할 수도 있었다.(112 페이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헸던 10년 동안 광해군 측의 궁녀들은 인목대비를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고 모함했다. 인조 반정 직후 인목대비를 괴롭힌 원흉으로 지목된 상궁 김개시는 목이 잘렸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다소의 예외를 제외하면 궁녀는 기본적으로 공노비와 사노비 등 노비 출신의 여성들이었다. 지밀 상궁의 경우 네 살에 입궁했다. 침방 상궁은 여섯 살에 입궁했다.

 

네 살 입궁 사례는 자식 없는 대비의 어린 수양딸을 하기 위해 입궁한 것이었다. 물론 조선 시대 17세기 궁녀들의 입궁 나이와 고종, 순종 대의 궁녀들의 증언은 일치하지 않는다. 미혼 궁녀들은 각 처소 주인들의 시중과 의식주 관련 노동을 위해 입궁했고 기혼 궁녀는 유모나 보모 등 아이의 양육과 관련된 일로 입궁했다. 예비 궁녀로 입궁하는 아이들은 적어도 일곱 살 이상이었고 아이 양육을 위한 기혼 궁녀들의 입궁은 나이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132 페이지)

 

왕의 유모는 봉보부인이라 불렸다. 1품이었다. 봉보부인은 매년 쌀과 콩 60석을 받았다. 영의정이 받는 양보다 많은 것이었다. 유모는 궁녀들처럼 내수사나 각사의 여자 종에서 선발되었으므로 공노비 신분인데 봉보 부인이 되면 자연 면천(免賤)되었다. 심지어 예종은 봉보부인의 친족 27명을 면천해주었다. 연산군은 이것을 빌미로 봉보부인의 친족을 전부 다 면천시켜 주려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139 페이지) 정식 유모 외에 어쩌다가 왕에게 한번 젖을 먹인 여성들도 면천되었다.

 

원자(元子) 이외의 왕실 아이들 즉 왕자와 공주, 옹주 등이 혼인으로 궁궐을 나가면 보모 상궁은 으레 따라서 출궁하곤 했다. 출궁한다고 해서 궁녀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왕자와 공주의 궁방(宮房)에 소속된 궁녀로 바뀔 뿐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간이 틀어진 시초가 바로 보모 상궁들이 잘못 가르친 데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궁녀는 5품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4품 이상은 후궁이다.

 

조선 시대 양반 관료 조직이 크게 9품에서 5품까지의 사()4품에서 1품까지의 대부(大夫)로 구성되었듯 내명부의 조직도 9품에서 5품에 이르는 궁녀와 4품에서 1품에 이르는 후궁으로 양분되었다.(155 페이지) 5품에서 6품은 상궁, 상의 등 상()이라는 말 다음에 구체적 업무 내용이 들어갔다. 7품에서 8품까지는 전빈, 전의 등 전()이라는 말과 함께 담당 업무가 들어갔다. 9품은 음악을 연주한다는 의미의 주() 다음에 긍상각치우의 5음이 들어갔다.

 

상궁은 마마님이라 불렸고 나인들은 항아(姮娥)라 불렸다. 왕의 승은(承恩)을 입고도 후궁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특별 상궁, 승은 상궁 등으로 뷸렸다. 각 처소에는 궁녀 전체를 통솔하는 제조(提調) 상궁이 있었다. 제조 상궁과 부제조 상궁은 각 처소의 지밀(至密)에 소속되었다. 대전(大殿) 궁녀 대부분은 전문직 여성이었다. 대전의 긍녀 중에서 왕의 잠자리 상대가 될 가능성이 높은 궁녀는 사실상 지밀의 젊은 궁녀들로 한정되었다.

 

반면 대전 궁녀들 중의 대다수는 평생 자기 업무 분야에 종사한 철저한 전문가로 존재했다.(169 페이지) 궁중 생활 문화의 진수를 담담, 전승한 주역이었던 것이다. 상궁과 나인 이외의 여성들이 있었다. 방자, 취반비, 무수리, 파지 등이다. 방자는 방에 딸린 사람이다. 밥하는 취반인을 취반비라 했다. 궁중에서 물 긷는 사람은 무수리라 불렀다. 세숫물을 담당하는 사람을 수모(水母)라 했다. 파지(巴只)는 청소를 맡은 사람이다.

 

상궁이나 나인은 평생 주인을 위해 수절했다. 방자, 취반비, 무수리, 파지 등은 그런 억압에서 자유로웠다. 내의원에 속한 의녀들은 출퇴근을 했고 혼인도 할 수 있었다. 궁중에 일이 없을 때는 여성 범죄자를 조사하는 수사관 역할을 하기도 했고 궁중 연회에서 가무를 보여주는 기생 역할도 담당했다.(188 페이지)

 

낮은 물론 은밀한 왕의 잠자리까지 함께 한 지밀 나인들은 최고의 측근이 되었다. 침방, 수방, 소주방, 생과방, 세수간, 세답방 등의 나인들은 굳이 밤까지 일할 필요가 없었다. 왕과 왕비의 침실에 관심을 가지면 대역죄로 내몰렸다. 왕이나 왕비가 어느 방에서 잠을 자는지, 누가 침실을 지키는지, 몇 명이나 지키는지 등은 국가 최고의 기밀이었다. 긍궐의 특성상 수완이 좋은 궁녀는 각종 이권에 개입할 수 있었다.

