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허수경 시인이 '정든 병'이란 시에서 한 말이다. 나는 이 시가 실린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에 붙잡혀 그의 새로운 시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시인이 병에 정들었듯 나는 병에 관심이 많다. 뉴스를 보니 박*이란 엔터테이너가 ADD라는 병을 앓고 있다. ADHD가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라면 ADD는 과잉 행동 없는 주의력 결핍 장애다. 조용한 주의력 결핍 장애이고 더 힘들지도 모르는 병이다.

 

젠더 & 섹슈얼리티 전문가 마리 루티는 TV 시청이나 알코올 중독 같은 대응기제도 신자유주의 사회의 성과 원칙에 반해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니라 더 즐겁게 사용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원하는 삶의 방식 즉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항시 대기하는 삶을 거부하는 사회적 방식의 일종이라는 의미이다.('남근 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 91 페이지) 행동의 저변에 숨겨진, 본인도 모르는 의도를 찾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로 읽히는 글이다.

 

이 글을 접하고 정희진 작가의 글을 읽으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그 글은 "광장의 축제는 일상의 프로작(우울증 치료제)이다. 어쩌면 촛불은 밤의 시위가 아니라 낮의 우울을 밝히는 데 더 긴요한지도 모른다."('낯선 시선' 195 페이지)

 

정희진 작가를 페미니즘 스승이라 말하는 시인처럼 내게 정희진 작가는 페미니즘에 눈뜨게 해준 분이다. 낯설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재일 한국인 디아스포라 서경식 선생의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고 있는 나에게 낯섦은 화두이다.

 

물론 그것은 해소해야 할 병리라는 의미에서의 화두가 아닌 수용하고 이해해야 할 현실로서의 화두이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에 이어 두번 째로 읽는 서경식 선생의 '디아스포라 기행'을 통해 내가 느끼는 바이다. 낯설게 보기는 소수자 되기의 출발일 수 있겠다는, 더 맞춰보아야 할 생각을 사족처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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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공부 가이드 - 브리태니커 편집장이 완성한 평생학습 지도
모티머 J. 애들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유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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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박사, 저술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집장을 지낸 모티머 애들러(Motimet Adlet; 1902 2001). 그의 '평생 공부 가이드'는 독특하다는 평으로는 부족한 책이다. 저자는 찰스 반 도렌과 함께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을 쓴 분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여기까지 읽을 만큼 인내심과 끈기가 있는 일부 독자는 약간 당황했을 것이라 말한다.(161 페이지) 이 책은 어떻게 공부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지식 분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책을 열면 인문학을 전문화라는 야만을 다스릴 치료제로 이해함으로써 아스펜 인문연구소의 설립을 격려한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에게란 말이 있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안내서라 부른다. 종국에는 매력적인 목표이자 노력의 완성인 이해와 지혜에 도달하기를 바라며 모든 사람이 여정을 시작할 때 필요한 지도를 자신의 책이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종합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을 추구하는 책이고 스스로 공부해 이해와 지혜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이다. 저자는 당대의 모든 지식을 알파벳순이 아닌 방법으로 백과사전처럼 포괄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알파벳순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인간의 지식을 조직하는 체계적이고도 원리적인 방법을 전혀 내놓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37 페이지)

 

물론 백과사전의 항목을 알파벳순으로 하지 않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구성하면 이용자에게 지식의 구조 즉 학식 세계의 지도를 제공할 수 있지만 이용자가 관심 있는 항목을 손쉽게 찾게 해주는 참고 도서로서의 기능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41 페이지)

 

저자는 인문학이 학문의 모든 갈래를 열거한 뒤 남는 것을 가리키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본다. 저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야기를 한다. 기원전 1세기에 이집트를 침략한 로마군의 공격에 잿더미가 된 그 도서관의 파피루스 필사본들이 어떻게 배열되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에 맞게 배열되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59 페이지)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4세기에 리케이온에서 한 강의를 일군의 정연한 논리로 편집하고 편찬한 것도 백과사전으로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저는 물리 현상과 천체의 운동에서 시작해 식물과 동물, 생명의 모든 현상을 거쳐 생물의 영혼에서 끝나며, 신학적 논의의 마지막 부분이자 편찬자가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논저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러한 저작 다음으로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시학을 다루는, 이론적이기보다 실천적이라 할 만한 다른 종류의 논저가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전체의 서론을 이루는 것은 논리학과 학문 방법론에 관한 논저로서, 이 논저를 통칭해 오르가논이라 부른다.(33, 34 페이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적 지식의 영역을 하위의 자연학, 중위의 수학, 상위의 형이상학의 위계질서로 조직했다.(162 페이지)

