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왕실문화총서 9
심재우 외 지음 / 돌베개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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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왕위 계승자인 세자(世子)의 세는 대를 잇는다는 의미다. 세자의 원어는 계세지자(繼世之子). 아버지의 대를 잇는 아들이라는 의미다. 고려시대에 태자로 불리다가 원 간섭기부터 세자 또는 왕세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원자(元子)는 왕의 적장자로 아직 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적장자가 왕이 된 경우는 일곱 건이다.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이다.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 명종의 장자 순회세자,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 정조의 장자 문효세자, 순조의 장자 효명세자 등은 요절한 세자들이다. 원자는 특별히 책봉할 필요가 없었으나 태종은 양녕대군을 원자에 책봉했다. 세자의 자질이 의심스러워 지식과 인격수양을 위한 예비 기간을 두고자 했기 때문이다.

 

양녕대군은 원자로서 처음으로 성균관 입학례를, 문종은 세자로서 처음으로 성균관 입학례를 치른 사람들이다. 연산군은 부왕 재위시 태어난 첫 원자다. 성종 7년의 일이다. 의안대군은 1382년에 태어났고 부왕 태조는 1392년에 즉위했다. 양녕은 1394년에 출생했고 부왕 태종은 1400년에 즉위했다. 문종은 1414년에 출생했고 부왕 세종은 1418년에 즉위했다.

 

대리청정을 한 세자는 모두 일곱 명이었다. 문종(710개월), 예종(111개월), 광해군(610개월), 경종(210개월), 사도세자(135개월), 정조(3개월), 효명세자(33개월) 등이다. 대비의 수렴청정도 일곱 차례였다. 성종, 명종, 선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대에 이루어졌다.

 

세자시강원은 서연(書筵) 즉 세자의 교육을 담당했고 세자익위사는 세자 호위를 담당했다. 세자익위사는 태종 때 설치되었다. 성종 재위 중 원자의 양육과 교육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원자로 하여금 민간의 고통과 물정을 알게 하기 위해 사가로 내보내 교육시킬 것인가, 임금이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보고 배울 수 있게 할 것인가가 쟁점이었다.

 

세자 책봉은 대체로 6, 7세에 이루어졌다. 세자 책봉 방법은 임헌책명(臨軒冊命)으로 규정했다. 임헌책령이란 원자가 정전의 뜰에 나아가 절차에 따라 책봉 받는 방식을 말한다. 세자 책봉례는 왕통의 차기 계승권자를 천하에 포고하는 것이다. 백성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세자는 국본(國本)으로 인식되었다. 세자 책봉일은 길일을 택했다. 그 이전에 책봉 사실을 종묘에 고했는데 이때 세자의 이름이 정해졌다.

 

책봉례를 할 때 세자는 면복(冕服)을 갖추었다. 일곱 가지 무늬가 새겨진 칠장복(七章服)을 입은 것이다. 칠장복은 곤복(袞服)이라고도 한다. 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는 점을 쳐 길을 택해 거행했다. 습의(習儀) 즉 예행연습을 행했지만 실수가 빚어지기도 했다. 세자가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치렀다고 해서 성균관에서 공부를 한 것은 아니다. 양반 자제들과 함께 성균관에서 공부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세자의 성균관 입학식은 유학의 스승인 공자에게 술잔을 올리고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의식을 통하여 세자 역시 유학을 학습하는 학생이라는 점을 만천하게 알린다는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는 대성전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한 후 유생복인 청금복(靑衿服)을 입고 명륜당에서 속수례(束修禮)와 입학례를 거행하는 순서로 이루어졌다.

 

세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완결점에 세자빈이 있다. 왕실이나 일반민의 경우 집안의 주인은 여성이고, 그 주인 역할을 할 며느리의 존재는 중요하다. 세자빈이 집안에서 맡은 역할을 잘해주어야 세자가 후계자 수업을 잘 받을 수 있고 그 위치가 더 확고해질 수 있다. 왕들은 스스로 왕의 아름다운 덕화를 상고해보면 반드시 지어미의 유순함에 힘입어 이루어졌다고 말했을 정도다.

 

세자는 현왕을 이어 왕이 될 사람으로서 정치적 역량을 키워야 하는 한편 왕 자리를 절대 넘보아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세자 교육은 이 점을 늘 인식하게 하는 양면성을 띠었다. 법적으로 인정된 섭정으로 대비의 수렴청정과 세자의 대리청정이 있었다. 전자는 왕과 대비의 공치(共治) 차원이었고 후자는 왕의 통치를 보조하는 차원이었다.

