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헤스론은 람을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허무하다 그치?)

어릴 적, 끝없이, 계속되는 동사의 수를 세다 잠든 적이 있다

 

* 소설가 박태원(1909 - 1986)이 형상화한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 구보씨(仇甫氏)는 정오쯤 집을 나와 보들레르가 말한 플라뇌르(flaneur; 어슬렁거리는 도시의 산책자)처럼 종로, 동대문, 정동(貞洞) 등을 걸으며 상념에 빠지는 인물이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이 소설에 삽화를 그린 사람은 하융이란 필명을 쓴 이상(李箱; 1910 - 1937)이었다. 어제 오랜만에 이상(李箱)과 플라뇌르를 떠올리며 독립문에서 경교장, 광화문, 서촌까지를 걸었다.

 

서촌에서 최근 재개관한 이상 시인의 집을 보았으나 압권은 3.1절 행사를 위해 정부종합청사에 대형 태극기를 설치하는 장면이었다. 워낙 큰지라 몇 파트로 나뉘어 설치된 국기는 설치미술을 연상하게 했다. 하지만 그 감동적인 모습을 뒤로한 채 나를 사유하게 한 것은 최근 프랑스 패션 잡지 보그에 표지 모델로 오른 유관순 열사였다.

 

여성이기에 그런지 유관순 열사는 위업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대우를 받고 있어 안타까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동기들 톡방에 대형 태극기 설치 장면과 보그에 오른 유관순 열사 모습을 올렸더니 한 동기가 딸과 함께 홍대 근처의 여성인권 박물관에 다녀왔다는 글을 올렸다.

 

일제에 전쟁 성노예로 끌려간 우리 여성들이 처했던 참담함을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다는 그에게 나는 호주 시드니의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파리의 쇼아(홀로코스트의 히브리어) 박물관, 라벤스브뤼크 여성 수용소 기념관 등이 소개된 송한나의 '뮤지엄 스토리'란 책을 추천했다.

 

그리고 최영미의 '어떤 족보'라는 시를 생각했다. 남자에서 남자로 이어지는 족보의 폭력에 이의를 제기한 시이다. 김승희 시인은 Mother(어머니)란 단어가 Matter(물질)이란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사실에 유의하라며 서구 신화와 종교가 어머니 정복 - 어머니 부정 - 어머니 승화라는 세 단계의 투쟁을 통해 여성 억압을 제조해왔다고 지적한 뤼터를 소개했다.

 

세포 발전소라 불리는 미토콘드리아는 어머니에게서 아들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 경우 다음 세대로 물려줄 수 없고 딸에게 이어진 것은 무수히 다음 딸에게 이어지기에 족보는 생물학적으로 여성 중심으로 편제되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설득력 있는 말이다. 물론 현실은 남성 중심으로 족보가 편제되는데 이는 가부장제 또는 남성중심주의로 인한 것이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읽어야 할 시가 최영미 시인의 '어떤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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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남부 도시 코르도바에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뜻하는 메츠키타(Mezquita)라 불리는 역사적 건축이 있다. “10세기 무렵 코르도바는 인구가 45만 명에 달하는 서유럽 최대 도시로 성장했으며 호학가로 유명했던 알하캄 2세의 통치 시기에는 이곳 도서관에 약 40만 권의 장서가 보관돼 서유럽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한국일보 수록 김정명의 이슬람 문명기행중에서)

 

승효상 건축가는 8세기에 이슬람 사원으로 지어진 이 건물이 점령군 기독교도들에 의해 교회 건축 양식으로 바뀐 것을 언급하며 이는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성당을 점령한 이슬람교도들이 성당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건물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한 것과 대조된다는 말을 한다.(‘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87 페이지)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약 800년 동안 스페인은 이슬람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 코르도바가 속한 안달루시아는 무슬림과 그리스도교도가 직접 만날 수 있었던 문명의 경계선이었다. 이슬람 문명이 스페인으로 전파된 통로는 지브롤터 해협이다.

 

아라비아인과 무어인들이 8세기 초 서고트를 멸망시키고 북부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이래 이슬람의 스페인 지배는 10세기에 이르러 최전성기를 맞았다.

