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13일 다섯 시 고문리 물문화관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는 해를 보았다. 참 아름다운 하늘이고 해였다. 해만으로도, 하늘만으로도 만들 수 없는, 지는 해가 선물하는 풍경을 누린 시간이었다. 그렇게 저녁 노을로 붉게 물든 하늘을 단소(丹霄)라 한다. 붉을 단, 하늘 소란 글자의 조합이다. 하늘 천()이 아닌 하늘 소()를 쓰는 글자가 이것 말고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은 능소화(凌霄花).

 

: 단소(壇所)란 제단이 있는 곳을 말한다. 묘단(墓壇)을 의미하기도 한다. 묘소가 실전되거나 유해가 없을 경우 유해를 대신할 신체 일부나 유품, 고인이 생전에 아꼈던 물건을 관에 넣어 땅에 묻은 것을 의미한다. 사실 단소나 묘단이란 말은 흔히 듣는 말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겸재 정선의 묘단 사진을 보았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광주정공(光州鄭公) () 지단(之壇)이란 비석 글씨가 선명한 묘단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손자 손암(巽巖) 정황(鄭榥)의 양주송추(楊洲松楸) 그림을 통해 정선이 묻힌 곳을 추정하는 책을 읽었다. 송추(松楸)는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무덤 주위에 심는 나무를 통칭한다.

 

겸재가 묻힌 곳은 쌍문동 정의여고 뒷산이다.(쌍문동이 속한 도봉구는 예전 양주땅이었다.) 나로서는 겸재(謙齋)의 겸이 주역에서 유래한 이름이듯 그의 손자 손암(巽巖)의 손도 주역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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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진의 제왕의 책을 읽고 리뷰를 썼다. 2020년 나의 첫 리뷰 도서다. 성종(成宗)의 소학, 선조(宣祖)의 주역, 정조(正租)의 서경 등이 인상적이었다. 조선사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면도 있고 매력적인 면도 있음을 다시 느꼈다.

 

성종이 소학을 읽은 것은 부부 불화의 원인을 아내인 폐비 윤씨에게 돌리려는 의도가 반영된 결과이고, 선조가 주역을 읽은 것은 왜란 시기의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방편이었고, 정조가 서경을 강조하며 요순(堯舜)을 도덕적 모범자로서의 군주가 아닌 정치의 한복판에서 권력의 중심을 잡았던 적극적 정치가로 재정의했다는 사실 등은 인상적이다.

 

갖은 이유를 들어 경연(經筵)에 임하지 않았던 연산은 만취한 상태에서 춘추(春秋)를 강()하게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싫어하던 경연을 만취한 와중에 시행한 의도는 오랜만에 신하들과 흥겨운 자리를 가지면서 그들이 그토록 바라는 것을 들어준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여주가 고향으로 도봉에 사시는 김선생님께서 지난 해 말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등 고향의 두 릉과 거주지인 도봉의 연산군 묘를 친구들과 함께 돌 것이라며 자료를 부탁하셨었는데 이번 기회에 우선 김범의 연산군을 읽고 정리해 글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에는 사화를 비롯한 연산군, 중종 시대의 주요 정치적 사건을 훈구와 사람의 구도가 아닌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역할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과 충돌로 파악한 에드워드 와그너의 논의가 소개되어 있다.

 

제왕의 책에서 연산군과 관련해 눈여겨 볼 만한 대목이 몇 군데 있다. 연산군이 자신의 친모가 폐비가 되어 사약을 받았다는 사실을 즉위 초에 이미 알았다는 것, 연산군이 쫓겨난 것은 자신을 믿고 따라줄 세력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 폐비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것은 근거가 불확실하다는 것 등이다.

 

연산군은 처음 생모의 진실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잘못한 것이 있어 사약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가 후에 후궁들의 참소(讒訴)가 중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폭발했다고 한다.

 

연산군을 몰아낸 주역들 가운데 연산군의 최측근들이 많았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언제 자신들에게 칼날이 향할지 몰라 불안에 떨던 측근들이 반정에 가담한 것이다. 윤씨의 잘못을 낱낱이 언급하고 있는 성종이나 대비의 교지에 윤씨가 성종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내용은 없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연산군 일기가 반정 세력들의 논리가 반영된 글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연산군은 폭군이었지만 거기에 개입된 반대 세력의 자기 정당화 논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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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책
윤희진 지음 / 황소자리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세자가 공부하는 교재는 소학, 효경,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대학연의, 상서(尙書), 주역, 예기, 춘추좌전, 통감강목 등이었다.(신명호 지음 조선의 왕’ 37 페이지) 국왕이 공부한 교재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세종대에 사서, 삼경, 춘추, 통감강목, 대학연의, 송감(宋鑑), 사기, 통감속편, 성리대전 등이었다. 성종은 예기, 근사록, 정관정요, 한서, 고려사, 국조보감 등을 추가했다.

