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기억력은 고금에 뛰어나 한 차례 눈으로 보기만 하면 죽을 때까지 잊지 않다가 우연히 자극만 받으면 한번에 수천 백 마디를 외워 마치 술통에서 술이 쏟아지듯 유탄이 퍼부어 판때기를 뒤엎듯 하였다.

구경(九經), 사서(四書), 23사(二十三史)에서 제자백가, 시, 부, 잡문총서, 패관, 상역(象驛), 산률학(算律學), 우의마무(牛醫馬巫)의 설....

모두 정밀히 연구하고 알맹이를 파내서 한결같이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 같았다. 질문한 사람마다 깜짝 놀라서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정약용이 표현한 이가환(李家煥; 1741 -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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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김준혁 지음 / 여유당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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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수원 화성(華城: 1997년 지정)을 무엇이라 부를까? 과학성과 합리성, 실용성 등을 두루 갖춘 동양 성곽의 백미? 강한 군사력에 근거, 왕도정치에 한 몫을 한 상징 건축물? 한신대학교 정조(正租) 교양대학 김준혁 교수의 이산 정조, 꿈의 도시 수원 화성을 세우다를 통해 바로 그 수원 화성의 정신과 물질적 토대를 알아보자.

 

무엇보다 먼저 말할 것은 1796년 축성(築城)된 수원 화성은 18세기 개혁 군주인 정조 자신을 가리키는 건축물이었다는 말이다.(340 페이지) 정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은 수원 화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적 힘이었고 정조는 바로 그 힘을 반대세력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중요한 점은 화성이 성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화성은 도시 전체를 의미한다.(175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정조는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세우고 그 중심에 화성(華城)을 축조(築造)했다. 개혁을 주도할 선진적 인물과 도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화성 축조의 배경은 무엇일까?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개인 차원의 죽음이 아니라 노론이라는 반대 세력의 정치적 행보가 작용한 결과다. 사도세자는 소론의 지지를 받았던 경종 궁녀들의 보필(輔弼)을 받으며 자랐다. 영조의 탕평책의 일환이었지만 이로 인해 사도 세자는 열 살이란 어린 나이에 노론 신하들의 잘잘못을 거론하는 등 소론의 시각으로 정세를 보았다.

 

자연히 이는 영조 및 노론 세력과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이런 지적이 이 책의 주요 성과이다. 물론 영조의 과오는 정치적 성향의 차이로 환원할 수 없다. 개인적인 과오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화성 성역은 1804년 정조의 양위 이후를 대비한 터전(303 페이지)이었다.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화성은 주인을 잃었다. 정조는 개혁과 호학(好學)의 군주였고 애민(愛民)과 위민(爲民)의 군주였다.

 

또한 만기친람(萬機親覽: 온갖 정사를 임금이 친히 보살핌)의 군주였고 남다른 효심을 가진 군주였다. 정조는 서얼 허통과 자휼전칙을 시행했고 노비제도 혁파안을 통과시키려 했고 신분에 관계 없이 열심히 일하는 자가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어 나갔다.

 

정치색이 달라도 쓸모가 있으면 적재적소에 등용했다.(350 페이지) 둔전(屯田)을 운영하도록 했고 대규모 국영 농장을 만들었다.(144 페이지) 더욱 그는 수원을 국제 무역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147 페이지) 이렇듯 정조의 개혁은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185 페이지)

 

정조는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은 물론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만들었다. 문무(文武)를 겸한 정조의 전일성(全一性)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조는 임금과 신하가 하나가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268 페이지) 화성 행궁의 정문 이름을 신풍루(新豐樓)로 지은 데서 알 수 있듯 정조는 수원을 자신의 새로운 고향으로 선언했다. 풍이란 말은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灃沛)에서 유래해 황제의 고향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305 페이지)

 

정조는 고도의 정치 역량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사도세자와 관련한 언급을 일정 선에서 그침으로써 노론으로 하여금 화성 축성과 관련해 더 이상 시비를 걸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212 페이지)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듯 화성은 정조의 모든 역량이 총동원된 작품이자 정조 자신을 가리키는 건축물이다.

 

정조에 대해 한 논자(백승종)는 정조가 조선 왕조의 오랜 국시(國是)인 성리학의 함양을 부르짖었다는 이유로 정조가 개혁 군주로 불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정조와 불량 선비 강이천‘ 346 페이지) 정조가 취한 물적 토대에 기반한 수많은 개혁의 시도들은 도외시하고 성리학이라는 학문만을 고려한 편중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정조는 정신에 대해서는 성리학을, 정신 이외의 여타 분야에 대해서는 실학 정신을 인정, 적용했다. “화홍문(華虹門)은 실학 정신을 실현한 평등 정신의 산물”(260 페이지)이란 말을 새기자. 정세에 대처하고 백성들에 대해 보인 정조의 태도에 실학 정신이 깃들지 않은 것이 있는가, 묻게 된다 .