 

그 이슬람의 최전성기 이후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이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을 탈환한 뒤 서구에서 오랜 세월 잊혀졌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자연학’, ‘영혼에 관하여등의 저술들이 이미 아라비아인들에 의해 번역되고 재해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리차드 루빈스타인 지음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이들참고)

 

루빈스타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서구에서 오랜 세월 잊혀졌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플라톤 사상을 수용해 이교도의 반기독교적 교리에 대항하는 논리로 활용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 말한다.(87, 89 페이지)

 

한때 마니교도였다가 기독교(카톨릭)로 회심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이 지닌 커다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악()을 선()의 부재로 본 플라톤의 정의를 받아들여 악을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결핍 즉 인간이 자유의지를 그릇되게 사용함으로써 초래된 윤리적 블랙홀이라 규정함으로써 그 이론을 마니교에 반대하는 데 이용했다.(87 페이지)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는 자연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갖기에 신이 선은 물론 악에 대해서까지 제 1 원인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슬람 세계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등지에서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누스의 의학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서, 유클리드의 수학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 등을 번역한 시기는 8세기 이후이다.

 

이 대번역의 시기에 번역된 책들과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공통으로 관계된 사상가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장미의 이름의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최근 서강대에서 김은주 교수의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으로 이해된 개체’, 박제철 교수의 미적분학의 창시자가 상상한 물리 세계등의 강의를 들었다. 두 철학자(스피노자, 라이프니츠)는 어려운 철학 만큼 어려운 자연학을 펼쳤다.(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자연학 위에 자신의 사상을 더했다.)

 

김성환 교수의 ‘17세기 자연 철학(부제: 운동학 기계론에서 동력학 기계론으로)’을 읽을 필요를 느낀다. 형이상학(metaphysics)이란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철학 이전에 자연과학에 정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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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 마르크스와 다윈의 저녁 식사
일로나 예르거 지음, 오지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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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다윈의 저녁 식사라는 부제의 일로나 예르거(Ilona Jerger)의 책 두 사람을 읽었다. 동기(動機)가 된 것은 정조(正租)와 정약용의 관계를,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적 상상을 더해 논픽션 형식으로 쓰려는 생각이다. 사실 두 사람이 소설(형식의 글)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소설 형식이어서 잘못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저녁 식사라는 말을 접하고 10년 전 읽은 장대익 교수의 다윈의 식탁을 떠올렸다. ‘다윈의 식탁은 진화론의 후예들이 펼치는 논쟁 형식의 책이다. 나는 다윈에 대해서는 물론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최근 흐름으로 보건대 나에게 익숙한 것은 마르크스(의 생애).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자본을 쓴 그를 역시 같은 도서관을 자주 찾아 자기만의 방을 쓴 버지니아 울프와 비교하는 글로 연결지었기 때문이다.

 

독일인 마르크스가 영국인 다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았던 것은 망명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다윈의 존재를 알았다. 다윈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헌사를 적어 다윈에게 보냈을 정도인데 두 사람이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마르크스와 다윈의 관계를 매개한 것은 허구의 인물인 베케트 박사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다윈의 지인이자 마르크스의 사위인 에이블링이 다윈에게 장인을 모시고 집을 방문해 대화를 나누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청함으로써 성사되었다.

 

베케트 역시 두 사람에게 차례로 상대를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했다. 허구의 인물인 베케트 박사는 다윈과 마르크스의 집을 번갈아 방문하며 각기 이런 저런 병에 시달린 두 사람을 치료해주는 주치의로 설정되었고 에이블링은 실제 마르크스의 사위였지만 그가 마르크스의 사위가 된 것은 마르크스가 사망한 후이다. 따라서 이 설정 역시 소설적 즉 (부분적으로) 허구다.

 

저자는 진화 이론 자체가 아닌 다읜의 내적인 삶에 초점을 맞춘 만큼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이론 구조보다 마르크스 개인 성격이나 국가 없는 망명자로서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말을 했다. 다만 다윈의 경우는 집안이나 산책로 등의 풍경이 상세하게 묘사된 반면 마르크스의 경우는 베케트와의 짧은 대화가 주되게 다루어졌다.(자료 찾기가 어려운 결과다.)

