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애국가와 무궁화에 대한 연이은 충격적인 사실을 전하는 강효백 교수님의 책 가운데 꽃은 다 함께 피지 않는다가 있다. 이 책에 사랑은 우단사련藕斷絲蓮처럼이란 글이 있다.(: 연뿌리 우.) 우단사련은 연뿌리가 잘라졌으나 끈끈한 점액질의 하얀 실이 나와 계속 연결된 상태를 뜻하는 말로 형제애 또는 이성간 사랑을 상징한다.

 

꽃은 다 함께 피지 않는다에는 슬픔도 사랑이다란 글이 있어 관심을 끈다. ‘사랑은 우단사련藕斷絲蓮처럼같은 글만 있었다면 흥미를 덜 끌었을 것이다. ‘위대한 모정처럼 당신을 사랑하세요같은 글도 그렇다.

 

권지영 시인의 거미줄이란 시가 생각난다. “나무와 나무 사이/ 어두운 밤에도 드리워진/ 거미줄 한 가닥// 그대와 나 사이에도/ 저만치의 거리에서/ 아스라이 닿아// 거친 바람에 흔들릴지라도/ 끊어지지 않는/ 인연 한 가닥

 

어제 나는 한 수업 시간에 아리아드네(ariadne)란 아이디를 쓰는 분에게 테세우스는 어디 있느냐는 물음을 던졌다. 이 분을 포함 두 명의 다른 여자 분과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네 시간 가량 노닥거렸다. 아리아드네는 괴물 미노타우르스를 처치하기 위해 미궁에 들어간 애인 테세우스를 위해 실뭉치를 주어 길을 잃지 않고 나올 수 있게 한 신화 속 공주다.

 

이 수업에서 나는 낙하산 때문에 정교수가 되지 못한 분의 이야기를 듣고 그 낙하산 줄을 끊어야 하는데, 라 말해 좌중을 웃겼다.(그러고 보니 이 글의 주제는 실 또는 줄인 듯 하다.)

 

거친 바람에 흔들릴지라도/ 끊어지지 않는/ 인연 한 가닥이란 시구를 접하고 나는 슬픔 의 감정을 느꼈다.(슬픔도 사랑이지만 모든 슬픔이 사랑은 아닐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연 한 가닥이란 구절이 나를 슬프게 한 것이다. 모든 소중한 인연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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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는 것을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류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다. 단 차이가 있다. 내가 들을 때는 묻는 형식으로 말하고, 해설할 때는 확실히 익혀 명확히 이야기하되 사안에 따라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대답(對答)하거나 강의(講義)할 때보다 질문(質問)하거나 수강(受講)할 때는 새롭게 생각할 여지가 있다는 사실도 내가 염두에 두는 지침이다.

 

어제 수업을 예로 들어보자. 나는 판교(判敎)는 교판(敎判)이라고도 한다는 강사의 말에 고판은 교상판석(敎相判釋)을 말하는 것이지요? 라고 물었다.

 

일본의 불교학자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교상판석의 변천을 말한 바 있다. 남북조 시대의 교상판석은 석존(釋尊)의 설법인 모든 경전을 모순되지 않도록 판단하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수, 당 이후에는 경전이나 철학서에서 가르치는 교리나 학설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으로 변모하여 각 종파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어떤 종파보다 뛰어남을 논증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경전의 성립과 전개’ 131, 132 페이지)

 

내가 아는 정도는 대략 이 정도이다. 깊이 있게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바로 어제 지식이랄 것도 없는 내 말에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인 사람이 있다는 말을 교판 수업 후 들었다. 나에게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은 내가 밴드에 올린 글을 보고 글로도 아는 척을 하네.”라며 노골적인 불편감을 표했다고도 한다.