 

화성 완공 1년 전 어머니 회갑을 치르기 위하기 위해 나선 행차를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 완공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를 자세히 보아야 하겠고 정조의 철학적 면모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다. 내가 정조를 좋아하는 것은 전기한 여러 면모들 외에 정조가 주역과 풍수 등에 능통해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다양하게,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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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상곡(夜想曲) 2018-10-0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그래봤자 조선은 이미 패망의 길로 갈수빢에는 없었습니다. 청나라와 일본의 경제력과 외교력을 따라가기엔 조선은 이미 늦어도 한참을 늦었다(임진왜란때 조선은 그냥 패망했어야 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10-03 19:03   좋아요 0 | URL
역사 추리 조선사 리뷰를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야상곡(夜想曲) 2018-10-03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저는 조선의 두얼굴을 추천합니다.
 

요즘 정조에 대한 책을 연이어 읽고 있다. 이정우 교수의 ‘인간의 얼굴‘에서 정조와 정약용의 문답 부분을 읽은 이래 이십 년 가까이 읽자고 다짐만 해온 정조 본격 읽기를 이제 시작한 셈이다.

박상하의 장편 소설 ‘왕의 노래‘를 완독하고 서평을 작성했고 백승종의 ‘정조와 불량 선비 강이천‘을 필요한 부분만을 읽었다.

지금 읽고 있는 김준혁 교수의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와 김도환 교수의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도 반드시 서평을 쓸 것이다.

정조에 대한 책을 읽다 보면 다산 정약용을 만나게 된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에서 정조가 성균관 유생들을 강도 높게 교육시키며 주제를 줘 그것을 논문화하게 했음을 언급한 부분에서 정약용 이야기가 나온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내준 과제는 중용에 대해 논문을 쓰는 것으로 정조는 다른 유생들의 답변은 모두 황잡(荒雜; 거칠고 조잡)하지만 정약용이 한 답은 특이하기에 반드시 식견 있는 선비가 될 것이라 말했다.

정조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중용에 대해서는 퇴계와 율곡의 학설을 모두 공부했지만 정약용이 율곡의 학설이 더 옳다는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남인은 대대로 퇴계의 학설을 옳다고 따르는 사람들인데 남인인 정약용이 퇴계가 아닌 율곡의 학설을 옳다고 한 것은 학문적인 자기 견해가 확실했다는 의미이다.

중용은 나도 관심이 많다. 아직 체계화하지 못했지만 신정근 교수의 논의를 따라 말하자면 중용은 어떤 원칙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조절하는 것이다.

사뭇 비경제적이고 산만해지더라도 꼭 읽고 싶은 책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래서 힘들지만 그래서 행복하기도 하다.

인문서이면서 소설만큼 흥미로운 김준혁 교수의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를 읽고 어떤 책으로 옮겨가게 될지 모르지만 어떤 책이 되었든 즐겁게 읽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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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의 문을 열다 - 철기문화의 시작, 춘추전국 시대 생각하는 힘 : 세계사컬렉션 4
심원섭 지음 / 살림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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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문화의 시작, 춘추전국시대를 부제로 한 '중국 고대사의 문을 열다'에는 많은 인물이 나온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리더십을 보인 주() 文王이 주목할 만하다. 문왕은 상()의 주왕(紂王)에 의해 옥에 갇힌 뒤 갖은 시련을 이기고 풀려나 강태공을 만난다.(서울을 은으로 옮긴 이후의 상나라를 은상이라 부름)

 

문왕은 상 정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고 아들 무왕이 그 뒤를 이었다. 상을 무너뜨린 것의 정당성을 회의했던 무왕은 자신의 행위를 천명으로 표현했다. 무왕이 4년 후 죽자 아들 성왕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성왕이 나이가 어려 무왕의 이복동생인 주공 단()이 국정을 대신했다. ()은 상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였고 주공 단은 성왕이 장성하자 권력을 순순히 넘겼다. 주나라는 친인척과 공신들을 제후로 삼는 봉건제도를 시행했다. 강태공은 신과 점술을 통해 나라를 다스린 은상과 달리 사람의 능력과 역할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봉건제의 핵심은 책봉(冊封)과 조공(朝貢)이다. 책봉은 주나라 왕이 제후에게 다스릴 땅을 내려주고 통치 권한을 인정해주는 격식이다. 제후들은 주나라를 지키는 데 나서야 했고 정기적으로 주나라 국왕에 인사를 드렸고 조공을 바쳤다.