 

내적인 삶이나 개인 성격 등에 초점이 맞추어졌지만 베케트가 다윈과, 그리고 마르크스와 나누는 이론적 대화는 꽤 전문적이다. 마르크스와 다윈이 만난 자리에서 오고간 대화도 그렇다. 사실 이 부분은 다윈의 아내 엠마의 문제가 드러난 자리이기도 하다.(엠마는 무신론자인 남편 다윈이 기독교 신앙을 갖도록 설득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다윈의 저술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본저술의 단서를 삼았지만 다윈을 기회주의자로 보았다. 마르크스는 다윈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관찰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동물과 식물의 세계에 그대로 대입했으며(141 페이지) 공산주의는 진보이며 순진하게 꿈결 같은 자연 상태가 진보가 아니라는 말을 했다.(146 페이지)

 

다윈은 자연과학자로서 과학이란 모든 사회적인 분쟁의 외부에서 작동해야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는 말(162 페이지)과 함께 자연에 협력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종이 계속 생겨나는 것은 경쟁의 결과라는 말, 협동을 기본 원칙으로 격상시키려는 사회가 두렵다는 말(163 페이지)을 했다.

 

다윈은 자연의 수많은 법칙 중 몇 가지를 점점 더 이해함으로써 신앙심 깊었던 예전 마음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한다.(298 페이지) 다윈은 자신을 불가지론자로 규정했다.

 

두 사람은 내 관심사와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책이다. 마르크스와 스피노자의 유대인 및 랍비와의 연관성이 그것이다. 마르크스와 스피노자 모두 유대인이었고 마르크스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랍비 아버지의 자식들이었으나 그런 점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고 누가 가족사를 알려고 하면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스피노자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랍비가 되기를 기대받았지만 범신론을 버리지 않아 파문당했다. 오랜만의 소설이라 말해야 하지만 소설 이상의 책이라는 생각에 그런 표현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에도 소설 형식의 책이어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는 말은 하고 싶다. 재미를 묻는다면 재미라기보다 진실의 감동이 더 크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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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 - 1946)에 관심이 간다. 하위징아에 대해서 '호모 루덴스'보다 '중세의 가을'이 실제적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나에게는 더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중세의 가을이란 하위징아가 전성기를 지나 쇠락해가는 시기로 알려진 14, 15세기를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나아가는 시대로 보았다는 뜻이다.

 

하위징아는 낡은 사상의 형식들은 죽어 버리지만 그와 동시에 같은 토양 위에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와 꽃피기 시작한다는 말을 했다.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 1932 - 2016)는 중세는 단일한 특성을 지닌 하나의 세기가 아니고, 유럽 문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암흑기가 아니었고, 고전 문화를 무시하지 않았고, 화형의 불꽃은 다른 시대에도 타올랐다는 말을 했다.

 

중세를 이야기하려면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 1924 - 2014))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책 가운데 '연옥의 탄생'이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일로나 예르거(Ilona Jerger)'두 사람 - 마르크스와 다윈의 저녁 식사'에 천국, 지옥, 연옥 이야기가 나온다.

 

지옥은 자본주의, 천국은 공산주의, 연옥은 평화로운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폭압적인 중간 단계)로 소환되었다. 다윈과 그의 주치의인 베케트 박사가 마르크스의 사상을 두고 나눈 대화에 나오는 내용이다.(다윈은 마르크스의 선동을 못마땅해 하고 베케트는 지지한다.)

 

그리스도교와 스탈리니즘의 세부 사항들을 대응시킨 최인훈(1936 - 2018)'광장'이 생각난다. 에덴시대 vs 원시공산사회, 타락 vs 사유 제도의 발생... 천년왕국 vs 문명공산사회 등이 대응되었지만 연옥은 나오지 않는다.

 

고프는 연옥 개념이 정립된 12세기에 주목했다.(연옥 개념은 12세기에 갑자기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다.) 12 세기는 르네상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회와 문화 수준이 최고점에 오른 중세의 한 시기다. 후일 프로테스탄트가 되는 세력들은 연옥 개념을 부정했다.