 

첫 대리청정 주인공은 문종이었다. 세자의 대리청정 사례가 많지 않은 것은 조선시대 적장자로 대통을 이은 왕이 많지 않았고 장성한 세자가 있고 현왕이 노년기에 접어든 상황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종은 대리청정을 시키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인조는 장성한 아들 봉림대군이 있었음에도 시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의 평균 나이는 20.8세였다. 나이는 적게는 열 살에서 많게는 서른 살에 이르렀다. 청정 기간은 1년에서 13년까지이다. 평균 기간은 5.2년 정도로 수렴청정 평균 기간과 비슷하다. 왕이 나이가 많거나 질병 등으로 국정 운영 능력이 떨어졌을 때 대리청정을 했고, 정국 전환의 의도를 가진 임금의 의도로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고, 전란 중 대리청정을 했고(광해군, 소현세자), 불안한 세자의 정치적 지위를 안정시키려는 의도로 왕이 대리청정을 명한 경우에 대리청정을 했다.(경종, 정조)

 

정조의 대리청정은 3개월에 불과해 그의 통치가 대리청정 효과에 힘입은 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리청정은 세자가 정치적 희생양이 될 여지가 다분했다. 문종은 20년이나 세자로 있다가 28세의 장성한 나이에 청정을 시작했다. 경종은 29세의 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영조가 사도세자(1735 1762)에게 부과한 대리청정은 양위 소동이 일어난 가운데 결정되었다. 영조 51년인 1775년 세손(이산)에게 내려진 대리청정 결정은 최초의 세손 대리청정 사례다. 당시 영조는 83세의 고령이었다. 1442년 대리청정기에 세종은 세자가 남면해 조회를 받고 신하들은 칭신(稱臣)해야 한다고 주장해 반발을 샀다. 결국 동쪽에 앉아 의식을 진행하도록(서향하도록) 했고 칭신은 포기했다.

 

세종(재위 1418 1450)144792일 신하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신하들의 세자에 대한 칭신, 세자의 남면, 신하들의 사배(四拜) 등을 관철시켰다. 사도세자는 13년 넘게 대리청정 했지만 부왕 영조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3년여만에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세종은 대리청정을 수행하는 세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떠돌이 생활을 감수했고 세자에게 왕에 버금가는 정치적 권위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두 차례 양위 소동을 일으킨 세종은 양위 선언 한 달 전에 연희궁(延禧宮)을 수리하도록 조처했고 수리가 끝나자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종은 144512일 경복궁에서 연희궁으로 갔다가 313일 희우정으로 옮겼고 412일 다시 연희궁으로 옮겨 107일까지 그곳에서 기거하였다.

 

그리고 108일 아들 수양대군의 집에 가서 다음 해 126일까지 거처했다가 다시 연희궁으로 행차했다. 연희궁, 희우정, 수양대군가, 효령대군가, 양녕대군가 등이 세종이 머문 곳들이다. 23개월이 넘는 기간에 세종이 시어소(時御所) 생활을 한 것은 무려 690일이었다. 세종의 시어소 생활은 건강을 되찾기 위한 피병(避病) 목적도 있었지만 세자가 정궁을 장악하고 대부분의 국사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대리청정을 통해 세자로 하여금 정치적 장악력을 확실히 갖추도록 하고 궁극적으로 양위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영조는 세자를 믿고 세자에게 왕에 버금가는 권한을 주려했던 세종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영조는 처음부터 전위할 생각이 없었고 다만 대리청정을 통해 양위 소동을 일으켰을 뿐이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청정을 시키려 하자 노론보다 소론이 더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세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다. 영조는 세자를 정치일선에 내세웠지만 뒤에서 소론을 중용하여 노론을 견제하는 정책을 폈다.

 

당연히 노론이 소론에 대해 공세를 강화하게 되었고 이에 사도세자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영조는 세자를 심하게 책망했고 부자 사이는 갈등으로 치달았다. 17521129일 소론의 이종성이 영의정이 되자 노론계의 사간원 정언 홍준해가 상소를 올려 그를 극단적으로 탄핵했다. 당시 세자는 상소문을 돌려주며 타이르는 조처를 취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영조는 격노하여 홍준해를 제주도로 귀양보내는 한편 세자를 크게 책망했다.