 

제후도 친인척이나 측근들을 책봉했다. 그들을 경(), 대부(大夫)라 한다. , 대부는 사()를 책봉했다. 봉건제도는 상 정벌에 공을 세운 여러 집단을 주나라가 포상한데서 비롯되었다. 주나라는 청동기 문화에 기반을 둔 시대였다.

 

왕과 제후들이 혈연 및 군신 관계로 맺어진 봉건제도는 대를 이어갈수록 혈연관계가 멀어졌다. 주는 견융을 피해 호경에서 낙읍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전 시대를 서주(西周), 새 시대를 동주(東周)라 한다.

 

동주 이후 기원전 403년까지를 춘추시대라 한다. 이 시대에는 100개 이상의 제후국이 있었다. 동주 시대의 왕과 제후의 관계는 형식적이었다. 춘추시대의 다섯 패권국 중 하나였던 제나라에서 유래한 관포지교란 형편이나 이해 관계에 상관없이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을 말한다. 관중을 포숙이 일방적으로 믿고 인정한 것이다.

 

중국은 하, , 주가 생활하던 공간을 중원이라 불렀고 주변 이민족들은 오랑캐라 불렀다. () 계층의 성장은 춘추시대의 끝을 알렸다. 종법(宗法) 제도는 무너지고 관료의 부패와 무능력은 심각한 지경이었다. 제후국들은 더욱 체계적 통치를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의 사상이 출현했다. 공자는 처음에 신정 정치와 천명 사상에 우호적이었으나 점차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공자는 '주례(周禮)'를 중시했고 서주(西周)를 이상적인 시대로 보았다. 공자의 핵심 사상은 인()이다. 인은 왕과 경, 대부 등 귀족이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이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기를 즐겼던 공자는 신분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이 배움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고 지식이 보편적으로 확대되는 데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춘추 시대에 주나라를 능가하는 힘을 갖게 된 제후국들이 여럿 등장했다. 가장 강한 제후국 즉 패자(霸者, ; 으뜸 패)가 주도한 질서를 회맹(會盟)이라 한다.

 

제후들은 쇠퇴한 주나라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이민족의 침입에서 주 왕실을 보호함)와 계절존망(繼絶存亡; 주 왕이 책봉한 제후이니 힘이 약해도 함부로 무너뜨려 합치면 안 됨)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춘추 시대 후반에 이르러 하극상(下克上)이 나타났다. 노나라의 경우 계손(季孫), 맹손(孟孫) 숙손(叔孫)의 세 집안이 군사력 확충을 빌미로 나라 땅을 함부로 차지하기도 했고 노나라를 통치하던 제후 소공을 나라 밖으로 추방하기도 했다.

 

혼란이 극심해져 전국 7웅의 시대가 도래했다. 전국 시대는 춘추 시대와 달리 경쟁국 수가 변화했을 뿐 아니라 철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전국 시대의 또 다른 특징으로 상공업과 화폐 경제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에서 분기(分岐)한 위()는 학문과 지식으로 무장한 사() 계층을 등용해 관료 정치를 실현했다. 전국 시대의 각 국왕들은 춘추 시대와 달리 능력에 따라 인재에게 관직을 주었다. 지식을 가진 사() 뿐 아니라 평민도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전국 7웅은 기본적으로 중무장한 병사를 수십만 명 거느렸고 진()과 초()100만 동원이 가능했다. ()와 진()의 차이가 흥미롭다. 위는 일찍 뜨고 일찍 졌고, 진은 내실을 다져 떠올랐다. 진은 나머지 여섯 나라를 압도, 전국 시대를 평정했다.

 

진의 통일은 하나의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통치 체제의 서막이었다. 봉건제에 기초해 각국이 주나라를 떠받든 느슨한 체제와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전국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전쟁 중에도 지식이 꽃핀 것이다. 이른바 제자백가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세상의 변동에 적절하게 호응하면서 사상이 나오고 이를 따르는 무리가 늘면서 학파가 형성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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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노래 - 정조의 역사 읽기, 정조의 속살 읽기, 정조의 모두 읽기
박상하 지음 / 생각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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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바르게 이끌었다는 뜻의 묘호를 받은 임금. 개혁 군주이자 학자 군주. 독살되었다는 논란의 주인공. 바로 조선 22대 임금 정조(正租)를 이르는 말이다. 박상하의 장편 '왕의 노래'는 화성(華城) 행차(行次; 을묘원행)에서부터 시작해 오회연교(五晦筵敎)를 거쳐 운명(殞命)에 이른 정조의 마지막 5년을 그린 장편 소설이다.