 

그 후 교재는 국왕의 취향에 따라 더 추가하기도 하고 빼기도 했다. 영조 대에는 소학, 심경, 대학연의보, 동국통감, 성학집요, 절작통편 등이 중시되었다.(심재우, 한형주, 임민혁, 신명호, 박용만, 이순구 등 지음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 131 페이지)

 

윤희진의 제왕의 책에서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자. 이 책에는 10 명의 군주가 즐겨 읽은 책이 나온다. 한 사람의 고려 왕과 아홉 사람의 조선 왕이 즐겨 읽은 책이다. 고려 왕 광종의 정관정요, 조선 왕 태종의 대학연의, 세종의 자치통감, 성종의 소학, 연산군의 춘추, 선조의 주역, 효종의 심경, 영조의 예기, 정조의 서경, 고종의 효경, 조선책략 등이다.

 

광종은 정관정요를 읽은 뒤 연호를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해 강력한 군주가 되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당나라의 역사가 오긍이 지은 정관정요에는 당 태종이 신하들의 간언을 잘 받아들이는 명군으로 그려져 있다.(‘정관: 貞觀은 당 태종 이세민의 연호다.) 그런 까닭에 고려의 신하들은 광종이 이 책을 애독하며 집권 초기 신중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며 광종이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현명한 군주가 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27 페이지)

 

광종은 후주 태조의 왕권강화 작업에 깊숙이 관여했던 쌍기를 데려와 과거제를 도입, 집권 세력의 물갈이를 시도했다. 이는 무인 출신 호족들과 그 자제들의 정계 진출을 제도적으로 막는 장치였다.(28 페이지)

 

대학의 의미를 풀어쓴 대학연의는 독서를 즐기지 않았던 무장 태조가 밤중에 이르도록 자지 않고 읽은 책이자 조준이 이복동생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기고 울분을 참지 못하던 이방원에게 권하며 이것을 읽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책이고 세종이 100번도 더 읽었다는 책이다.

 

대학은 정호, 정이 형제가 예기에서 중요 구절을 발췌해 편찬한 책이다. 대학연의는 진덕수가 대학과 자치통감강목을 종합해 지은 책이다. 경제통 조준은 정조전과 함께 조선 개국공신의 하나였으나 정도전과 다른 길을 걸었다. 정도전이 방석을 지지한 것과 달리 이방원을 지지한 것이다.

 

태조는 세자로 방번을 주장했고, 신하들은 방번은 절대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방석이 타협안으로 선택되었다. 저자는 대학연의를 임금이 되는 과정에서 많은 무리수를 두어 아버지를 비롯 여러 신하들의 외면을 받은 태종이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하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읽은 책으로 풀이한다.(55 페이지)

 

세종이 즐겨 읽은 책은 자치통감이다. 세종은 제왕이 뒤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왕이 되었다. 즉위 두 달이 채 안 된 시절에 경연을 연 세종은 첫 책으로 선택한 대학연의 공부를 4개월만에 마쳤다. 양녕대군이 6년이 걸렸으니 4개월은 그 1/18의 시간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다. 대학연의 이후 세종이 선택한 책은 북송의 사마광이 19년에 걸쳐 완성한 총 291권의 역사서인 자치통감이다. 당시 조정 신하들은 대학, 중용 등 경서를 금과옥조로 삼고 연구할 뿐 역사서는 소홀히 다루었다. 세종은 누구보다 자치통감의 역사적 가치와 정치교재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성종은 소학을 즐겨 읽었다. 훈구세력들을 압박했으나 이른 죽음을 당한 예종의 뒤를 이어 열세 살의 잘산군이 왕이 된 것은 훈구세력들 입장에서 이미 성장한 월산대군보다 어린 잘산군이 수월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선왕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네 살의 어린 나이였다.) 성종은 경연에서 소학을 공부하겠다고 한 첫 임금이었다. 성종이 소학을 읽겠다고 한 지 20여일만에 폐비 사건이 일어났다.

 

폐비 논의가 시작되던 무렵 승정원에서 다음 경연에 읽을 책으로 사서와 대학연의를 추천했다. 성종은 소학을 주장했다. 대학연의에 따르면 부부 불화의 일차 책임은 성종에게 있다. 수신이 이루어지지 않아 제가에 실패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학에 따르면 문제의 원인은 교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중궁 탓이다. 성종이 소학을 강조한 해가 재위 7, 8년 무렵인 것도 흥미롭다.

 

김종직으로 대표되는 사림파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이 심히 아낀 조광조에 이르러 소학은 개인의 실천을 위한 책에서 사회적 실천을 위한 책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연산군은 춘추를 즐겨 읽었다. 건국 이래 궁궐에서 원자의 자격으로 태어난 왕은 단종 이후 연산군이 처음이다.