 

이때 세자는 궁중을 휩쓴 홍역을 앓고 난 직후임에도 엄동설한에 눈 위에서 대죄(待罪: 죄인이 처벌을 기다리는 것)하였고 그 때문에 몸이 몹시 상했다. 다음 달 소의(昭儀) 문씨 문제로 영조의 선위 파동이 일어났다. 영조는 10세의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 효장세자의 빈인 현빈궁 소속의 나인이었던 소의 문씨를 총애했다. 소의 문씨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선희궁)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다가 대비인 인원왕후 김씨(숙종의 계비)에게 질책을 당하고 종아리를 맞는 일이 있었다.

 

화가 난 영조가 항의의 뜻으로 선위하겠다고 하자 인원왕후는 그러라고 맞받아쳤고 이에 세자는 또다시 대죄하다가 머리가 돌에 부딪혀 망건이 부서지고 피가 나는 지경을 당했다.(인원왕후는 영조가 왕이 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1755년 을해옥사(소론 일파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모)가 일어나 소론이 대대적 타격을 받고 노론은 확실한 정치적 기반을 잡았다. 이에 영조는 친정체제를 강화했고 세자의 입지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17572월과 3월에 세자를 후원하던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와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가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세자는 더욱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고 세자는 폐위될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약원 도제조 김상로는 세자를 폐하자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당시 김상로는 세자를 진찰한 후 세자의 몸 상태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고했다. 다음 해 8월 명릉(숙종,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능)으로 능행길에 나섰던 세자가 비를 맞아 몸이 몹시 좋지 않자 돌아오는 길에 잠시 겅기감영에 들렀는데 김상로가 이를 세자가 반기를 들고 군대를 일으킨 것으로 참소했다.

 

영조가 세자의 폐위 전교를 승정원에 내리자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계가 반대했다. 이에 영조는 이를 철회했지만 세자의 울화증은 크게 악화되었다. 이 이후 왕과 세자는 화합할 수 없는 단계로 들어섰다. 1760년 왕이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겨가며 두 사람의 소통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며칠 후 습종(濕腫) 치료를 위해 세자가 온양 온궁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로 인해 세자는 거병(擧兵: 쿠데타) 의심을 받았다.

 

다음 해 4월 세자가 관서 지역으로 미행을 떠나자 노론은 이 사건을 정치공세로 밀어붙였다. 1762년 액정별감 나상인의 형 나경언이 세자가 불궤(不軌: 모반)를 모의한다고 고변했다. 나경언은 동궁을 무고한 혐의로 참형당했지만 여파는 세자에게 떨어졌다. 사건 발생 20일이 지나자 영조는 휘령전 뜰에 세자를 불러 자진하도록 강요했고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은 뒤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영조는 세자를 불신했고 어린 세자에게 노회한 정치가 이상의 능력을 요구했다. 세자가 이에 부응하지 못하자 영조는 세자를 불신했고 이런 부왕의 태도에 세자는 더욱 위축되어 가는 등 마음의 병을 키워갔다. 붕당간의 갈등과 연결되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참사로 이어진 이 사건은 부왕의 신뢰가 전제되지 않은 대리청정은 교육이 아니라 독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효명세자는 자신의 정치적 모델을 할아버지 정조에게서 찾았다. 정조대에 시행되었던 능행 정치도 효명세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효명세자는 정치 운영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정조를 흠모해 그를 닮고자 했다. 효명세자의 죽음도 의문스럽다. 스무 살 전후의 똑똑하고 패기있던 효명세자는 비록 무능했지만 지지를 보내준 아버지 순조의 후원 아래 할아버지 정조를 자신의 모델로 삼아 안동 김씨 세력과 힘겨운 싸움을 했다.

 

조선시대 세자는 왕실의 대를 잇고 왕조의 영속(永續)을 위해 보위를 이어가는 존재로 비창(匕鬯)이라 불렸다. 비창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그릇의 명칭으로 대를 이어 종사를 받든다는 의미다. 조선은 유교 이념을 국시로 삼아 국초부터 세자 교육에 효제충신(孝弟忠信)을 중요시했지만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혈연관계가 적대적 관계로 돌변하는 비극적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태조와 태종, 인조와 소현세자,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왕 외에도 왕비, 대왕대비, 친인척, 고위 관료 등 왕실을 둘러싼 대부분의 인물들이 세자의 정적이 될 수 있었다. 생모조차도 세자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사도세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보위에 오르지 못한 채 이복형 방원에게 살해당한 이방석, 세자 지위를 박탈당하고 동생에게 보위를 물려준 양녕대군 이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 이조, 할아버지 인조에게 버림받은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철, 아버지에게 죽임당한 사도세자 이선, 보위에 오르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떠돌던 영친왕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연과 질곡은 다양하다.

