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핀란드)의 춥고 어두운 겨울을 떠올리게 하는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듣고 났지만 더위는 그대로입니다.

그럼 우리 전통 음악을 들으면 어떨까요?

아무래도 쓸쓸한 가을 풍경을 떠올리기에 좋은 아쟁이 어떨까요?

현을 마찰해 소리를 내는 찰현 악기인 아쟁은 소슬(蕭瑟; 서늘하고 으스스하다, 고요하고 쓸쓸하다)한 악기입니다.

우리의 찰현 악기는 아쟁과 해금 뿐인데 흥미로운 것은 소슬하다의 슬(瑟)이란 글자가 큰 거문고 슬자라는 점입니다.

조선의 문신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8 - 1638)가 쓴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가을 밤에 울리는 아쟁 소리/ 현악기 소리가 관악기 소리 같네..˝

조선의 해금 명인 유우춘이 해금을 비사비죽(非絲非竹)으로 표현한 바 있지만 장유는 아쟁 소리를 듣고 사성여죽성(絲聲如竹聲)이라 표현했습니다.(絲는 현악기를 의미, 竹은 관악기를 의미)

해금이 현악기도 아니고 관악기도 아니라 불리는 것이나 현악기인 아쟁 소리가 마치 관악기 소리 같다고 인식된 것은 참 운치있습니다.

서양의 경우 클라리넷, 플룻, 오보에, 바순(파곳)과 금관악기이지만 음색이 목관 악기 같은 호른을 함께 묶어 목관 5중주로 부르는데요...

처음 이에 대해 알았을 때 낯선 느낌을 가졌습니다만 그 파격도 비사비죽 또는 사성여죽성의 파격에는 미치지 못한다 생각합니다.

세계 2차대전 중 프랑스의 가구 운반병으로 입대했다가 독일의 포로가 되어 괴를리츠 수용소에 억류된 채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를 작곡하고 연주까지 한 올리비에 메시앙을 생각해봅니다.

영하 20도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피아노 연주를 맡았던 메시앙은 일찍이 그렇듯 자신의 음악을 황홀하게, 그리고 주의 깊게 잘 이해하며 듣는 청중은 없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메시앙이 수용소에서 곡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독일 장교 하우프트만 칼 알버트 브륄의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이 화염 천지를 이길 곡으로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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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책도 발효 과정을 거쳐야 읽게 된다는 말을 최근 했다. 이렇게 말하면 그 기간이 1, 2년 또는 한 두 달이려니 생각하겠지만 내게 7년 넘게 발효하고 있는 책이 있다. 건국대 몸문화 연구소장 김종갑 교수의 근대적 몸과 탈근대적 증상이란 책이다.

 

전혀 읽지 않은 것이 아니라 1/ 4 정도를 읽은 책이다. 어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고 구입할 때와 다르게 읽다 보니 관심 밖의 영역을 다룬 책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최근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 이유를 알아보고 있다.

 

필자의 책들 중 지난 4혐오, 감정의 정치학을 읽었고 서평을 쓰지는 않았지만 6월에는 생각, 의식의 소음을 읽었다. 그리고 지금 여러 필자들과 함께 쓴 감정 있습니까?’를 읽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감정 있습니까?’에 실린 김종갑 교수의 글은 충격적이다. 내가 모르는 많은 부분을 새롭게 알았기 때문이고 그런 부분에 대해 다른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니 부분적으로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것이라 해야 맞겠다. 혐오를 다룬 부분에서 필자는 지금까지의 서양 역사를 남성이 문화를 독점하면서 여성을 자연으로 비하했던 가부장의 역사로 규정했다.

 

혐오가 발생하는 지점은 달리 있다. 문명의 주인공으로서 여성을 고상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변형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에게 복종하지 않거나 그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설명이다.

 

또한 여성 혐오는 관념으로서의 인간은 신처럼 위대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하늘이면서 동시에 땅이고, 멋있으면서 비루한 존재라는 이중성 또는 양가성을 피하기 위해 긍정적인 부분은 남성이 챙기면서 부정적인 부분은 여성에게 투사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필자의 결론은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은 남성이 스스로를 혐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궁금한 부분이 있다. 생명의 기원인 여성의 몸은 동시에 죽음의 종착점이 된다는 부분에 대해서이다. 이를 불교학자 에드워드 콘즈 식으로는 탄생이야말로 죽음의 원인“(‘한글 세대를 위한 불교’ 47 페이지)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여성의 신비로운 능력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오로지 여성으로부터서만 기원하는가? 여성이 큰 역할을 하고 남성이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부분은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생식(生殖)하는 것은 여성의 것이었고 문화적 변형의 작업은 남성이 독차지했다는 부분과 함께 읽을 부분이다.

 

생명의 기원이 남성의 역할에도 힘입듯 문화적 변형 작업 역시 부분적으로 여성들에 힘입은 바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지? 설령 없다 해도 이는 가부장적인(문화 독점적인,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 여성 배제적인) 문화의 산물이 아니겠는지? 물론 모든 책임을 가부장적 제도와 교육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앞에서 나는 여성 혐오적 역사와 현실 그리고 철학적 배경에 대해 다른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사실 이런 부분은 충격적이고 무의식 차원의 그늘과 얼룩을 감지하게 한다.

 

더욱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 못하는 남성일수록, 불행한 남성일수록 여성을 혐오한다는 사실(135 페이지)은 사회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고 정신분석의 대상이기도 하다.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은 남성이 스스로를 혐오하기 때문이라는 필자의 말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많은 부분을 누리다가 이제 그 몫을 챙기지 못하게 된 평균 이하의 남성들이 사태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적대감을 여성에게 투사하거나 여성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제 나의 심리상담은 다음 주 월요일 16회를 대단원으로 끝이 난다. 감사하게도 내 개인적 불행을 남감히 여긴 여성 심리상담사의 은덕으로 한 주가 무료 연장되었지만 끝은 끝이다.

