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소리로 텍스트 읽기, 걸으며 읽기 등 몸을 움직이며 하는 독서치료 실천에 제격인 봄의 문턱이다. 독서치료는 몸이 아픈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 않게 하려고 개입하는 것, 책이 지닌 모든 효과를 성실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실천 행위다.

 

소설가이자 독서치료사인 레진 드탕벨의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을 읽는다. 저자는 문학, 예술 분야에서 많은 상을 받은 저명한 분으로 음독(音讀)은 목소리의 진동에 어울리는 문체적 특성을 지닌 문학 텍스트를 매개로 신체기관의 가장 깊은 부위와 접촉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말은 시가 가진 신비한 힘은 리듬, 울림, 생각이라는 세 가지 힘이 합쳐져 생긴다는 프랑스의 심리 치료사 루시 기예의 말과도 상응한다. 여기서 잠시 신체기관과의 접촉이라는 주제와도 어울리며 현대의 우리에게 무엇보다 시사적인 기억 부조화에 대해 분석한 저자의 의견을 들어보자.

 

이를 위해 언급할 것은 스크립토륨에 대한 서술이다. 스크립토륨은 서양 중세 수도원의 책 사본 제작소였다. 그곳에서 필경사들은 동물 가죽의 표면에 글을 새겼다. 동물 가죽을 자르고 불순물이 다 없어질 때까지 다듬어 그 위에 매우 뾰족한 도구로 생채기를 입히는 방식으로 글을 쓴 것이다.

 

그 과정에서 책 내용이 깊게 각인되었다. 반면 오늘날의 글쓰기는 더 이상 동물 가죽을 괴롭히며 글자를 새기는 행위가 아닌 바 글자는 그 만큼 잘 기억되지 않는다. 바야흐로 봄의 문턱인 지금 필요한 것은 근육의 향연을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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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치(niche)란 말은 생태적 지위, 틈새 시장, 벽감(壁龕) 등의 뜻을 가진 말이다. 상생과 공존에 바탕한 생명체들의 자기만의 고유 자리라고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는 생각을 한다. 같은 나무라도 줄기의 수직적 위치에 따라 주로 서식하는 새의 종류와 그 먹이가 약간씩 다르다면 즉 니치가 분화되어 있다면 다른 종의 새들이 한 나무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글(박지형 지음 스피노자의 거미’ 47, 48 페이지)이 어떤 영감을 준다. 잠 못 이루는 자가 돌아눕고 또 돌아누우며 진정한 자리를 찾는 것처럼 자리를 찾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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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4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4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당 묘()라는 글자에 얼굴의 의미(: )가 있고, 얼굴 모()에 사당(祠堂)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우여곡절 끝에 알았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초상화에 관한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외국의 경우 얼굴의 흠을 못 본 듯 그렸지만 우리나라는 우직스러울 만큼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그렸다고 전제한 뒤 조선 선비들의 정직함을 선비정신의 발현으로 설명했다.

 

선비정신이 무엇일까? 선비정신이란 의리 정신이자 불의에 항거하는 비판적 저항정신이다.(계승범 지음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43 페이지) 문제는 누구를 위한 선비정신이며 무엇을 위한 선비정신인가, . 적어도 조선사에서 선비들은 개인적으로는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정치무대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고미숙 선생의 고산 윤선도 평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윤유기는 본래 간사하고 독한 사람으로 그 성질이 독사와 같고 행실은 개, 돼지와 같습니다. 집안에서 처신하는 것으로 말하면 어머니가 죽었는데 장사 지내지 않았고, 아버지의 첩을 팔아먹었으며 재산 다툼으로 형을 죽였습니다... 간사한 인간의 비위를 맞추고 자기 아들 선도를 달래어 글을 올림으로써 조정을 모함하고 선비들을 일망타진하려 하였으며 이이첨을 공격한다는 핑계 아래 전하를 모함하면서...”

 

사헌부와 사간원이 연합하여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다. 고미숙 선생은 요즘으로 치면 인신공격에 해당하는 사항까지도 시시콜콜하게 들추어내면서 반대편의 부도덕함과 허위를 가차 없이 몰아붙이는 이런 언술에서 조선조 선비들의 도학적 이미지를 떠올리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종종 아수라장을 연출하는 요즘의 국회의사당을 방불케 하는바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투쟁이란 이렇듯 진흙탕의 개싸움 같은 형상을 연출하기는 매일반인 셈이라고 결론지었다. 정치 무대에서 저러했으니 그들은 개인적 심성이 뛰어났을수록 더욱 위선적이고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면모를 연출할 수 밖에 없었다.