 

이들은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이다. 병사한 세자들이 아닌 쫓겨나고 죽임 당하고 떠돌아야 했던 세자들이다.(의경세자, 효장세자, 문효세자 등은 병사했다. 효명세자는 죽임 당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현세자는 34세에 숨을 거두었다.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침을 놓은 의관 이형익에게 어떤 죄도 묻지 않았음은 물론 이형익을 처벌하라는 관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청나라에서도 소현세자의 죽음에 놀라 사신을 파견하여 조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조선시대 세자의 문학을 살필 수 있는 대표 인물이 사도세자와 효명세자다. 사도세자를 양육한 상궁 나인들은 대부분 경종과 경종비 선의왕후를 모시던 사람들로 영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지 못했다. 효명세자는 조선 왕실의 가장 뛰어난 문인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서른 두 명의 세자가 있었고 이들에게는 서른 다섯 명의 적자 형제와 여든 아홉 명의 서자 형제가 있었다. 왕에게 세자가 없었던 사례는 단종, 덕종(추존왕), 예종(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한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인성대군. 인성대군은 세 살에 요절, 장순왕후는 인성대군 낳은 후 산후병으로 타계), 원종(추존왕), 헌종(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은 왕자 얻지 못하고 옹주 하나 얻고 사망), 철종(원자 이융준 생후 6개월만에 사망) 등이었다.

 

두 명이었던 사례는 태조에게 방석과 정종, 태종에게 양녕과 세종, 세조에게 덕종(추존왕, 의경세자)과 예종, 인조에게 소현세자와 효종, 영조에게 진종(효장세자)과 장조(사도세자), 정조에게 문효세자와 순조 등이다. 선조의 세자 광해군과 동복형 임해군, 이복동생 영창대군 사이의 갈등은 주목할 만하다. 선조와 광해군의 사이는 임진왜란이 진행되면서 점점 나빠졌다. 선조의 위기의식과 열등감 때문이었다.

 

서자인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은 전쟁 상황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전선을 누비며 군사들을 격려하고 인심을 안정시켜 신망을 얻었다. 전쟁 후 광해군의 입지는 좁아졌다. 광해군은 선조가 죽고 바로 즉위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다, 선왕 사후 5일 후에 입관을 하고 즉위식을 치르는 왕실 관행을 어긴 것이었다. 불안감의 반영이었다. 서자 출신으로 인목왕후 김씨가 낳은 영창대군의 존재를 의식한 결과다.

 

광해군은 즉위 후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였다. 계축일기에 의하면 광해군은 영창대군이 자신의 세자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광해군의 세자는 영창대군에게는 조카였고 광해군이 영창대군과 자신의 세자의 관계를 생각한 것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인 것을 염두에 둔 결과다.

 

조선 시대의 서른 두 명의 세자에게 114명의 여자 형제(38명의 적자 형제, 76명의 서녀 형제)가 있었다. 사도세자의 동복 여동생 화완옹주가 남편을 잃고 궁으로 돌아왔을 때 영조와 사도세자는 악화일로의 관계였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편애를 받는 화완옹주를 질투하기도 했다. 화완옹주는 그런 사도세자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부추겨 영조를 경희궁으로 이어(移御)하게 했다. 영조는 신료들과 논의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왕비(정순왕후 김씨)만 데리고 경희궁으로 이어했다. 영조의 이어가 결정되자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불러 칼을 어루만지며 이후에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이 칼로 너를 벨 것이라 말했다. 화완옹주는 울면서 앞으로 잘할 터이니 목숨만 살려주세요라고 간청했다.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믿고 평양에 행차하기도 했다. 사도세자는 여동생 화완 옹주를 통해 부왕 영조와의 갈등을 해소하기도 했지만 화완옹주로 말미암아 임오화변의 비극을 재촉했다고 할 수 있다. 세자 인종이 부왕 중종에게 폐서인된 이복 형제인 복성군, 혜순옹주, 헤정옹주(이상 경빈 박씨 소생) 등을 복권 요청한 것은 화려한 아가위 꽃송이처럼 우애 가득한 형제간의 사랑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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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확산으로 도서관들이 휴관에 들어갔다. 211일 친구와 함께 도봉숲속마을 강의를 듣고 시내에 진입해 빌린 책들이 다섯 권 있다. ‘산성으로 보는 5000년 한국사’(이덕일), ‘경기도 산성 여행’(최진연),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한국학중앙연구원), ‘병자호란 1, 2’(한명기) 등으로 모두 서울도서관에서 216일 남한산성 해설을 위해 빌린 책들이다.

