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종묘 해설을 하기 위해 입장하며 검표(무료관람이었지만 근무는 하는...) 직원에게 인사를 하자 오랜만에 오셨네요, 란 말을 했다. 종묘는 궁궐 가운데 내가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많이 드나든 곳이다.

 

교육 과정을 마치지 않은 상태로 첫 해설을 한 곳이고, 동기들에게 해설을 한 곳이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며 부탁해 외국인에게 하는 영어 해설을 들은 곳이고, 묘현례(廟見禮)를 보기 위해 갔던 곳이고, 울적할 때 해설을 듣기 위해 갔던 곳이고, 올 봄 해설 준비를 위해 몇 차례 갔던 곳이고, 어제 해설을 위해 갔던 곳이다. 물론 내가 그분에게 각인(?)된 것은 몇 가지의 전문적인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2017년 이 즈음에 비해 시간이 갈수록 내 종묘 내공이 풍성해졌다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말로 하면 과거는 미약했다는 의미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며 부탁해 외국인에게 하는 영어 해설을 들은 곳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니 프랭크 게리가 생각난다.

 

지난 2012년 리움 미술관의 초청을 받고 특강을 위해 한국에 온 게리는 자신이 한국에 온 것은 종묘 정전을 보기 위해서라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반인들이 없는 이른 시각에 자신의 일행들만 종묘를 보게 해달라는 부탁을 해 결국 문화재청의 허락을 얻어냈다.

 

그는 동선에 맞게 안내하려는 종묘 직원을 마다하고 바로 정전으로 가 합장, 배례했다. 그는 어떤 명분을 제시했었을까? 종묘 제사에서 술을 드리는 의례를 빼놓을 수 없다. 임금이 단술(감주)을 바치는 것을 초헌(初獻), 세자가 탁주를 바치는 것을 아헌(亞獻), 영의정이 청주를 바치는 것을 종헌(終獻)이라 한다.

 

경북 예천(醴泉)의 예()가 단술 예자다. 예천군의 옛 지명이 달 감과 샘 천을 쓰는 감천(甘泉)이었다. 현주(玄酒)는 특이하다. 술 주자가 들어 있지만 맑은 물을 의미한다. 조선의 경우 비가 오지 않거나 농사 상황이 좋지 않으면 금주령을 내린 까닭에 제사에 술을 쓸 수 없었던 관계로 맑은 물이라는 의미의 현주, 달콤한 술이라는 의미의 감주를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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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興士團) 앞에 몇 개의 시비(詩碑)가 있다. 타고르의 동방의 불꽃‘, 함석헌 선생님의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우두(雨杜) 김광균 시인의 설야. 잠언(箴言) 같은 말도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지난 해에는 어떤 친일 역사가가 공개된 자리에서 정신병자라고 규정한 분이 안창호 선생님인 줄 알고 흥분하는 투로 전했는데 알고 보니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었다.

 

어제는 한 청자(聽者)가 왜 저 시비들이 이 자리에 모이게 되었는지 물어 흥사단 앞이니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과 민족주의적 작품성을 보였던 타고르와 함석헌 선생님의 시비가 있는 것은 어울리는 바이고 김광균 시인의 설야(雪夜)‘ 시비는 서정적인 작품이지만 친구 황금찬 시인께서 이 자리에 세우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답은 황금찬 시인이 아니라 구상 시인이다. 김광균 시인은 1914 1993, 황금찬 시인은 1918 2017, 구상 시인은 1919 2004의 이력을 가지고 계시다. 한 살 차이시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 해야 하나? 지난 해는 연속적으로 만나는 분들께 실수한 것이어서 다음에 만나 사죄했지만 어제는 언제 만날지 알 수 없는 분에게 실수한 것이어서 어디에 사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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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은 지적 열등감을 주기도 하지만 희열감을 주기도 한다. 두 경우 모두 내가 모르던 분야를 알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솔직히 어느 경우가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어느 경우가 희열감을 느끼게 하는지는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모르는 분야라 해도 나에게 글을 쓸 동기를 제공하거나 공감하게 하는 바가 있을 경우에는 희열감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소설을 낸 한 영화평론가의 글을 읽었다. 촘촘한 사유가 돋보이는 긴 글이지만 요약하면 직업으로 다룰 분야를 학문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시된 것이 몇 가지였는데 글은 그냥 많이 써보면 되는 것으로 굳이 대학에서까지 가르칠 필요가 있겠냐는 그의 논리가 내 관심을 자극했다. 물론 나는 내가 팔로우 하는 필자의 논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해보니 글은 많이 써보면 는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하찮지만 나는 내가 들었던 글 잘 쓴다는 평에 이렇게 반응한다. 선생심도 저처럼 쓰고 쓰면 잘 쓸 수 있습니다라고. 잘 쓰는 것에도 수준 차가 큰데 요컨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유일하게 잘 하는 것이 글쓰기로 이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잘 쓴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다른 것들은 거의 젬병 수준인데 글에서만 낙제점을 면했다는 의미다.