 

앞서 초상화 이야기에 언급된 조선 선비들의 놀라운 우직함은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하게 들추어내면서 반대편의 부도덕함과 허위를 가차 없이 몰아붙이는 가학적인 언행과 사고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한 가닥의 털, 한 올의 머리카락이라도 달리 그리면 안 되는”(‘승정원 일기의 표현) 초상화 제작 지침은 조선의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를 생각하게 한다. 한 가닥의 털, 한 올의 머리카락이라도 달리 그리면 안 되었기에 얼굴의 온갖 못나고 부끄럽고 추한 모습까지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다르고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조선에서 주자학은 학문이 아니라 종교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틀림이 없다는 말에서 하나님을 주희(주자)로 치환하면 조선의 주자학 유일주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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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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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도 행간의 의미를 헤아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조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광해군이 왕기가 서린다는 정원군의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광해군 당대의 사초 등 원자료를 옮긴 실록 본문이 아닌 인조(정원군 아들)대에 편찬될 때 작은 글씨로 추가된 세주(細註)가 출처라는 점이 대표적이다.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통해 다시 광해군 일기는 반정 세력인 서인의 입장이 반영된 글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광해군 일기는 사학사(史學史)적으로 단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정서본(正書本)과 중초본(中草本)이 남겨진 것이 광해군 일기다.

 

실록은 새 임금이 즉위한 뒤 임시기구인 실록청을 통해 편찬된다. 방대한 사고를 바탕으로 빠른 시일 내에 작성한(휘갈겨 쓴) 초벌 원고를 초초본(初草本)이라 하고 수정작업을 거친 원고를 중초본(中草本)이라 한다. 이 역시 초서로 휘갈겨 쓴 원고다. 중초본 원고를 정서한 것이 정초본(正草本)이고 정초본을 대본으로 활자를 뽑아 조판 작업을 벌여 인쇄한 것이 완성된 실록이다.

 

초초본, 중초본, 정초본은 세초(洗草)한다. 종이 재활용 차원이고 완성된 실록과 다를 경우 생길 시비거리를 막기 위한 차원이기도 하다. 광해군 일기의 정서본과 중초본이 남은 것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 부족과 청나라의 군사적 위협 때문이었다. 인쇄를 포기하고 정서한 두 벌을 강화 정족산과 무주 적상산 사고에 보관했고 중초본은 봉화의 태백산 사고에 보관한 것이다.

 

광해군 일기 뿐 아니라 광해군도 기록의 주인공이다. 조선의 어느 임금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을 노숙까지 하며 다닌 것이다. 분조(分朝)를 이끌고 왜와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분조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조정(朝廷)이 피란할 때 임금과 세자(世子)가 따로 피란하여 세자(世子)가 거느리는 조정(朝廷)을 말한다. 이 분조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다.

 

사실 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왜가 그렇게 빨리 밀고 올라오지 않았다면 선조가 광해군을 왕세자로 낙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이 쫓겨난 것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서다. 폐주(廢主) 즉 쫓겨난 임금, 혼군(昏君) 즉 어리석은 임금 등의 이름이 그에게 붙었었다. 폐주는 맞지만 혼군은 아니다.

 

광해군을 쫓아낸 사람들은 반정 13년만에 청나라군의 침략을 받아 인조가 태종(홍타이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치욕을 맛보았다. 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대() 후금 정책을 비판했지만 기본적으로 광해군의 정책을 답습했다.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였다.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킨다는 의미의 발난세반제정(撥亂世反諸正)에서 유래한 반정(反正)이란 용어 자체가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기인한 것이다. 어떻든 반정 세력이 내세운 명분은 세 가지였다. 폐모살제, 무리한 토목공사, 후금과 밀통함으로써 재조지은을 베푼 명을 배신한 것 등이다.

 

광해군의 부인 유씨가 반정 당일 창덕궁에 들이닥친 반정 주체들에게 한 말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오늘의 거사가 대의를 위한 것이요, 아니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요?” 반정 주체들은 몇 사람을 빼고는 벼슬이 없는 포의(布衣) 신분이었거나 정치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이 부분에서 상기할 말이 있다.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 주류 학자들은 주자학 강화에 여념이 없었고, 정치에서 배제된 남인들은 실학적 작업에 몰두했다.”(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161 페이지)는 말이다. 포의(布衣) 신분이었거나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인조반정의 주체들은 권력을 찬탈(簒奪)했고 우암 당시 정치에서 배제된 남인들은 실학적 작업에 몰두했다.

