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디는 벤투의 스케치북이다. 이는 존 버거의 동명의 책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벤투는 ‘축복받은‘을 의미하는 베네딕트의 줄임 말이다.

스피노자(1632 - 1677)는 유대교에서 파문당한 뒤 유대 이름인 바루흐를 라틴 이름인 베네딕트로 바꾸었다.(바루흐도 ‘축복받은‘을 의미.)

한편 ‘고통스러운 곳으로부터‘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에스피뇨자(espinhosa)에서 온 스피노자는 그의 성이다.

‘축복받은‘과 ‘고통스러운 곳으로부터‘의 기이한 결합이라 해야 하는가?

홍대선의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에 스피노자의 삶과 사상이 소개되어 있다.(데카르트,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등과 함께 소개)

서양 철학자들 중 내가 생몰 연대를 외우는 유일한 인물인 스피노자는 신 즉 자연 사상으로 유대교에서 파문당한 뒤 마지막 순간까지 철학 연구를 하며 유리(렌즈) 세공을 생계 수단으로 삼았다.

스피노자에게서 무엇보다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자급자족의 삶을 살았다는 데 있다.

물론 스피노자에게 렌즈는 수입원이었던 한편 과학적 관심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스피노자는 천문학의 거시현상 관찰과 그런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는 광학의 수학적 원리들에 매료되었다.(스티븐 내들러 지음 ‘에티카를 읽는다‘ 40, 41 페이지)

스피노자에게 렌즈와 기구들이 생계의 수단이기도 했고 과학적 관심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 것은 인상적이다.

자신을 쟁취하지 못하는 인생은 실패라고 생각한 스피노자는 실제로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뒤 ˝이젠 자유˝라 외쳤다. 개인의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스피노자는 신체와 정신은 동등하며 평행하다는 주장(신체 - 정신 평행론)을 했다.(손기태 지음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105 페이지)

사상과 삶의 일치, 생계수단이 된 렌즈가 과학적 관심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 특수한 사례, 그리고 신체와 정신의 평행론은 수미상관의 질서를 느끼게 한다.

이는 스피노자를 특별하게 인식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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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일 년에 한 번씩 위빠사나 명상센터에 들어가 열흘 내내 묵언수행을 한다는 최옥정 작가의 ‘2라운드 인생을 위한 글쓰기 수업‘을 읽으며 나도 짧게라도 묵언수행 센터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멍때리는 시간이 절실하다고 말하는 작가가 위빠사나 명상센터 경험을 이야기하는 끝에 멍때리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멍때리기가 묵언수행의 방편적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말 또는 묵언수행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아쉬운대로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언제 날을 잡을까? 하루 종일 두뇌와 눈을 혹사시키며 사는 입장으로 그런 묵언의 시간을 갖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창의와 충전을 위한 놀이라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한 건축가가 이런 말을 했다. ˝한옥은 묵직한 겉보기와 달리 언제라도 끊임없이 변할 준비가 되어 있고 실제로 항상 변한다.

한옥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하루를 온전히 머물며 한옥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풍경거리를 감상할 줄 알아야 한다.˝(임석재 지음 ‘나는 한옥에서 풍경놀이를 즐긴다‘ 25 페이지)

역시 관건은 시간을 내는 것이다. ˝하루를 온전히 머물며˝란 말을 보라. 오늘 전형필 가옥을 둘러보았고 2주 후 한무숙 문학관을 둘러보게 된 나로서는 짧게일망정 한옥을 보며 해설하는 시간 자체가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한옥에서 하루를 온전히 머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을까 헤아리게 된다. 아, 한옥에서 하는 묵언수행 프로그램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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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의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가옥을 찾은 것은 지난 6월 15일. 당시 나는 춘곡의 주선으로 전형필 선생이 위창 오세창 선생을 만난 대목을 떠올렸다.

춘곡에게 전형필은 제자였는데 내가 간송 전형필 선생이 위창 오세창 선생을 만난 대목을 떠올렸다고 하지 않고 전형필 선생이 위창 오세창 선생을 만난 대목을 떠올렸다고 말한 것은 그때까지 전형필 선생에게 옥정연재(玉井硏齋)라는 재호(齋號: 당호堂號의 다른 말)는 있었지만 아호(雅號)는 없었기에 그렇다.(옥정연재는 우물에서 퍼올린 구슬 같은 맑은 물로 먹을 갈아서 글씨를 쓰는 집이라는 의미.)