 

한 차례 반납 연장을 했으니 정상 반납일은 33일인데 도서관측이 225일부로 휴관을 하며 모든 이용자들에게 선물을 주듯 일주일씩 자동 연장 처리를 해놓았다는 사실을 오늘 확인하고 3일 도서관을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못 읽은 책을 마저 다 읽고 10일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3월은 왕릉 프로그램 하나, 숲 프로그램 두 개, 마을 해설 프로그램 하나 등을 준비해야 하는데 도서관을 갈 수 없어 참 난감하다. 현재 나는 도서관을 이용할 수도 없고 해설들도 잠정 중단되었고 숲해설 수업(受業) 개강은 3주 연기되었으니 사실상 자가 격리 중인 셈이다. 대구의 한 상인께서 코로나로 인해 매출이 전무하다시피 한 현실에 우는 모습을 티브이로 보았다. 마음이 아프다.

 

최악의 경우 인구의 40%가 감염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모든 상황이 심히 걱정스럽다. 행복하게 출발하고 22일까지 좋았던 2월이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로 악몽으로 막을 내리기 직전이다. 2월은 친구로 인해 시종 감사하고 행복한 달이었다. 그와 함께 3월 받을 수업 일정에 차질이 없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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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거미 - 자연에서 배우는 민주주의
박지형 지음 / 이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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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거미란 거미를 관찰하던 스피노자의 만년에서 비롯된 제목이다. 저자는 제한된 자원이 소수의 생물에 의해 독점되기보다 비교적 고르게 배분되어 다양한 생물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생태계의 원리를 자연의 민주주의라 부른다. 저자는 환경생태학자다. 생물학이 세포나 분자 수준에서 생명현상을 다룬다면 생태학은 보다 긴 호흡으로 생명의 신비를 노래한다.

 

홉스는 나의 어머니는 쌍둥이를 출산했다. 나와 공포를이란 말을 했다. 공포는 홉스의 어머니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을 침략하는 것에 놀란 것을 두고 이르는 말로 이로 인해 홉스는 조산아로 태어났다. 홉스는 왕과 국교를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왕당파와 의회를 통해 시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의회파 사이의 극심한 대립과 전쟁을 경험하며 공포의 시대를 벗어날 이성적 묘책을 궁리한 홉스의 화두를 이야기하며 저자는 자신의 책의 핵심 질문과 홉스의 이야기가 연결된다고 말한다.

 

홉스 같은 근대의 기획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자연은 실제로 항구적인 전쟁 상태인가?”(44, 45 페이지) 홉스는 인간 본성상 항구적인 전쟁 상태는 불가피하므로 사회적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는 개인의 권리를 위임받은 강력한 주권이 필요하다고 보았다.(187 페이지) 제한적인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개체들 중에 주어진 환경 조건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개체가 살아남는 것을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약자가 항상 경쟁에 져서 완전히 도태된다면 지구상에는 소수의 강자만이 남아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구한 진화 과정에서 생물다양성은 감소하지 않고 증가하였다.“(47 페이지)

 

네덜란드의 유대인 이민자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무신론자라는 죄목으로 유대인 사회에서도 추방당한 스피노자는 유럽이 주도한 근대적 질서의 모순과 혼동을 자신의 개인사 속에 구현했다.(54 페이지) 스피노자가 태어난 해는 1632년이다. 이 해에 서양 근대사에서 이름을 남긴 인물이 여럿 태어났다.

 

미생물학의 아버지로 현미경을 개발한 레이우엔훅,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르, 존 로크 등이 그들이다. 17세기는 어떤 시대였는가? 중세적 현상으로 생각하기 쉬운 마녀사냥이 최고조에 달한 때가 바로 17세기다. 독일의 30년 전쟁이 일어난 때도 17세기다. 네덜란드의 17세기는 공화주의자 더빗을 살해하고 왕당파를 추종했던 네덜란드 대중의 광기와 노예적 이성의 시대였다.