 

맞 비교는 무리인가? 그렇지 않으리라. 물론 같은 시대는 아니지만 인조반정에 대해 동조했던 남인들은 나라를 다시 세운 경사(재조지경: 再造之慶)라 극찬했다.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 유몽인을 보자. ‘상부(孀婦)‘란 시를 통해 유몽인은 새 남편감(인조)이 훌륭하다 해도 본래의 지아비(광해군)를 배신할 수 없음을 밝혔다.

 

이 시로 인해 그는 반혁명 행위자로 몰려 처형당하고 말았다. 어우(於于)란 그의 호는 공자를 조롱하는 말이다. ’장자천지조에 나오는 말로 밭을 돌보는 노인이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공자를 빗대 허망한 말로 세상을 속이고(於于以蓋衆) 홀로 악기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불러 천하에 이름을 파는 사람(獨弦哀歌以賣名聲於天下者乎)이라고 비웃으며 밭 가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조롱한 데서 나온 말이다.(이덕일 지음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269 페이지)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이고 어머니는 공빈 김씨다. 광해군이 태어난 해인 1575년은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정치적 분란이 일어난 해이다. 정랑(正郎)과 좌랑(佐郎)을 의미하는 전랑(銓郞)5, 6품에 불과한 직이지만 장관인 판서까지도 견제할 수 있는 핵심 요직이었다.

 

이 자리를 둘러싼 논쟁으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했다. 김효원 후임으로 추천된 심충겸이 외척(명종 비 인순왕후의 동생)인 까닭으로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세력이 동인이었고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주장한 세력이 서인이었다. 광해군이 유년과 소년 시절을 보낸 1580년대는 중요 전환기였다. 척신정치가 끝나고 사림들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던 시기였다.

 

천하는 공물(公物)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한 정여립 처리 문제로 인한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 과정에서 남명 문하의 수재였던 최영경의 죽음으로 수사 책임자인 송강 정철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남명 조식, 화담 서경덕 계열의 사람들이 북인이 되고, 이황의 제자들은 남인이 되는 동인의 분열이 일어났다.

 

()의 원병 파견은 자국이 전쟁터가 되지 않기 위해 택한 조치였다. 광해군에게 영특하고 총명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명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승인해달라는 조정의 요청을 광해군이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를 들어 번번이 거부했다. 이는 광해군의 반명(反明) 감정의 빌미가 되었다. 광해군은 끝내 명의 승인을 얻지 못했고 선조의 급서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어렵게 왕의 자리에 오른 광해군이 풀어야 할 과제는 산적한 것이었다. 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어루만지고 무너진 국가 기반을 세우고 후궁의 자식이자 둘째로 등극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해야 했던 것이다. 붕당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써야 하는 과제도 빼놓을 수 없었다.

 

심약했던 광해군을 더욱 심약하게 한 것은 형 임해군의 역모 혐의와 그에 따른 교살이었다. 광해군 5년인 1613년 대북(大北)이 영창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도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인목대비도 저주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역모 관련자로 치부되어 대북파의 공격을 받았다.

 

저주 행위란 선조가 죽은 것은 이미 죽은 선조의 첫 왕비인 의인왕후 탓이라는 소문을 듣고 인목대비가 의인왕후의 무덤에 사람을 보내 허수아비 등을 묻는 등 주술적인 행동을 한 것을 말한다. 폐모 논의는 이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무리한 토목공사는 광해군의 큰 실책이었다. 광해군은 단종과 연산군이 쫓겨난 창덕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당시 파주 교하(交河) 천도론이 있었으나 신료들의 반대에 막혔다. 이 좌절로 광해군이 서울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 것일 수도 있다.

 

후금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는 명의 요청도 광해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조선을 살렸다는 명분을 내세운 명의 무리한 은() 수탈도 조정과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 누르하치가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결정적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광해군은 명의 출병 요구를 거절하다가 결국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는 1만의 군대를 보냈다.

 

광해군은 신중하게 처신(관망)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선군은 후금에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 사실만을 놓고 보면 강홍립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그는 악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관망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이미 전세가 기운 상황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은 요동 전체를 후금에게 빼앗긴 것을 강홍립의 책임으로 돌렸다. 하지만 언급했듯 전세는 이미 기운 상태였었음을 알아야 한다. 광해군은 강홍립의 항복을 고의적인 것으로 여기는 명의 의심을 희석하려 했다. 정묘호란 시 강홍립은 향도(嚮導)로 차출되었다.