 

그 사람의 말이 결여한 것은 설득력이다. 그도 아는 척을 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는 척이 아니란 말인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말하자 역정을 낸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認定) 욕망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걸 모르는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란 작품에는 인식만 있고 표현이 주는 즐거움이 없다면 영원히 우울해질 것.’이라는 말이 있다. 되새길수록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그 사람에게 결여된 것은 자존감이기도 하다. 내가 언급한 내용들이 뭐기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반감을 표했을까? 나는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을 보면 질투하지 않고 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다만 나도 아는 척 하기 좋아함을 모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를 그렇게 설명한다. 세상 지식은 많고 아는 척 하는 즐거움은 크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란 의미를 지닌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易說乎)라는 공자의 말처럼 열심히 배우고 익힌 것을 선의(善意)로 표현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상대가 자신보다 더 많이 안다고 질투하지도 말고 덜 안다고 무시하지도 말며 교류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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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역 1번 출구로 나와 정독도서관 가는 길에 이학사라는 출판사가 있다. 이 출판사에서 낸 분류와 합류라는 책에 의미 있는 내용이 있어 전화로 물었다. 꽤 주목할 내용인데 근거 자료를 제시하지 않아 그것에 대해 물은 것이다. 나온 지 오래된 책이어서 저자들에게 물을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5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리고 출판사에 연수(年數) 제한 규정이라도 있는 것일까? 어떻든 이해하기 어렵지만 좋은 내용을 읽을 수 있게 해준 출판사에 불평을 늘어놓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안으로 생각한 것은 직접 찾는 것이다. 누구든 이것 말고 다른 길은 없을 것이다.

 

책 내용 중 이론지(理論知)와 실천지(實踐知)에 대한 대비가 눈길을 끈다. 책은 이론지를 에피스테메(episteme), 실천지를 프로네시스(phronesis)로 정의했다. 얼마 전 읽은 모티모 애들러의 평생 공부 가이드는 에피스테메는 전문(인들의) 지식, 파이데이아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하는 종합적 지식으로 정의했다.(173 페이지)

 

내가 오래전에 읽은 바로는 에피스테메는 진지(眞知), 독사(doxa)는 억측(臆測)이었는데... 한자경 교수는 오직 무명(無明)과 불각(不覺)뿐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 말하며 모른다는 자각은 우리가 개념적으로 분별되지 않는 어떤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다른 방식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말한다.(’분류와 합류‘ 144 페이지)

 

여담이지만 밝음이라는 것에 대해 한자가 분류한 것을 말하고 싶다. ()은 밝을 명이고, ()은 밝게 볼 명이다. 경운궁 준명당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글자가 명()이다. 나는 우리는 개념적으로 분별되지 않는 어떤 것을 다른 방식으로 알고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때의 밝음(지식)은 암묵적으로 안다는 의미에서 밝을 명자를 써서 명지(明知)라 표현해야지 밝게 볼 명자를 써서 명지(眀知)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은 수동적이고, ()은 능동적이다.

 

김상환 교수는 모든 합리적 질서는 분류에서 오지만 모든 발견과 창조는 기존 질서로 포착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나아가 기존의 질서 전체에 의문을 유발하는 분류 불가능자가 제기하는 문제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30 페이지) 분류는 어렵고 발견과 창조는 더욱 어렵다. 단편적안 모든 발견은 큰 틀로 수렴되거나 벽돌 하나나 둘이 아닌 그것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건축물이 되어야 한다.

 

최근 나는 주역(周易)8괘 중 태극기에 등장하는 4(건곤감리)와 나머지 4(손태간진)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다. 뜻의 차이(건곤감리는 하늘, , , 불을 의미하기에 거창하고 손태간진은 바람, 연못, , 우레를 상징하기에 덜 거창하다.)도 차이려니와 대칭의 유무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은 가운데 양효를 중심으로 위, 아래 모두 양효가 자리해 대칭을 이룬다. ()은 가운데 음효를 중심으로 위, 아래 모두 음효가 자리해 대칭을 이룬다. ()은 가운데 양효를 중심으로 위, 아래 모두 음효가 자리해 대칭을 이룬다. ()는 가운데 음효를 중심으로 위, 아래 모두 양효가 자리해 대칭을 이룬다.