 

프랜시스 베이컨은 책을 산출하는 인간의 능력을 오름차순으로 기억력, 상상력, 이성으로 분류했다. 전기(傳記)와 역사는 기억력의 영역에 들어가고, 시와 픽션은 상상력의 영역에 들어가고, 철학은 이성의 영역에 들어간다.(60 페이지) 물론 기억력만이 아니라 이성과 상상력도 역사적 지식에, 역사적 연구와 서술에 관여하지만 기억력이 없이는 역사도 없다.

 

마찬가지로 기억력과 상상력은 모든 형식의 철학적 또는 과학적 기획에 관여하지만 이성 없이는 철학이나 과학은 존재할 수 없다. 이성과 기억력 역시 시 창작에서 일정 역할을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상상문학은 없을 것이다.(91 페이지)

 

저자는 여러 학자들을 이야기한다. 그 중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빼놓을 수 없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의 사용과 정신의 작용을 통제하는 훈련, 문법과 논리를 공부해 습득하는 기술을 배움의 첫 단계로 정했다. 플라톤처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특정 주제에 대한 공부를 개개인이 많은 경험을 쌓아 원숙해진 시기로 유보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과 정치학 공부는 젊은이의 몫이 아니라 말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적 진리와 철학적 지혜를 추구하는 탐구의 정점 또는 가장 높은 수준과 관련이 있다. 플라톤은 변증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이다.(형이상학은 물리현상을 넘어설 뿐 아니라 변화, 움직임, 생성보다 존재에 관심을 두는 학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차이점도 많다. 플라톤은 물리적 세계와 자연의 관찰 가능한 현상에 대한 지식을 주는 학문 전부를 뺐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포함시켰다.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을 엄격하게 구분했다.(79 페이지) 플라톤은 역사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역사보다 철학적이라는 말을 할 때 한 번 역사를 언급했다. 시는 실행할 수 있거나 실행할 법한 행위를 묘사하고 역사는 일어난 사건만을 다룬다.

 

입증이나 반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보면 역사, 철학, 과학 등은 지식의 영역에 속하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92 페이지) 그런데 위의 네 영역을 더 넉넉한 의미로 진리를 받아들일 경우 모두 진리에 포함된다. 저자는 우리의 이해에 이바지하는 시와 철학의 공통점은 지성을 사용하는 것이라 말한다.(186 페이지)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프란시스 베이컨에게서 심대한 영향을 받았지만 베이컨과 달리 종교적 신학을 철학에 포함시킴으로써 인간의 지식과 신성한 지식의 구별을 무시했다.(102 페이지) 콩트는 인간 지식의 세 단계 발달론을 제시했다.

 

지식을 신화나 미신 등과 동일시한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 즉 사변적 단계, 실증과학으로 대표되는, 경험적으로 증명된 타당한 지식의 단계다.(114 페이지) 저자는 에피스테메와 파이데이아의 차이를 설명한다. 라틴어로 Scientia(스키엔티아)로 번역하는 그리스어 에피스테메는 특정 전문 분야에서 사용되는 전문 지식을 말한다. 라틴어로 후마니타스로 번역하는 그리스어 파이데이아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하는 종합적 지식이다.(173 페이지)

 

저자는 전문화를 야만이라 부른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를 언급한다. 저자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종합인이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생 초반, 후반에는 종합인이 되어야 하고 중반에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77 페이지) 저자는 평생 공부를 지속하는 데 특히 필요한 것은 시와 상상문학에서 얻을 수 있는 종류의 이해라 말한다.(20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종합적 교양인을 나타내는 표식은 인간 학식의 전 영역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21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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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주 들리는 말이 스포일러란 말이다. 다 아는 바이지만 반복하자면 망치는 사람이란 뜻이고 구체적으로 말해 영화를 먼저 보고 줄거리를 상세하게 말해 감상을 방해하는 사람을 이른다. 내가 이 단어의 원형(?)인 스포일이란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의미의 Spare the rod, spoil the child란 문장에서이다.(지금도 영어 교과서에 이런 문장이 있는지 궁금하다, 아마 없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어떻든 내게도 스포일러란 말이 자주 들리는 것은 전례를 딛고 영화에 관심을 두게 된 결과이기도 하고 SNS에 자주 노출된 탓이기도 하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인 내가 이 말에 민감한 것은 최근에는 아니지만 내가 책 서평을 꽤 상세하게 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쓴 서평을 보고 책 한 권을 다 읽은 것 같다는 말이 내게 전달되기도 한다. 처음 이 말을 듣고 나는 내가 핵심을 놓치지 않고 거론해 높이 평가받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너무 많은 정보를 담아낸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일 수도 있다 싶다.

