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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의 문을 열다 - 철기문화의 시작, 춘추전국 시대 ㅣ 생각하는 힘 : 세계사컬렉션 4
심원섭 지음 / 살림 / 2018년 5월
평점 :
철기 문화의 시작, 춘추전국시대를 부제로 한 '중국 고대사의 문을 열다'에는 많은 인물이 나온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리더십을 보인 주(周) 文王이 주목할 만하다. 문왕은 상(商)의 주왕(紂王)에 의해 옥에 갇힌 뒤 갖은 시련을 이기고 풀려나 강태공을 만난다.(서울을 은으로 옮긴 이후의 상나라를 은상이라 부름)
문왕은 상 정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고 아들 무왕이 그 뒤를 이었다. 상을 무너뜨린 것의 정당성을 회의했던 무왕은 자신의 행위를 천명으로 표현했다. 무왕이 4년 후 죽자 아들 성왕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성왕이 나이가 어려 무왕의 이복동생인 주공 단(旦)이 국정을 대신했다. 송(宋)은 상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였고 주공 단은 성왕이 장성하자 권력을 순순히 넘겼다. 주나라는 친인척과 공신들을 제후로 삼는 봉건제도를 시행했다. 강태공은 신과 점술을 통해 나라를 다스린 은상과 달리 사람의 능력과 역할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봉건제의 핵심은 책봉(冊封)과 조공(朝貢)이다. 책봉은 주나라 왕이 제후에게 다스릴 땅을 내려주고 통치 권한을 인정해주는 격식이다. 제후들은 주나라를 지키는 데 나서야 했고 정기적으로 주나라 국왕에 인사를 드렸고 조공을 바쳤다.
제후도 친인척이나 측근들을 책봉했다. 그들을 경(卿), 대부(大夫)라 한다. 경, 대부는 사(士)를 책봉했다. 봉건제도는 상 정벌에 공을 세운 여러 집단을 주나라가 포상한데서 비롯되었다. 주나라는 청동기 문화에 기반을 둔 시대였다.
왕과 제후들이 혈연 및 군신 관계로 맺어진 봉건제도는 대를 이어갈수록 혈연관계가 멀어졌다. 주는 견융을 피해 호경에서 낙읍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전 시대를 서주(西周), 새 시대를 동주(東周)라 한다.
동주 이후 기원전 403년까지를 춘추시대라 한다. 이 시대에는 100개 이상의 제후국이 있었다. 동주 시대의 왕과 제후의 관계는 형식적이었다. 춘추시대의 다섯 패권국 중 하나였던 제나라에서 유래한 관포지교란 형편이나 이해 관계에 상관없이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을 말한다. 관중을 포숙이 일방적으로 믿고 인정한 것이다.
중국은 하, 상, 주가 생활하던 공간을 중원이라 불렀고 주변 이민족들은 오랑캐라 불렀다. 사(士) 계층의 성장은 춘추시대의 끝을 알렸다. 종법(宗法) 제도는 무너지고 관료의 부패와 무능력은 심각한 지경이었다. 제후국들은 더욱 체계적 통치를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의 사상이 출현했다. 공자는 처음에 신정 정치와 천명 사상에 우호적이었으나 점차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공자는 '주례(周禮)'를 중시했고 서주(西周)를 이상적인 시대로 보았다. 공자의 핵심 사상은 인(仁)이다. 인은 왕과 경, 대부 등 귀족이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이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기를 즐겼던 공자는 신분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이 배움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고 지식이 보편적으로 확대되는 데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춘추 시대에 주나라를 능가하는 힘을 갖게 된 제후국들이 여럿 등장했다. 가장 강한 제후국 즉 패자(霸者, 霸; 으뜸 패)가 주도한 질서를 회맹(會盟)이라 한다.
제후들은 쇠퇴한 주나라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이민족의 침입에서 주 왕실을 보호함)와 계절존망(繼絶存亡; 주 왕이 책봉한 제후이니 힘이 약해도 함부로 무너뜨려 합치면 안 됨)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춘추 시대 후반에 이르러 하극상(下克上)이 나타났다. 노나라의 경우 계손(季孫), 맹손(孟孫) 숙손(叔孫)의 세 집안이 군사력 확충을 빌미로 나라 땅을 함부로 차지하기도 했고 노나라를 통치하던 제후 소공을 나라 밖으로 추방하기도 했다.
혼란이 극심해져 전국 7웅의 시대가 도래했다. 전국 시대는 춘추 시대와 달리 경쟁국 수가 변화했을 뿐 아니라 철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전국 시대의 또 다른 특징으로 상공업과 화폐 경제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진(晋)에서 분기(分岐)한 위(魏)는 학문과 지식으로 무장한 사(士) 계층을 등용해 관료 정치를 실현했다. 전국 시대의 각 국왕들은 춘추 시대와 달리 능력에 따라 인재에게 관직을 주었다. 지식을 가진 사(士) 뿐 아니라 평민도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전국 7웅은 기본적으로 중무장한 병사를 수십만 명 거느렸고 진(秦)과 초(楚)는 100만 동원이 가능했다. 위(魏)와 진(秦)의 차이가 흥미롭다. 위는 일찍 뜨고 일찍 졌고, 진은 내실을 다져 떠올랐다. 진은 나머지 여섯 나라를 압도, 전국 시대를 평정했다.
진의 통일은 하나의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통치 체제의 서막이었다. 봉건제에 기초해 각국이 주나라를 떠받든 느슨한 체제와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전국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전쟁 중에도 지식이 꽃핀 것이다. 이른바 제자백가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세상의 변동에 적절하게 호응하면서 사상이 나오고 이를 따르는 무리가 늘면서 학파가 형성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