 

화성 행차는 육의전과 결탁(정경유착)하고 왕권 위에 올라서려는 등 온갖 폐단과 전횡을 일삼은 노론 지배 세상을 바꾸기 위해 감행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소설은 행차 이레 전부터 시작해 하루 단위로 벌어진 숨가쁜 대립 구도를 그린 뒤 에필로그에서 정조가 부르지 못한 왕의 노래를 지금 듣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왕의 노래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농토가 없는 백성이 마음껏 장사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광화문 앞 육조 마당에 나아가 백성들과 함께 넘치는 기쁨으로 부르겠다는 노래이다. 노론과 결탁한 시전 상인 외의 가난한 백성들의 시장인 난전을 금한다는 금난전권이 상징하듯 정조 재위 시절 경제권력은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정조가 처음 왕의 노래에 대해 들은 것은 그의 나이 열한 살 때로 영조를 대신해 정치(대리청정)를 하던 아버지와 함께 민심을 헤아리기 위한 암행을 나가서였다. 정조는 암행 길서 나서 종루대로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며 왕의 노래를 부를 것이라는 말을 들었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린다.

 

왕의 노래의 장점 중 하나는 회상(回想)에 있다. 정조는 화성 행차를 두고 빚어진 군주와 신하간의 논쟁으로 인한 안타까움을 어루만지고 달래려고 연 궁중 잔치에서 취기가 올라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창경궁 휘령전에서 비통한 죽음을 당한 사건(임오화변; 1762)을 떠올린다.

 

소설에서 서른 셋의 정약용은 정 3품 병조참지로, 42세의 홍병신은 암행어사로, 53세의 백동수는 정조의 호위무사로, 역시 53세의 이가환은 공조판서로, 75세의 채제공은 우의정으로, 77세의 홍낙성은 영의정으로 나온다. 이들이 정조의 측근들이다. 반면 병조판서 심환지, 정약용의 라이벌인 이조참지 김진탁, 정순왕후 등은 정조의 정적들이다.

 

특히 정순왕후는 정조의 미스테리한 죽음에 개입했을 것으로 믿어지는, 영조의 계비이다. 정조 사후 열한 살에 즉위한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며 나라를 노론이라는 일당 체제에서 안동 김씨 일가의 체제로 만든 세도정치의 원흉이다.

 

소설의 재미는 정조의 화성 행차를 방해하기 위해 노론이 벌인 상상할 수 없는 비열한 작전을 사전 차단 또는 무산시키려는 백탑결사 등 정조 측근들의 활약에서 찾을 수 있다.

 

소설 초반부에서 정약용은 이론과 실천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 라는 정조의 물음에 실천이라 답한다. 정조는 이론이라 말한다. 한편 무엇이 문제냐는 물음에 정약용은 백성의 가난이라 답하고 정조는 공정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정조의 성격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문제가 다음 문장에 녹아 있다. "왕의 하루는 분주하기만 했다. 왕조의 왕은 이념적으로 태양을 상징하기 때문에 태양이 뜨기 전에 벌써 침소에서 일어나야 했다....하루 동안에 왕이 처리하는 업무를 흔히 만기라 일컬었다.... 왕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진 채 조용히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란 거의 없었다. 다른 왕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었다."(144, 145 페이지)

 

물론 정조는 개혁과 애민의 임금이었고 어릴 적부터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는 등 아버지를 죽인 노론과 대치해야 했던 남다른 사정이 있었던 군주였다. 돋보이는 부분은 화성 행차에 참여한 사람들을 세밀하게 묘사한 부분이다.

 

을묘년 화성 행차(1795) 이후 5년만인 1800년 정조는 유명을 달리 한다. 정치 원칙은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말로 노론에 칼날을 정면으로 겨눌 것임을 선언한 오회연교(五晦筵敎: 정조 245월 그믐날에 정조가 경연자리에서 내린 하교) 직후의 일이다.

 

'왕의 노래'는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꾸는 작가의 의지를 스릴과 탄식의 이중주로 만든 작품이다. 정조에 대한 논란 부분은 소설이 다룰 부분이 아니었으리라. 오랜만에 역사 소설에 진지하게 몰입하게 해준 작가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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