 

조선 시대 궁녀들은 재산 증식에 열심이었다. 궁녀는 긍정적으로 보면 혼인을 포기한 전문직 여성들이라 할 수 있다. 궁녀들이 꽃놀이나 뱃놀이를 갈 때 기생은 물론 액정서(掖庭署)의 별감이나 궁의 남자 종들도 여보란 듯이 거느리고 다녔다.(214 페이지) 인조, 효종, 현종 3대에 걸쳐 상궁으로 있었던 박씨는 대궐 밖에 자기 소유의 가옥과 토지를 매입해 국가의 공증을 받기도 했다. 액정(掖庭)은 궁궐 영역을 뜻한다.

 

박씨는 당연히 소작인이나 노비에게 토지를 경작시켰다. 많은 소작료를 거두었다. 박씨는 양손자에게 재산을 전부 물려주었는데 양손자는 이를 곧바로 팔아버렸다. 비녀를 꽂고 어른 복장인 배자를 입고 하는 계례(筓禮)가 있다. 긍녀들도 계례를 치렀다. 성인식과 혼례식을 결합한 의례다. 궁녀들은 혼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실제는 신랑 없이 혼례식을 치렀다.

 

어려서 입궁한 궁녀가 자신의 상전과 맺는 관계는 주인과 여종의 관계였지만 그들은 형식적인 주종관계를 넘어 심정적 의리 관계를 맺곤 했다.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열세 살에 궁녀가 된 계환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궁녀가 된 지 7년만에 인조 반정을 만나 유배를 갔다가 다시 소현세자의 나인이 되어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궁까지 되었다. 더욱 원손의 보모 상궁이 되어 인조 이후 2대까지의 영화를 보장받았다.

 

그녀는 30여년 궁녀 생활의 마지막을 자신의 주인인 강빈에 대한 의리와 충성을 지킴으로써 마감했다. 상궁과 나인 등 정식 궁녀는 기본적으로 왕이나 세자 등 주인의 여자로 간주되었다. 그들의 간통은 무거운 처벌로 처리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은 사형수들을 가을에 처형했다. 그 기간에 국가에 경사라도 생기면 사면되었다.

 

반면 모반대역(謀反大逆) 죄인은 부대시형(不待時刑)을 받았다. 곧바로 처형된 것이다. 때를 기다리지 않고 처벌한 것이다. 상궁이나 나인의 간통은 부대시형으로 처리되었다. 절대 살려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궁녀는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성을 단념해야 했다. 상대 남자도 목을 베었으니 남자도 궁녀와 사랑을 나누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간통하여 임신한 경우에는 출산 후 바로 죽였다.

 

그럼에도 궁녀들의 간통은 근절되지 않았다. 출궁한 궁녀들의 성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곤장 100대에 처했다. 출궁한 궁녀들의 성을 금지한 결정적 이유는 비밀 유지 차원이었다. 남자들의 온전한 혈통을 지키기 위한 차원이기도 했다. 그들은 출궁 전에는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출궁 이후에는 여승이 되어 죽을 때까지 정절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사도세자의 지밀 상궁인 수칙 이씨도 궁에서 나갔다.

 

그 전에 궁에서 나온 이모를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궁에서 나온 수칙 이씨는 스스로 죽을 작정을 한 듯 보였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다. 그 사이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했다. 수칙 이씨는 서른이 넘은 나이가 되었다. 정조가 궁녀를 보내 조사를 명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수십 년 동안 수절하며 어렵게 사는 궁녀 소식에 얼마나 감동했겠는가.

 

정조는 수칙 이씨에게 종 2품을 내렸다. 궁녀들은 한 방에서 2, 3명씩 생활했다. 궁궐이라는 한정된 공간 때문이었다. 상호 감시를 위해서였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세 번째 이유로 동성애가 생겼다. 세종의 큰 며느리 순빈 봉씨가 그 주인공이다. 지밀 상궁인 소쌍이 파트너였다. 세종은 궁녀 내은이와 내시 손생이 정이 깊어져 미래를 언약하며 청옥관자를 주고 받은 사건을 참형으로 다스렸다.

 

세조는 나에게는 문()에는 귀성군(龜城君)이 있고 무()에는 홍윤성이 있으니 족히 근심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귀성군은 세종의 손자이자 세조의 조카였다. 귀성군 이준은 18세에 병조판서, 28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귀성군에게 덕중이라는 궁녀가 편지를 보냈다. 사모하는 감정을 절절히 쓴 편지였다. 죽음을 무릅쓴 편지였다. 수양대군의 아이를 낳은 덕중은 후에 소용(昭容)이 되었다.

 

세조의 부름을 받지 못해 외로워진 덕중은 내시 송중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이에 경악한 송중은 이를 세조에게 알렸다. 세조는 덕중을 살려주었다. 다만 덕중을 특별 상궁으로 강등시켰고 내시 송중도 그대로 궁중에서 일하게 했다. 그런 덕중이 귀성군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갈피를 잡지 못한 귀성군은 아버지(임영대군)에게 고백했고 아버지는 다시 형 세조에게 고했다.

 

이번에도 세조는 대범하게 처신했다. 덮어두었으나 다만 덕중을 방자로 강등시켰다. 덕중은 그 이후에도 귀성군에게 편지를 보내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귀성군에게 죄는 저들(편지를 전해준 내시 포함)에게 있다는 말을 했다. 내시 후보자를 화자(火者)라 한다. 효자동은 내시들이 모여살던 화자동이 바뀐 것이다. 은평구 갈현동의 궁말이란 마을은 출궁한 궁녀들이 모여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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