 

경제 버블의 원조격인 네덜란드의 툴립 피버(tulip fever)17세기에 일어났다.(한국사 이야기여서 그렇지만 17세기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기해예송, 갑인예송,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이 일어났다.) 1675년 페르메르가 숨을 거두었다.

 

2017년 세상을 떠난 존 버거는 발렌티너의 렘브란트와 스피노자를 인용하며 같은 시기에 암스테르담에 살았던 두 인물이 각자의 방식으로 교회의 권위에 저항하며 싸웠다고 말했다. 렘브란트가 파산 선고를 받은 해에 스피노자는 유대교회에서 추방당했다. 1656년에 일어난 일이다. 스피노자가 거미를 관찰하며 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들뢰즈는 스피노자가 파리를 잡아먹는 거미를 보며 죽음이라는 환원불가능한 외재성에 대해 사색했을 것이라 말했다.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동물을 먹이로 삼지만 사는 동안에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에 억압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리라. 스피노자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거미뿐 아니라 자연의 다양한 질서를 관찰하여 체계적인 생태 이론을 정립한 위대한 생태학자가 되었을지 모른다.(85 페이지)

 

허버트 스펜서는 적자생존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복잡한 다윈의 이론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복잡한 이론이 쉽게 이해되는 장점은 있지만 적자생존으로 단순화된 진화론은 자연뿐 아니라 인간 사회를 항구적인 전쟁터로 오인하게 할 위험이 있다.(91 페이지) 다윈과 게오르기 가우스가 생물 간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궁극적으로 알고 싶어 한 것은 경쟁배제 자체보다는 경쟁을 넘어선 공존의 비밀이었을지도 모른다.(102 페이지)

 

간디는 자신이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것을 받는 것도 도둑질이라 말했다. 그의 이 말은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을 생각하게 한다.(177 페이지) 그 자체의 필연성에 따라 존재하고 작용하기 때문에 자연에는 넘치는 것도 모자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스피노자는 어둠을 직시하고 어둠 너머 어렴풋이 비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까지 누구도 진정한 인간해방과 절대민주주의를 상상하지 못했기에 스피노자의 사상은 네그리의 말처럼 너무 이질적인 야성적 파격이라 할 수 있다.(179 페이지)

 

홉스가 자연상태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대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계약을 통해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고 보았다면 로크는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도 개인의 권리를 상호 인정하는 사회를 인정하는 사회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다.(187 페이지) 오직 계약을 통해서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끝내거나 타고난 권한을 신장시킬 수 있다고 믿은 사회계약론자들과 달리 스피노자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동체를 지향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묘사한 자연상태에서 개인들은 하나로 결합할 때 개인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권리를 집단적으로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192 페이지) 기득권 세력이 보이지 않는 발로 뛰어다니며 시장 질서를 교란시키는 인간 사회보다는 자연생태계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더 잘 작동한다.(219 페이지) 홉스가 자연상태에서의 혼란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절대권력을 가진 왕권을 옹호한 것과 달리 스피노자는 개인을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다중의 지배를 꿈꾸었다.(224 페이지)

 

다중에 의한 자율적 사회 구성은 전통적인 계급론의 관점으로는 잘 파악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다중은 실체를 드러냈다. 저자는 사회의 올바른 구성 원리를 고민하던 스피노자에게 거미 관찰이 영감을 준 것처럼 자연에서 얻은 생태적 상상력이 한계에 봉착한 근대적 민주주의의 대안을 찾아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좋은 길 안내자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243 페이지) 이제 프레데리크 로르동의 정치적 정서를 읽어야 할 순서다.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정이란 전통적 이원론을 전복하고 변용과 정서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운 스피노자에 대해 전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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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진화, 신의 출현 - 초기 인류와 종교의 기원
E. 풀러 토리 지음, 유나영 옮김 / 갈마바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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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 박사 에드윈 풀러 토리의 뇌의 진화, 신의 출현은 원제(Evolving Brains, Emerging Gods)와 번역본의 제목이 일치하는 드문 책이다. 저자는 뇌가 진화함에 따라 신들이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호모 하빌리스를 더 영리한 자아, 호모 에렉투스를 인식하는 자아, 옛 호모 사피엔스(네안데르탈인)를 공감하는 자아, 초기 호모 사피엔스를 성찰하는 자아, 현행 호모 사피엔스를 시간 속의 자아(를 가진 존재)로 분류했다.