추사의 제자이자 역관(譯官: 역관은 통역관을 말하는데 나는 왜 자꾸 역관易官을 떠올리는지...)이었던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 선생은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 전형필을 보고 깊은 산 속에서 흐르는 물<간(澗)>과 같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부친 오경석의 스승인 추사가 그의 다른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에게 세한도(歲寒圖)를 주며 인용한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는 뜻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라는 문구에 나오는 송(松)을 넣어 간송이라는 아호를 전형필 선생에게 지어 주었다.

선불교에서 법통을 계승하는 것을 연상하게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당시 오세창 선생이 전형필 선생에게 아호를 지어준 것은 선생이 전형필 선생으로부터 부친인 오경석의 탁본을 선물받았기 때문이다.(오경석이 인장을 해 중국 금석학자들에게 보낸 탁본을 전형필 선생이 입수해 선물한 것.)

내일 전형필 가옥을 간다. 단아하고 소박한 집을 보며 간송 선생의 인품과 헌신적 노력을 되새길 것이다.(폭염이 누그러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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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를 실제 나이보다 열 살 정도 젊게 평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나는 그런 사실을 좋아하기보다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경우 건강도 좋은가, 하는 궁금증을 갖는다.

젊게 보이는 사람들이 건강도 좋다고 하지만 예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내가 그 예외의 한 사람이다.

염색을 잘 하지 않는 내가 할 필요를 느끼는 것은 다음 주 월요일 듣기로 한 강의가 책쓰기 강의이기 때문이다.

책쓰기는 글쓰기와 다르다는 또는 책쓰기는 글쓰기가 아니라는 말의 진정한 뜻을 다음 주 월요일 강의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해 어떻게 나만의 문제의식을 갖고 그에 맞춰 자료를 수집하며 목차는 어떻게 구성하며 긴 호흡으로 글을 쓰는지 등을 배우는 시간이 될 것이다.

어떻든 강사나 다른 수강자들이 나를 보고 이제껏 책 한 권 쓰지 못하고 뭐 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만 어쩔 수 없이 위축이 된다.

사실 책쓰기 강의를 듣는 것처럼 자신의 이력을 의식하게 하는 것 즉 나이 들어 하기 어려운 것이 점을 보거나 사주를 보는 것이다.

불혹이 없다고 하지만 굳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삶의 길을 찾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에게 삶의 길을 묻거나 의뢰하는 것 자체가 불혹에 이르지 못한 또는 천명을 알지 못함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린 아이들에게도 물을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지만 그렇더라도 제 힘으로 충분히 애쓴 후에 하는 것이 관건이다.

내 나이와 같은 때에 또는 한 살 많은 나이에 등단한 시인이나 70세가 넘어 첫 장편 소설을 쓴 분, 그리고 유명 교수이지만 내 나이보다 한 살 많은 나이에 첫 책을 쓴 분 등을 보며 희망을 갖는다.

물론 나는 그 분들이 완성도 높은 시/ 장편 소설/ 책 등을 쓰기 위해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게 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이 내 나이까지 결과를 내지 못한 표면만 보고 나와 그 분들이 걸은 삶의 과정까지 같거나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각자 길이 다르고 소명이 다르고 몫이 다르다고 생각할 뿐이다.(내 영원한 문제 거리인 위장이 요즘 주목할 만하게 좋아져 이런 글이라도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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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이야기도 계급적 – 맞는 표현인지 모르지만 – 으로 접근할 수 있고 흥미 위주로 접근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녹지(綠地)가 주는 혜택에서조차 소외된다는 기사와, 폭염은 자연재해가 아닌 사회비극이라는 주장을 하는 책(뉴욕대 사회학과 교수 에릭 클라이넨버그의 ‘폭염사회’)을 읽으며 격하게 공감한 것과 별개로 유현준 교수의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으며 흥미를 느꼈다.

저자에 의하면 유럽의 도시들은 자동차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만들어진 까닭에 사람보다 조금 더 빠른 마차의 속도에 맞춰 거리가 만들어져 (자동차에 맞게 도시가 만들어진 미국의 도시들에 비해) 도시의 도로망이 짧은 단위로 나누어짐으로써 사람들에게 거리의 다양성과 도로의 공간감을 더 잘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흥미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1995년 7월 기온이 섭씨 41도까지 올라 일주일간 700여명이 사망한 시카고를 예로 들며 그것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정치, 사회적 실패라고 규정한다.

700여명의 대부분은 노인, 빈곤층, 고립된 사람들이었다. ‘폭염사회’는 의미가 깊은 만큼 시선을 잡아끄는 흡인력도 대단한 놀라운 책이다.
자꾸 우리의 현실을 비춰보게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책이기도 하다.

지금 폭염을 겪는 현실보다 한번 상승한 온도는 되돌려지지 않는다는 말이 더 힘을 빠지게 하는 이때 클라이넨버그의 책이 중요한 사람들에게 꼭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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