 

스포일러란 말은 두 경우로 분류될 것이다. 영화에 대해서든 책에 대해서든 말로 하는 경우와 글로 하는 경우다. 말로 하는 경우는 혹시 친한 사람이라면 막을 수 없어서 스포일러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글로 하는 경우는 아니지 않을까 싶다. 글로 하는 경우는 강제성이 없다. 스포일링이라 하기 어려운 것이다.

 

내용이 조금만 길고 지루하면 바로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무수한 인터넷 공간에서 스포일링이라니.. 넘어가면 그만일 텐데. 혹여 글이 너무 리얼하고 재미가 있어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읽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다른 관점으로 영화를 볼 여지를 염두에 두고 그냥 넘길 수 없는가?

 

중요한 것은 줄거리가 아니다. 즉 아무리 줄거리를 상세하게 듣게 되더라도 영화를 보는 제각각의 시각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영화를 단지 이야기 거리를 얻으려고 보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자기만의 시각을 확인하고 느낌을 다듬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광장을 읽는 일곱 가지 방법]이란 김욱동의 책이 있다. 최인훈 작가의 광장을 읽는 방법을 역사 비평, 형식주의 비평, 심리주의 비평, 사회학적 비평, 신화 비평, 구조주의 비평, 포스트구조주의 비평 등으로 제시한 책이다. 물론 책이든 영화든 이런 여러 방식으로 작품을 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시각을 갖는 것이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각에 같은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차이나는 진술을 하는 것은 라쇼몽이란 영화에 한()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 자체로 한계의 존재이고 시각은 불완전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단순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에 맞는 편한 영화를 보려는데 줄거리를 미리 구체적으로 말하니 김이 샌다는 식으로.. 그렇다면 할 수 없다. 다만 적어도 글로 줄거리와 의미 등을 상세히 말하는 경우에는 스포일링이라 하지 말고 그대로 넘어가면 되리라.

 

나는 감동은 작가(作家)와 수용자가 함께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대단한 작가의 글이나 말도 듣거나 읽는 사람이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안목이 없으면 불편하거나 평범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 상대가 말이나 글 실력이 너무 뛰어나(끝까지 읽거나 들었)다면 스포일링이라 하지 말고 자신의 공감 및 수용 능력을 확인한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높게 보아야 할 것이라 말하고 싶다.

 

만일 그런 뛰어난 이야기꾼이나 문필가의 내공에 감동한 결과 그 영화를 반드시 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자신의 공감 및 수용 능력을 확인했으니 다행인 데다가 영화까지 기대를 갖고 보게 되었으니 이중으로 감사할 일이고, 그렇지 않고 듣기는 들었지만(또는 읽기는 읽었지만) 그 결과 감상욕구가 사라졌다면 자신의 공감 및 수용 능력을 확인한 것에 대해 감사하면 되지 않겠는가. 어떤 경우에든 스포일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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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에 이어 두해 째 왕릉(王陵) 연구팀에 속해 올해 첫 숙제를 했다. 융건릉(隆健陵)에 다녀오지 않아, 참가한 팀원들과 달리 소략(疏略)한 숙제를 맡게 되었다. 가지 않은 것은 지난 해 9월 동작(銅雀)에서 간 일정에 참여했었기 때문이다.

 

또 갈 수도 있었는데 내키지 않았다. 외적 요인으로 시큰둥한 것이 아니라 공부하기 위해 들어갔지만 왕릉은 궁()이나 묘()에 비해 다루기(?)가 난감하다. 신이 나지 읺는다고 해야겠다.