 

신들은 약 200만년의 임신 기간을 거쳐 태어났다는 글로 포문을 연 이 책은 뇌 크기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커진 뇌의 특정 영역들과 이 영역들을 잇는 연결의 밀도라고 설명한다. 호모 하빌리스의 뇌가 커진 이유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이 있다. 기후와 기타 환경 조건의 변화, 고기 섭취 증가와 같은 식단의 변화, 사회적 변화 등이다.

 

사회적 뇌 가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장류는 그들의 유별나게 복잡한 사회 체계를 관리하기 위해 뇌를 더 크게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호모 에렉투스가 자아 인식이 없는 상태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 흔히 추웠던 기후에서 수십만 년 씩 생존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생존 기간을 헤아리면 호모 에렉투스는 지구상에 살았던 호미닌(현생인류의 근연종들) 중 가장 성공한 종이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성찰하는 자아를 가졌다는 말은 그들이 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인식했다는 의미다. 현생 호모 사피엔스가 보인 행동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새로운 것은 시신을 의도적으로 매장하면서 부장품을 묻은 것이다. 현생 호모사피엔스가 약 4만 년 전부터 보이기 시작한 새로운 행동들 가운데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은 것은 예술의 등장이다.

 

현생 호모 사피엔스가 갖춘 가장 획기적인 것은 자전적 기억이다. 정신적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에 경험했던 개인적 사건들을 다시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까닭에 자전적 기억은 자신의 미래 경험을 상상할 토대를 제공해주는 기억이다.(182 페이지) 이는 과거로부터 축적된 경험을 활용하여 자신을 미래에 온전히 - 이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투사(投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189 페이지)

 

이 기억은 이점인 동시에 짐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알고 불안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전적 기억의 발달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 시기에 시각예술이 분출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란 말을 한다. 벽화 동굴에 동물이나 그 밖의 영이 존재했다면 이는 미지의 것을 설명하는 데도 활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204 페이지) 동굴벽화를 좀더 복잡한 종교적 산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남아공의 인지고고학자인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가 대표적이다. 샤먼이란 원래 황홀경에 들어가서 병을 치료하는 시베리아 퉁구스 부족의 토착 주술사였다.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는 구석기 시대 동굴에 그려진 기하학적 문양은 샤먼이 황홀경 속에서 본 시각적 환각을 재현한 것이라 설명한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직립, 언어사용, 큰 두뇌, 작은 치아 등을 드는데 저자는 죽음에 대한 지식을 꼽았다. 강력 공감한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의 자전적 기억에 의해 활성화되는 뇌 영역과 미래의 사건을 상상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에는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건망증 환자가 과거는 물론 미래에 대한 사고에서 결함을 드러내는 것과 차원이 같다.(214 페이지) 정착 생활을 할 때 고인을 주거지 인근에 매장할 수 있고, 그래서 선대 조상의 시신이 점차 축적되었다.(241 페이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관계에도 혁명이 일어나 사람들은 조상령을 가정에 들이기에 이르렀다. 농경과 조상숭배는 전자는 생계유지를 위한 차원에서, 후자는 위급할 때의 원조를 위해 함께 발달했다.(254 페이지) 원시사회에 대한 연구는 혼령과 신들의 연속체가 흔했음을 보여준다. 신의 범위도 인간적 특성을 띠며 특정 집단이나 부족에 국한된 신에서부터, 더 높고 심지어 더 멀리 있는 신, 세상을 창조했지만 세상사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지는 않는 신에까지 이른다.(255 페이지)

 

서유럽에서 신이 출현한 증거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파키스탄, 남동부 유럽에 비해 모호하지만 내세에 대한 강박이 보편적이었음은 분명하다.(299 페이지) 5, 000년 전 4, 000년 전 중국 북부에서 룽산문화가 발달했다. 이 문화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조상숭배다. 조상과의 소통은 갑골을 이용한 점술을 통해 행해졌다. 갑골은 황소, 물소, 돼지, 양의 견갑골이다. 죽은 조상에게 특정 질문을 던져 뼈가 갈라질 때까지 열을 가해 갈라진 패턴을 조상이 내려준 답으로 해석했다.(308 페이지)

 