 

아울러 말하고 싶은 것은 글쓰기를 기법에만 치중해 가르치는 것에는 불편감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논리를 가르치면 잘 쓸 것이고 독창적이고 일관성 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사유하는 법을 가르치면 더욱 잘 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펼칠 수 있게 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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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바젤의 수도사 야콥 루버는 도서관 없는 수도원은 무기고 없는 요새와 같다는 말을 했다. 12세기 카노니쿠스 고트프리트는 도서관 없는 수도원은 무기고 없는 성채와 같다는 말을 했다.

 

요새와 성채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하지만 요새라 하든 성채라 하든 큰 차이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 최근 나온 고상균의 '수도원 맥주 유럽 역사를 빚다'가 몇 가지 점에서 관심을 끈다.

 

첫 번째는 수도원에 관한 책이라는 점이다. 나는 야콥 루버나 카노니쿠스 고트프리트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수도원을 도서관이라는 키워드로 보는 데 비해 저자는 맥주로 그 역할을 한다는 차이가 있다.

 

두 번째는 '맥주 없이 개혁도 없다''카타리나 폰 보라의 맥주, 그리고 루터의 그리스도교 개혁'이란 챕터가 도서관 없는 수도원은 무기고 없는 요새(또는 성채)를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본문에 의하면 맥주가 수도원의 중요 수익원이 되어 서민들의 양조장은 문을 닫거나 이전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내가 도서관과 연결지어 쓰려는 힐데가르트 폰 빙엔 수도원장이 맥주와 영성의 어머니로 소개되었다는 점이다.

 

맥주를 만들어 팔아 남편의 종교개혁을 도왔다는 마르틴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이야기도 흥미롭다. 오타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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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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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全鎣弼: 1906 1962) 선생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우리나라 국보급 문화재들의 일본 유출을 막고 일부 문화재는 일본에서 되사온 문화의 투사 역할을 하신 분이다. 1938년 성북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박물관인 보화각(寶華閣)을 세워 평생 모은 문화재를 전시한 분이다.

 

() 아버지(작은 아버지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큰 재산을 허튼 곳에 쓰지 않고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는 데 쓴 분이다.(전형필 선생은 24세에 조선 거부 40명에 들 정도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다.) 전형필 선생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문화재를 사들인 골동품상이 아니라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큰 돈을 적소(適所)에 쓴 수장가셨다.

 

전형필 선생의 재호(齋號)는 이종 형인 월탄 박종화 선생의 아버지인 박대혁 선생이 지어준 옥정연재(玉井硯齋). 우물에서 퍼올린 구슬 같은 맑은 물로 먹을 갈아 글씨를 쓰는 집이라는 의미다. 아호(雅號)는 스승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 1953) 선생이 지어준 간송(澗松)이다.

 

산골물 간자와 세한도의 송자를 조합한 호다. 휘문고보 미술 선생인 춘곡 고희동의 소개로 만난 위창 선생은 젊은 전형필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들어오는 순간 깊은 산 속에서 흐르는 물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간()자를 택했고 논어 자한편의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에서 송을 택해 간송이란 호를 만들었다.

 

위창 선생은 간송의 평생 스승이었다. 위창 선생은 간송에게 서화(書畫)를 모으는 일은 안목도 있어야 하고 재물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오랜 인내와 지극한 정성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위창 선생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간송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 1856)의 제자이자 역관이었으며 선생의 선친인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 1879) 선생이 중국으로 보낸 탁본을 선생에게 선물했다.