 

세종까지는 조선 건국 이전에 태어난 왕들이었고 문종은 아버지가 충녕대군이던 때에 태어났으니 궁 밖에서 태어났고, 예종은 아버지가 수양대군이던 시절 태어났으니 역시 궁 밖에서 태어났다.(109 페이지) 연산군이 태어난 것은 생모 윤씨가 후궁에서 왕비로 발탁된 지 3개월 후다.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서다.

 

선조가 즐겨 읽은 책은 주역(周易)이다. 선조는 이황, 기대승, 이이 등 최고의 성리학자들로부터 대학, 소학, 논어, 맹자, 시경, 서경 등 유학의 기본서들을 착실하게 배워나갔다. 난세 때문이었는지 선조는 임진왜란 이후 주역에 몰두했다. 다른 책은 거의 읽지 않고 오직 주역만 읽은 것이다. 선조가 주역만 읽자 이를 비난하며 다른 책을 권하는 신하들도 있었다. 선조는 주역을 마음 다스리는 용도로보다 사물에 접응(接應)하는 역학용으로 보았다.

 

효종은 심경을 주목했다. 남송시대의 진덕수가 마음 수양을 목적으로 쓴 심경의 핵심 내용은 경()이다. 효종이 심경을 선택한 것은 산림(山林)에게 손을 내미는 정치적 제스처였다. 효종은 10만의 정예군만 있으면 북벌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전란으로 황폐해진 조선에서 10만의 군사를 기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효종이 북벌에만 올인해 민생을 돌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김육(金堉)의 제안을 받아들여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해 경제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효종이 심경을 선택한 것은 북벌을 위해서였다. 물론 효종의 북벌과 송시열의 북벌은 달랐다. 효종의 북벌은 군사적인 것이었고 송시열의 북벌은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고 우리의 힘을 길러 국교를 단절하자는 명분론적인 것이었다.

 

기해독대(己亥獨對)1659년 효종이 송시열과 단 둘이 마주앉아 북벌에 대해 논한 일을 말한다. 이 독대 이후 두 달만에 효종은 급서(急逝)했다. 효종은 심경을 마음을 다스리는 책이 아닌 정치적 목적으로 대했다.

 

영조는 예기를 즐겨 읽었다. 영조는 임인옥사(壬寅獄事)와 깊이 관련된 인물이다. 임인옥사는 1722(경종 2) 노론 측에서 세 가지 방법을 이용해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을 계기로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임인옥사는 삼수옥(三手獄)이라고도 한다. 자객을 시켜 살해하는 대급수, 독약으로 죽이려 한 소급수, 숙종의 유언을 빙자해 폐출시키는 평지수를 말한다.

 

숙종의 유언이란 숙종이 노론 대신 이이명과 가진 독대에서 연령군(명빈 박씨 소생으로 숙종의 3)과 연잉군(영조)을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이 음모에 연잉군이 가담했다. 연잉군은 역적의 수괴였다. 그러나 경종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고립된 연잉군을 구한 것은 영의정 조태구를 비롯한 소론 온건파였다.

 

경종 재위시 왕위를 세제(世弟)인 연잉군에게 넘기라는 주장을 한 노론 4대신을 법으로 처단하라고 한 김일경을 연잉군이 왕이 되어 국문할 때 김일경은 스스로를 신()이 아닌 나<:>라 칭해 영조를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애써 대리청정을 시킨 것은 대리청정이 임금이 아플 때 통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노론이 주청하고 자신이 받아들인 대리청정이 결코 역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예기는 영조가 읽다가 눈물을 흘린 책이다. 영조가 예기를 논하다가 임금이 죽고 세자가 탄생했다는 대목에 이르러 경종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은 그리움과 죄책감의 눈물이라기보다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정치적 눈물 즉 악어의 눈물이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의 힘으로 영조를 왕위에 앉혔다고 생각한 노론은 영조를 압박해 소론에게 정치 보복을 가하려고 했다.(소론 강경파는 경종 독살설을 확신하며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조에게 소론은 경종 처단 역모 연루로 고립된 자신을 구해준 사람들이었다. 영조는 노론 대신 소론 온건파의 손을 들어준 정미환국을 단행했다.

 

정조는 서경을 즐겨 읽었다. 영조 31년 강경 소론들이 벌인 나주벽서 사건을 계기로 영조는 노론으로 돌아섰다. 노론을 이를 계기로 소론을 역적으로 몰아붙였다. 사도세자는 영조와 노론의 생각이 동의하지 않았다, 피비린내 나는 정치보복을 막으려 한 것이다. 정조는 강력한 국왕 중심의 정치의 실마리를 서경에서 찾았다. 서경은 요, , 탕왕, 문왕, 무왕의 말을 기록한 고전이다.