 

사도세자(장조)의 융릉(隆陵)과 아들 정조의 건릉(健陵) 이야기를 각각 한 편씩 하는 숙제를, 여러 편의 글을 읽고 내 생각으로 정리, 재편하는 형식으로 마무리짓지 못했다. 내켰다면 정조의 풍수 활용에 대해서도 썼을 것이다.

 

이종호의 책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 답사기에서 읽은 다음의 글이 마음을 풀어주었다. “능호를 건()이라 한 것은 쉬지 않고 가는 하늘의 도를 상징한 것이다.”(362 페이지) 정조의 능에 대한 이야기이다. 굳셀 건이지만 하늘의 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 여겨진다.

 

하늘이니 건()이고 그것을 건()으로 바꿀 법도 하다. 지난 해 나온 박현모 교수의 정조평전의 부제가 생각난다. ‘말 안장 위의 군주라는 부제다. 이 부제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군주는 물론 늘 목숨을 위협 받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군주 정조를 상징하는 절묘한 중의적인 말이다.

 

나는 정조(正祖)로부터 주역(周易)의 하늘 곧 건괘(乾卦)를 연상한다. , 하면 용()이 생각난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세운 원찰 용주사(龍珠寺)를 생각하고 하는 말은 아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전면에 보이는 안산(案山)을 여의주로 인식하였고 그 중요성에 대해 굉장히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박정해 지음 사찰에서 만나는 불교풍수참고) 용주사 자체가 정조의 깊은 관심 속에 입지선정이 되고 건설된 사찰이다.

 

물론 나는 풍수를 논할 실력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올해 임기봉 교수의 임금의 도시를 읽고 풍수를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중요한 점은 풍수는 자연친화적이기에 인간에게 유리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 차원 말고 죽은 조상이 살아 있는 후손과 감응(感應)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하고 주관적이다. 표면은 발복(發福)이고 실제적으로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명당을 고른 정조의 경우를 보면 정치적 차원과 무관한 경우도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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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0 0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명창정궤(明窓淨机)는 밝은 빛이 들어오는 방의 정갈한 서안(書案)을 말한다.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なつめ そうせき: 夏目漱石>가 좋아했다고 한다. 가끔 단 한 권의 책도 없이 텅텅 비어 정결한 방, 절간 같은 방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의 글이 생각난다.(‘바람을 담는 집수록 책이 없는 방, 절간 같은 방’ 186 페이지)

 

밝은 빛이 들어오는 방의 정갈한 서안을 의미하는 명창정궤에서 정갈하다는 의미는 김화영 교수가 말한 것처럼 책이 없는 책상이라기보다 서너 권의 책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화영 교수는 어쩌다가 묵어가는 시골 여관방, 주전자와 물그릇과 재떨이가 전부인 금욕적인 방, 그리하여 마침내 책이 그리움이 되는 오후를 그렸지만 나는 서너 권의 책이 있는 방을 만든다면 그 책은 어떤 책들이 될까? 궁리하지 않을 수 없다.

 

아아, 상당히 어려운 과제다. 이런 구상(構想)은 모든 음악이 없어져도 바흐의 평균율만 있으면 복원이 가능하다는 말에 영감을 받은 결과다. 책의 물질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나는 아무래도 알베르또 망구엘 류의 사람이리라.

 

보르헤스 이야기를 해야겠다. 시각 장애인이 된 채 국립 아르헨티나 도서관장이 된 보르헤스는 그 사건을 자축하기 위해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하느님의 기막힌 아이러니를 시로 썼다.(알베르또 망구엘 지음 밤의 도서관’ 283 페이지)

 

그런 보르헤스가 책은 읽는 순간 속에 존재하고, 그 후에는 읽은 페이지에 대한 기억으로서 존재하며, 책이라는 구체적 형태는 얼마든지 처분 가능하다고 생각한 작가인 반면 제자 망구엘은 언어의 구체적 물질성, 책의 단단한 현존, 그 형체, 크기, 질감을 원하는 사람이다.(2018827 교수신문 수록 김정규 시인 글 서재를 해체한다는 것에 대하여참고)

 

나는 사실 펴볼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는 책들조차 과감히 정리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금욕적인 방은 상상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깨끗하게 방을 정리하리라 마음 먹을 뿐이니 나는 바벨탑 무의식의 소유자일 수 밖에 없다. 쌓아서 구원에 이르려는 또는 이를 수 있다고 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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