 

간송은 스승 고희동 선생으로부터 서화 전적을 왜놈들로부터 지켜달라는 당부를 들었고 이종형 박종화로부터는 민족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는 조언을 들었다.(79 페이지) 아버지 전영기 선생으로부터는 반드시 교육사업을 하라는 유언을 들었다.(352 페이지)

 

간송은 위창의 질문에 우리 선조의 서화 전적과 골동은 조선의 자존심이라고 답했다. 위창은 간송의 문화재 수집 사업에 큰 역할을 했다. 서화와 골동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법이나 적정 가격 등에 대해 들은 것이다. 작품을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화가가 생존했던 시대에도 가품(假品)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미루어서도 알 수 있다.(100 페이지)

 

간송은 이익을 남기려는 골동품상이 아니라 문화재를 지키는 의지를 가진 사람답게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구입하는 데에도 정성을 쏟았다. 이런 점은 위창에게서 배운 바라 할 수 있다. 간송은 위창 선생에게서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 우여곡절에 휩쓸리지 말고 오로지 조상님들의 얼과 혼을 모으고 간수하는 데에 힘써 매진하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이 식민지 시대에 존엄을 지키는 길일 것이라는 것이다.(122 페이지)

 

위창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화가들의 그림들도 모았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미술을 총정리하기 위한 큰 뜻의 발로였다. 간송은 단원 김홍도나 현재 심사정을 더 알아주는 시대에 겸재의 그림을 구입했다.(90 페이지)

 

공재 윤두서와 관아재 조영석의 그림을 구한 것도 마찬가지 차원이다.(112 페이지... 공재와 관아재는 어진 작업에 참여하라는 어명이 내리자 선비가 환쟁이 취급을 받았다며 붓을 꺾은 선비 화가였다.: 116 페이지) 호고(好古)의 벽() 때문에 마구잡이로 수집한 것이 아니라 자료를 찾고 공부하며 체계적인 수집 계획을 세웠다.(117 페이지) 간송은 서화 골동이 눈앞에 나오면 취향보다 그것이 이 땅에 남아야 하는지 여부를 먼저 생각했다.

 

간송은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의 그림도 소중하게 여겼다.(152 페이지) 간송은 제 값을 주고 문화재를 구입하라는 위창 선생의 가르침을 따랐다. 위창 선생은 서화를 구입하는 데 값을 깎으려 하면 좋은 작품을 절대 만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서화상들은 장사꾼이지만 대부분 서화를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품을 알아주고 대접해주면 좋은 작품이 나왔을 때 얼른 알려주지만 흠을 잡으며 깎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00 페이지)

 

간송이 백두용에게서 인수한 한남서림은 고서화 수집의 전진기지였다. 한남서림의 책들은 백두용이 평생 모아 각별하게 간직해온 것들이다. 백두용은 간송에게 자신은 훈민정음에 관한 책을 찾기 위해 반평생을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했다고 하며 자네에게는 인연이 닿을 수도 있으니 염두에 두고 기다리다가 인연이 오면 놓치지 말라는 말을 건넸다.(143 페이지)

 

간송은 청전 이상범(1897 1972), 심산 노수현(1889 1978)과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두 화가는 심전 안중식(1861 1919)에게서 배운 사이다. 심전(心田)은 나누어 노수현에게는 심자를 주어 심산(心汕)이라는 호를, 이상범에게는 전자를 주어 청년 심전이라는 의미로 청전(靑田)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간송과 소전(素田) 손재형(孫在馨: 1903 1981),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 1984) 등과도 인연을 맺었다. 한국 전쟁 당시 보화각의 수장품을 접수할 공산당원들이 들이닥쳤을 때의 일이다. 전형필은 수장품을 놓아두고는 어디도 갈 수가 없어 가족들은 모두 외가로 보낸 뒤 보화각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빈집에 몸을 숨겼다. 당시 보화각에 들이닥친 공산당원들의 책임자는 월북 화가 일관 이석호(1904 1971)였다.

