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시인의 시집 '기억의 집'이 전혀 구태의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30년 가까운 세월의 풍화를 이겨낼 만큼 시인의 문제의식이 보편적이기 때문일 수 있고 첨예한 관심으로 들춰보던 책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내가 그의 시로부터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의식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가령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어떤 아침에는' 중 일부) 같은 구절이 그렇다.

 

시인은 '이제 가야만 한다'에서 이런 말을 한다. "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엉뚱하지만 괴테의 작품 세계를 생각했다.

 

강렬한 자의식과 주관주의로 채색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사회와 소통함으로써 주관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시작하는 주인공을 그린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인류 역사에 대한 거시적 문제의식을 보인 '파우스트' 등으로의 변화가 내 관심사이다.

 

물론 나는 성장 소설이기도 한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같은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든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너무 주관적이고 '파우스트'는 너무 스케일이 크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함께 읽어도 좋은 책이다.

 

오늘 내게 어느 분께서 새로운 삶의 시간이 열리는 듯 하니 문 열리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걸어가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분의 말이 맞다면 어느 책으로 내게 열리는 새로운 시간을 자축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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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성(心因性)이란 말이 새롭지 않지만 나는 그 개념을 나에게 적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게 시험 스트레스가 있다는 점은 모르지 않지만 그것이 몸이 아픈 형태로 드러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험 공부 하기가 참 싫은데 그 싫은 일을 서둘러 마무리 하고 해설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배 아픈 증세가 사라졌다.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르지만 비슷한 현상이 얼마 전에도 있었음을 감안하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시험 스트레스란 읽고 싶은 책을 읽지 못하고 성적을 평가받기 위해 정해진 답을 외워야 하는 상황으로 인한 현상이다. 그러면 원하는 책을 읽을 때는 스트레스가 없는가? 그렇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읽는 것은 좋았지만 읽었으면 어떤 식으로든 서평을 쓰기로 한 약속을 지켜오느라 참 힘들었다. 최근에는 리뷰 없이 책을 읽고 있다. 그렇게 완독한 책이 서너 권은 된다.

 

내가 서평 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책 살 돈이 넉넉지 않아 빌려 읽고 이용 가능한 형태로 정리해두기 위해서였다. 그랬는데 제법 완성된 형태의 서평 쓰기 자체가 하나의 목표처럼 되어 왔다.

 

내 서평 글이 긴 것은 내가 집착하는 버릇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느 부분 하나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나마 지금은 힘들고 손가락이 아프고 하는 등의 물리적 이유로 글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

 

이제는 책을 쓰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서평과 저술은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16명이 참여해 하나씩 할당된 주제에 따라 글을 써 완성된 하나의 책으로 만드는 책 쓰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고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 홀로 쓰는 것이 있다.

 

책 스트레스는 다른 면으로도 있다. 충실하게는 아니지만 1500편의 서평을 쓰다 보니 왜 책을 쓰지 않느냐는 말을 많이 듣는다. 비슷한 말을 모임에서 듣곤 한다. 내가 특별히 많이 알지도 못하고 내 지식이 양질도 아닌데 어디서든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도 스트레스이다. 알기만 많이 할 뿐 지식을 하나로 꿰지 못한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왜 책을 쓰지 않느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최근 내가 하게 된 것 중 하나가 사람들이 깊다는 말과 넓다는 말을 혼동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나는 깊이가 없는데 깊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차라리 얕고 넓게 안다고 하면 수긍할 만하다.

 

낮에 김마루님께서 내 글에 부족한 그 무엇을 채워줄까 하지만 읽다보면 질문만 많아지고 그 질문에 또 읽다보면..그렇게.”란 댓글을 달아주셨다. 수긍한다. 적절한 단계에서 의문이나 미진함을 무시하고 새 단계로 나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듯 하다.

 

모든 것은 어떻게 잘 이별하는가의 문제로 수렴되는 듯 하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늘 새롭게 되도록 애쓰겠다는 다짐을 최근 했다. 정지용 시인의 시구를 빌어 말하자면 척촉(躑躅)처럼 우울함이 난만(爛漫)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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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없이 책을 사지만 이거다 싶은 책을 발견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지난 번 주역에 관한 책들 중 획기적인 ‘주역 강의‘(서대원 지음)를 산 데 이어 오늘 마침내(?) 지금 내게 꼭 필요한 한 - 영 버전의 전통 문화 해설서를 손에 넣었다.