현생 호모 사피엔스에게 지고신이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신의 존재를 믿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문자 기록 이후에야 확인 가능하다. 6, 5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그 증거는 물의 신 엔키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원의 형태로 존재했다.(314 페이지) 4, 300년 전 유신론적 호미닌으로서의 현생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이래 신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정의하는 특성 중 하나가 되었다.(315 페이지)

 

죽음의 딜레마는 사람의 뇌 진화의 필연적 결과다. 인간은 나머지 자연으로부터 위풍당당하게 우뚝 치솟은 자기 자신의 찬란한 독특성을 인식하지만 결국 땅속 몇 피트 밑으로 돌아가 앞 못 보고 말 못하는 채로 썩어서 영영 사라진다.(327 페이지) 뇌 진화 이론은 신들, 그리고 신들과 공식 결부되는 공식 종교가 인간 뇌 발달의 산물이라고 상정한다.(331 페이지) 인간은 신을 필요로 한다.(357 페이지)

 

영국의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는 우리 생물종의 절대 다수는 인간의 허영심을 이토록 만족시키고 인간의 슬픔에 이토록 위안을 주는 믿음을 계속해서 묵종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358 페이지) 새로운 신과 종교가 계속해서 태어나듯 기존의 종교들은 계속해서 죽어갈 것이다.(359 페이지) ‘뇌의 진화, 신의 출현은 뇌의 진화에 따라 신이 출현한 사태(?)를 서술한 인상적인 책이자 투사란 말이 인상적인 책이다.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가 말한 샤먼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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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집요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하나는 執拗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輯要이다. 집요(執拗)하다는 말은 고집스럽게 끈질긴 것을 말한다. 집요(輯要)는 요점만을 모았다는 의미다. 두 단어는 반의어(反意語)는 아니지만 나는 반의어라 생각한다. 가령 박문호 박사가 자연과학 대 인문과학을 73의 비율로 50대가 될 때까지 양질의 책 3천권 정도를 집요하게 읽다 보면 정보가 서로 링크되면서 양()이 질()로 바뀌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했을 때 집요하다는 말은 책 전체를 집중해 통독하고 또 통독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리라.(그는 두 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한 번 읽을 가치도 없다는 말을 했다.)

 

박문호 박사는 하버드 대학 교육의 최종 목표는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그저 그런 책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라는 총장의 말을 인용했다. 박문호 박사는 어렵지만 피해 갈 수 없는 기본 학습량을 습득하는 학습 독서만이 우리의 학습 근육을 강화시켜준다는 말을 했다. 요점만을 모은 책은 도출 과정이 생략된 것이어서 어렵지 않고 좋은 책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능력을 기르게 하지도 못한다.

 

박문호 박사는 대칭의 붕괴를 이야기한다. 빅뱅 당시에 하나로 통일되어 있던 힘이 우주 팽창과 더불어 순식간에 네 가지 힘으로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동일한 성격을 띤 채 완벽한 대칭을 이루다가 우주가 팽창하고 서서히 식어가면서 다른 특성의 힘이 출현하게 된 것으로 중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 전자기력이 네 가지 힘이다.(우주가 식는다는 말은 화산 폭발로 분출한 용암이 식는 것을 떠올리게도 한다.)

 

대칭이 깨져야 무언가 생기는 것이다. 가령 우주 초기의 대칭이 깨짐으로써 생긴 것이 의식이다. 소립자 물리학 박사인 무라야마 히토시는 오른쪽과 왼쪽의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오른쪽과 왼쪽의 구별은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이 완전히 좌우가 바뀌어도 대부분의 물리법칙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무라야마 히토시는 물질과 반물질을 말한다.

 

물리학자 프랭크 클로우스는 전자가 양전하를 띠고 양성자가 음전하를 띠어도 겉보기에는 다를 게 없다는 말을 하며 물질에서 이런 바꿔치기가 일어난 것이 반물질이라 설명한다. 다시 무라야마 히토시에 의하면 현재의 소립자 이론에 따르면 물질은 반드시 자신과 짝을 이루는 반물질과 함께 태어난다.(이를 쌍생성이라 한다.)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면 쌍소멸이 일어난다. 물질과 반물질이 정확히 같았다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무라야마 히토시는 물질이 반물질보다 10억 분의 2 정도 많았기에 물질이, 우주가, 의식이, 우리가 있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이의 비밀을 쥐고 있는 중성미자 이야기는 생략..)

 

집요한 공부가 필요하리라.

 

* 글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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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8 15: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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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8 2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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