 

고프에 의하면 천국보다 지옥에 가깝지만 그 자체로 천국을 향한 낙관적인 전망과 열망에서 나온 연옥 개념은 민중 통제를 위해 교회가 만든 제도라기보다 중세인들의 망탈리티 속에 자리잡았던 합리와 낙관의 요소들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다시 내 이야기를 하자면 지금까지의 수사(修辭)적 말들에도 불구하고 중세에 대한 내 관심은 결국 도서관(수도원)에 대한 관심인 셈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자료들을 찾는 일이 남았다. 기존의 3D에 하나의 D(Depressive; 두달이고 석달이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외딴 곳에서 발굴을 하니 우울한..)를 더해 자신들의 직업을 4D 업종이라 말하는 고고학자가 된 마음으로 지층을 파헤쳐 결과를 얻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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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로드 4000km - 대한민국 100년,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임시정부 투어가이드
김종훈 외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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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독립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인 2019년은 뜻 깊은 해다. 많은 관련 책이 나왔고 기념식도 성대하게 거행될 것으로 보인다. '임정로드 4000km'도 관련 책들 가운데 하나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항저우, 창사, 광저우, 류저우, 충칭 등지를 떠돌았다. 그 길이 4000km라는 사실은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임정로드 4000km'는 세세한 여행 안내가 돋보이는 책이다. 특징적인 것 중 하나는 김구 선생의 효창원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부분을 0부로 정했고 마지막 10부를 번외편 일본과 대만 우리가 잘 몰랐던 영웅들의 마지막 걸음으로 정했다.

 

도입부라 할 0부에서 만나게 되는 사연은 이승만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다. 그는 김구 선생 묘소인 효창원을 무력화하기 위해 반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앞에 거대한 효창운동장을 조성했다. 임정로드 4000km의 시작점은 예전에는 김신부로(金神父路)로 불렸던 서금2(瑞金二路)이다.

 

"임정로드 4000km팀이 카메라와 삼각대, 지도 한 장을 들고 첫 걸음을 뗀 곳이다."(유래가 정확하지 않은 서금이로는 서금 1로와 함께 하는 이웃 길인 2로이고 김신부로의 김신부는 김대건 신부를 말하는 것으로 김신부로는 속칭이다. 서금을 중국어로는 루이진이라 한다.)

 

예관(?觀) 신규식 선생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리라. 흘겨본다는 뜻의 예관이란 호를 가졌던 선생은 중국 혁명 지사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상하이 지역에 독립운동 기반을 닦은 분으로 예관은 을사늑약에 분노해 음독 자살 시도 끝에 살아남았지만 오른쪽 시신경을 잃어 흘겨본다는 의미로 지은 호이다.

 

저자들은 걷고 또 걸어야 길이 생긴다는 말을 한다.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의미다.(110 페이지)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듯 임시정부는 우리의 뿌리이자 정신이다. 더구나 올해는 임정수립 100주년의 해이니 더욱 각별하다. 임시정부가 처했던 여건은 여관(중국 용어로는 '여사: 旅社'.)을 거처로 삼기도 했을 만큼 열악했다.

 

파수꾼을 자처한 세 인물 김철, 송병조, 차리석의 이름도 기억해야 하리라. 특히 평안도 출신으로 신학문을 접한 뒤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가 되어 후학을 양성한 데 이어 비밀결사인 신민회 요원으로 활약했던 차리석 선생은 임시정부의 내일은 군주제의 청산이며 민주화의 새 출발을 기약함에 있다는 말을 남겼다.

 

저자들은 우리가 치욕스런 역사까지 기억하고 보존하는 중국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172 페이지)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위안부 관련 진열관 하나 없이 소녀상 하나 세우는데도 일본의 눈치를 살폈다.(176, 177 페이지)

 

저자들은 정부가 지켜주지 않자 학생들이 나서서 할머니들을 지키겠다고 나선 것을 가장 안타깝고 아쉬웠던 지점이라 덧붙였다. 금릉대학(현 난징대학)은 여운형, 김약수, 조동호, 김마리아 등이 수학한 곳이고 약산 김원봉 장군이 의열단을 만들기 전 공부한 곳이다.(약산 김원봉 장군은 백범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이 컸던 유일한 인물이다.)

 

약산(若山)은 고모부이자 스승인 황상규의 주선으로 짓게 된 호다. 황상규는 김원봉과 김두전과 이명건을 의형제가 되게 했고 각각의 호도 지어주었다. 김원봉은 약산, 김두전은 약수(若水), 이명건은 여성(如星)이다. 산과 같다, 물과 같다, 별과 같다는 뜻이다.

