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인성(心因性)이란 말이 새롭지 않지만 나는 그 개념을 나에게 적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게 시험 스트레스가 있다는 점은 모르지 않지만 그것이 몸이 아픈 형태로 드러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험 공부 하기가 참 싫은데 그 싫은 일을 서둘러 마무리 하고 해설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배 아픈 증세가 사라졌다.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르지만 비슷한 현상이 얼마 전에도 있었음을 감안하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시험 스트레스란 읽고 싶은 책을 읽지 못하고 성적을 평가받기 위해 정해진 답을 외워야 하는 상황으로 인한 현상이다. 그러면 원하는 책을 읽을 때는 스트레스가 없는가? 그렇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읽는 것은 좋았지만 읽었으면 어떤 식으로든 서평을 쓰기로 한 약속을 지켜오느라 참 힘들었다. 최근에는 리뷰 없이 책을 읽고 있다. 그렇게 완독한 책이 서너 권은 된다.
내가 서평 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책 살 돈이 넉넉지 않아 빌려 읽고 이용 가능한 형태로 정리해두기 위해서였다. 그랬는데 제법 완성된 형태의 서평 쓰기 자체가 하나의 목표처럼 되어 왔다.
내 서평 글이 긴 것은 내가 집착하는 버릇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느 부분 하나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나마 지금은 힘들고 손가락이 아프고 하는 등의 물리적 이유로 글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
이제는 책을 쓰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서평과 저술은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16명이 참여해 하나씩 할당된 주제에 따라 글을 써 완성된 하나의 책으로 만드는 책 쓰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고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 홀로 쓰는 것이 있다.
책 스트레스는 다른 면으로도 있다. 충실하게는 아니지만 1500편의 서평을 쓰다 보니 왜 책을 쓰지 않느냐는 말을 많이 듣는다. 비슷한 말을 모임에서 듣곤 한다. 내가 특별히 많이 알지도 못하고 내 지식이 양질도 아닌데 어디서든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도 스트레스이다. 알기만 많이 할 뿐 지식을 하나로 꿰지 못한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왜 책을 쓰지 않느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최근 내가 하게 된 것 중 하나가 사람들이 깊다는 말과 넓다는 말을 혼동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나는 깊이가 없는데 깊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차라리 얕고 넓게 안다고 하면 수긍할 만하다.
낮에 김마루님께서 내 글에 “부족한 그 무엇을 채워줄까 하지만 읽다보면 질문만 많아지고 그 질문에 또 읽다보면..그렇게.”란 댓글을 달아주셨다. 수긍한다. 적절한 단계에서 의문이나 미진함을 무시하고 새 단계로 나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듯 하다.
모든 것은 어떻게 잘 이별하는가의 문제로 수렴되는 듯 하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늘 새롭게 되도록 애쓰겠다는 다짐을 최근 했다. 정지용 시인의 시구를 빌어 말하자면 척촉(躑躅)처럼 우울함이 난만(爛漫)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