 

이석호는 보화각의 수장품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자 피난 가지 않고 국립박물관을 지키던 혜곡과 소전을 데려왔다. 소전은 추사의 세한도를 찾아오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수장자 집 앞에서 몇 달 동안 무릎을 꿇고 사정해 되찾아온 전설의 수집가였다. 이석호는 자신이 데려온 자들은 골동품을 다룰 줄 모르니 두 사람이 지휘해 파손되지 않도록 잘 포장하라고, 하나라도 파손되면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지연작전을 폈다. 아무래도 수장품 목록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좋은 것과 덜 좋은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더 튼튼한 상자가 필요합니다 등의 핑계를 대었고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했다. 최순우는 지하실에 위스키가 궤짝으로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형필이 미 군정청 고적 보존 위원회에서 활동할 때 손님 접대용으로 구해둔 미제 위스키였다.

 

이석호는 공산당원이기 이전에 풍류를 좋아하는 화가였다. 매일 술판이 벌어졌다. 이석호는 취하면 지인들의 안부를 물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석호는 소전과 혜곡이 시간을 지체하는 것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두 사람에게 물건을 평양으로 운반할 때 같이 올라가면 평양박물관에서 근무하게 힘써주겠다며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소전은 1층에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일부러 구른 뒤 다치를 다쳐 움직일 수 없다고 엄살을 부렸다. 혜곡도 장단을 맞추었다.

 

이석호는 두 사람을 불러 며칠 내로 포장을 마치지 않으면 책임을 묻겠다며 권총을 겨누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이석호와 당원들은 모두 퇴각해갔다.

 

간송에게는 서화 골동계에서 잔뼈가 굵은이순황과 신보 기조(新保喜三) 등의 우정과 헌신의 동지가 있었다. 이순황은 위창 선생의 소개로 만났다.(149 페이지) 신보 기조는 간송의 부탁을 받은 이순황의 추천으로 알게 된 일본인 거간꾼이다.(174 페이지) 신보 기조는 자신이 일본인이지만 평소 위창 선생님을 흠모해왔다는 말을 했다.(180 페이지)

 

신보 기조는 조선을 떠난 유물을 되찾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하며 앞으로 조선에 꼭 남아 있어야 할 유물이 나타나면 가장 먼저 간송에게 연락하겠다고 덧붙였다.(188 페이지)

 

간송은 57세의 나이에 급성 신우염으로 타계했다. 1962126일이었다. 그가 타계한 후 그가 애써 모은 것들이 국보로 지정되는 경우도 많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간송은 구제와 교육사업에도 헌신했다.

 

간송이 구입한 문화재들 중 국보로 지정된 것들은 12, 보물은 10, 서울시 지정문화재가 4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천학매병)과 훈민정음 해례본, 혜원 풍속도, 금동(金銅)삼존(三尊)불감(佛龕) 등이다. 학이 구름을 날고 있어서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으로 천학매병(千鶴梅甁)이라고도 한다. 실제 학은 69마리이지만 병을 빙빙 돌리면 천 마리의 학이 있는 듯 느껴지기에 그렇게 부른다.

 

매병이란 반드시 매화를 꽂아두었던 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화주를 담아두는 용도로 쓴, 조금 큰 병 모양의 도자기는 모두 매병이라 불렀다. 거래되는 골동품들 중 조선 시대 도자기는 집안에서 내려오는 전래품이 많아 대부분 온전했지만 고려시대 도자기는 무덤에서 꺼낸 도굴품들이 많아 흠이 있었다.

 

혜원풍속도는 일본에 가서까지 되사온 문화재다. 간송은 수집품 중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구입한 훈민정음을 최고의 보물로 여겼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잤다.(377 페이지) 고서화나 골동 거간들뿐 아니라 학자들도 많이 드나들던 한남서림에 어문학 연구에 조예가 깊었던 김태준이란 사람도 찾아오곤 했다.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으로 제자 중 이용준이란 사회주의자의 집안에 세종대왕으로부터 하사받은 훈민정음이 있었다. 간송에게는 사회주의자인 김태준을 통해 훈민정음을 사들이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간송 전형필400 페이지가 넘는 책이다. 소설 형식의 책이어서 쉽게 읽힌다. 무엇보다 문화재와 그에 얽힌 인연들을 아는 기쁨 때문에 재미 있게 읽힌다. 고려청자, 불상, 서화 등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책이기도 해 의미가 큰 책이다. 관련된 다른 책들을 찾아 읽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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