정독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복사하다가 언급한 한 - 영 버전의 전통 문화 해설서는 복사를 하기보다 소장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여기 저기 수소문해 교보나 영풍이 아닌 알라딘(중고매장) 합정점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한 달음에 달려가 샀다.

평소 읽었지만 한 권도 소장하고 있지 않은 저자의 책이어서 기분이 묘한데 사실 번역자에게 더 큰 감사함을 표해야 마땅하다.

책을 구입하는 행위란 기본적으로 올라가 멀리 볼 수 있는 거인의 어깨를 확보하는 행위이거나 지붕에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확보하는 행위이다.

문제는 사다리로 인해 벌어진다. 장하준 교수를 통해 알게 된 개념들 중 사다리 걷어차기가 있다.(자세한 설명 생략)

이 개념은 내가 지붕을 올라갈 때 사용한 사다리를 다른 사람들은 이용하지 못하도록 걷어차는 행위이다.

나는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이 글에 관심을 보일지 회의적이지만 다른 책들은 얼마든지 제목을 공개할 수 있는 반면 오늘 산 책만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오늘 나의 이런 행위는 사다리 감추기에 해당한다.

나는 오늘 내내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란 조은 시인의 ‘언제가는‘의 구절을 생각하며 우울했었는데 전기한 책을 손에 넣고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책이 무엇인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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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서점 직원에게 ˝책 읽을 시간이 무지 무지 많겠어요. 이렇게 책에 둘러싸여 앉아 있기만 하면 되니까요.˝란 말을 하자
직원이 이렇게 답했다 한다.

˝손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데요?˝ 그러자 손님이 ˝나요? 난 옷가게에서 일해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직원이 ˝음.. 그러면 손님은 옷 입어볼 시간이 정말 많겠어요. 그렇게 옷에 둘러싸여 계시잖아요.˝라고 말했다.

북 런던의 고서점에서 일하며 시와 단편소설을 쓰고 있는 젠 캠벨의 ‘그런 책은 없는데요‘란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책에 둘러 싸여 있으니 책 읽을 시간이 무지 많겠어요˝란 말을 한 사람이 하필 옷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만일 그렇게 물은 사람이 아무 일도 안하는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어떻든 다소 작위적이지만 흥미롭다. 저자는 그런 질문을 받고 옷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을 가상해 상상 속에서 그런 답을 하는 것을 그린 것일 수도 있다.

서점 근무는 낭만 및 한가와 거리가 멀다. 운영해 본 적도 없고 직원으로도 근무한 적도 없지만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젠 캠벨이 말한 옷가게 직원은 서점 상황을 충분히 관찰하지도 않고 막연한 선입관으로 그런 질문을 한 듯 하다.

˝이 책을 모두 읽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아니다. 십 분의 일도 못 읽었다. 혹시 당신은 세브르 도자기로 매일 식사를 하느냐?˝고 답했다는 아나톨 프랑스의 멋진 말로 아쉬움을 달래고 싶다.

아나톨 프랑스가 마주친 방문객의 질문도 썩 현명하지는 않지만 젠 캠벨이 마주친 손님의 질문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우문현답 시리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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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초쯤으로 보이는 주부 옆 자리에 앉은 전철. 그녀, 걸려온 전화를 퉁명스럽게 받는다.

˝오늘 화요일이예요. 전화 걸지 마세요.˝ 화요일은 일이 있으니 전화 하지 말라는 말인가?

책을 찾아 알라딘 강서홈플러스점까지 가는 길에 만난 풍경이다.

그녀는 엄마란 말을 한다.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를 어찌 저렇게 받는 걸까?

왜 그런 것일까 ?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겠지만 옆의 나에게까지 불편함이 전해진다.

내 안에 있는 불효에 대한 자책감을 그녀가 자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승희 시인의 ‘우란분절‘을 연상하며 마음 상해하던 또는 위로받던 나는 오늘 옆 승객의 전화 사건으로 불편하고 우란분절의 화자처럼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마르다.

강서홈플러스 알라딘에 가기 위해 마주쳐야 하는 의류 점포 앞에서 나는 책보다 옷에 비중을 두며 사는 삶은 참 편하고 가벼우리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친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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