 

1616년 해주목사 최기(崔沂)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 풀려난 뒤 광해군의 부름을 받고 관직에 나아간 이귀란 자가 있다. 이귀 일당이 역모를 꾀한다는 투서가 들어가 광해군이 직접 이귀를 문초하고자 했으나 광해군을 주물렀던 개똥이가 이귀를 비호함으로써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고 이는 반정의 빌미가 되었다. 광해군의 외교는 내치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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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시귀(蓍龜)라 칭한 미수 허목(1595 1682). 점칠 때에 쓰는 가새풀과 거북이란 말에서 유래한 시귀란 시()의 귀신이 아니라 점칠 것도 없이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숙종의 말은 주역에 능통한 사람은 점을 치지 않는다는 말을 상기시킨다. 주역의 대가였던 미수는 병중(病中)에도 누워서 주역을 읽었다. 미수는 숙종으로부터 은거당(恩居堂)을 하사받았다.

 

미수 이전에 임금으로부터 집을 하사받은 경우는 둘이었다. 방촌(厖村) 황희가 세종에게서 영당(影堂)을 받았고, 선조 때 활약했던 오리(梧里) 이원익이 인조에게서 관감당(觀感堂)을 받은 것이다. 84세에 우의정에서 물러나 연천으로 돌아온 미수는 은거당에 은거(隱居)했다.

 

리은시사(離隱時舍)는 명재 윤증(1629 1714)의 고택이다. 리은(離隱)1) 속세를 떠나<> 은둔<>한다는 의미라 주장되기도 하고, 2) 알맞은 때에 은둔<>을 벗어난다<> 즉 세상에 나아간다는 의미라 주장되기도 한다.

 

나는 2)를 지지한다. 주역의 첫 괘인 중천건(重天乾)괘를 설명하는 효사 가운데 현룡재전 이견대인(見龍在田 利見大人)이란 말이 있다. 잠겨 있던 용<잠룡: 潛龍>이 물 밖으로 나와 밭에 나타났으니 대인을 만나보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미다.

 

물론 주역 중천건괘에는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말도 있다.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나타났으니) 대인을 만나보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미다. 이 이견이란 말에서 경복궁 경회루의 동문 중 하나인 이견문(利見門)이란 이름이 유래했다.

 

어떻든 은둔도 때를 따라야 하는 것일 수 있지만 정녕 알맞은 때를 따라야 하는 것은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리은시사를 세상에 나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윤증은 한번도 벼슬하지 않았지만 이산(泥山)에서 송시열을 상대로 소론의 논리를 만들었다.

 

소론(少論)인 윤증이 노론(老論)인 송시열(1607 1689)의 정적이었듯 남인(南人)인 허목 역시 송시열의 정적이었다. 나로서는 세 사람이 모두 당시로서는 드물게 80을 넘겨 살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허목 88, 윤증 86, 송시열 83)

 

아깝게(?) 80 문턱인 79세에 세상을 떠난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였다. 맹사성의 조부 맹유는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자 이에 반발해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해 버렸다.

 

이때 맹유의 나이는 78세였다.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는 충청도 서천으로 숨어 들었다. 맹희도는 아들 맹사성에게 고려 왕조는 더 이상 없다. 마침 네 스승인 권근이 너의 출사를 권하고 있으니 새 왕조에 몸을 담아 백성만을 바라보는 정치를 해라.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은 너의 할아버지와 나로 충분하다.는 말을 했다.

 

맹사성은 조선 건국에 대한 노골적 거부 의사를 철회한 아버지를 보며 새 왕조에 출사(出仕)했다.(신동욱 지음 조선 직장인 열전’ 90 페이지)

 

연천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이양소(李陽昭), 김양남(金揚南) 모두 조선 건국에 협조하지 않고 은둔한 사람들이다. 태종 이방원과 동문수학했거나 친구였던 두 사람은 태종의 부름을 끝내 거절했다.

 

연천(漣川)의 연()은 물 이을 연이기도 하고 눈물 흘릴 연이기도 하다. 이양소로부터 거절당한 태종의 눈물이란 데서 연천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정확한 것은 장담할 수 없다. 이름의 유래가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정도전, 정몽주, 이방원을 비롯 여러 군상들이 빚어낸 고려 말, 조선 초 정치사회가 새삼 관심을 끈다. 나로서는 이제 조심스럽게 고려로까지 관심을 넓힌 셈이다. “이번 겨울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비어 있는 들판에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어볼까.”란 말을 한 한 작가처럼 나는 아직 남은 겨울에 서점에 들러 해당 책들을 찾아야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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