 

정정화 선생이 장강일기(長江日記)’에 썼듯 김원봉은 해방 후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모욕을 당하고 결국 자발적으로 북으로 건너갔다. 약산의 금릉대학 동문 중 한 분이 몽양 여운형이다. 좌우합작을 위해 헌신했던 몽양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살을 당했는데 이는 약산으로 하여금 북으로 가게 한 위협이 되었다.

 

의열단을 창설한 약산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었다. "애국지사에게 말씀 드리기 송구하지만"이란 말로 운을 뗀 저자들은 임정 멤버들이 정정화 여사의 사진을 보고 보인 첫 반응이 모두 똑같았다는 말을 전한다. 엄청 미인이라는 말이었다.

 

정정화 선생은 열살에 구한말 고위 관료인 동농 김가진 선생의 아들인 김의한과 결혼을 했다. 9년 뒤 시아버지와 남편이 아무 말 없이 상하이 임시정부로 전격 망명하자 선생은 시아버지와 남편을 찾아 1920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홀로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장강일기에 의하면 드디어 선생이 시아버지와 상봉하자 시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시아버지는 "네가 어떻게 여길 왔느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온 게야?"라고 말했고 정정화 선생은 저라도 아버님 뒷바라지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아 허락도 없이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했고 시아버지는 "그래 잘 왔다, 고생했다, 참 잘 왔다, 용기 있다."고 답했다.

 

정정화 선생은 상대적으로 감시가 덜한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 독립 자금을 모으는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탐사팀은 심한 고생을 했다. 예정보다 일찍 떠나는 기차도 한 몫을 했다. 저자들은 이제 건국절 논란은 그만 하자고 말한다. 임시정부는 1921년에 외교권을 행사했다.

 

저자들이 말했듯 이승만 정권이 출범한 1948815일을 건국절로 못박는 세력들의 잘못을 알리고 임시정부 탄생일인 1919411일을 대한민국의 시작일로 알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저자들은 그런 점이 임정 프로젝트의 이유이자 목적이라 말한다.

 

9부는 해방의 감동을 느끼다란 부제가 붙은 충칭이다. .충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거처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역사상 최초로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한 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는 피난의 연속이었다. 상하이에서 12, 충칭에서만 4번 청사를 옮겼다.

 

김구 선생의 강력한 의지로 탄생한 광복군은 1942년 조선의용대와 합쳐진 후에야 대한민국의 정식 군대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김구 선생은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을 결정하며 조선의용대 총대장인 김원봉 장군을 광복군 부사령 및 1지대 지대장으로 선임했다. 군의 좌우 합작 뿐 아니라 임시정부 의정원에도 좌익진영 인사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1945815,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수년 동안 준비해온 국내 진입은 중단되고 말았다. 김구 선생은 3개월이나 해방 조국에 돌아가지 못했고 그 사이 미소는 한반도에 38선을 그었다. 한 달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마지막 부()에서 윤봉길과 윤동주, 송몽규의 묘한 인연을 보자.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태어나 용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시샤대학 영문과 재학중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송몽규는 만주 은진중학교를 거쳐 서울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후 1942년 도쿄 제국대학에 입학했다.

 

윤동주 생가를 관리하며 명동촌 촌장을 지낸 송길연씨란 분에 의하면 안중근 의사가 명동촌의 선바위에서 사격 연습을 했다.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밀사로 파견(1907)된 이상설이었다. 이상설이 세운 간도의 첫 근대식 학교였던 서전서숙은 후에 명동서숙을 거쳐 명동학교로 발전했다.

 

안중근 의사가 간도로 갔는데 이유 중 하나는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였다. 충북 진천 출신인 이상설은 25세때 과거에 급제한 뒤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내던지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선 데 이어 이듬해에는 조선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간도 용정으로 갔다.

 

저자들은 다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고 말한다. ‘임정로도 4000km’는 중요 부분을 간추려 설명하는 압축적 편성이 돋보인다. 대장정이라 말하고 싶다. 감사드린다.

    

 

 * 네이버 작가 소영처럼님이 제공한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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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1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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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2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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