 

어떻든 여성 혐오는 민감한 문제여서 이를 상담의 대상으로 삼을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그리고 정신분석적 문제여서 심리상담과 어울리지 않지만 내담자들로 하여금 옵션으로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답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여성 혐오감에 괴로워 내담하는 남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 이상하다는 반응 또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듣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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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온이 39.6도를 기록했다고 한다. 서하라란 말로 표현할 정도로 서울의 2018년은 위대하다.

서하라는 서울 플러스 사하라인데 사하라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일반 명사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몽골의 대표 사막을 고비사막이라 알고 있지만 실제 그들 말로 고비가 사막이란 뜻이듯.(고비란 말도 몽골 사람에게 물었더니 곱에 가깝게 발음했다.)

한 외신은 2080년까지 더위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라는 뉴스를 내보냈다.

이제 우리에게 화염 지옥이 아닌 여름을 맞는 것은 틀린 일이 된 것이다.

누진제에 기반한 전기요금제도 탓에 에어컨을 켜지 못하고 여름을 나는 폭염 난민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당연히 합리적인 개선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통해 알 수 있듯 밀집된 채 맞는 여름 더위는 육체적으로는 물론 감정면에서도 대단히 부정적이다.

그것이 심리적 면역력을 약하게 하리라는 것은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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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과 물리학을 공부한 존 파웰은 정확한 주파수로 작은 노력을 반복해 커다란 효과를 얻는 것이라는 말로 공명(共鳴)을 정의했다. 그네를 예로 들어 공명을 설명하는 파웰에 의하면 그네에 올라탄 아이를 뒤에서 밀 때 타이밍만 정확하게 잘 맞추면 약간의 힘만 주어도 그네를 아주 높이 밀어 올릴 수 있는데 이는 그네가 나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점에 밀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네가 흔들리는 자연스러운 리듬에 맞게 힘을 가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과학으로 풀어보는 음악의 비밀’ 92 페이지)

 

김금희 작가의 장편 경애의 마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의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허수경 시인의 바다가란 아름답고도 슬픈 시가 있다. 이 시를 내 나름으로 정리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제게 다가온 깊은 바다를 가득 잡으려 했지만 손이 없고, 손이 없기에 잡지 못하고 울려고 했지만 눈이 없고, 눈이 없기에 안기지 못하고 서성이다 돌아서는 바다를 보고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혀가 없고, 결국 글썽이고 싶고 검게 반짝이고 싶었지만 손이, 눈이, 혀가 없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우리는 멀어지려는 그네를 때맞춰 밀어낼 수 있다. 자신의 그네를 스스로 높게 올린 뒤 시간이 되면 서서히 내려올 수 있다. 허수경 시인의 시처럼 돌아서는 누군가를 잡지도 못할 수도 있고 가지 말라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음악학자 서우석 교수는 혼자 음악을 듣는 것이 소통이 끊어진 혼자만의 일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시작부터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며 그 이야기에 비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라는 말을 했다.(‘물결 높던 날들의 연가’ 22 페이지)

 

각자의 그네를 홀로 밀어 올렸다가 시간이 되면 내려오는 경애의 마음랑의 이야기도 결국 타자(他者)의 이야기에 비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아닐지? 영문학자 김종갑 교수는 고통과 기쁨, 사랑과 미움, 질투와 칭찬, 공포 등 모든 것이 해석의 결과라는 말을 했다.(‘감정 있습니까?’ 16 페이지) 원래 그런 것은 없다는 의미이다.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고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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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사진을 보며 한여름 극심한 폭염을 이겨보려고 앨범을 뒤지다가 눈내린 한양도성 혜화 구간을 순회하며 찍은 2016년 12월 말의 수업 사진을 어렵게 발견, 단톡방에 올렸다.

그런데 뭘 잘못 만졌는지 키보드가 영어로만 입력할 수 있게 되어 서툰 영어로 설명을 해야 했다.

그 사진은 함께 수업한 우리 모두가 알지만 게시자의 입장에서는 왜 올렸는지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 순리였다.

이 사진이 우리의 좋은 겨울을 생각나게 한다, 한국어 키보드가 작동하지 않는다, 죄송하다 정도의 말을 영어로 썼지만 결국 언어의 한계가 곧 사유의 한계임을 실감하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키보드를 복구하고 충분한 전후 사정을 우리 말로 게시하고 나자 속이 후련했다.

외국의 모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본 생각이 난다. I write better than I Speak. 말하는 것보다 더 잘 쓴다는 말인데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말하기 만큼 쓰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아니 말하기 만큼 쓰기도 쉽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쓰기는 참 더딘 과정이지만 바로 바로 고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말 대신 글을 쓰면 문법을 지키고 주술관계를 맞추는 등 비문을 쓰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하고 그것이 쓰기를 어렵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

우리나라 일급 작가들의 비문들을 예시해 바르게 고친 박찬영의 책을 보고 명문 쓰기는 고사하고 비문 쓰기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글을 쓰고 또 쓰면서 바르게, 간결하게 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저절로 어법에 맞는 말을 하게 된다.

물론 내용도 충실해야 하지만 둘 다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책 읽기임을 생각한다면 책을 꾸준히 읽어야 한다는 말 외에 특별히 할 말이 없다.

내 카카오스토리를 보고 내가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는다는 말을 하는 분이 있고 특별하다, 호기심을 갖게 한다는 말을 하는 분이 있지만 다독이나 특별함이 해결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본은 여전히 책이다. 엄청나게 읽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인 사람이 되는 것, 일상 가운데서 특별하기보다 새로운 것을 잘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내 꿈이다.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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