 

반면 손()은 가운데에 양효가 있고 위에는 양효, 아래에는 음효가 자리해 대칭이 아니다. ()는 가운데에 양효가 있고 위에는 음효, 아래에는 양효가 자리해 대칭이 아니다. ()은 가운데에 음효가 있고 위에는 양효, 아래에는 음효가 자리해 대칭이 아니다. ()은 가운데에 음효가 있고 위에는 음효, 아래에는 양효가 자리해 대칭이 아니다. 이런 발견(?)은 사소하다. 하지만 모든 성과는 이런 작은 발견에서 시작된다.

 

김상환 교수는 과학적 발견 뿐 아니라 모든 위대한 발견은 전혀 다른 규칙 사이를 횡단하는 비스듬한 시선 속에서 일어났다고 말한다.(’분류와 합류‘ 33 페이지) 김상환 교수가 한 말을 다시 음미하게 된다. 발견과 창조 이전에 분류가 있다. 물론 분류도 어렵다. 그래도 분류를 잘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분류를 통해 남다른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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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자료를 찾다가 정은경의 밖으로부터의 고백을 다시 읽었다. ’사랑, 그 천 번의 입맞춤이란 글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모든 이야기는 다 얘기되었고 모든 형식도 다 실험되었다고 생각했다.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될 것 같고 그 파도의 출렁임 속에 피로와 허무로 잔뜩 찌들어 있던 어느 날, 이 책은 나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 이것이 이 장의 첫 두 문장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책은 할레이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란 소설이다. 부럽다. 이 책은 오래 전 강유정 문학평론가에 의해 소개된 책이었다. 책이 출간된 것이 2009년이니 강유정 평론가가 책을 소개한 것은 2009년 이후의 어느 날이리라. 정은경의 책에는 스테판 츠바이크도 등장한다.

 

아니 밖으로부터의 고백이란 서명(書名)은 스테판 츠아비크에 대한 책들(로랑 세크직의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을 다룬 글 제목과 같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매력적이다. 독일어로 문학 작품을 쓴 유대인 출신의 오스트리아 작가이고 유럽에서 제일 가는 장서가였다.

 

세계적인 작가였으나 고향에서 자신의 책은 화형당했고 유럽 최대의 장서가였으나 모두 두고 떠나야 했던 사람이다.(내가 읽은 츠바이크의 책은 프로이트를 위하여한 권이다.) 이쯤 되면 츠바이크가 도서관을 이용했을 가능성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공공 도서관을 이용했을까? 츠바이크가 즐겨 찾은 빈의 카페 센트랄은 아르투어 슈니츨러, 로베르트 무질, 알프레드 아들러,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도 즐겨 찾은 곳이다. 이 카페가 당시 지식인들에게 응접실겸 도서관 역할을 했다.(높지 않으리라.) 때마침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에 대해 쓰려고 했으니 츠바이크 글도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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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은 너무 당연하다. 어제 서촌 순례에서 윤일주 교수가 형 윤동주 시인의 용정 무덤을 찾아달라고 연변대 교수 오무라 마스오에게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참석자 한 분께서 윤일주 교수가 자신의 주례를 서주신 분이라고 말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역사와 함께 주변 배경 분야를 두루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막 580 페이지가 넘는 역사 책을 주마간산격으로 읽고 서평을 썼다. 29개의 꼭지로 이루어진 책이다. 좋은 책이지만 지루함을 느꼈다.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역사 전공자들도 역사책을 읽을 때 지루함을 느낄까? 느낀다면 비전공자들과 양상이 다를까? 한 사람을 다룬 전기를 읽고 싶다. 오늘 책에서는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 1932) 선생에 대한 인상적인 이야기를 읽었다,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생은 이회영(1867 1932) 선생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격인 분으로 꼽힌다. 그런데 나에게만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선생이 50세에 칸트, 홉스, 루소 등의 서구 근대 사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계몽주의자로 변신했다는 점이다.

 

작년 여름 민족지도자 석주 이상룡이란 책이 나왔으니 꼭 읽어야겠다.(아직 이회영 단독 평전도 못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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