 

노론은 늘 임금에게 요순시대를 본받으라는 말을 했다. 정치는 신하들에게 맡기고 임금은 유학 공부에 전념하라는 말이다. 정조는 서경을 재해석했다. 정조와 남인은 서경 해석에서 뜻을 같이 했다.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평가받는 요순도 흉작에 분발하여 천하 사람을 바쁘고 시끄럽게 노역시켰고 정밀하고 엄혹하여 천하 사람들을 공손하게 움츠리고 떨게 하여 일찍이 털끝만큼도 감히 거짓을 꾸미지 못하게 한 정치가였다는 것이다. 정조는 서경을 근거로 노론과 다르게 요순을 도덕적 모범자로서의 국왕이 아니라 정치의 한복판에서 권력의 중심을 잡았던 적극적인 정치가로 본 것이다.

 

고종은 효경과 조선책략을 즐겨 읽었다. 신정왕후의 뜻을 따라 고종은 효경을 첫 교재로 받아들였다. 신정왕후는 고종의 양모다. 조선책략은 1881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지고 와 고종에게 직접 바친 책이다. 저자는 황준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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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에 관심을 기울이던 오래 전 박옥줄 교수가 번역한 레비스토르스의 슬픈 열대’(삼성출판사)를 읽었다. 지금은 기억하는 것이 거의 없다. 어제 모 방송에서 슬픈 열대에 대한 해설을 접했다. 자신을 공간을 여행하는 고고학자라고 설명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학문적 출발을 가능하게 한 세 학문으로 지질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를 지목했다.

 

이 학문들은 표층이 아닌 심층을 주목하는 학문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어제 방송을 보았기 때문인지 아주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어딘지 분주하게 옮겨다니며 무언가를 먹고 마시고 싸움 구경을 하다가 일행 중 한 명에게 날카로운 말을 던진 꿈이었다.

 

꿈 속에서도 무언가를 움켜 쥐고 놓지(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내 모습이라니.. 아무튼 정신분석학 이야기를 듣자마자 꿈을 꾸었다는 것이 기이하다. 정신분석학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이 꿈이 아닌가.

 

그런데 정녕 꿈이라 할 것은 우리의 시원(始元) 자체가 아닌지? 35억 년 전 미스테리하게 출현한 최초의 생명체 시아노박테리아가 햇빛, 바다 속 이산화산소, 물 등을 이용해 만든 에너지를 쓰고 난 뒤 생긴 찌꺼기를 배출한 것이 바로 산소(酸素)라는 것이 나는 꿈만 같다.

 

허수경 시인이 “..살아온 길이 일테면 자궁 하나/ 어느 범벅한 무덤 하나 찾는 거라면/ 이게 꿈 아닌가..”란 말을 했으니 그에 비하면 나는 너무 거창한 것인가? 물론 시원은 꿈 같아도 현실은 현실이리라. 내가 딛고 선 터전인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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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한()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한된 때로 왜곡된 팩트 사이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아내는지다. 나는 과연 역사를 냉철히 공부하는 것인지, 하는 반성을 하곤 한다. 냉철하지 못함은 선입관을 가지고 인물이나 사건을 대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일 것이다.

 

나는 가끔 내가 좋아하는 정조(正租)를 무조건 좋게 바라보고 그에 대한 비판이나 단점 지적은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할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고종은 무조건 무책임한 군주 또는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하는 군주로 보는 것은 아닌지, 하는 반성을 한다.

 

지난 해 문소영의 조선의 못난 개항과 이상각의 이경 고종황제를 읽었다. 문소영의 책은 똑똑한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회수한 스물한 살의 고종이 과연 국정을 잘 운영했는가? 그렇지 못했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는 말을 한다.

 

책에는 이런 말도 있다. “큰 나라에 기대어 사는 사대주의에 익숙한 고종은 외세에 의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인식 자체가 떨어졌다.” 반면 이상각의 책에서 고종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인 영민한 군왕, 이이제이의 외교 전략으로 열강의 노림수를 피하면서 국체를 보존한 노련한 승부사로 그려졌다.

 

오늘 강효백 님의 페북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내가 여력이 있다면 고종황제를 재조명하여 역사적 사면 복권해드리고 싶다. 고종은 세종 못지 않은 성군이었다. 일제와 종일매국 식민사관에 오도 주입된 텍스트를 맹신한 나의 고정관념을 뉘우친다. 처절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고종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유지할 것이되 그런 가운데서도 다시 보아야 할 부분, 다르게 보아야 할 부분을 적극적으로 찾을 것이다. 자기 생각이 중요하다. 다만 지지하든 비판하든 명확하게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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